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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62.8]
특집 동경대전에 관한 견해
『대선생주문집』의 성립연대에 관하여
– 도올 김용옥의 학설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최근에 간행된 『동경대전 1』에서 저자 김용옥은
“『대선생주문집』이
『최선생문집도원기서』보다 먼저 성립되었다”는
파격적인 학설을 제기하였다.
이 설은 종래에
“『최선생문집도원기서』를 바탕으로
『대선생주문집』이 필사되었다”는
통념을 뒤집는 것이어서
연구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파장을 일으키리라 예상한다.
이 글은 이러한 배경에서 김용옥 학설의 타당성을
문학학적 관점에서 검토하기 위한 시론이다.
한편 김용옥은 자신의 학설이
표영삼의 학설과 일치한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동경대전 1』 에는
표영삼으로부터 받은 영향에 관한 이야기들이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다.
그래서 먼저 표영삼의 학설에 대한 검토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1. 표영삼 학설의 변화
동학연구자 표영삼(1925~2008)은
1985년에 쓴
「수운대신사의 생애 – 연대에 대한 새로운 고증」의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기술을 살펴보면
고종 2년(1865년) 경에
수운 대신사의 장질(長侄)인
최세조(崔世祚. 字 맹륜(孟倫))와
영해 접주였던 박하선(朴夏善)이 편저한
『수운문집(水雲文集)』
(일명 『수운행록(水雲行錄)』)이 있고,
다음은 고종 17년(1880년 경)에
동학의 차도주(次道主) 강시원(姜時元,
이름은 수(洙) 또는 사원(士元))이 편저한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가 있다.
(…) 『최선생문집도원기서』나 『대선생사적』은
모두 『수운문집』을 바탕으로 하여
동학의 제2세 교조 해월신사(최시형)와
수운 대신사의 관계를 추가 기술한데 지나지 않는다.
이에 의하면 1865년 무렵에
박하선이 최세조와 함께
『수운문집』 이라는 책을 썼고,
1880년 무렵에
강시원이 『최선생문집도원기서』를 썼다.
여기에서
『수운문집』 은 ‘문집’이라고는 되어 있지만
사실은 최제우의 행장과 같은 성격의 글로,
1964년에 최수정과 김상기에 의해
‘네 가지’ 판본이 세상에 알려진 문헌이다.
그리고 『최선생문집도원기서』 는
최제우의 행장에 더해서 1879년까지의
동학 교단의 상황을 서술하고 있는 문헌으로,
1978년에 신용하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사료이다.
먼저 『아세아 연구』 13호(1964)에 소개한
네 가지 판본의 『수운문집』 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계룡본』으로 필사연대는 미상이다.
두 번째는 『단곡본』으로 1898년에 필사되었다.
세 번째는 『용강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관몰문서(官沒文書)』의 제15책에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 『규장각본』이라고도 한다).
이 『용강본』은 표제가
『大先生主文集 通章合部』라고 되어 있고,
필사연대는 1900년이다.
마지막으로 『도곡본』이 있는데, 1911년에 필사되었다.
김상기에 의하면, 『용강본』과 『도곡본』은
내용이 일치하고 누락도 동일하다
(21행에 걸친 누락이 있다).
『계룡본』도 오탈자가 많다.
그래서 『단곡본』이
비교적 정확한 판본이라고 평가하면서,
『단곡본』을 중심으로
다른 세 판본을 참고하여 새로운 정본을 만들었다.
제목도 『수운문집』 이라는 원제 대신에
내용에 걸맞은 『수운행록』으로 개칭하였다.
그런데 『수운문집』 의 저자나 성립연대에 대해서
김상기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는데,
표영삼은 그것을 “최맹륜과 박하선이
1865년 무렵에 편저하였다”고 단정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표영삼이 말하는
1865년의 『수운문집』 은
김상기가 소개한
네 가지 판본의 ‘원본’에 해당하는 셈이다.
즉 표영삼의 설에 따르면,
김상기가 소개한 네 가지 버전의 『수운문집』은
1865년의 원본 『수운문집』 을
각각 1898년(단곡본),
1900년(용강본),
1911년(도곡본)에 필사한
필사본이 되는 셈이다(계룡본은 필사 시기 미상).
한편 『최선생문집도원기서』 는,
윤석산의 설명에 의하면,
『동경대전』 간행과 함께 기획된 책으로,
필사본 한 권만 제작되어
유시헌 집에 감추어져 있다가
김연국에 의해 계룡산 상제교 본부로 옮겨졌고,
그것을 김연국의 아들 김덕경이 보관하고 있다가
1978년에 세상에 공개한 문헌이다.
그런데 표영삼은
「수운대신사의 생애」를 쓴 지 20여 년 뒤에는
『수운문집』 에 대해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다.
2004년 출간한 『동학1』에서는
『수운문집』 과 『대선생주문집』 의 성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다소 길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전문을 인용한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는 (최제우를 만나러)
최경상(해월)이 혼자 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수운문집』 에는 박하선과 최경상 등
6~7인이 같이 간 것으로 되어 있다.
(…) 『최선생문집도원기서』는 제대로 되었으며
『수운문집』 은 가필한 흔적이 보인다.
『수운문집』 은
최수정에 의해 1960년경에 발굴되었다.
이때 세 가지 기록을 찾았는데,
이 중 단곡리에서 찾아낸
단곡본을 『수운문집』 이라 한다.
1898년에 공주 계룡면 경천리에 살던 김옥희가
영주군 단산면 단곡리로 피신가 있다가
2년 후인 1898년에 필사한 것이다.
나머지 두 기록은 계룡본과 도곡본이다.
계룡본은 단곡본과 같으나 오자가 많고,
도곡본은 『수운문집』 과는
다른 『대선생주문집』 과 같은 기록이다.
현재 전해지는 『대선생주문집』 은
1900년에 평남 용강에 사는
임중칠이 필사한 필사본이다.
즉 1896년 11월에 용강 접주
홍기조, 홍기억, 임부언 등 3인이
경기도 광주 이종훈의 안내를 받아
(경북) 상주 은척면 우기리 은척원에 갔다가
필사하여 가지고 온 것을
임중칠이 다시 필사한 것이다.
이 『대선생주문집』 필사본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대선생주문집』 은
언제 누구에 의해 집필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최선생문집도원기서』 가 편찬된
1880년 이후에 보급되었다는 사실이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말미에 있는
강시원의 발문에는 정리된 자료가 없어
어렵게 집필했다는 심정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참고할만한 문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는
강시원이 직접 자료를 수집해 집필한 것이다.
기묘년(1879년) 가을이었다.
나는 주인(해월)과 함께
선생(수운)의 도원(道源)을 계승하고자
선생의 사적을 단행본으로 만들려 했는데,
시작과 끝이 뒤섞이고 앞뒤가 어지러워,
쓰려 해도 함부로 기록할 수 없었고(書不能犯筆)
오류의 실마리가 있을까 두려웠다.
그 근원을 궁구하여 잇고자 하면
이치가 ‘그렇다’에 근접하지 않고,
그 뿌리를 탐구하여 근원을 캐들어가면
상황이 ‘그렇지 않다’에 부합되지 않았다.
간신히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기록하려 하면
그 근본을 아직 자세히 모르고,
그렇지 않음을 믿고 기록하고자 하나
그 말단을 아직 살피지 못했다.
( 『최선생문집도원기서』「발문」)
이것으로 미루어
수운의 정통성을 내세울 만한 역사기록은
기묘년(1879년) 가을에
처음으로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최선생문집도원기서』는
1880년에 보급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내용에 문제가 있어
해월에 의해 견봉날인한 채
유시헌에게 맡겨져 묻혀버렸다.
그 대신 수운의 정통성을 내세울만한 기록이 필요하여
따로 정리해서
『대선생주문집』 이란 이름으로 보급하였다.
단곡본 『수운문집』은
원래 『대선생주문집』을 옮긴 것으로
이름만 바꾸었기 때문에 문장이 거의 다르지 않다.
다만 최경상(해월)에 관련된 부분만
약간씩 바꾸어 놓았다.
(중략) 『수운문집』은 해월 최경상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속셈에서 이처럼 고친 것이다.
1898년에 필사하여 만든 『수운문집』은
소위 청림교 측 인사들에 의하여
해월 최경상 부분을 모두 고쳐버린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계룡본과 단곡본은 『수운문집』이고,
용강본과 도곡본은 『대선생주문집』 이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의 발문에 의하면
저자인 강수는 참고자료 없이
수운의 일대기를 집필하였으며,
따라서 『최선생문집도원기서』야말로
수운의 정통성을 서술한 역사기록으로서는
최초로 편찬된 것이다.
반면에 『수운문집』 은 『대선생주문집』 을
약간 수정한 수정본으로,
정황상 청림교에서 필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상에 의하면 표영삼은
앞서 소개한 1985년의 학설에서
입장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1985년에는
“1865년에 박하선이 최세조와 함께
『수운문집』을 썼다”고 했는데,
2004년에는 “『수운문집』 은
1898년에 『대선생주문집』 을 수정한 것이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표영삼은 이듬해 나온 『동학 2 』에서도
2004년의 학설을 고수하고 있다.
이 문건( 『최선생문집도원기서』)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06년경부터이다.
1910년 이후에는
오상준이 『천도교회월보』에
『본교역사』를 집필하면서 참고자료로 쓰게 되었다.
이에 앞서 1908년에 시천교가
사본을 만들어 가져다 1915년에 만든
『시천교종역사』를 집필하는데 자료로 삼았다.
그 후 김연국이 시천교를 따로 만들면서
유시헌의 아들 유택하로부터
1918년에 원본을 가져갔다
(각주: 이때 유택하는
전세인의 필사로 사본을 따로 만들어 보관하였다.
현재 그의 손자인 유돈격이 보관 중이다).
이 원본은 1978년 4월 4일에 이르러서야
김덕경에 의해
『중앙일보』에 공개되어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중 수운의 창도 부분은
따로 떼어 세상에 내놓기로 하였다.
현재 『대선생주문집』 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록이 없어 확언할 수는 없으나
『최선생문집도원기서』와
『대선생주문집』 을 비교해 보면 거의 같다.
다만 『대선생주문집』 에는
『최선생문집도원기서』 에 미진한 부분이
약간 보완되었을 뿐이다.
(중략) (『대선생주문집』 의) 규장각 소장 필사본은
동학문서 사본 15책 중
『수운제문집』이란 이름의 문건에 들어 있다.
첫 제목에는 『대선생주문집』 이라 적혀있으며,
이 필사본은 평남 용강군 임중칠이
상주에 와서 해월을 만나보고 얻어간 필사본을
1900년 1월에 다시 필사한 것이다.
두 필사본을 대조하면
임중칠이 필사한 용강본이 좀 더 자세하다.
이 문건은 관에서 1900년 가을에 몰수하였고
현재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대선생주문집』 은
『최선생문집도원기서』 에서
수운의 창도 부분만을 따로 떼어서
미진한 부분을 보완해서 만든 판본이다.
그래서 표영삼의 2004년의 학설과
2005년의 설명을 종합하여
문헌의 성립순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
⇒ 『대선생주문집』
⇒ 『수운문집』
2. 김용옥 학설의 검토
그런데 김용옥은
최근에 간행한 『동경대전1』(통나무, 2021)에서
“『대선생주문집』 의 성립이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최선생문집도원기서』 보다
앞선다”(73쪽)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대선생주문집』 이야말로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최수운의 생애에 관한
가장 초기의 오리지날 문헌”(73쪽)이며,
이 문헌은 최시형의 부탁에 의해
“1864년에서 1869년 사이에
박하선에 의해 작성되었다”
(73쪽, 77-78쪽)고 보고 있다.
나아가서 “이것은 표영삼 선생님의 설이다”
(78쪽)라고 소개하면서,
“나는 1865년 경에 맹륜의 구술을 기초로 하여
여타 자료를 종합하여 박하선이 구성한 글이라는
표영삼 선생님의 감정이 정확하다고 본다”
(97쪽)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대로 표영삼은
2004년에 1985년 설을 뒤집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김용옥이 말하는
“표영삼 설”과 “표영삼의 감정”은
표영삼의 ‘후기 학설’(2004년)이 아닌
‘초기 학설’(1985년)을 가리키는 셈이다.
김용옥의 설에 의하면,
1880년에 간행된 『최선생문집도원기서』 나
1900년에 필사된 규장각본 『대선생주문집』 은
모두 1860년대 후반에 성립한
원본 『대선생주문집』 의 수정본 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김용옥은 무엇을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일까?
그 주된 논거를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최제우의 가계에 관한 서술
김용옥은 먼저
『대선생주문집』 과 『최선생문집도원기서』 의
첫머리에서 나오는 자구 차이를 근거로
『대선생주문집』 이 『도원기서』보다 먼저
성립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하에서는 편의상 『문집』과 『기서』로 약칭).
먼저 원문의 차이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기서』: 先生, 姓崔也, 諱濟愚, (…) 慶州人也.
山林公諱鋈之子也, 貞武公諱震立之六世孫也.
번역: 선생은 성은 최씨이고 이름은 제우이며,
(…) 경주인이시다. 산림공 옥의 아들이시고,
정무공 진립의 6세손이시다.
『문집』 : 先生, 姓崔氏, 諱濟愚, (…) 慶州人也.
父山林公諱鋈之○, 貞武公諱震立之六世孫也.
司成公諱訥之十一代孫也.
母, 韓氏, 籍淸州. 配, 朴氏, 籍密陽.
김용옥 번역: 우리 선생님은 성이 최씨이시고
이름이 제우요, (…) 경주인이시다.
아버지 산림공은 이름을 옥이라 하는데,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6세손이요,
사성공 최예(崔汭)의 11대손이시다.
우리 선생님의 어머니는 한씨요, 본관이 청주이다.
부인은 박씨인데, 본관이 밀양이다.(84쪽)
여기에서 『기서』의 서술에 따르면
최제우는 최진립의 6세손이 된다.
그런데 『문집』의 서술에 의하면 7세손이 된다.
이 차이에 대해 김용옥은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최제우의) 가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최진립은 분명 최제우의 7대조 할아버지다.
(…) 그런데 『도원기서』가
수운이 최진립의 6세손이라고 잘못 베낌으로써
기타 동학사료에도
대부분 6대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선생주문집』을
정독하지 못한 데서 생긴 오류이다.
이것은 『도원기서』의 정보가
『문집』 의 정보에 앞선 것일 수 없다는 것을
명료하게 입증하고 있다.(87쪽)
이에 의하면 최제우의 가계에 대한 서술에 있어서
『문집』 의 정보가 『기서』보다 정확하기 때문에
『문집』 의 성립이 『기서』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김용옥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이것은 『대선생주문집』 이 매우 구비되지 않은
엉성한 초략본(草略本)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도원기서』 는
문장의 구성에 별 하자가 없는
다듬어진 세련된 초본(抄本)이지만,
문장의 내용에 있어서는 오히려 오류가 많다.
이것은 초략본을 보고서
세련본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세련본으로부터 초략본이 나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문집』 이 『기서』의 저본이라는 사실은
초두(初頭)에서부터 입증되는 것이다(84쪽).
즉, 『문집』 은 구성이 엉성한데
『기서』는 세련되어 있기 때문에
『기서』가 후대의 저작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서』는 『문집』 의 세련본인 셈이다.
하지만 『기서』도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필사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할만한 사실이 있다.
『문집』 의 경우에도 최진립 이후의 서술에 있어서는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점은 김용옥도 지적하고 있다.
‘사성공’은 『문집』 에
‘訥(눌)’로 되어 있으나 ‘汭(예)’가 맞다.
(그는) 최수운의 13대조 할아버지다.
그러니까 (『문집』 에서) ‘11대손’이라 한 것도
‘12대손’으로 바꾸어야 한다.(89쪽)
즉 『문집』 에 나오는 사성공에 관한 정보는
이름도 시대도 잘못되어 있다.
이 점은 『기서』 뿐만 아니라 『문집』 도
“문장의 내용에 있어서 오류가 많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과연 『기서』가
『문집』 을 정독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
정반대로 『문집』 이
『기서』를 정독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문집』 에 나오는 사성공과 한씨부인,
그리고 밀양 박씨에 대한 내용은
『기서』에는 아예 없다.
이 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만약에 표영삼의 후기 학설대로
『기서』가 먼저 성립하였다면, 『기서』의 서술에다
『문집』 이 내용을 보완했다는 말이 된다.
반대로 김용옥의 주장처럼 『문집』 이 먼저 성립했다면,
『문집』 의 서술을 『기서』가
실수로 빼먹거나 일부러 생략했다는 말이 된다.
어느 쪽이 가능성이 높을까?
실수로 빼먹었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왜냐하면 구성상 텍스트의 첫머리인데다 내용적으로도
최제우의 가계에 관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부러 생략했다는 말이 되는데,
과연 『기서』의 저자가 최제우의 가계에 관한 서술을
일부러 생략할 필요가 있었을까?
기왕이면 『문집』 처럼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려 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문집』 의 저자가
『기서』의 가계 서술이 소략하다고 생각되어
보완을 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 『기서』의 부정확한 정보를
『문집』 이 보완해서
세련되게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도 없다.
이에 해당하는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김용옥은 “(최제우는) 총명하기가 사광과 같다”
(89쪽)는 문장의 원문이
『기서』에는 “聰明司曠”으로,
『문집』 에는 “聰明師曠”으로
다르게 표현되어 있는 점을 지적한 뒤에,
“강수는 『대선생주문집』 의
‘師曠’도 ‘司曠’으로 오사(誤寫)했다.
師曠이 司曠으로 쓰인 예는 전무하다.”
(94쪽)고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문집』 이 『기서』보다
후대에 나온 세련본이라고 생각하면,
『문집』 이 『기서』의 오류를
바로잡은 예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2) 최옥의 사망 시기에 관한 서술
『기서』와 『문집』 의 첫머리에는
최제우의 가계에 관한 설명에 이어서
아버지 최옥의 사망 시기에 관한 서술이 이어지고 있다.
양자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기서』: 稍至十餘歲, 氣骨壯肅, 智局非凡.
年至二八, 已亥之歲, 山林公沒.
번역: (선생님이) 10여 세가 되자
기골이 장대하고 지혜가 비범하였다.
16세가 되는 기해년(1839년)에
산림공이 돌아가셨다.
『문집』: 稍至十歲, 山林公歿.
김용옥 번역: 우리 선생님이 겨우 10살 되었을 때
아버지 산림공은 돌아가시고 말았다.(89쪽)
여기에서는 산림공의 사망 시점이
서로 다르게 서술되고 있다.
『기서』에는 최제우가
16세 되던 해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문집』 에는 10세 때의 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김용옥에 의하면
역사적 사실은 16세가 맞다(95-96쪽).
따라서 『문집』 의 서술은 오류이다.
뿐만 아니라 『문집』 에는 『기서』의
“氣骨壯肅, 智局非凡. 年至二八, 已亥之歲”
부분이 아예 없다.
『기서』에 있는 한 문장이 통째로 빠져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용옥은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그때는(=산림공이 돌아가셨을 때는)
수운의 나이가 17세(우리 나이)였다.
(…) 이 오류는 10세 때 모친상을 당한 것을
오인한 데서 파생한 잘못이라고도 말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기서』가 『문집』 의 오류를
바로잡았다는 사실에 있다.
바로잡았다기보다는 『문집』 의 공백을
적당한 레토릭으로 늘렸고,
‘二八六’이라는 부정확한 수치에 의거하여
근암공(=최제우의 아버지)의 서세(逝世)를
기해년(1839)으로 잘못 기술하고 있다.(96쪽)
그런데 김용옥의 추정대로
『기서』가 『문집』의 오류를 바로잡았다면,
그냥 ‘十’을
‘十六’이나 ‘二八’로 수정하면 되지 않았을까?
왜 굳이 ‘十’은 그대로 놔둔 채
번거롭게 중간에 한 문장을 끼워넣었을까?
이에 대한 의문은
『문집』의 원문 구성을 보면 풀릴 수 있다.
이 사진을 잘 보면, 『문집』 의 저자가
필사하는 과정에서 『기서』의 한 문장을
건너뛰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稍至十餘歲”의 다음 글자인
‘氣’와 동일선상에 있는 다음 줄의 글자가
‘山’으로 시작하는데,
『문집』 의 문장도
‘山’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稍至十歲, 山林公歿.).
즉 『문집』 의 필사자가 한 줄을 건너뛰어서
‘氣’를 써야 할 곳에 ‘山’을 쓴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우리도 번역을 할 때에,
특히 세로로 쓰여진 일본어나 한문으로 된 문헌을
번역할 때에 종종 범하는 실수이다.
이와 같이 『기서』에 있는 구절이
『문집』 에 빠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기서』에는 없는 구절이
『문집』 에 나오는 사례도 있다.
‘전시황(全時晄)’이 등장하는 단락이 그렇다
(200-207쪽).
전시황은 본명이 전성문인데,
1875년에 ‘전시황’으로 개명하였다.
바로 여기에 김용옥 설의 딜레마가 있다.
왜냐하면 1875년은 박하선이 죽은 지 6년 후이어서,
이 단락은 박하선이 쓴 글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김용옥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 단락은 앞뒤 단락과의 문맥도 매끄럽지 못하다.
그래서 김용옥은 이 단락을
“후대에 삽입된 독립파평”이라고
추정하고 있다(203쪽).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단락이야말로
『문집』 전체가 『기서』보다
후대에 성립했다는 결정적인 증거 중의 하나다.
『문집』 의 저자가 『기서』를 보완하거나 의도적으로
수정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단락을 삽입한 것이다.
이상의 고찰에 의하면,
『기서』와 『문집』 을 비교했을 때
문장이나 단락 상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로는
대략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필사 과정에서의 누락이나 생략이고,
다른 하나는 부자연스러운 보완이나 수정이다.
(3) ‘동학’ 개념의 출현 시기
한편 『문집』 과 『기서』에는
최제우가 「포덕문」을 지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기서』에는 ‘동학’이라는 말이 나오는 반면에
『문집』 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에 대해 김용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포덕문」을 썼을 당시에는
‘동학’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음 해 「논학문(=「동학론」)을 쓸 때부터
서학을 강력히 의식하여 쓰기 시작한 개념이다.
수운은 포덕 당시 그의 뇌리에 ‘동학’은 없었다.
(…) 강수의 오첨(誤添)으로 인해
오히려 『대선생주문집』의 오리지널리티가
선명하게 부각된다.(148쪽)
김용옥의 지적대로 ‘동학’ 개념이
1861년 12월경에 쓰여진
「논학문」에 처음 나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헌상의 사실이다.
‘동학’ 개념이 발화된 시점은
「논학문」의 저작 시기(1861년 봄)와
대체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논학문」의 서술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신유년(1861년)에 이르러
사방에서 어진 선비들이 찾아와서 물었다. (…)
문: “도가 같다면 서학이라고 부릅니까?”
답: “나는 동에서 태어나서 동에서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이지만 학은 ‘동학’이다.”
이에 의하면
최제우가 ‘동학’이라는 말을 쓴 시점과 장소는
1861년 초의 경주에서이다.
즉 남원에 가기 이전에
이미 경주에서 ‘동학’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다만 그와 같은 사실을
남원에 가서 「논학문」에다 밝혔을 뿐이다.
따라서 『기서』 의 「포덕문」 서술 부분에
‘동학’이라는 말이 나온다고 해서
그것을 ‘잘못된 첨가[誤添]’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4) ‘심고’에 관한 서술
김용옥은 이어서 『기서』 의
“一曰食告, 一曰出必告, 入必告.”와
『문집』 의 “一曰食告, 出必告, 入必告.”를
대비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강수의 『기서』 를 『문집』 과 비교해보면,
두 번째 ‘一曰’이
쌩으로 첨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一曰’의 보통의 용법으로 말하면,
“하나는 …이요, 또 하나는 …이요” 하는 식의
표현이 더 자연스럽다.
그래서 강수는 자기류의 한문지식에 따라
두 번째 ‘一曰’을 첨가한 것이다.
그러나 원문은 원문에 즉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더구나 두 번째 ‘一曰’은 대상이 명료하지 않다.
“出必告, 入必告”는
『예기』「곡례(상)」에 나오는 말을 변형시킨 표현인데,
‘食告(식고)’처럼 개념화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냥 일상 행동거지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出必告, 入必告”는 독립된 문구가 아니라
‘식고’에 포섭되는 설명인 것이다.(149쪽)
그런데 동학 교리상으로 보면
“出必告, 入必告”는 ‘심고(心告)’에 해당한다.
윤석산은 『기서』 의 이 부분에
“출입시에 드리는 기도로 ‘심고’라고 한다”라고
주석을 달고 있다.
표영삼도
『문집』 의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식사할 때 한울님에게 고하는 일과
나가거나 들어오면
반드시 한울님에게 고하도록 하는
심고(心告)라는 수행법을 만들었다.
한편 『해월신사법설』에는
“出必告, 入必告”와 유사한
“出入必告”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事天地如事父母, 出入必告, 一如定省之禮.
開闢五萬年以後, 先生之始刱者也.
천지를 부모처럼 섬겨서 출입 시에 반드시 고하기를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예처럼 하여라.
이것은 개벽 후 5만년 만에
(수운) 선생이 처음으로 만든 예법이다.
여기에서 “出入必告”는 『기서』 나 『문집』 에 나오는
“出必告, 入必告”의 준말에 해당한다.
해월의 해석에 의하면,
천지를 부모로 섬겨서
외출하거나 귀가할 때 심고를 드리는 예는
최제우가 역사상 처음으로 발명했다는 것이다.
이상에 의하면, 『기서』 의 “出必告, 入必告”도
‘식고’처럼 충분히 개념화될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강수는 “出必告, 入必告” 앞에
‘一曰’을 붙여서 ‘식고’와 구분한 것이다.
다만 ‘심고’라는 말을 직접 쓰는 대신에
“出必告, 入必告”라고 내용을 풀어썼을 뿐이다.
따라서 『기서』 가 『문집』 에는 없는
‘一曰’을 잘못 넣었다고 보기보다는,
『문집』 이 『기서』 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一曰’을 삭제하거나
빼먹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5) “祈禱之書”(『기서』)와 “所禱之書”(『문집』 )
이 외에도 『문집』 이
『기서』 의 필사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는 많다.
가령 최제우가
노승에게 『을묘천서』를 소개받는 장면에서,
노승을 향해
“책을 책상 위에 올려 놓으십시오”라고 말하는 대목이
『기서』 에는 “納于書案”이라고 되어 있는데
『문집』 에는 “納于書”라고 되어 있다(103쪽).
즉 『기서』 에는 책상을 의미하는 ‘案’자가 있는 반면에
『문집』 에는 책을 의미하는 ‘書’만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용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히 박하선의 기술이 미비한 것이며,
강수의 첨가가 정당한 것이다.”(103쪽)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은
기술상의 미비나 완비의 문제가 아니라
구문상의 맞고 틀림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納于書”는
의미 자체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역하면 “책에 올려 놓다”).
그런데 박하선이
『문집』 을 쓸 정도의 한문 실력의 소유자라면
이 정도의 오류를 범할 리가 없다.
따라서 이 문제를
김용옥 설의 관점에서 설명하기 위해서는
원본 『문집』 에는 “納于書案”으로 되어 있었는데,
규장각본의 저자가 필사하는 과정에서
‘案’을 빼먹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구절에서는
『기서』 는 『문집』 의 세련본이 아니라
『문집』 과 차이가 없게 된다.
비슷한 예를 하나 더 들면,
최제우가 『을묘천서』의 핵심을 말하는 대목이
『기서』 에는 “祈禱之敎”라고 되어 있는데,
『문집』 에는 “所禱之敎”라고 되어 있다.
이에 대해 김용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문집』 의 “所禱之敎”를 강수는 “祈禱之敎”로 고쳤다.
하여튼 강수의 문장이 더 세련되어 있다.
이것은 『문집』 자료가
강수의 『도원기서』 보다 앞서는 것이며
저본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만든다.
초략본에서 세련본이 나올 수는 있어도
세련본에서 초략본이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104쪽)
그런데 “所禱之敎”는,
앞의 “納于書”의 경우처럼 구문상 어색한 표현이다.
직역하면 “기도한 가르침”이나
“기도하는 가르침”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所는 ‘~한’이나
‘~하는’을 나타내는 관형격 조사의 역할).
즉 “기도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의미는
도출해 내기 어렵다.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한문으로 표현하려면
“所禱之敎”보다는 “祈禱之敎”가 자연스럽다.
“祈禱之敎”를 직역하면
“기도의 가르침”이 되기 때문이다.
박하선이 정말 『문집』 의 저자였다면
이 정도의 초보적인 구문을 몰랐을 리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所禱之敎”는
“祈禱之敎”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생긴 차이일 것이다.
‘祈’를 ‘所’로 잘못 보았거나, 아니면
‘祈禱’를 자의적으로 ‘所禱’로 수정한 것이다.
실제로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기서』 의 ‘祈’자는 ‘所’와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
(6) 淨器와 精器의 혼동
이 외에도 김용옥은
『문집』 에는 ‘精器’로 되어 있는 것을
『기서』 에서 ‘淨器’로 바로잡았다고 하면서
“精器에서 淨器로 고쳐지는 것은 가능해도,
淨器에서 精器로의 수정은 불가능하다”
(127쪽)고 말하고 있는데,
『기서』 를 확인해 보면
『문집』 과 마찬가지로 ‘精器’로 되어 있다.
혹시 『기서』 의 글자를
순간적으로 착각한 게 아닌가 싶다.
참고로 『도원기서』 와 『대선생주문집』 의
해당 원문을 확인해 보면 사진과 같다.
(7) 조동일의 『을묘천서』 이야기 분석
마지막으로 관점을 약간 바꿔서,
이번에는 최제우가 ‘이야기화’되는 과정을 근거로
『문집』 의 성립연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조동일은 2011년에 나온 개정판
『동학 성립과 이야기』
(모시는사람들, 초판은 1980년)에서,
최제우가 이른바
『을묘천서』를 받는 장면에 관한 서술이
『용담유사』와 『도원기서』 사이에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고 지적한 뒤에,
『도원기서』 의 서술은 『용담유사』 이후에
‘이야기화’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금강산에서 왔다는 이상한 중이
(최제우에게) 천서(天書)를 전해 주고는
자취를 감추었다는 이야기는
모든 자료에 두루 나타나며,
최제우의 득도를 말하는 데
핵심적인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 (『용담유사』의) 「몽중노소문답가」에서는
(최제우가) 금강산 상상봉에서
꿈에 도사를 만나 문답한 다음에 득도를 했다고 했다.
그런데 『도원기서』 에서는
(…) 아주 자세하게 꾸며냈다.
(…) 최제우가 (「몽중노소문답가」에서)
스스로 말한 득도 과정을 변형시킨 것이라고 생각된다.
(…) 노래(=「몽중노소문답가」)에서는
(최제우) 자기 자신이 금강산 상상봉에 올라가서
도승을 만났다 했는데,
이야기(『도원기서』 )에서는
최제우가 울산에 머무르면서
할 일 없이 초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도승이 찾아왔다고 했다.
(…) 최제우 자신이 금강산 상상봉에 올라가
도승을 만났다고 하면
도승이 그만큼 숭고한 존재로 부각된다.
(…) 노소(老少)의 문답을 거쳐
소년이 비로소 깨달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도승이 최제우의 이름을 듣고
멀리까지 최제우를 찾아왔다고 하면,
최제우가 더 위대한 인물일 수 있다.
(…) 지상의 인물인 최제우가
초월적인 매개자인 도승보다 오히려 높다는 주장은
최제우를 따르던 사람들이
최제우를 숭앙하자는 데서 생긴 것이다.
(…) 『도원기서』 이후의 자료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되풀이하였다.(140-145쪽)
이 단락은
비록 『대선생주문집』 에 관한 언급은 없지만
『대선생주문집』 의 성립연대를 생각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왜냐하면 최제우가
『을묘천서』를 얻는 과정에 관한 서술이
『기서』 와 『문집』 에 동일하게 나오고 있는데,
내용상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김용옥의 표현을 빌리면
“토씨 하나 틀림이 없이 그대로 실려있다.”(103쪽)
그런데 조동일의 분석에 의하면
『기서』 의 서술은 『용담유사』의 서술보다
최제우가 격상되어 서술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어느 정도 신비화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집』 에도
이 부분이 고스란히 나오고 있는 이상,
『문집』 역시 최제우가 어느 정도 신비화된 이후의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김용옥의 주장대로라면 『문집』 은
최제우 사후 3-4년 안에 박하선에 의해서 쓰여졌다
(최제우는 1864년에 처형당했는데,
박하선은 고문 후유증으로 1869년에 죽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시기에 박하선이 최제우를
『기서』 나 『문집』 처럼
신비적으로 ‘이야기화’할 수 있었을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지 않을까?
여기에 더해서 김용옥은
“수운이 처형 당한 직후에
해월이 박하선에게 수운의 행장 집필을 부탁했을 것”
(78쪽)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하늘같은 선생님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과연 행장 집필을 부탁할만한 여력이 있었을까?
시체수습과 장례준비,
그리고 향후대책에 몰두하지 않았을까?
수운이 죽자마자
마치 훗날 『수운문집』의 편찬을 예견이나 했듯이
행장집필을 지시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이상의 추측에 일리가 있다면,
설령 김영옥의 주장대로
『문집』 이 『기서』 보다 먼저 성립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박하선의 저작일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4. 맺으며
이상의 고찰에 의하면,
『문집』 이 『기서』 보다 먼저 성립되었다는
김용옥의 설에는 무리가 많음을 알 수 있다.
표영삼의 후기 학설대로
“『기서』 가 『문집』 보다 먼저 성립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표영삼이 『기서』 의 발문을 인용하면서 지적했듯이,
『기서』 의 저자 강수는
최제우의 행장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참고할만한 자료가 없다”는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만약에 『문집』 이 먼저 있었고,
강수가 그것을 보면서 『기서』 를 작성했다고 한다면
이런 고백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김용옥은 “동학연구자들에게는
모종의 『도원기서』 신화가 있다”
(151쪽)고 비판하고 있다.
“『도원기서』 의 메시지가
절대적인 기준인 양 생각”(151쪽)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김용옥이야말로 신화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대선생주문집』 이라는 신화다.
『도원기서』신화를 없애려고
새로운 신화를 만든 셈이다.
그리고 그 신화에 빠져 무리한 억측을 시도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앞에서 살펴본 ‘전시황’이 나오는 대목이다.
김용옥의 설대로라면,
이 단락은 “후대의 삽입”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설명하기 시작하면
설명하지 못할 게 없다.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은 모두
“후대의 삽입이나 조작”이라고 말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은 게 된다.
이러한 “설명같지 않은 설명”이 나오는 이유는
애당초 가설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가설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무리한 억측이나
불합리한 설명이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헌학적 문제는
신중하게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댓글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