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잔차 스님의 깨달음과 세계불교 수행법의 정리]
인도의 힌두교 수행법은 내 마음에 아뜨만과 브라만이 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색계선정을 통해서 나(아뜨만)와 신(神=브라만)이 하나로 합일하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체험한 인도 성자는, 마하리쉬, 마하라지 또는 크리슈나무르티 같은 분들입니다.
또 중국에서는 육조 혜능대사, 임제스님, 백장스님, 마조스님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역대 수많은 큰 스님들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서산대사, 경허스님, 경봉스님 등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루는 태국의 아잔차 스님도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이분들은 모두 본성을 깨친 분들입니다.
본성이란 중생이나 부처나 누구에게나 마음속에는 깨끗하고 고요한 본래자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는 것입니다.
이 본래자리는 어리석은 중생에게도 있고 강아지나, 동물, 식물 에게도 모두 있으며,
이 자리는 어떠한 번뇌 속에서도 오염되지 않고 항상 청정하고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 본성(아뜨만, 브라만, 자성, 주인공)은 무색계선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수행법은 집중을 통해 얻어집니다.
그 내용을 보면, “내”가 사라지고 “대상”이 사라지면서, 그 둘이 통으로 하나가 되어 텅 비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내”가 “신”과 합일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절대 청정한 자리라 합니다.
이분들의 깨닫고 난 후 수행법은,
이 청정한 자리에 있으면, 어떤 번뇌가 오더라도, “청정하고 고요한 자리”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청정하고 깨끗합니다.
그래서 이 본성자리는 번뇌가 물들일 수 없는 자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여여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항상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 그 분들의 수행입니다.
그러면
석가모니의 수행법은 무엇일까요?
석가모니는 단 한 번도 내 마음이 깨끗하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도리어 내 마음은 오염되어 있어서 모든 것이 가짜며 환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무아(내가 없고)며 무상(대상들은 실체가 없다)이며 “연기”라고 했습니다.
본성을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을 하십니다.
그리고
수행법도 완전히 다릅니다.
본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내 마음속에 있는 청정하고 깨끗함을 찾지만,
석가모니는 그와 반대로, 청정한 것은 없고 모두가 “뇌”가 만든 환각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환각인 줄 알 수 있을까가 핵심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설혹 내 마음속에 있는 청정하고 고요한 자리를 찾았다 해도, 그것은 우리의 뇌가 만든 환각이라고 결론 내리고, 절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각인 줄 아는 것이 급선무이지, 청정하고 깨끗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념처경에서는 수식관을 통해서, 또 4대(지,수,화,풍)수행을 통해서, 시체관을 통해서, 공동묘지관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환각인 줄 찾을 수 있을까 하고 심사숙고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하는 이유는 너무나 명백합니다.
허상이고 환각인 줄 알면 절대 그것에 속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깨끗하고 청정함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왜 환각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환각인 줄 알면 그것에 속지 않고 마음이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유롭다는 뜻에서, 구속에서 벗어난 해탈(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론]
본성론자(힌두교)는 마음의 “청정하고 깨끗한” 본성 자리를 찾고,
연기론자(석가모니)는 마음이 왜 환각인지를 찾습니다.
이 둘은 명백하게 다른 수행법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 수행법을 배우는 사람들은, 무색계선정을 얻은 다음, 그것을 번뇌가 일어날 때마다 적용시켜, 번뇌를 돌아보는 순간, 그 번뇌가 환으로 사라지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든지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적용시켜, 돌아보는 순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 환각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앞에 있는 책상을 볼 때,
그 책상을 바라보는 순간 책상이 사라져 텅빈 허공이 됩니다.
그리고 다시 평상심으로 돌아오면 예전 그대로 책상을 봅니다.
이것이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 찰나, 찰나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져야 합니다.
(앞에서, 아잔차 스님은 무색계선정을 얻고, 그 후의 수행법을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하고, 회원님들에게 답을 해 보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이 그 답변에 해당됩니다. 무색계선정을 얻고나서, 그다음부터 이런 수행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을 하면서, 돌아보면, 순간적으로 사라짐이 되기 때문에, 볼 때마다 환각인지 아니까, 절대 속지 않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모든 번뇌에 적용되고,
또 어떠한 사물이라도 적용됩니다.
사람, 동물, 귀신, 사랑스런 것이건, 미운 것이건, 산이건, 건물이건, 죽음이건, 삶이건 모두 찰나 찰나 적용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이고 연기법입니다.
연기란, 인과 연이 모여 만들어진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부언]
“아잔차 스님의 오두막”이라는 책에서 나온 글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성 수행”과 “연기법 수행”의 차이를 모릅니다.
단지 불교에서 사용하니까 전부 같은 수행이겠지 하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각 수행법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오해하기를, 아잔차 스님도 부처님과 같은 연기법 수행을 하시겠지 하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석가모니의 수행법과는 다릅니다.
이 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이 여러 회원님들과의 마지막 대화가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