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중(安禧重)
효자정문(孝子旌門)
<효자정문> 영조 4(1728)~정조 24(1802). 효자, 조선 문신, 자는 여중(汝中),
본관은 순흥(順興) 안유(安裕)의 21대손. 어릴 때부터 부
모 옆에서 언제나 상냥하게 재롱을 피워 그의 부모들은 항상 기특하게 여겼다.
영조 19년(1743) 6월 그믐날 밤에 심한 우레를 동반한 폭우로 인하여 사당이 무너져 내리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때 희중의 부모는 병중에 있었으므로 겨우 16세 밖에 안 된 희중은 혼자서 위험을 무릅쓰고 사당 안에 뛰어 들어가서
기둥과 들보가 부러지려는 찰라 들보를 떠받들고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였더니 뇌성이 멈추고 폭우가 그쳤으므로
무사히 신주(神主)를 받들고 나와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이는 조상을 숭모하는 지성에 신명이 감동한 까닭이라고 사람들은 찬탄하였다.
그는 성장할수록 지성으로 부모를 봉양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으며 특히 부모님의 마음을 편케하여 드리는 것으로
생활의 규범으로 삼았다.
영조 26년 할아버지가 병환이 위독하였을 때 그는 가산을 돌보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하여 구환하였다.
그러나 병증에 차도가 없자 자기 집을 떠나서 치료받는 것이 좋다는 피접풍속에 따라 양지 암실촌 정씨네 방을 빌려
조부를 옮겨놓고 반년동안 간호하면서 지성을 다 하였으나 병환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러자 그는 매일 환자의 변을 맛보아 병세를 진단하면서 시탕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피로하여 잠시 졸았을 때 꿈에 도인이 나타나서 북두칠성에 기원하면 영험이 있을 것이라고 선몽하였다.
꿈에서 깨어난 안희중은 신기한 생각에 점복집을 찾아가 문의해 보자 역시 꿈에 이른 대로해보라고 하였다.
때마침 몹시 추운 겨울이였으나 매일 밤 목욕재계하고 자신의 몸으로 조부의 병을 대신하여 달라고 기도하였는데
기도할 때면 의례히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호위하듯 머물러 있다가 기도가 끝나면 사라졌다.
이러기를 한 달여 만에 신기하게도 조부의 병환이 쾌차되었다.
건강을 되찾게 된 조부는 여생을 마칠 때까지 건강을 유지하였다.
그러던 중 영조 41년(1765) 6월에 희중의 할머니가 화장실에 갔다가 갑자기 달려든 광견에게 팔꿈치를 물려 그 독성으로 인하여
기절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주변 사람들은 광견에 물린 자국은 쑥 뜸을 하면 좋다고 권하였으나 희중은 주야를 가리지않고 40여 일간 독을 입으로 빨아내어 끝내 완쾌되도록 하였다.
일찍이 백부(伯父)를 비롯하여 고모, 삼촌 등 3남매가 일찍 죽었으므로 조부모의 슬픔은 극에 달하여 마음을 상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틈만 있으면 위안을 드리고 건강을 위하여 슬픔을 거두도록 간곡히 호소하여 끝내 조부모의 마음을 돌려 먹고 자위하게 되니
이 모든 것이 그의 지극한 효심 때문이었다.
영조 44(1768)년에는 조부가 돌아갔고, 또 영조 48년에는 조모 김씨가 노환으로 숨지자 장례를 치루고 차자임에도 장조카에게는 조금도 부담을 주지 않고 봉제사에 쓰일 제수비용은 자신이 부담하였으며, 기일(忌日)이 다가오면 미리부터 몸을 조심하고 기일에는 목욕재계하고 슬픔에 잠겨 종일을 숙연히 보냈다.
노쇠한 만년에는 뜰안의 행보마저 어려운 데도 한서(寒暑)나 비바람을 피하지 않고 매일같이 성묘하기를 부모 생전에 조석문안하듯하면서 오히려 늙어만 가는 세월 속에 성묘할 수 있는 날이 줄어감을 아쉬워 하였다.
정조 18년(1794년)에 그의 덕행과 고령을 포장하여 조정에서 2품의 관직을 내리고 양노의 은자(恩資)를 내린 후 3대를 추증하니 이 모든 것이 그의 지극한 효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조 24년(1802) 8월 5일 오시에 하세하니 수 74세였다.
외사면 박곡리에 효자 정문을 세웠으며 지금도 전해온다.
<참고 : 삼강행실록, 안희중행장기, 내고장의 얼>
안희중(安禧重) 효자정문(孝子旌門)
생년 1728년(영조 4)
몰년 1800년(정조 24)
본관 순흥
대표관직 동지중추부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박곡리에 있는 조선 시대 안희중의 효자 정려각.
정려각은 앞면과 측면 모두 1칸으로 구성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다듬은 초석을 놓았다.
초석은 하부는 팔각형으로 만들었으나 상단부는 원기둥을 세우는 것에 맞추기 위해 원형으로 다듬은 독특한 형태이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박곡리
안희중(安禧重, 1728∼1800)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1743년(영조 19) 6월 그믐날 밤 폭우가 쏟아져 사당이 무너지려 하였으나 부모님은 모두 병석에 누워 있었다. 당시 16세였던 안희중은 급히 사당으로 뛰어 들어가 대들보를 붙잡고 하늘에 호소하자 폭우가 잠잠해졌다. 그리하여 안희중은 무사히 신주를 받들고 나올 수 있었다.
부인인 김해김씨는 스무 살에 4살 연하의 안희중에게 시집왔었는데, 사당이 무너지려 할 때 같이 고생하였으며 집안 어른들을 모시는 데에도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1750년경 백부를 비롯한 고모 등 삼남매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마음을 상한 할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안희중은 할아버지를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한 의원이 요양하는 것이 좋다고 권유함에 따라 당시 수원부 양지현(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엄실촌에 있던 정씨 집에서 정성껏 간호하였다.
그러던 중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북두칠성에 기도하면 효험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일러주었다. 이에 안희중은 추운 겨울임에도 매일같이 목욕재계하고 할아버지 대신 자신이 아프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 덕분인지 할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하였는데, 이번에는 할머니가 미친개에게 물려 위독하게 되었다. 그러자 안희중은 40여 일 동안이나 입으로 독기를 빨아내어 할머니를 낫게 하였다.
1768년에는 할아버지가 천수를 다하고, 1772년에는 할머니가 천수를 다하자 작은 아들임에도 큰 조카에게 부담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장례 비용을 자신이 부담하였다. 제사에는 소홀함이 없었으며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사당에 올렸다가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상훈과 추모]
1794년(정조 18) 조정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벼슬을 내리고 상금을 하사하였다.
안희중 효자정문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박곡리에 있으며, 내용은 “효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안희중지려 상지사년 갑인 삼월일 명정(孝子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安禧重之閭上之四年甲寅三月日銘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