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www.youtube.com/live/8nFNCo0hWZk?si=CXvqo1KvlciLmbY9
창세기 강론 100
창세기 37:25-36
팔려 가는 요셉
야곱의 톨레도트에서 야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요셉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렇게 전개키시는 성경의 의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삭의 언약 안에서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고 이제 야곱 언약 안에서 아들들을 이스라엘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언약의 나라로 세워 언약의 성취자가 이 땅에 참 이스라엘로 오셔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으로 양을 치러 갔다가 도단으로 갔고 요셉은 형들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도단까지 가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에 보내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25절). “그들이 앉아”라는 말의 ‘야사브’는 ‘앉다, 머무르다, 살다, 거주하다’라는 뜻이다. “눈을 들어”라는 말의 ‘나사’는 ‘들어 올리다, 가지고 가다’라는 뜻이고, “본즉”이라는 말의 ‘라아’는 ‘보다, 조사하다, 지각하다, 주목하다’라는 뜻이다.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주목하고 있는 상태는 그들과 함께 거주하는 상태와 같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형제들의 사고방식은 애굽적 사고방식으로 요셉을 처리한다는 의미이다.
24절에 보면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라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형제들은 요셉을 죽음 가운데 던져 놓고 자신들의 목숨을 지탱하기 위해 음식을 먹고 있다. 세상의 것을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죄인들이다. 한마디로 너의 죽음으로 나는 살아야겠다는 죄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리할 때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죄 가운데서 자기들의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 사는 이기심을 이용하여 말하게 하신 것이 대속의 죽음이 되게 하셨음을 드러내고 계신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요 11:50)
“이스마엘 사람들이 …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라고 하였는데 지리적으로 도단은 애굽으로 가는 무역로였다. 이때 이스마엘 사람들이 왔다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요셉을 어디로 이끄시는가를 보여주신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대로 이루어가시는 일이 순조롭게 되고 있음을 나타낸 말씀이다. 이런 점에서 “눈을 들어 본즉”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던져진 구덩이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죽음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인 그들에게 생명이 되었을 것이나 형제들은 눈을 들어 보았으나 하늘의 생명을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땅의 것에 매여 있었기에 요셉을 처리할 방안을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스마엘 사람들이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가고 있었다는 것은 죽음을 취급하는 자들로 요셉의 죽음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시하는 동방박사들의 예물(마 2:11)과 실제 예수님의 죽음에 쓰인 재료이기 때문이다(막 15:23, 요 19:39).
“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28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26-28절).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기 위해서 일을 저질렀지만 “유다”가 요셉을 죽이는 것보다 차라리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아버리자는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요셉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는 유다 자신의 의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위해 요셉을 사용하실 것에 대한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겉으로는 유다의 대안으로 요셉이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언약이 요셉을 죽이신 것이다. 그렇게 죽는 것이 형제들을 이스라엘로 살리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유다의 제안은 요셉을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라는 것으로 죄를 회피하려는 죄성을 드러낼 뿐이다. 결국 유다의 악함과 르우벤의 악함은 같은 것이다(21, 29-30절). 하나님의 언약에 맞서는 이스라엘의 죄성을 드러내신다. 참으로 아이러니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자의 이름도 ‘유다’이다. 그런데 유다가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 죽이되 자신들의 죄를 숨기기 위해 로마인들의 손을 빌려 죽인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오늘날 교인들이 예수님 당시에 자신이 거기에 없었다는 것으로 나는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다는 항변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내가 먹은 선악과가 되듯이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인 것은 죄의 권세에 매인 내가 죽인 것이다.
“은 이십”이란 표현은 당시 은이 돈으로 사용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율법에서는 서원을 위한 속전으로 정해진다. 그러니까 요셉의 팔림은 서원의 값으로 성소에 바쳐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은”이라는 ‘케세프’는 율법에서 생명을 대속하는 ‘속전’으로 표현된다(출 30:11-16). 이런 점에서 열이라는 완전한 말씀이 ‘이스라엘의 야곱’과 ‘애굽의 요셉’을 중심으로 둘로 드러나는 계시이다.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3 네가 정한 값은 스무 살로부터 예순 살까지는 남자면 성소의 세겔로 은 오십 세겔로 하고 4 여자면 그 값을 삼십 세겔로 하며 5 다섯 살로부터 스무 살까지는 남자면 그 값을 이십 세겔로 하고 여자면 열 세겔로 하며(레 27:2-5)
상인들에 대하여 25절에서는 “이스마엘 사람들”이라고 하였고, 28절에서는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니, 이스마엘은 하갈의 소생이고 미디안은 그두라의 소생이다(창 25:1-2, 12). 이들은 애굽으로 내려는 생활을 통하여 그 목숨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에서 이스마엘 사람들과 동일시되고 있다. 실제로 후에 이스마엘 사람들과 미디안 사람들은 같은 족속으로 취급되었다(삿 8:24).
“29 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30 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29-30절). 르우벤의 슬픔은 형제로서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하나님의 언약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아무리 애통하고 슬퍼한다고 할지라도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형제를 위한 슬픔의 표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가 없는 것이라면 우리의 악함일 뿐이다.
요셉을 상인들에게 판 것은 그를 구출하려고 했던 맏형 르우벤이 없는 사이에 이루진 일이다. 자신의 장자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르우벤의 인간적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아니 인간적 욕심을 이루도록 하나님은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요셉에게 주신 계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야 하는 계획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적 욕심에 의해 마음대로 이용될 수 없다.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라는 르우벤의 말은 오로지 자기만 생각하는 죄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선악과를 먹은 죄인의 선악 기준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31-32절).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과거 야곱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내려고 염소를 요리하였고 염소의 가죽을 이용했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창 27:9, 16). 염소를 죽여 자신들의 죄를 가리고자 하는 것이 죄인들의 종교성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에서 동물의 죽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계시하기 원하셨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그들이 그 채색옷을 가져가 전달하게 했다. 그들의 아버지에게’라는 말이다. 즉 형제들이 요셉의 옷을 가지고 직접 야곱에게 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 피 묻은 것을 보냈다는 뜻이다. 이렇게 한 이유는 야곱이 객관적으로 사건을 판단하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형제들은 아버지가 판단함으로 자기들 스스로 죄를 고하는 것을 숨기기 위한 의도가 엿보인다.
“33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33-35절).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라는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에 알아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계속 “아버지”(32, 33, 35절)와 “아들”(32, 33, 34 35절)로 반복하여 표현하고 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짐승들과 같은 죄인들에 의해 찢김을 당하고 먹힌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구유에 누인 아기로 오셨다. 그것이 십자가 죽음의 표적이기 때문이다.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눅 2:11-12)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라는 표현을 통해 아버지 야곱도 아들과 함께 하나가 되어 찢겨지고 죽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야곱은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죽는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죽는 죽음이었다.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1-24)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36절). 형제들이 요셉을 미디안 사람들을 통해 애굽에 팔았지만 사실은 죽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리게 일하셨다.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제들 손에서 죽이신 것이다. 요셉의 죽음 안에서 형제들, 즉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로 세워지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안에서 언약의 후손이 오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대로 애굽으로 옮겨 이방인의 품에서 이스라엘로 만드실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의 힘과 노력에 의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언약이 성취되는 것이다(2025011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