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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반야선원 포교사회 원문보기 글쓴이: 19기 혜연정 주분남
💚2024년6월16일 사찰순례2💚
《유튜브는 각전마다 구체적인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
금강송 숲길, 아름다운 연못이 있는 맑고 푸른세상 천축산 불영사의 불영지에서 부처님 그림자를 친견하고 왔습니다
●천축산(天竺山 653.3m)●
경상북도 울진군에 위치해 있는 산으로서, 울진의 대표적인 명산입니다.
전체적인 산세는 능선이 동서로 뻗어 있으며, 동쪽으로 동해바다. 서쪽으로는 통고산과 이어져 있고, 수백년된 금강송(松)인 춘양목과 느티나무, 굴참나무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상 서쪽 능선에는 북바위라는 암봉이 있으며, 그 북쪽 기슭에는 651년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한 비구니 사찰인 불영사(佛影寺)가 있으며, 그 옆으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계곡이며 명승6호로 지정된 불영계곡이 있습니다.
조망도 무척 우수하여 동쪽으로는 동해바다, 북쪽으로는 불영계곡이 보이는 등 사방으로 경북의 마루금이 장관입니다ㆍ
천축산이라는 이름은 '하늘천' '대나무축' 자로서 서기 651년 의상대사가 이곳의 산세가 인도의 천축산과 비슷하다고 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ㆍ
천축산 불영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입니다 ㆍ
불영사는 651년(신라 진덕왕 5) 의상 대사(625~702)가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입니다.
《불영사의 창건설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의상 대사가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해안을 따라 단하동 해운봉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서역의 천축산을 옮겨온 듯한 지세가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맑은 물위에 부처님 다섯 분의 형상이 떠올라 인연 깊은 곳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근 폭포에 독룡이 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대사는 처음 독룡에게 설법하고 이 땅을 보시할 것을 청했으나 용이 따르지 않자 법력으로 쫓아내었습니다.
용은 분하여 산을 뚫고 돌을 부수며 떠났는데 대사가 못을 메워 사찰을 창건하였다. 의상 대사는 이어서 남쪽에 청련전을 짓고 무영탑을 세워 비보한 뒤 산 이름을 천축산, 절 이름을 불영사라 하였습니다.
처음 연못에 비친 부처님 모습의 바위는 불영암, 용이 산을 뚫었다는 자리는 용혈, 용이 도사리고 있던 곳을 오룡소라고 하며, 불영사를 휘감아 도는 광천계곡은 구룡계곡으로도 불립니다.
지금 사찰 경내에 있는 연못이 바로 의상 대사가 부처님 그림자를 보았다는 불영지입니다.
그런데 불영사를 창건한 의상 대사는 그 뒤 오랫동안 천하를 두루 다니다가 오랜만에 다시 불영사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절 입구의 선사촌에 이르러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몹시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부처님이 드디어 돌아오셨군요!”하였다. 마을 사람들도 이를 보았는데, 그 이후로 불영사를 불귀사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축산이 백암산 줄기이므로 백암산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백암산은 울진군 온정면과 영양군 수비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해발 1,004m이며 태백산맥의 줄기인 중앙산맥에 딸린 이 지방의 명산입니다.
《양성혜는 스님의 승탑 (문화재자료 제162호)》
의상 대사는 불영사를 창건하고 9년 동안 머물렀고 원효 대사도 왕래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불귀사, 곧 불영사 주변에는 동쪽으로 삼각봉(三角峰), 절 아래로 좌망대․오룡대, 남쪽으로 향로봉․청라봉․종암봉, 서쪽으로 부용성․학소대, 북쪽으로 금탑봉․의상대․원효굴․용혈 등이 있어 모두 절의 승경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창건에 대한 이러한 내용은 1370년(고려 공민왕 19) 유백유가 지은 「천축산불영사기」에 나와 있습니다.
이 「천축산불영산기」는 불영사에 대한 최초의 기문으로,
이후 많은 중수 현판들이 모두 이 기문을 인용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지금 그 원문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종이에 묵서하여 기록한 듯합니다.
이 기문은 「불영사중창기」에 따르면 1611년 무렵까지만 해도 절에 보관되었던 것을 알 수 있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습니다.
《불영사에도 창건설화는 아니지만 불영사에 얽힌 전설이 있습니다 ㆍ전설은 다음과 같습니다ㆍ》
불영사에는 환생전이라는 큰방이 한칸 있는데 그방의 현판이 '환희료' 라고 쓰여 있는데, 이것은 죽은사람을 놓고 불영사 탑앞에서 불철주야 삼일동안 기도를 하고 돌아가신 영혼이 되살아난 후부터 지어진 이름이라고 합니다ㆍ
청련전과 무영탑료는 환희료와 환생전으로 불리기도 하였답니다.
1408년(태종 8) 이문명이 지은 「환생전기」에 의하면 옛날에 백극재가 울진현령으로 부임한 지 3개월 만에 급병을 얻어 횡사하니 그 부인이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불영사로 와서 남편의 관을 탑전에 옮겨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올렸다. 3일 만에 남편이 되살아나 관을 뚫고 나오자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탑료를 환희료, 불전을 환생전이라 하고, 『법화경』 7권을 금자로 사경하여 불은에 보답하였다고 합니다.
《대웅보전 (보물 제1201호)》
《황화실 (환생전)》
불영사는 창건이후 여러차례의 중수를 거쳤으며,
1396년(태조 5)에 화재로 인하여 나한전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던 것을 이듬해에 소운이 중건하였습니다.
그 뒤 1500년(연산군 6)에는 양성이 중건하였고 1568년(선조 1) 무렵에 성원이 목어 · 법고 · 범종 · 바라 등을 조성하였고, 남쪽 절벽 밑에 남암을 지었으며, 의상이 세웠던 청련전을 옛터에 중건한 뒤 동전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전에 영산전과 서전을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영산전만이 남고 모두 전소되었습니다. 성원은 1603년에서 1609년(광해군 1) 사이에 선당을 건립하였고, 불전 · 승사를 중건하였습니다. 1701년(숙종 27)에는 진성이 중수하였고, 1721년에는 천옥이 중건하였습니다.
그 뒤 혜능이 요사채를 신축하였으며, 재헌과 유일이 원통전을 중수하고 청련암을 이건하였습니다. 1899년과 1906년에는 설운이 절을 중수하고 선방을 신축하였습니다.
그 이후 약 100여년간 도량이 많이 쇄락해진 채 신라 전통 고찰
이라는 명맥만 유지되어 오다가 1991년 현재 회주 심전 일운스님이 5년간의 대만유학을 마치고 불영사에 오면서부터 소리없이 자리하던 고찰을 최근 20여년만에 동해일원의 최대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변모했습니다ㆍ
회주 심전 일운스님은 일주문을 신축하고 대웅전을 중수 복원하면서 1994년 대웅보전과 후불탱화가 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ㆍ
《감로수각》
1994년에는 울진 기성 5312 연대에 군법당 북일 호국사를 신축하였으며 이후 천축선원, 무위당, 황화실, 청운당, 청풍당, 반야당, 설선당, 법영루, 의상전, 심우당, 희운당, 향운당, 법운당, 심전당, 단하당, 세심제, 청납당, 응향각, 수장고, 유물전시관, 불영교, 설법전을 신축 및 복원하였으며 지금 현재도. 중창불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ㆍ
천축산을 끼고 있는 불영사계곡은 생태보호지역이며 요즈음 보기드문 꼬리진달래와 백리향을 비롯해 560여종의 식물이 자생하고 있습니다ㆍ또한 조류11종, 어류42종, 포유류17종, 나비30종, 거미류94종이 살고 있음이 학술조사를 통해서 밝혀졌는데 불영사는 주변의 자연환경 생태보존을 위해서도 계속 노력하고 있답니다ㆍ
《불영지》
《황화실 (환생전)》
《설선당 (종무소)》
《산신각》
《설법전》
《명부전》
《응진전》
《의상전》
《칠성각》
《극락전》
현존하는 당우로는 1981년 보물로 지정된 불영사 응진전을 비롯하여 극락전 · 대웅보전 · 명부전 · 의상전· 칠성각 · 산신각 · 황화당 · 설선당 · 법영루, 응향각등이 있습니다.
《대웅보전(보물 제1201호)》
《영산회상도 (보물 제1272호)》
《응진전(보물 제730호)》
《불영계곡(명승 제6호)》
《삼층석탑(유형문화재 제135호)》
문화유산으로는 대웅보전(보물 제1201호),
영산회상도(보물 제1272호), 응진전(보물730호),
불영사 계곡 (명승제6호), 불영사삼층석탑(유형문화재 제135호), 불연(유형문화재 제397호), 불패(유형문화재 제398호), 신중탱화(유형문화재 제423호) 비롯하여 불영사부도(문화재자료 제162호)로
그 밖에도 대웅전 축대 밑에 있는 석귀와 배례석· 불영사사적비 등이 있습니다.
《불패(유형문화재 제398호)》
《신중탱화 (유형문화재 제423호)》
《불영사부도(문화재자료 제162호)》
《석귀(거북이)》
《사적비》
《불영사는 2020년 CNN이 선정한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사찰 33곳 중 한곳입니다 》
●일주문●
1992년 봄에 회주 일운스님이 신축하였으며
편액은 '천축산 불영사' 로 걸려져 있습니다ㆍ
●불영교●
울창한 숲길과 108개 연꽃이 새겨진 불영교를 건너 불영사로 갑니다.
울진 불영사는 15Km를 굽이 흐르는 불영계곡을 지나
금강송 숲길이 있는 맑고 푸른 아름다운 절입니다.
●불영지●
산 위에 있는 부처님 모습을 닮은 바위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쳐서 얻은 이름인데...저희들은 오후에 친견하였습니다
다행히 서쪽의 부처님 바위가 연못에 비친 모습을 보고, 담아서 왔습니다ㆍ정말 복을 받은 사람이죠
연못에는 수련과 어리연이 많이 피어 있었습니다ㆍ
●부처바위●
연못위로 보이는 바위가 불영사라는 이름을 갖게한 부처바위입니다 ㆍ그러니까 이곳 산세가 인도의 천축산과 비슷하다고 하여 산이름을 천축산이라 하였고, 서쪽능선의 부처님 형상을 한 바위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치므로 절이름을 불영사라 하였습니다
●대웅보전 (보물 제1201호)●
대웅보전은 불영사의 중심법당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전각입니다ㆍ이 대웅보전은 정면3칸에 측면 3칸의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입니다ㆍ기단은 다듬은 돌을 허튼층 쌓기하였으나 가구식 기단과 유사하며, 건물의 앞면에는 어칸에 사분합문을 좌우 협칸에 이분합문을 달았고 우측면 앞쪽 협칸에는 한짝 세살문을 두었으며, 배면 어칸에는 이분합문을 설치하였습니다ㆍ공포의 구성은 내사출목, 외삼출목입니다ㆍ
대웅보전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02년(선조35) 중건하였으나 1720년(숙종46)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1721년(영조1)에 중건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ㆍ
《내사출목》
《외삼출목》
특히 기단 밑 좌우에 돌거북(석구)을 놓아 건물을 받들게 한것은 특이한 구상으로 이는 불영사의 자리가 화기를 많이 품고 있는 곳으로 (화산)이어서 수 신인 거북으로 불기운을 눌러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ㆍ
대웅보전은 다포계의 구조가 건실하고 각 부재의 조각도 깔끔하여 특히 단청은 금단청계열로 격조높은 수법을 보이고 있습니다ㆍ
《거북의 몸체를 찾아라》
대웅보전 기단아래 양쪽에 목을 내밀고 있는 돌거북 두마리의 몸체는 찾을 수 있습니다ㆍ대웅보전 안에 있습니다ㆍ 어디에 있느냐 하면, 세 불상이 있는 불단 위의 천장을 가로지른 두 대들보 옆구리에 달라붙어 있습니다. 작아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양쪽 대들보에는 세 개의 발톱을 가진 용 그림이 있고, 그 발톱 옆에 거북이 한 마리씩 붙어 있습니다. 금색인데 다리와 꼬리가 달린 몸체만 있습니다. 머리 부분이 없습니다. 머리는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재미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해학성을 잘 보여주는 조각입니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금으로 만든 거북이라 하지만, 오래전에 이를 조사한 문화재 위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동으로 만든 동제라고 한다.
기단 아래의 돌거북과 법당 안의 거북은 같은 시기에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웅보전은 보물 제1201호입니다ㆍ
불영사 대웅보전의 건립 시기는 대웅보전 내부에 걸린 탱화의 묵서명에 '옹정3년 을사(雍正三年 乙巳)'라고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1725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법당의 불상 뒤 벽에는 1725년에 조성된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보물 제1272호)가 걸려 있습니다.
여섯 명의 스님들이 그렸다고 합니다. 비교적 양호한 보존 상태인 이 탱화는 18세기초 조선 불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법당 내부는 이와 함께 기둥과 도리 사이에 조각한 용두 4점, 반야용선, 비천상, 단정학, 극락조, 백호 등 수준 높은 그림과 조각, 건축 부재 등으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불단 위에 봉안된 세 불상은 2002년에 조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높이 1m 정도의 이 불상들은 경내에 있던 6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태풍으로 부러진 것을 활용했습니다.
그 나무 둥치를 4년간 물에 담그고 말리기를 반복한 후에 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영산회상도(보물 제1272호)●
불영사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 부처가 인도의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ㆍ
이러한 회상도는 사찰에서 중심법당의 후불화로 놓입니다ㆍ
이 탱화는 가운데에 석가여래를 모시고 하단 좌우에 문수ㆍ보현보살과 제석천ㆍ범천을 표현하고 그 위로 좌우 4위씩 8대보살을 표현 하였습니다 ㆍ
그리고 보살상 상단에 10대 제자와 권속을 표현하고 최상단에 분신불이 표현되어 있습니다ㆍ 특히 석가모니불의 법의가 붉은가사(홍가사) 를 취했고 광배도 붉은태를 이중광배를 나타내고 있는것등은 영ㆍ정조때 많이 제작된 조선 후기 불화의 양식입니다ㆍ
이 불화는 중심인물은 크게 표현하고 그 비중에 따라 하단에서 상단으로 좌우 대칭적인 구도를 취한것이 특징입니다ㆍ
제작시기는 1735년(영조11)으로 18세기이후에 유행하는 영산회상도 가운데 이른시기의 것으로 채색의 사용법이 유려하고 묘사법이 정밀하여 그림의 품격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ㆍ
●부처님 진신사리●
불영사 주지 심전 일운스님이 직접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진신사리입니다ㆍ 1623년 캔디 왕조시대 황금으로 만든 사리함에 봉안돼 있던 진신사리 21과 가운데 1과입니다.
2300여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스리랑카 까뚜가하갈게 라자마하 비하라야 사찰에서 모셔왔답니다.
●삼층석탑 (유형문화재 제135호)●
불영사 삼층석탑은 2층기단을 구비한 평면 방형의 일반형 삼층석탑으로 높이는 3.21m입니다ㆍ
기단부는 2층으로 구성되었으며 상 하층 기단 면석에는 양우주와 탱주1주가 모각되어 있습니다ㆍ그리고 상 하층 기단 갑석 하부에는 부연이 없습니다 ㆍ탑신부는 3층으로 구성되었으며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별도의 돌로 만들었습니다ㆍ탑신석의 각 면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습니다
옥개석의 처마는 수평이고 받침은 모두 4단입니다ㆍ
상륜부는 노반없이 여러부재가 놓여 있습니다 ㆍ
이석탑은 원래 황화실 옆 동쪽에 일부 무너져 있었는데. 1977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여 현재의 모습을 이루고 있습니다ㆍ이 석탑은 규모는 작으나 전체적으로 균형을 잘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잘 계승한 탑이며 기단 갑석 하부에 부연이 없는 등으로 보아 제작시기는 고려시대 초로 추정됩니다ㆍ
●황화실(환생전)●
●설선당(종무소)●
●설법전●
●산신각●
●청풍당●
●무위당●
●천축선윈●
●명부전●
●의상전●
●응진전(보물 730호)●
조선시대 후기에 지어졌으며. 불영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ㆍ원래는 영산전었다고 하는데 조선후기의 건축물로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1981년 보물 제73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ㆍ
1960년에 조성한 석가본존여래좌상과 후불탱 그 좌우에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 상이 봉안되었고 불단 주위에는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ㆍ기도가피가 영험한 법당입니다 ㆍ
●칠성각●
●극락전●
●법영루●
●반야당●
●법운당●
●사적비●
고즈넉한 풍경을 즐기며 경내 아름다운 길을 따라 자리잡은 명부전 의상전 응진전 칠성각 등을 살펴봅니다.
수련과 어리연이 예쁘게 피어있었고, 하늘이 맑아 부처님의 그림자도 볼 수 있었습니다ㆍ
아름다운 연못 불영지를 한바퀴 돌아보고 불영사를 나옵니다.
한국의 아름다운 계곡으로 유명한 불영계곡에 있는 불영사 길은 깊은 산속의 숲길로 걷는 내내 새소리 물소리가 들리는 좋은 길입니다.
아름다운 금강송 숲길과 파란 하늘 그리고 아름다운 연못이 있는 천축산 불영사 연못에 비친 부처님의 그림자를 친견하고 시작부터 감사한 날입니다.^^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
신라시대의 고승(高僧).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 성은 김씨. 한신(韓信)의 아들이다. 19세 때(29세에 출가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최근의 고증을 따 랐음.) 경주 황복사(皇福寺)에 출가하였다. 얼마 뒤 중국으로 가기 위하여 원효(元 曉)와 함께 요동(遼東)으로 갔으나,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잡혀 정탐자로오인받고 수십일 동안 잡혀 있다가 돌아왔다. 10년 뒤인 661년(문무왕 1) 귀국하는 당나라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 어 갔다. 처음 양주(揚州)에 머무를 때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그를 관아에 머무르게 하고 성대히 대접하였다. 얼마 뒤 종남산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智儼)을 청하였다.지엄은 전날밤 꿈에 해동(海東)에 큰 나무 한 그루가 나서 가지와 잎이 번성하더니 중국에 와서 덮었는데, 그 위에봉(鳳) 의 집이 있어 올라가 보니 한개의 마니보주 (摩尼寶珠)의 밝은 빛이 멀리까 지 비치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의상을 특별한 예 (禮)로 맞아 제자가 될 것을 허락하였다. 그곳에서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은밀한 부분까지 분석 하였다. 당나라에 머무르면서 지엄으로부터 화엄을 공부한 것은 8년 동안의 일 이며, 나이 38세로부터 44세에이르는 중요한 시기에 해 당한다. 의상이 터 득한 화엄사상은 넓고도 깊이 있 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남긴 <화엄일승법 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통하여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신라로 돌아온 그해에 낙산사 (洛山寺)의 관음굴(觀音窟) 에서 관세음보살에 게 기도를 드렸다. 이때의 발원문인 <백화도량발원문 (白花道場發願文)> 은 그의 관음신앙 (觀音信仰)을 알게 해주는 261자의 간결한명문이다. 그뒤 부석사 (浮石寺)를 세우기까지 전국의 산천을 두루 편력하였는데, 이는 화엄사상을 펼 터전을 마련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귀국 후부터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 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674년 경주의황복사에서 표훈(表訓)·진정(眞政) 등의 제자들에게 <화엄일승법계도> 를 가르쳤다는 것으로 보아, 부석사가 이 룩되기 전부터 훌륭한 제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의상 이전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화엄사상이 전개되어 있었지만, 화엄사상이 크게 유포되기 시작 한 것은 의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의상이 화엄대교를 전하기 위하여 중악 팔공산 미리사 (美 里寺), 남악 지리산 화엄사 (華嚴寺), 강주 가야산 해인사 (海印寺), 웅주 가야현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등을 창건한 것으로 전하여 온다. 또, 의상의 교화활동 중 가장 큰 업적은 많은 제자들의 양성 이었다. 그에게는 3, 000명의 제자가 있었고, 또 당시에 아성(亞聖)으로 불린 오진 (悟眞)·지통(智通)·표훈 ·진정·진장(眞藏)·도융(道融)· 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 10명의 제자가 있었다. 이 밖에도 <송고승전>에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 그리고 <법계도기총수록 (法界圖記叢隨錄)>에 나타나는신림(神琳) 등이 의상의 훌륭한 제자들이었다. 이들은 항상 스승을 모시면서 화엄학을 수학하였다. 의상은황복사에서 이들에게 <법계도>를 가르쳤고, 부석사에서 40일간의 법회를 열고 일승 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문답하였으며, 소백산 추동(錐洞) 에서 <화엄경>을 90일 간에 걸쳐 강의하였다
. 지통의 <추동기(錐洞記)>, 도신의 <도신장(道身章)>, 법융의 <법융기(法融記)>, 진수의 <진수기(眞秀記)> 등은 모두가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문헌들이다. 668년(문무왕 8)에 세수 78세로 태연자약하게 입적하였다고 한다. 저술로는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記)>1권, <화엄일승법계도>1권, <백화도량발원문>1권 및 최근 발견된 <일승발원문 (一乘發願文)> 등이 있다.
🔶️천축산 불영사 🔶️해운대 반야선원 🔶️불기2568년 6월16일 사찰순례2🔶️금강송 숲길과 아름다운 연못이 있는 맑고 푸른세상 ...
https://youtube.com/watch?v=WMl_ZMAsBuk&si=Lqsury7SUCRLKSU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