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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U자걷기] 후기 스크랩 윤종영 고문의 대한민국 U자 걷기 제10구간 참가기(2) (12/12/9/일)
함수곤 추천 0 조회 72 12.12.08 18:39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한밤의 사진편지 제1795호 (12/12/9/일)

 

함수곤의 블로그 '한밤의 사진편지'로 가시려면 아래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blog.daum.net/ham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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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fe.daum.net/hansamo9988 >

cafe.daum.net/hansamo9988

 

대한민국 U자 걷기 제10구간 참가기(2)

 

 

글 : 윤 종 영(한사모 고문yooncy1936@hanmail.net)

사진 : 이창조 (홍보위원장 lc191@hanmail.net)

 

 

 

2012년 118일 목요일)

 

새벽에 눈을 뜨니 기분이 행결 가볍다. 오늘부터 걷기 일정의 후반이요. 오늘만 지나면 거의 끝나는 기분이 든다. 그렇지만 오늘 걷는 거리도 80여리길, 발바닥을 조심스럽게 문질러 본다. 잘 걸을 수 있겠지.

아침은 어제 저녁 먹은 매향리 횟집”, 상큼한 바지락 미역국에 제육볶음까지, 회원모두가 오늘 걷기의 원기를 모두 충전 받은 것 같다.

우리 일행은 버스에 승차, 오늘 걷기의 출발점인 화옹방조제 입구까지 이동하였다. 나는 버스속에서 어제 보았던 이곳 매향리 동네 곳곳에 모아 놓은 탄피들을 떠 올리며 수년전까지 매스컴에 자주 등장, 세인의 관심을 모았던 옛일이 생각난다.

 

6.25전쟁이라는 엄청난 전쟁의 부산물로 등장한 사격장, 전쟁수행을 위해, 전후의 평화유지를 위해, 필요 불가결한 것이긴 하지만 이를 보는 시각의 차이나 민족감정까지 얽혀 사격장 존속여부를 놓고 극한적인 대립까지 가져 왔었다. 다행이 양국의 원만한 타협 속에 해결되어(2005.8.3) 이제는 옛일을 되돌아보는 역사적인 유적지가 되었다.

우리는 화옹방조제 입구에서 버스에서 하차, 방조제길에 올라 대오를 이루어 궁평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바다를 보며 걷는 길, 좀 지루하다. 걷다보니 한글로 쓴 도로입양이라는 도로 표식판이 보인다.

 

도로 입양이라니 주변회원 몇 분에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우선 궁금해 시 문화과에 물어보니 도로과로 전화를 돌려준다. 담당자가 회사나 타 기관에 도로관리를 맡긴 것이라고 그럼 한자로 어떻게 쓰냐고 물으니 찾아서 알려주겠다고, 얼마 뒤에 알려준다. 한자로 입양(入養)이라고.

참 재미있고 황당하다. 좀더 세련되고 한글세대가 알기 쉬운 단어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턴데. 나는 전화로 이런 나의 뜻을 전했지만 이미 관용화되어 많이 쓰고 있어 고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 걸은 도로중에 제일 청소가 않되어 있다. 결국 입양이라는 것이 책임 회피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이런 생각에 젖어 우울해진 기분을 달래보며 잠시 우리가 걷고 있는 화성시의 아름다운 옛 모습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화성은 조선조 정조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불가분의 인연을 가지고 있다. 화성이란 이름자체가 정조가 지은 것이다.(정조실록:181월 참조)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자리가 화산(花山:8백의 산봉우리들이 한개의 묏부리를 들러싼 형상)이고 화()는 화()와 통하고 또 중국인(華人)이 왕을 축복했다는 뜻을 따서 화성이라 작명했다고 한다.

화성이란 지명의 출현은 결국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 능(원래는 )을 지금의 화산(옛 수원의 邑治)으로 이장하면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도세자는 조선왕조사에 드물게 부왕의 손에 죽음을 당한 세자로 당시에 노.소론 간 당쟁에 희생이 된 비극적인 왕손이었다.

정조는 즉위하면서 자기의 정통성과 관련 있는 비명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양주 배봉산(현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는 초라한 영우원(묘호: 垂恩墓-永祐園)의 이장을 추진, 지금의 융릉(顯隆園-隆陵)으로 이장하였다.(정조13)

정조실록에 의하면 사도세자의 이장은 정조가 부친에 대한 극진한 효심 속에 친히 모든 것을 챙겨 가면서 행하였고 이장을 마친 후에도 새 원을 참배하고 이산의 이름이 화산(花山)이니 꽃과 나무를 많이 심으라라는 교지를 내릴 정도로 정성을 드렸고 부친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부근에 있는 용주사(龍珠寺)를 확장하여 원찰(願刹)로 삼기까지 하였다. 용주사는 원래 신라 염거화상이 개창(문성왕)한 갈양사(葛陽寺)인데 정조가 이 절을 크게 중수하고 낙성식 날 용이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어 용주사로 개칭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융릉이나 건릉(정조), 용주사는 널리 알려진 수도권에서 가까운 곳이기에 여러 차례 찾았을 것으로 생각되나 기회가 되면 주말 걷기 코스로 한번 찾았도 좋을 것 같다.

우리 일행은 한참 걸어 궁평항에 도착, 화옹방조제 기념비(2008,12,31)를 둘러보고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였다. 우리일행은 다시 원기를 회복, 걸음을 재촉하여 오늘 오전 꼴인지점인 해운초등학교앞에 도착, 버스로 점심식당인 고천식당으로 이동하였다. 고천식당의 점심은 구수한 우거지 된장국, 오늘 점심은 고맙게도 남묘숙회원님이 베풀어주셨다.

오후는 버스로 대부도 진입로까지 이동, 옛날에 여러 차례 찾았던 대부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벌써 수 십년전 인천에서 배로 이곳을 찾았던 기억이 단편적으로 떠오른다. 그런데 지금은 내륙으로 연결되어 이곳을 걸어서 찾는다니, 정말 상전벽해(桑田碧海). 한참 걷다 보니 선두가 옆에 있는 갯펄길로 들어선다.

 

이곳은 간척지로 아직 농토가 되기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어떻든 오랜만에 흙길을 걷는 것 같다. 모든 회원들이 거칠은 자갈과 흙길을 걷는 것이 오히려 즐겁고 행복한 것 같다. 자연을 좀더 가까이 접할 수 있어서이겠지, 더욱이 이 길이 지름길이라니, 그래서 그런지 지휘부가 간척지 길 가운데서 유우머(諧謔)교실에다 노래잔치 자리 까지 만들어 회원들의 흥을 돋아준다.

우리일행은 간척지 길을 나와 차도를 따라 열심히 걸으면서 지도를 열심히 찾아보지만. 화성시와 안산시 시계를 표시하는 도로 표지판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화성을 지나면서 화성과 연결하여 잊을 수 없는 역사적인물이 정조와 사도세자이지만 간혹 남이(南怡:1441-1468)장군도 그의 행적과 시와 연계되어 생각나는 인물이다.

남이 장군 묘는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있다. 몇 년 전 내가 관계하는 학회에서 이 지역을 답사하면서 그의 묘를 찾아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생각이 난다. 그의 묘가 경기도 청평군 남이섬에도 있지만 그것은 허묘(墟墓)이다.

남이장군(시호-忠武)은 그의 행적보다 그의 죽음을 가져왔다고 알려진 20대에 북방의 이시애 난과 건주위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썼다는 패기에 찬 그의 시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 내린다 남이장군은 태종의 외손자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26세에 병조판서까지 올랐지만 그를 시기하던 예종이 즉위하면서 그가 역모를 꾀했다는 유자광의 모함을 받아 28세 나이로 처형되었다.

그의 시 白頭山石磨刀盡 豆萬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未平國자를 으로 고쳐 역모로 몰렸다고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후에 그의 억울함이 알려져 순조 때 복권 되었다. 같이 걷는 옆 회원에게 이 시를 물으니 거의 몇자 틀리지 않고 기억한다. 이 시가 정말 유명한 것 같다.

 

한참 걷다보니 대동초등학교 앞 반갑게도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일행은 버스에 승차, 대부도의 경기도청소년원 도자기체험관앞에 하차하여 옆동네의 안산영어마을을 거쳐 오늘 꼴인지점이요, 숙소인 대부도 팬숀파크에 전원 무사히 꼴인하는 감격을 맛보았다.

팬숀파크는 서구풍의 아름다운 건물로 이루워진 정말 오래 기억될 만한 마을이다. 집안도 편리하고 쓰기 편하게 잘 설계되었고 주변경관도 잘 정리되어 있다. 오늘은 오랜만에 나이별로 팀을 나누어 단체 합숙, 나름대로 재미있는 저녁밤이 되었다.

저녁은 참사리횟집에서 조개탕에다 돼지고기삼겹살은 무한정 제공한다고, 거기다 술까지도, 모든 회원들은 허리띠를 푸르고 기분은 최고조, 사흘간에 피로가 완전히 풀리는 것 같다. 거기다 반별 노래경연까지, 나도 할 줄 모르는 노래한마디,

이기분이 숙소까지 연장되어서인지 모든 회원들은 기분 좋게 숙면 하였다고.

 

 

 

다음날(119일 금요일)

 

오늘은 금요일, 거의 10구간도 종반에 들어섰다는 생각에 기분이 정말 홀가분하다. 그러면서 어제까지 잘 버티어 준 발바닥이 고맙다. 이틀만 잘 참아다오,

그런데 아침에 밖을 보니 안개가 짙게 끼어 있다. 안개쯤이야 하면서 이런저런 걱정이 된다. 아침식사는 어제 저녁 먹은 참사리횟집에서 시원한 황태탕으로 속을 달래었다. 지휘부에서도 안개 낀 차도를 걷는 위험을 생각해서 출발을 연기, 한시간 반이나 지나 930분쯤, 조심스럽게 안개속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오늘 걷는 길은 안산시 대부도 숙소에서 시흥시 오이도 까지 70여리길이다.

오전에 주로 걷는 대부도(大阜島)의 지명은 서해안에서 가장 큰 섬이라 하여 큰 언덕이란 뜻을 담아 작명되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옛 문헌에 보면 대부도라는 지명은 옛부터 사용되었지만 한자 표기는 고려시대에는 大府島로 표기 한 적도 있으나 조선후기에 지금의 표기로 통일, 사용하였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인문지리서인 이중환의 택리지에 보면 이 섬에 대해 대부도는 화량진에서 움푹 꺼진 돌 줄기가 바다위로 나타난 것인데 그런 까닭에 물이 대단히 얕다. 옛날에 학이 물속 돌 줄기 위를 걸어가는 것을 보고 그 길을 찾아서 이 길을 학지(鶴指)라 부르게 되었다.

 

이 길을 오직 섬사람들만이 익숙하고 다른 지방 사람은 알지 못했다. 병자년에 섬사람들이 청 병사에게 쫓겨서 그 줄기를 따라 도망쳤다.-----청병이 이들을 쫓아 오다 길을 몰라 모두 물에 빠져 죽고 섬사람들은 무사히 피 할 수 있었다. 이 섬은 토지가 비옥하고 백성이 많아 남쪽에서 오는 배의 첫 관문이 되어 강화와 영종의 외문 구실을 한다---”라 하여 조선시대 상당히 번성하였던 수도권의 해상관문이었다고. 그런데 지금은 이런 역할은 보이지 않고 작물재배지, 관광유원지로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우리 일행은 대부도 중앙로를 따라 아직도 뿌연 안개를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주변에 눈에 많이 띄는 것이 포도밭, 포도 특산지로 점차 정착되어 가고 있는 것 같고. 걷는 길가 집에 바지락 칼국수집이 많이 눈에 보인다. 이것도 이곳 명물로 유명해지고 있는 것 같다.

한참 걷다 보니 언덕위에 비석 같은 것이 보인다. 별로 유적물이 보이지 않아 서운하던 차이기에 얼른 언덕윗길로 뛰어 올라가 보니 조그만한 성당 앞마당에 있는 세멘트 물탱크라, 나이탓인가, 혼자 걸으며 쓴 웃음을 지었다. 오늘까지 걸은 길이 주로 해안가 나 방조제길이어서 그렇겠지만 그동안 비석하나 무덤하나 눈에 띠인적이 없으니 마음속으로 무엇인가 보고 싶어 생긴일이라 생각 되지만 좀 바보스럽다.

혼자 구스렁거리며 걷다 보니 오늘 오전 꼴인지점인 소문난 조개구이집식당 앞, 전회원이 낙오자 없이 도착, 점심은 이곳 명물인 바지락 칼국수로 입맛을 다시면서 맛의 진미를 맛보았고 또 점심은 임금자 회원님이 제공, 모든 회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오후는 대부도에서 시흥시 오이도까지 이은 40리에 달하는 시화방조제 길을 주로 걷는다. 우리 일행은 방아머리 공원을 거쳐 시화호방조제길로 들어섰다. 나는 방조제길을 걸으며 아직까지 걸은 대부분의 방조제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지만 시화방조제의 규모나 이곳에 설치한 풍력발전소, 조류발전소를 보며 우리의 희망찬 밝은 미래상을 그려볼 수 있어 기분좋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방조제 뚝 멀리 보이는 시흥시 시화상업단지, 바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인천시 송도국제도시를 보며 이 곳의 엄청난 변화에 지난시절 자주 찾던 곳과는 전혀 다른 생소한 외국도시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안산시를 떠나며 기억하여야할 안산시의 역사적 인물로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1763)선생을 떠올렸다. 이곳에는 성호 선생의 기념관과 묘가 있어(안산시 상록구 이동) 관심 있는 인사들이 많이 찾고 있다.

 

나도 두차례 관계하는 학회회원들과 이곳을 찾았던 기억이 난다. 성호선생은 실학자로 벼슬에 뜻을 접고 이곳 안산 첨성촌에서 일생을 학문연구에 전념, 반계 유형원 선생의 학풍을 계승, 실학의 중흥을 이룩한 분이다. 성호는 학문이란 공리공담이 아니라 실제 사회에 유용한 것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학문연구 방법으로 자득(自得)”을 중시 하였다.

관리들의 부패와 당쟁을 막기 위해 양반도 산업에 종사하여야 한다는 사농합일(士農合一), 양반들의 대토지 사유를 억제하여 토지균등을 이루기 위한 한전법(限田法) 등을 주장하였다. 또 그는 농가경제의 안정을 위해 고리대, 화폐제도, 환곡의 개선책을 제시하고 더욱이 서구 지리학, 의학 등 서학(西學:서구문화)에 대한 편견 없는 소개와 이의 연구와 보급에 주력하였다. 그는 성호사설(星湖僿說), 곽우록(藿憂錄) 등 많은 저서를 남기었다. 그의 이러한 경세치용의 근대지향적인 실학학풍은 안정복 이가환 정약용 등에 계승되어 후기실학을 대성케 하였다.

 

위당(爲堂 鄭寅普) 선생님은 실학의 계보와 사승 관계를 정리하기를 “--반계(磻溪)1(), 성호(星湖)2, 다산(茶山)3--”라 하였고, 다산은 성호에게 사숙(私塾)하면서 형님에게 보낸 편지에 스스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천지의 위대함과 일월의 광명함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이(성호)선생님의 힘이었습니다라는 글들을 보며 성호선생의 조선후기 실학자로서의 학문적인 위치나 업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곳도 수도권에 위치한 교통이 편리한 곳이니 주말 걷기 코스로 선정해도 무난 할 것 같다.

우리일행은 드디어 오늘 골인 지점인 오이도 기념공원에 오후 5시경, 전원 무사히 도착, 버스로 월곶 해수욕탕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나는 비목파 몇 분과 바닷가에서 오랬만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고

저녁식사는 월곶회센타에서 조개구이, 왕새우구이, 우럭매운탕으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가졌고 바닷가 아우디모텔에서 마지막 밤을 숙면하였다.

 

 

 

 

다음날(20121110일 토요일)

 

새벽에 눈을 뜨니, 정말 기분이 홀가분하다. 드디어 마지막날, 더욱이 오늘은 오전만 걷는다 거리도 30여리, 어제까지 잘 버티어준 발바닥이 고맙다. 이를 지켜주신 높은데 계신 높은분이 고맙고,

아침 7시에 서들러 어제 저녁 먹은 월곶회센타에서 시원한 해물탕으로 어제의 피로를 풀고 원기왕성, 오늘출발지인 월곶역에 모였다. 오늘 걷는 코스가 수도권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오늘 9명의 회원들이 이곳에 도착, 우리 일행의 환영을 받으며 새롭게 팀에 합류하였다.

오늘 안내는 이 부근에 사는 일공 심상석회원이 자청,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옛날에 조그만 어촌이었던 월곶이 새로운 포구로 수도권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곳광장에 세워진 미래탑이 이곳의 밝은 미래를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어 주고 있다고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일행을 따라 월곶 포구 해안도로를 따라 걸으면서 길 위에 서성거리는 낚시꾼들을 보며 옆에 회원에게 옛날 이 갯벌에서 내가 하였던 망둥이 낚시와 비교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얼마 걷다보니 옛 수인선 소래 철교(鐵橋)와 마주친다, 철교위에 걸음을 옮겨보니 철교 침묵사이로 다리 밑 갯벌이 간혹 보인다.

 

문득 6.25전쟁 1.4후퇴시 부모님을 따라 이 다리를 건느면서 밑에 흐르는 바닷물에 현기증이나 힘들어 했던 옛 생각이 나 잠시 부모님 생각에 걸음이 멈짓거려진다. 드디어 우리일행은 다리를 건너 이번 걷기에 최종종착지요, 나의 제2의 고향인 인천시에 발을 딛었다. 얼마나 반가운지.

나는 같이 걷는 옆 회원에게 인천의 역사적 뿌리를 중얼 거려 본다. 인천의 시발은 삼국사기에 기술된 백제 건국비화에 나오는 백제의 시조 온조의 형인 비류(沸流)가 미추홀(彌鄒忽)에 세웠다는 십제국(十濟國)이다.

 

이 십제국의 도읍터 성터가 남아 있는 문학산(일명 배꼽산)이 인천역사의 뿌리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인천 출신들은 학교 때 이산에 소풍을 한 두번 갔던 추억을 모두 가지고 있고 지금까지도 이산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곳을 고구려가 차지한 후 미추홀이 매소홀(買召忽), 통일신라시대는 소성(邵城:경덕왕)으로, 고려시대에는 경원군(慶源郡) , 인주(仁州:인종의 모후 문경태후 인주이씨의 내향)로 되었다가, 조선조에 들어와 인천(태종:1413)으로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늘 우리가 찾아 걷고 있는 소래포구(남동구 논현동)의 소래(蘇萊)에 대한 지명 유래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위해 나당동맹을 체결, 이에 당장(唐將) 소정방(蘇定方)이 당나라 백제 원정군을 이끌고 중국 산동성 래주(萊州)를 출발, 지금의 이곳에 도착하여 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 되자, 그후 소정방의 자와 래주의 자를 따서 소래라 하였다고, 이와 유사한 지명으로 경기도 양주군을 한때 내소군(來蘇郡:신라 경덕왕), 부안군의 내소사(來蘇寺)등 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소래라는 지명은 이곳 주위산과 냇가에 소나무()가 많아 이곳을 송천(松川)이라하다 이것이 솔래로 다시 소래가 되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화 되었다.

 

옛 수인선 소래 다리를 건느며 보니 왼편에 포대가 보인다. 이 댕구산 포대는 최근에 이곳이 포대 자리라 알려져 새로히 복원한 것이다. 이 포대는 고종15(1878) 일본의 침략에 대비, 인천에 화도진 포대와 이곳에 댕구산 포대(일명 獐島砲臺)등을 설치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포대의 배열을 보면 2문은 바다쪽, 1문은 동남쪽을 향해 외곽과 내곽의 수비를 목적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일행은 이 포대를 들러보고 소래(남동구) 해안도로를 따라 열심히 걸어 미추홀 외국어 고등학교 앞을 지나 한참 걷다가 보니 도로공사로 복잡한 도로가 있어 이를 버스에 승차하여 통과하였다, 버스에서 내려 송도 신도리 거리를 걸어 드디어 이번 대한민국 U자 걷기 10구간 최종 종착지인 인천 송도 신도시 해돋이 공원에 전회원이 무사히 도착 , 감격스러운 완주 기쁨을 나누었다,

 

우리는 다 같이 10구간 완주를 자축하며 임진각까지 무사 완주를 기원하고 한사모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뜻을 담아 만세 삼창을 소리 높혀 합창하며 서로 포웅,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이순애 회원이 오늘 아침에 준 홍시 가로등이라는 헌시의 첫 구절이 떠오른다

기적입니다. 부활입니다.

일상,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를 궁금해 했던 할매 할배들

지금 환호하는 순간 글썽이는 눈물이 선물입니다.“

얼마나 우리의 모습과 마음을 잘 그려주었는지.

이번걷기의 성공은 함수곤 대표를 비롯한 지휘부(이영균 이경환 김태종, 이창조 김영신)의 치밀한 계획과 지도력 그리고 각종 봉사팀의 봉사정신과 모든 회원들이 자기보다 남을 배려하는 자기 희생정신 등이 모아진 결과라 하겠다.

그러면서 높은 곳에 계신 높은 분의 끊임없는 보살핌이 가장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모든 회원들과 뜻을 모아 높은 분에게 진심어린 감사를 드렸다.

 

 

 

 

Tchaikovsky
String Sextet in D minor Op. 70

Souvenir de Florence
플로렌스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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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12.08 21:28

    첫댓글 윤종영 고문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서해안에 소정방과 관련지은 지명이나 절 이름까지 있는데, 소래포구가 솔내- 소나무가 많은 냇가-에서 소래로 변형되어 부르게 되었다는 지적이 좋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어리 이창조 드림

  • 12.12.08 21:56

    10구간을 무사히 완주하심을 축하드립니다.
    가는곳마다 의미있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어 많이 배우고 익혔습니다.
    걷기도 힘드셨을켄데 어찌 이리 자세한 내용을 쓰셨을까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 12.12.13 16:53

    사전답사하시랴, 1주일간 60명 가까운 한사모 회원의 길라잡이하시랴 일순간의 쉴틈도 없이 고생히신 함수곤 대표님과 다섯분의 집필위원님들의 상세한 기록을 겸한 'U자걷기'후기를 감사한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또한 윤종영 고문님의역사적 고찰을 곁드린 중후한 후기를 읽으며 새삼 곳곳의 숨어있는 유래와 전통을 알게되어 우리의 여행이 격조 높은 도보여행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우리가 걸었던 곳곳의 추억을 떠올리며 두고두고 읽어 봐야겠다는 마음도 일었어요.후기를 읽으니 우리는 이제는 날개를 달고 기러기 같이 날며 창공에서 당진과 인천 송도까지 나르며 내려다 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구바야7013 님의 글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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