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8-9).
오늘 전하는 말씀은 그 어조를 매우 강한 톤으로 하기 때문에 구원받지 않은 마귀의 자녀들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성령의 칼"이 자기 양심을 찌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 마귀 자식들은 이 첫 문단을 보자마자 귀신을 본 것처럼 황급히 피해 갈 것으로 생각한다. 오직 구원에 대한 고민에 수심으로 가득 차서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을 얻을까 진실되이 구하는 "예비 알곡 독자"만이 이 글을 읽고 정확한 구원의 길로 들어서기를 원한다.
성경은,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주로 기록한 신약 서신서들은 구원에 대해 어렵게 진술하고 있지 않고, 한마디로 인간의 어떤 행위도 필요없이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데 그 믿음의 대상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시요, 믿음의 방식은 "그 분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신앙 고백으로 되어 있다. 기독교계가 수용하고 있는 다양한 종교 행위의 방식들, 이를테면 교리문답, 세례/침례, 제자 훈련, 은사주의식 느낌과 성령 체험 같은 방식이 아닌 오직 한 가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은 천명하고 있다.
나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자 온라인 성경 교사로서 사람들에게 구원에 대해 설명할 때 여러 성구들을 개구리 뜀뛰기 하듯 건너다니면서 정작 그 구절들에 대한 설명은 부실하게 뭉개고 넘어가는 식으로 하지 않는다. 단 한 두 구절이라도 똑바로 이해하면 그 사람이 구원받는 최소한의 지식이 될 수가 있기 때문에 나는 누군가에게 구원을 설명할 때 많은 성구들을 읽어나가면서 장광설을 펼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맨 처음 인용한 구절들과 그 외 몇 구절만 가지고 신약적 구원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여기서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으로 통하는 문의 문고리를 부지런히 더듬어 찾다가 결국 못 찾고 칼빈의 "영원 전의 선택"이라는 전혀 다른 문을 찾아서 흑암 속으로 돌아간다. 애초에 "선택"과 "택자"라는 개념이 그토록 대단한 것이라면 왜 에베소서 2장은 사람이 구원받는 기본 이치를 설명할 때 저렇게 단순하게 이야기하고 있겠는가? 선택받았기 때문에 믿음이 오고 은혜가 오는 것이라면 믿음과 은혜 위에 선택이 금과옥조로 먼저 제시가 되어야 맞지 않는가?
"믿음으로 말미암아"에 대해 생각해 보라. 여기서 "말미암아"(영킹: through)는 구원이라는 사건의 "과정"이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이, 그 자체가 구원이라는 사건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길만 하다. "내가 지금 정확하게 예수님을 믿은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 믿음의 사건에 수반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저주받을 다른 복음, 곧 행위 구원을 많이 가르치는 한국 개신교 풍토에서는 "은혜"라는 말이 굉장히 더럽게 왜곡되어 있다. 은사주의 교회에 가서 "은혜"가 뭐요, 물어보면 성경과 동떨어진 다른 것을 제시한다. 그들은 "은혜는 곧 성령 세례요"라고 곧잘 대답할터인데 그들이 말하는 성령 세례는 우리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성령 침례가 아니다. 그들의 성령 세례는 사도행전 2장의 경우처럼 외적으로 보여지는 신비 체험을 통해 성령이 그들 위에 강림하는 사건을 말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히 방언을 해야만 하고 결론적으로 그들은 방언이 있어야만 진정한 성령침례요 사도행전의 실현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또, 칼빈주의자들은 "은혜"를 행위와 연결시켜 생각한다. 그들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라는 고백이 완전한 구원을 가져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삶의 전반적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가 맞물려서 "견인"(칼빈주의 제5 강령)을 완성할 때에 구원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진다라고 여긴다. 사실상 칼빈주의식 견인은 로마 카톨릭의 행위 구원과 토씨 하나 차이밖에 없는데 즉, 로마 카톨릭은 7성사의 행위, 그 의식들 안에 구원의 점진적 진보가 내포되어 있어서 교인이 평생 그것들을 행해야 구원이 1%씩 완성되어 간다고 여기고 칼빈주의 장로교도들은 그것을 7성사로부터 분리시켜서 자기들의 종교 행위, 곧 주일 예배 참석, 새벽 기도회(이것은 한국식 기독교 풍습), 각종 교회 봉사 활동에 연계시킨 것 뿐이다. 그런 소위 <착한 행위들>을 통해 구원은 1%씩 이루어져 가며 칼빈주의자들이 매우 애호하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의 행로를 따라 천성길을 향해 선행으로 포인트 쌓아가며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한 칼빈주의식 은혜, 카톨릭식 은혜, 또는 모슬렘과 불교도, 힌두교의 은혜라는 개념은 예외없이 전부 인간의 행위와 연결되어 있고 무슨 착한 일을 행하면 그들의 신이 그 사람에게 천국에 갈 수 있는 포인트를 적립해 줘서 남들보다 하늘로 갈 수 있는 권리를 더 갖게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한국 개신교도들은 칼빈주의를 대부분 수용하고 있고 심지어 알미니안들조차도 행위에 대한 강박증은 동일하게 갖고 있다. 한국 개신교 교회의 과반수 이상, 실질적으로는 절대다수가 아닌가 보이는데 그 정도의 집단이 행위 구원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너희에게서, 인간에게서 난 것이 구원이 될 수 없다는 말씀인데 요한복음 1장에 동일한 말씀이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 그들은 혈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또한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라(요 1:12-13).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이 구원받는 대상인데 그들은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면서 "혈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또한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한 자들이다.
즉, 사도 바울이 신약 서신서들에서 전파한 "은혜의 복음"과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이 전달한 영접에 대한 이치는 99%가 아닌 100% 동일한 것이다. 사도 요한은 위 본문에서 어떠한 인간의 종교 행위도 구원과 연관시키지 않았고 의도적으로 행위 요소를 완전 배제했다.
"영접"은 마음으로 입술로 하는 것이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거나 교회 봉사를 하고 기도회에 참석하는 선한 "행위"가 아니다. 행위가 곧 믿음이고 믿음이 행위라고 가르치는 어떤 이단 집단들은 심히 잘못 판단한 자들이다. 영접하는 것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되기 때문에 여러분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기 위해서 어떤 "예비적 차원의 행위들"을 상당 시간을 두고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또 구주로 영접한 이후에도 구원을 확정시키기 위해서 "후속적 차원의 선행들"을 상당 기간 행해야 하는 게 아니다.
여러분이 행하는 선한 행위들은 어느 정도, 그러니까 전부 자기 의지는 아니고 성령의 교시에 따르는 것일 수 있겠지만 어쨌건 자기 의지가 작용해서 결정하고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십일조를 바치건 일주일에 교회 문지방을 10번, 20번 넘어다니건 새벽 기도회에 개근상을 타건 그것은 "혈과 육신과 사람의 뜻"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 종교 행위들은 구원의 일부분을 구성할 수 없는 그저 행위일 뿐이다.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선물", 우리 하나님께서 구원을 어렵게 설명하신다는 편견을 갖고 성경을 읽지 말라. 성경은 5살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쉬운 표현으로 구원을 말씀하고 있다. 여러분이 때묻지 않은 6살, 7살 꼬마들에게 가서 "선물"이 뭐냐고 물어보라. 선물은 선물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에게 "무료로" 주는 것이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면서 "내가 이 선물을 1만원 주고 샀는데 지금 갑자기 급해서 그러니 너 이 선물 받고 나한테 5천원을 거슬러 주라"고 말한다면 그건 선물의 의미가 훼손된 것이다. 선물이라는 것은 100% 거저 줄 적에 선물이지 거기서 수수료 떼면 선물이 아닌 일부라도 값을 치른 것이 되어 버린다.
초등생들은 이 진리에 대해 의심없이 믿지만 세상 때가 많이 묻어서 의심부터 하고보는 어른들은 "선물? 구원이 거저 받는 선물?"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다. "공짜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격언대로 다단계에 들어가서 공짜로 부자 되려다 사기도 당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이 공짜라고 하면 죽어도 안 믿는 사람들 천지다.
행위에서 난 것은 "자랑할 수 있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다. 교회들마다 가 보면 "나는 모태 신앙이요"(그런 말 성경에 어디 있나?), "나는 4대, 5대째 기독교 집안이오"(혈로나 육신으로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에헴, 나는 이 교회 장로를 20년 동안 뼈빠지게 봉사해서 얻었소"(이명박도 소망교회 주차 봉사하면서 장로직 얻었다)
그래서, so what? 그렇게 열심히 살아서 집사, 장로가 되고 신학 박사 하고 명망있는 기독교 인사가 되었다고 하면 그게 자랑이 아니고 겸손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내가 나의 구원에 대해서 "자랑"한다고 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은 머리가 나빠서 구원을 못 받는데 나는 IQ가 150이라서 단박에 믿었습니다"라고 자랑하는 게 아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나도 "죄인들 중에 우두머리"(딤전 1:15)였으나 쉬운 은혜의 복음을 접하고 그 메시지가 내 마음에 들어왔을 때 거부하지 않고 믿음으로 반응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다, 이것이 내 자랑이라면 자랑이다.
내가 IQ가 남들보다 좋았거나 기독교 집안에 태어났거나 남들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었기 때문에, 심지어 은사주의 체험 집회에 가서 두 손 들고 "성령 불, 성령 불, 불 불 불을 내려달라"고 목이 찢어지게 외쳤던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 십자가 안에 있고 그 은혜를 하나님께서 선물로 내 앞에 두신 것을 믿었고 나의 마음 문 앞에 놓여진 그 선물 상자를 나는 단지 집어들어서 내 것으로 삼았을 뿐이다. 이것이 내 행위에서 비롯된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자랑할 것은 전혀 없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내 손이나 발이 수고하고 힘쓴 것이 없고 나는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사도 바울이 가르친 그대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으려고 그것을 즉시 내 마음에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에 의해서니라(롬 3:27).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고생했기에 현재의 위치에 올라섰는지 자랑하고 다닌다. 자신이 어떻게 개고생을 하며 살아서 대학 교수, 법관, 재벌 총수가 되었는지 자랑할 만 하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것은 세상에서 명예와 권세, 부귀를 얻기 위해 노력하여 성취하는 과정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여러분이 잘 된 간증과 비뚤어진 간증을 구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구원받기 전의 삶을 미화하는지 철저히 부정적으로 말하는지 보면 안다. 구원받지 못한 채 죽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간증을 유튜브의 극동 방송 녹화분을 통해 본 적이 있다. 그는 교회의 장로였고 모태 신앙을 자랑했으며 또 많은 기독교인들로부터 진짜 신실한 장로교인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그는 주차장 봉사해서 딴 사꾸라 장로 이명박처럼 자기가 받은 장로직을 이후에 반납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김영삼의 간증은 "간증의 핵심 포인트"라 할 수 있는 구원 간증이 전혀 없었다.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확인하고자 하면 언제든 유튜브에서 검색해 보면 나올 것이다. 그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었고 단지 기독교 집안에 태어나서 가정 예배와 새벽 기도 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자라서 자연히 "기독교적 풍습"에 젖어든 교인에 불과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자기를 구원시켜 주신 예수님에 대해 단 한마디도 입을 떼지 않고 한시간 넘는 간증 프로그램을 마쳐 버렸다.
김영삼이 자기 삶에 대해 합리화시키고 온갖 미사여구(김장환이 옆에서 추임새를 넣어가며 훌륭하십니다를 연발할 때)를 흐뭇하게 수용하는 모습은 지옥에 간 그 자주색 옷 입은 부자(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연상케 할 정도로 <자기 의의 악취가 사방에 진동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이 글의 독자들 가운데 내가 제시하는 구원의 기준이 마음에 들지 않고 반발심으로 "나는 그런 가식적인 사람이 아니오, 나는 진실되이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할 사람도 있다.
여러분이 양심에 물어보고 확실한 답을 제시해 주면 된다. 한 가지만 강조하겠다. 여러분의 너절한 각종 행위들을 양심 위에 얹어놓고 양심에서 하는 대답을 혼동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행위는 행위요, 믿음은 믿음이다. 뒤섞는 자는 절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고 지옥으로 향하는 바리새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