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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글쓴이 : 개구리 날짜 : 10-11-20 09:46 조회 : 209
내가 작가랍시고 초청 강연에 응하다 보면, 판에 박힌 질문 하나를 꼭 듣게 된다. 왜 작가가 되었는지를 묻고 곧바로 문화예술가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묻는다. 이런 경우 폼 나게 대답할 수도 있지만 나는 실제 폼 나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현학적이고 개념적인 답변이 수강생들에게 무슨 효용가치가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생겨 많이 머뭇거리게 된다.
고향에 내려가면 이웃 아주머니들이 첫 인사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신다. “돈 벌었어?” “돈 얼마 벌었어?” “돈 좀 내놔봐.” 이건 실제 에피소드로써 대부분의 아주머니들이 이렇게 물으시는 터라 내 머리 속은 속상함과 황량함으로 가득 차버린다. 그에 대해 마땅한 답변을 갖고있지 않은 나는 그냥 얼버무리다가 뒤돌아서기 일쑤다. 책이 출간되었다고 해봤자 소용없는 노릇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문화예술가에게 있어 기본 컨셉은 속상함이다. 세상과의 불협화음이다. 그렇다고 자기 나름의 가치관과 욕망과 비전에 맞는 어떤 나라가 어디에 있는 게 아니니 만큼, 죽으나 사나 이 땅에 발붙이고 살면서 세상과 싸워야 하는데, 이길 자신이 없다. 싸워서 지는 게 문화예술가의 몫이고 문화예술가에겐 아주 외로운 길만이 놓여있다. 길 저 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죽고 나서의 평가’다.
자, 그럼 문화예술가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몇 가지 경우를 들어보자.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문화예술 활동을 이끄는 내 지인은 얼마 전에 예술가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집을 나왔다고 실토했다. 그 동안 돈을 못 벌어 처자식에게 너무 미안했고 트러블도 생긴 터라 아예 가출했다고, 내일 공사판에 나가야 하는 관계로 2차 이동은 못 한다고 했다. 그는 공사판을 전전하는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얼마 후 자신들이 개발한 문화예술 브랜드를 모 기업에 제공하게 되었고 그 협약식이 언론보도에 크게 나왔다. 그 회사 오너와 함께 폼 나게 협약식을 치루고 연설까지 거창하게 한 그는 또 다시 공사판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우리 집사람 경험담이다. 연극배우로서 3개월간 공연활동을 했는데 돈 한 푼 받지 못했다. 그러려니 했는데 연극 <호텔 캘리포니아>에서 조연 창녀 역으로 활동하면서 샌들을 제공받았다. 그런데 공연이 마무리 되고 나니 샌들 값을 달라고 하는 터라 그야말로 화딱지가 나 연극배우 노릇을 그만 두었다. 하지만 자기가 어디로 가랴. 죽으나 사나 그 바닥에서 맴돌았다. 물론 이십 년 전부터 내가 있는 어린이 교육 쪽으로 자리 이동을 했지만 비슷한 문화예술 바닥이다.
이번 건은 자못 충격적이다. 얼마 전에 모 지역 예총회장이 부인을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예총회장은 연극배우인데, 그날 부인이 바람피운 문제를 알게 되어 실랑이가 벌어졌다. 같이 술을 마시며 어떤 놈과 바람을 피웠냐고 추궁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술을 마신 부인이 “나는 왜 남자만 만나면 몸부터 주는지 몰라. 에구!”라고 말했고 그 말에 격분한 예총회장은 예술제 홍보를 위해 플래카드 제작용 각목을 들여놓은 걸 집어 들어 부인을 내리쳤다. 먼 훗날, 교도소에서 나오게 될 그는 그래도 연극배우를 계속 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너무 자극적인 경우만 들게 되어 이 땅의 문화예술가들에게 한없이 미안하다.
그럼 문화예술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일단 나도 잘 모른다. 그러다 보니 나는 강연하는 중에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었다.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치이다가 막다른 골목으로 오게 되었다. 이것 외에는 할 것이 없는 상황이라 동화작가 노릇을 하게 되었다고.
수강생들이 내 말을 듣고 많이 웃어대고 기분좋아했다. 왜냐? 초청강사로 찾아온 아주 훌륭하고 멋진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자기들보다 훨씬 못한, 그저 그런, 실업자 수준에 불과한 어떤 사람인 터라 상대적으로 우월감과 쾌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나름의 유머에서 비롯된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아둥바둥거리는 평범한 어떤 샐러리맨을 상정하고 그의 시선에 비친 나는 누구일까, 그는 나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을까, 이런 헤아림 끝에 나를 향한 가장 저열한 시선에 대해 수강생들에게 말해주었을 뿐이다.
자, 그럼 앞으로는 좀 다르게 답변해 보자. 좀 더 솔직하게 답변해 보자. 당신은 왜 작가가 되었으며 문화예술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여기서 나는 현학적이고 개념적인 답변을 삼간 채 실제의 스토리를 들어 설명하기로 하겠다.
어느 날, 나는 글을 쓰다가 불광역으로 산책을 나갔다. 길에서 예쁘장한 아가씨 세 명이 설문조사를 하고 있어 심심하던 차에 그에 응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 실태와 희망사항이며 실현 가능한 소득 향상 방안에 대한 설문조사였다. 그들은 그것을 토대로 삶의 질 향상에 관한 정책을 개발하여 구청이든 시청에 제시를 하고 그 정책을 힘써 실현시킬 거라고 했다.
여기에서 가정을 들어 보기로 하자. 혹시나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서 “쯔쯔쯔. 얼굴 예쁜 아가씨들이 이 추위에 얼마 벌겠다고 저러나. 차라리 노래방에 취직이라도 하면 돈 꽤나 벌겠는데…….”하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그야말로 속물에 불과하다. ‘구역질나는 자본주의의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 아가씨들은 일당 벌자고 그러는 게 아니다. 어쩌면 식사비 정도는 사무실에서 받아가지고 나왔겠지. 그렇지만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저소득층의 소득을 높여주고 삶의 질을 개선시켜 주겠다고 자기 경비를 써가며 젊음을 바쳐가며 그 고생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들을 애써 도우려는 그런 사명감에 대해 격려해주기는커녕 멸시어린 말이나 해가며 음흉한 시선이나 주어서야 되겠는가.
문제는 그런 속물들이 우리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속 아픈 것이고 그래서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그 잘난 자본주의의 하류층으로 밀려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문화예술가의 존재 이유도 이와 비슷한 게 아닐까 싶어, 나는 왜 시인이 되고 작가가 되었는가에 대해 가슴에 손을 얻고 생각해보겠다.
시를 쓰며 동화를 쓰는 틈틈이,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내 몸을 채우고 있는 생명으로서의 가치가 무엇이며 생명은 어떤 긍정적인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아야 하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이다.
또 하나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좀 더 아름다워졌으면 하는 소망 때문이다. 이 세상이 좀 더 희망적이고 좀 더 따뜻해지고 좀 더 발전 역량을 갖추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시시때때로 아이들 얼굴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은 사명감이 생겨나서다.
마지막으로는, 그 알량한 명예욕도 있다는 걸 부정하고 싶지 않다. 식욕과 배설욕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나마 명예욕도 갖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문화예술가들이다. 명예로운 삶을 위해 이 세상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아주 고상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럼 대충 헤아려보니, 문화예술가에겐 생명으로서의 소명의식이 30%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명감이 30% 정도 되고, 명예욕 같은 것이 30%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렇게 골고루 나누다 보니 비어있는 게 10%인데 그건 왜 존재하는지, 누구를 위한 퍼센트인지는 나도 아직은 모르겠다. 그저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면 누구든 저절로 깨닫게 되겠지 싶다.
좀 더 써보자. 만약에 이 땅에 시인이 없었다면 우리 인류 사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새로운 감성 창출이며 변화무쌍한 아이디어며 삶의 존재 가치 정립 등을 공급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것은 사회의 활력과 발전에 있어 기본 소스인 터라 만약에 그런 것이 없었다면 그야말로 말이 안 된다. 우리 인류는 원시 시대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 전에 미국의 한 영화에서 비키니 미녀를 밧줄로 꽁꽁 묶어 달나라로 보냈다. 그 영화가 상영된 이후 사람들은 그 영화 스토리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50년 후에야 달 착륙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안데르센이 쓴 동화들은 150여년이 지나고 나서 월트 디즈니사의 작품이 되어 전 세계 문화 콘텐츠의 대표적 아이콘이 되었다. 하루 한 끼도 먹을 게 없고 엄청난 빚만 짊어진 수많은 민중들에게 변혁과 희망의 메시지를 응축시켜 전해준 프랑스와 러시아의 연극배우들에 대해, 그들이 무료로 나눠준 새로운 지평에 대해 알고 있는가.
이런 예는 무수히 많다. 아니, 우리 사회에 총체적으로 잠재되어있고 부글부글 끓는 것이 이야기와 꿈을 만드는 문화예술가들의 선지자적 노력이다. 따라서 사회의 활력과 발전에 있어 제일 앞장서 뛰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문화예술가들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문화예술가들이 그 잘난 돈 몇 푼 못 벌었다고 비아냥거리고 속이나 아프게 한다면 당신들은 그야말로 속물이고 배은망덕한 사람들에 불과하다. 솔직히, 이 세상 발전에 있어 저 멀리서 뒤따라오는 일이나 잘 해라. 뒤따라오는 폼이 영 마음에 안 들어서 하는 소리다.
<김문기 글>
예술가와 가난
[성기조]
문화체육관광부가 3년마다 실시하는 문화예술인 실태조사 결과(2009년도)에 따르면 문학 미술 대중예술 등 10개 분야 2천 명의 소득조사에서 전체의
37.4%가 문화예술 활동으로는 수입이 한 푼도 없다고 응답했다. 2006년 조사 때 26.6%보다 더 늘어났다. 한 달에 2백 만원 이하를 버는 문화예술인이 79.8%로 나타난 것을 보면 예술인들의 가난은 점점 심해 간다는 이야기가 된다.
광화문 한복판에 있는 세종문화회관 앞을 지나다 보니 “시민의 세종문화회관이다 수익성 강요 규탄한다”, “예술의 공공성 확보하라”는 등의 플랙카드가 민주노총공공연맹 전국공공서비스 노동조합 명의로 크게 붙어 있다. 그리고 더 큰 크기로 “임금차별 해소하라”, “상시 업무 직접 고용하라”, “저임금 비정규직 철폐하라”고 쓰여져 벽면을 가리고 있다. 이 글의 내용을 살펴보니 세종문화회관에 소속된 공연단체 단원이거나 아니면 단체를 운영하는 기간 요원들이 모여 써 붙인 게 틀림없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이들은 대중예술을 하거나 아니면 고전 음악 쪽에서 일하는 예술가들이란 생각이다.
이들의 수입을 어림잡아 보아도 2백 만원 이하를 버는 79.8%에 속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이보다 높은 액수의 돈을 버는 게 분명할 터인데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좀 아상하지 않느냐는 생각도 갖는다. 하지만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열악한 환경속에서 기본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수입이란 것은 누구나 알만하다. 그래서 예술인공제회를 설립하려는 운동이 일고 어떤 일이고 하고 보자는 생각이 앞서 일만 시켜달라고 아우성치며 월급이 얼마인지는 고려의 대상이 아닌게 예술계의 오늘의 현실이다. 한 달에 1백 만원도 못 받는 종사자들이 부지기수 인 것만 보아도 예술계의 벌이가 얼마나 열악한지 짐작이 간다.
사실이 이런데도 젊은이들은 문화예술계로 구름처럼 모여든다. 이른바 아트 러시(artrush), 큰일이다. 성공한 소수가 전체수익을 독점하는 세계가 문화예술계인데도 이런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해마다 수 만 명의 고교 졸업생이 문화예술을 전공하기 위하여 입학전쟁을 치루고 또한 그 만큼의 숫자가 졸업해서 사회로 진출하려고 하지만 그들을 수용할만한 곳이 문화예술계에는 없다.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 중, 몇몇 천재적 예술가들에게만 대중들은 박수를 쳐주고 소비자들은 비싼 평가를 지불하고 그들만 존경한다. 대부분의 보통 예술가(?)들은 시장에서 외면 당하고 거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이런 냉혹한 현실인데도 예술에 종사하고자하는 젊은이들은 “예술은 돈 버는 일이 아니다”란 말로 위안을 받는다. 이들에게 한 마디 묻고자 한다. 예술이 돈 버는 일이 아니라면 무엇을 먹고 사는가, 예술가도 알맞게 먹고 살만한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을 외면하고 꿈만 먹고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술이 돈 버는 일이 아니다란 말은 예술의 고귀함을 나타내는 고전적 가치관에서 출발하여 예술의 고귀함과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부채질하는 것은 국내 대학들이 수요공급의 원칙을 무시하고 예술가를 양산하는 교육정책이다. 문화예술계열 학과를 증설하여 정원을 늘리고 이들을 사회에 내보내는 무책임한 교육이 가난한 예술가를 양산해낸다면 심각한 고려를 해보아야 한다.
문화예술계의 일자리에는 고학력 지원자들이 수도 없이 많다. 유수한 외국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젊은이가 호텔 로비에서 피아노를 치는 일이 있는가 하면 공회당이나 교회에서 시간제 근무를 하고 있다. 이들은 한 달에 1백 만원도 못 받는다. 이런 불안전한 고용상태가 이어지기 때문에 임금 차별해소 하라고 외치고 저 임금 고용불안 비정규직 철폐하자고 외친다.
넘쳐나는 문화예술계의 인력 공급과잉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정부의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이 이럴진대 정부도 손 놓을 수밖에 없다. 정부와 지자체, 메세나 운동에서 문화예술계에 지원하는 돈이 통틀어 2천 억 원을 넘는데도 그 효과를 얻지 못하는데 어떻게 계속 지원금만 늘린단 말인가?
내일의 화려한 꿈을 이루기 위한 예술가들은 스스로 먹고 살기 위한 노력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지원금을 받기 보다는 자신의 예술작품이 남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예술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만 창조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받으면 좋아할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란 워홀(미술가)의 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가난을 면하는 예술가가 될 것이다. 예술가의 가난이 필연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 성기조
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중국낙양대 석좌교수
예술가는 무엇으로 사나
전강옥 조각가
37세의 촉망 받던 조각가 구본주는 2003년 경기도 포천에서 차에 치여 사망했다. 유족은 손해배상 소송을 냈고 법원은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가해자 측 보험사는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면서, 고인이 주로 건물의 대형 상징물 제작 등 육체노동에 종사했으므로 도시 일용(日傭)노임이 기준이 돼야 하며 정년도 육체 노동자에 준하는 60세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직자의 사고사에 대해 법원은 일반적으로 도시 일용노임을 산정기준으로 삼는다. 보험사 주장대로라면 예술가는 무직자다. 예술계는 반발했다. 대책위가 구성되었고 1인 시위와 서명운동이 이어졌다. 국회의원 14명이 항소 취하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험사에 보내기도 했다. 소송은 조정을 거쳐 원심 판결을 따른다는 조건으로 종결되었지만 파장은 적지 않았다.
이 사건이 예술계에 일으킨 논쟁 중 하나는 예술인 복지에 대한 것이었다. 사건의 여파와 함께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 향상, 기초생활과 사회적 신분 보장을 위한 정책이 정부 차원에서 논의된다는 말이 있었다. 2009년에는 예술인들의 복지를 위한 문화예술진흥법이 입법 예고되기도 했다. 이르면 올해 하반기부터 예술인 복지제도가 시행된다는 소식도 들렸다.
구본주 사건이 일어난 지 8년이 흘렀다. 예술가의 위상과 사회적 인식, 복지 문제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아무것도 없다. 입법 예고되었던 예술가복지법도 잠잠하다. 예술인들은 여전히 4인 가구 최저 생계비 120만원에도 못 미치는 수입으로 복지 사각지대에서 위태롭게 살아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술인들은 서로 신기하다고 한다. 일정한 수입도 없으면서 창작 활동은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많은 미술인들이 최근 논쟁을 일으킨 무상복지에는 무관심하거나 반대한다. 아이들 급식비가 만만치 않고 병원비가 두려워도 무상은 안 된다고 한다. 자신의 경제 상황과 전혀 다른 의견을 보이는 것은 정치적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이 예술계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생계를 돌보기도 버거운 예술인들은 복지를 위한 법 제정에 소극적이거나 자신과는 무관한 거창한 문제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보름 전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던 51세의 이원일 씨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상하이 비엔날레 전시감독, 독일 ZKM 아시아현대미술전 공동 큐레이터, 스페인 세비야 비엔날레 큐레이터 등을 맡아 세계에 이름을 알린 그였다. 주위에서는 스트레스와 과로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는 주요 공ㆍ사립 미술관에서 일했지만 박봉과 비정규직의 불안한 고용 상태였다. 화려한 명성에 가려진 큐레이터의 쉽지 않은 삶이 죽음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가 경제적으로 가족에게 남겨준 것은 없다. 사회보장제도라도 있었다면 어린 두 아이와 가족을 바라보는 미술인들의 근심이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
이원일 씨의 죽음으로 예술인들의 불안정한 수입과 복지 문제에 대한 관심이 미술계에 되살아나고 있다. 미술인들도 이제 정치적 관점을 떠나 순수한 자신의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복지 문제를 판단하는 것이 최소한의 생활 보장을 위한 입법에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생계가 벅찬 미술인들에게 적극 관심을 가지라고 하기도 미안한 일이지만, 예술가 자신의 자세 변화가 필요하다.
예술가들은 여태껏 붓 한 자루 들고 세파를 헤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