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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7장
이 땅의 것을 사용: 혼인의 경우,
은사와 부르심을 따라 행하라
(찬송 222장)
2023-3-6, 월
맥락과 의미
고린도 전서 5-10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가르칩니다. 사례를 가지고 원리를 가르치는 판례법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혼인과 성, 음식과 물질 사용)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가르칩니다. 6장에서는 음행에 대해, 7장에서는 혼인한 사람의 성에 대해, 그리고 혼인과 이혼에 대해 가르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결혼과 물질의 사용 같은 일상의 일은 기도나 예배, 방언 등에 비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혼한 사람 중에도 차라리 이혼하고 영적인 일에 집중하려는 사람이 있었던 듯합니다. 약혼한 청년도 파혼하고 독신으로 살려고 하는 청년들이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결혼의 소중함을 말합니다. 동시에 독신도 귀하다고 가르칩니다. 독신의 은사가 있으면 자신의 가정을 이루는 대신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는 사명을 다하는 것이 좋다고 충고합니다.
1. 결혼하라: 혼인한 가정의 침실, 독신에 대한 가르침(1-9절)
2. 미혼인 자, 결혼 후 혼자 된 자에게: 가급적 결혼하지 말라(8,9절)
3. 기혼자: 이혼하지 말라(10-16절)
4. 원칙: 각자의 부르심에 대한 가르침(17-24절)
5. 약혼한 청년, 배우자와 사별한 성도(25-40절)
1. 결혼하라: 혼인한 가정의 침실, 독신에 대한 가르침(1-9절)
1) 혼인하여 서로를 섬기라(6절)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1절) 고린도 교회가 전에 편지로 질문한 내용에 대해 다룹니다. 그때 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까?” “남녀가 성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이에 바울은 답합니다.
성령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모든 사람은 자신의 배우자를 두라고 합니다. 음행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적 욕구” 가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통해 그 필요를 채우라고 합니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성적 욕구를 악하게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성적 기능을 하는 생식 기관도 좋은 것입니다. 그 욕구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 관계 바깥에서 이루어지면 악합니다.
부부는 침실에서 서로를 섬길 사명과 의무가 있습니다(3,4절). 혼인한 사람은 자신의 몸에 대한 권한이 자기에게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분방하지 말라.”(5절) 방을 나누어 쓰지 말라. 다만 서로의 합의에 의해 기도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 경우에는 배우자를 침실에서 섬기는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기 위해 잠시 절제한 후에는 다시 합해야 합니다. 배우자가 다른 성적인 유혹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분방”은 남의 재산을 “속여 빼앗는다”(6:10)고 할 때 쓴 강한 어조의 말입니다. 상대방의 동의 없이 침실 생활을 거부하는 것은 남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것처럼 나쁜 일입니다.
부부의 성은 “나 자신의 즐거움을 충족”하는 일이 아닙니다. ”배우자의 성적 필요”를 채워주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피차 복종(엡 5:22)하는 일입니다. 사랑으로 종 노릇하는 일입니다.
2) 혼인은 “허락”사항(6-7절)
그러나 모든 사람이 혼인을 하는 것은 “허락”입니다(6절). 이 말의 정확한 뜻은 “각 사람의 은사와 소명에 따라 다르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복종해야 할 명령은 아닙니다. 각자의 부르심(17절, 나눠주신 것, 은사)에 따라 어떤 사람은 혼인하고 어떤 사람은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7절). 사도 바울처럼 독신으로 지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과부(남자를 포함하여 혼자된 사람)도 그대로 있는 것이 좋습니다.
2. 미혼인 자, 결혼 후 혼자 된 자에게: 가급적 결혼하지 말라(8,9절)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람, 결혼 후 혼자 된 사람에게는 결혼(재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으면 그렇게 하기를 권합니다. 이것도 명령은 아니고 권장 사항입니다. 독신으로 살려면 은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절제할 수 없으면 결혼하는 것이 낫습니다(8-9절). 그러지 않으면 음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음행은 아주 나쁜 일입니다.
독신으로 사는 이유는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사명을 다하는 데 독신의 목적이 있습니다. 독신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배우자를 섬기는 대신에 하나님의 가정인 교회를 섬기는 일에 집중합니다.
결혼하는 것도 결혼의 은사와 사명이 있음을 확인하고 해야 할 일입니다. 독신의 은사가 없으면 결혼의 은사가 있습니다. 또 결혼할 때는 부부로서 섬길 사명,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할 사명, 부부로서 교회를 섬길 사명 등, 사명을 확인하며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지 않았더라도 독신의 상태에 있으면 그것도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자리가 바로 사명입니다. 17-24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할 것입니다.
3. 기혼자: 이혼하지 말라(10-16절)
1) 배우자 모두 그리스도인인 경우: 절대 이혼 금지(10-11절)
이미 결혼한 기혼자는 이혼해서는 안 됩니다.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10절) 사도 바울이 만들어 낸 명령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주 예수님께서 세상에 몸으로 계실 때 하신 명령입니다(마 19:3-9).
미혼 혹은 배우자와 사별한 성도가 결혼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허락” 사항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사람에게는 이혼을 해도 되는 “허락”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헤어지지 말고 살아야 할 “명령”이 주어집니다.
주님은 배우자가 음행한 경우에는 이혼할 수 있지만 그 외에는 이혼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 부부가 혹 이혼을 하는 불행한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때에는 재혼은 하지 말고 그냥 지내든지, 혹은 다시 합해야 합니다(11절).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것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2) 배우자 중 한 쪽만 믿음: 불신 배우자가 고집하면 이혼 가능(12-16절)
a) 불신 배우자가 함께 살기 원하는 경우(12-14절)
“그 나머지 사람들”은 부부가 한 쪽만 믿게 된 경우를 말합니다. 불신자인 배우자가 이혼하기를 원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12절)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이런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새롭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의 개인적 의견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하는 말입니다(40절).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에게 믿지 않는 배우자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해서,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 중에서 두 사람 다 믿지 않다가 한 쪽이 먼저 믿게 된 경우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는 유대인들에게 없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고, 사도 바울이 이제 가르칩니다.
불신자 배우자가 계속 살기를 원하면 신자는 이혼해서는 안 됩니다(12-13절). 함께 사는 동안 믿지 않는 배우자가 구원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14절).
b) 불신 배우자가 이혼을 원할 경우(12-14절)
15절, 믿지 않는 배우자가 굳이 이혼하기를 원하면 이혼해 줄 수 있습니다(15절).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즉 ‘종으로 매일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불신자가 이혼을 원한다면 성도는 이혼하여서 그 사람에게 매이는 데서 자유롭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부르셨습니다”. 즉 가능하다면 평화를 이루기 원하십니다. 또 하나님이 불신 배우자를 구원하실지도 모릅니다. 불신 배우자를 둔 경우에도 쉽게 이혼하지 말고 평화롭게 같이 살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c) 신자인 부부 중 한 명이 간음한 경우 이혼 가능, 그러나 자비를…
마태복음 19장에서 우리 주님은 배우자가 간음죄를 저지른 경우 이혼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드시 이혼하라고 명령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경우에도 서로 용서하고 결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 덕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화평 중에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혼을 쉽게 하는 지금의 세태와는 전혀 다른 성경의 원리입니다. 믿는 배우자가 간음하고 자신을 버리고 떠난 경우에도, 다시 합할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 더 덕스럽습니다. 그러나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다른 사람과 재혼해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배우자가 용서하며 받아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간음하여 선한 마음을 악용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4. 원칙: 각자의 부르심에 대한 가르침(17-24절)
독신, 결혼과 미혼, 이혼 등에 대해 적용되는 중요한 원칙이 이것입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17절).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20절). 그리스도인의 일상의 삶에 대한 중심 원리입니다. 17-24절은 앞과 뒤에서 혼인에 대해 말하면서, 혼인에 대한 기본 원리를 말합니다.
할례자(유대인)는 할례자대로, 무할례자(이방인)는 무할례자대로 그대로 있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삶을 사람마다 다르게 해주셨습니다. 민족이나 직업, 신분, 환경의 차이는 하나님이 주신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부르심대로 지내는 것입니다(17-20절).
종이나 자유자도 각자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 합니다(24절). 민족, 신분, 직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존재 자체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중요합니다.
“나는 종이니 하나님의 교회에서 2등 성도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다”. 그렇게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19절). 노예이든지, 자유인이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제일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물론 노예에서 벗어날 기회가 있으면 벗어나야 합니다. 일상에서 더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을 계획하고 그것을 이루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현재 상태로도 자족하며 살아야 합니다. 종과 자유자 모두를 하나님께서 값 주고 사셨습니다. 이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노예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23절). 그리스도 안에서는 신분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께 속한 자유인입니다. 노예 아닌 자유인도 자기의 신분을 자랑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야 합니다(22절).
우리도 조건 때문에, 열등감이나 우월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6:20). 우리의 경제적인 상황이나 환경이 어떠하든지, 현재 상황에서 말씀을 지키며 영광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17-24절은 40절로 이루어진 고린도전서 7장의 가운데 부분입니다. 그중에서도 20절은 정확히 중간입니다. 1-19절은 이미 혼인한 사람에 대한 사도의 의견입니다. 21-40절은 혼인 후에 혼자된 경우, 그리고 혼인을 준비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7장은 그 내용도 아름답지만 글의 구조도 아름답습니다.
5. 약혼한 청년, 배우자와 사별한 성도(25-40절)
이제 25-40절은 약혼한 청년이나 배우자를 사별한 과부/홀아비에게 하는 바울의 말, 곧 그의 “의견” 혹은 “뜻”(25, 40절)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말합니다.
1) 독신이 더 낫지만, 의무는 아님(25-28절)
“처녀에 대하여는”(25절). 역시 고린도 교인들이 질문한 문제에 대해 대답합니다. “처녀”는 ‘약혼한 처녀’를 말하는 듯합니다. 서로 약혼한 교회 청년 남녀가 ‘영적인 일’에 집중하려고 파혼하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던 듯합니다. 이에 대해 답을 줍니다.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 의견을 말하노니.”(25절) 계명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순종해야 할 ‘절대적인 명령’을 말합니다. 의견은 ‘구체적 상황이나 사람에 따라 다르게 선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선 결혼해 있다면 이혼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명령’입니다. 결혼하지 않았으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26절), “아내를 구하지 말라”(27절),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조언’, ‘권유’입니다.
결혼하는 것이 독신보다 나빠서 그렇게 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임박한 환난”(26절) 때문입니다. 주님이 재림할 날이 다가오면서 이 땅에 고난이 많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자에게는 결혼하지 않은 자에게는 없는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28절). 그러나 결혼하는 것이 죄 짓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해도 됩니다.
2) 독신으로 사는 것의 유익(29-35절)
사도가 성도에게 가능한 한 독신으로 살도록 권하는 이유는 결혼하면 힘들기 때문이 아닙니다. 독신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크게 기여하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a) “마치 하지 않은 것처럼”-세상 즐거움에 초연함(29-31절)
첫째, 독신으로 사는 유익은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29절) 그리스도의 재림과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영원한 나라에 비해서 이 땅의 결혼의 즐거움은 상대적입니다.
우는 자들은 마치 울지 않는 자처럼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 땅의 즐거움과 기쁨에 대해서 별것 아닌 것처럼 대합니다. 재물도 집착하지 말고 잠시 사용하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기쁨이나 슬픔, 재물은 이 땅에서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사모하며 초연하여 살라고 합니다(29-31절, 종말론적 초연성).
물론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즐거워하고 살아가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성취가 전부가 아닙니다.
b) 독신으로 살면 교회와 하나님 나라 일에 집중할 수 있음(32-35절)
둘째, 독신으로 사는 성도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힘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혼한 자는 세상 일과 배우자를 기쁘게 하는 일을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 염려합니다. 결혼한 자가 배우자를 기쁘게 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일이기 때문에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사람보다 독신으로 있을 경우 크게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34절) ‘거룩’이란 일상의 것을 하나님께 다 바친 상태를 말합니다. 독신인 그리스도인은 자기 생계를 위한 시간 외에는 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결혼한 성도도 모든 삶에서 하나님을 섬깁니다(영으로). 그러나 몸으로는 가정을 섬겨야 합니다(육으로). 독신인 성도는 자기 가정에 매이지 않고 힘들어 하는 다른 가정을 돌아보고, 모든 시간을 바쳐서 다른 성도를 섬길 수 있습니다.
독신은 독신으로 사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와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삽니다(35절). 이것은 은사도 없는 사람이 독신으로 살다가 올무에 빠지도록 하기 위해서 사도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치에 합당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각자의 은사에 적절하게 삶의 모양새가 좋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독신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독신으로 살고, 은사가 없는 사람은 자기에게 적절하게 살 때 “흐트러짐이 없이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3) 약혼한 청년에게: 결혼은 죄가 아니므로 결혼하는 것도 좋다(36-40절)
약혼했으므로 반드시 결혼해야 할 경우
약혼한 교회의 청년은 다음 경우에는 결혼해야 합니다. 첫째, 약혼녀와 파혼하는 것이 어떤 이유에서건 합당하지 못한 줄로 생각할 경우입니다. 둘째, 약혼녀가 혼기가 지났을 경우입니다.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셋째, 자신이 결혼하기를 원할 경우입니다.
결혼하는 것이 죄는 아닙니다. 결혼이 죄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는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결혼과 성은 경건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혼했지만 결혼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
다음 조건이 되면 약혼을 했지만 결혼하지 않아도 됩니다. 첫째, “그가 마음을 정하고”(37절). 주님을 섬기기로 마음을 강하게 먹고 헌신해야 합니다. 마음을 “정하다”는 주님을 “섬기다”(35절)와 비슷한 뜻입니다.
둘째, 결혼을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어야 합니다. 결혼해서 채울 수 있는 성적, 정서적 욕구를 다스리는 능력/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성품상 독신으로 지내도 마음에 허전함이 없으면, 결혼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고 자유로움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약혼녀가 결혼하기 원하고 다른 배우자를 찾기가 힘들면 결혼해야 할 필연성이 있습니다.
셋째, “자기 뜻대로”(37절), 마음에 양심적으로 그런 판단이 내려져야 합니다. 사람마다 은사와 소명이 다르기 때문에, 그냥 다른 사람의 충고나 환경,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마음에 분명한 확신이 있을 때 독신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하는 것도 잘하는 것이지만 결혼하지 않는 것은 더 잘하는 것입니다(37절).
4) 배우자를 사별한 성도(39-40절)
남편을 사별한 여 성도는 재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지내는 것이 더 좋습니다(39-40절).
사도가 결혼과 이혼에 대해 말한 많은 부분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몸으로 계실 때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새롭게 생기는 문제들에 대해 성령님께서 감동으로 바울을 통해 초대교회와 이후 시대의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믿고 복종할 일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과는 다른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영적인 것을 사모하여 차라리 결혼의 행복을 포기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결혼한 성도도 그랬고, 약혼한 청년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은 당연히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도 이 땅의 행복을 위해 결혼하려 합니다.
우리 모두 사도를 통한 성령님의 지혜를 배웁시다.
첫째, 그냥 나이가 되어서 결혼하려 하지 말고, 나의 은사와 사명을 생각해봅시다. 독신으로 살 은사가 있으면, 결혼하지 않고 교회와 다른 가정을 섬기는 것이 좋습니다. 결혼하기 원했지만 결혼할 기회가 없이 나이가 들어갈 경우도, 비록 자신이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독신의 은사와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17절).
독신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자신의 가정이 아니라 교회의 다른 가정을 많이 돌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가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에 사명을 다합니다. 그래서 독신으로 사는 것을 권장합니다. 그러나 로마교처럼 독신으로 사는 성도가 결혼한 성도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둘째, 결혼한 성도는 가정생활이 힘들더라도 이혼해서는 안 됩니다. 배우자가 음행한 경우 외에는 이혼하면 안 됩니다. 고난 가운데 주님을 의지하며 인내하며 기도하고 나갈 때 주님의 도움과 은혜를 체험할 것입니다.
셋째, 결혼한 사람은 주님을 기쁘게 할 목적으로 살면서, 배우자를 기쁘게 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침실, 정서, 경제적인 것 등 모든 일에서 서로를 종으로 섬겨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피차 종으로 복종하며 섬깁니다(엡 5:20).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은 결혼 생활에서도 나타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넷째, 독신이나 결혼,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겪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 즐거움과 괴로움에 우리의 마음을 다 빼앗기지 맙시다. 영원한 천국의 즐거움을 생각하며 이 땅의 것에 초연한 자세로 살아갑시다. 주신 즐거움에도 자족합시다. 주신 괴로움에도 자족합시다. 오직 주님의 명령을 따라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소명을 다합시다(17, 20절).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나에게 결혼과 성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결혼 중이라면, 나의 결혼 생활이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독신이라면, 현재 나의 삶이 주님 안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합니까? 어디서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환난(26절), 부득이한 일(37절)=필연성(아낭케)
“환난”과 “부득이한 일”은 ‘필연성’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이 순응해야 할 상황을 말합니다.
<참고> 37절, 마음을 “정하고”=주를 “섬기게”
마음을 “정하고”(‘에드로서’, 37절)는 주님을 “섬긴다”(‘유-파아-에드로’, 35절)와 비슷한 뜻입니다. 약혼한 형제가 파혼하기로 마음을 정하는 이유가 주님을 섬기는 것일 때 파혼이 정당합니다.
<참고> 주 예수님의 명령과 바울이 주는 허락=의견=뜻
고린도전서 7장에서는 성도가 행동을 결정할 때 두 가지 성격의 기준이 있음을 말합니다.
첫째는, 어떤 상황에서나 적용되는 명령, 곧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지 필수적으로 해야 할 명령입니다.
둘째는, 구체적 상황, 사람에 따라 다르게 선택하는 원칙을 말합니다.
1) 명령: 누구나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보편적 명령
예수님의 “명령”(‘에피타게’, 6절):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다”는 모두가 따라야 할 절대적 명령이 아닙니다. 은사가 있는 사람이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하는 것입니다.
“명하심”(‘파랑겔로’, 10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주시라”-
결혼한 성도가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무조건 따라야 할 절대적 명령입니다.
“계명”(‘에피타게’, 25절): 약혼한 청년이나 배우자를 사별한 성도가 결혼할 것인가 독신으로 살 것인가 하는 것은 절대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2) 조언: 자신의 은사와 소명에 따라 각각 개별적으로 결정함- 성령님 인도
“내가 말하노니”(‘레고’):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원문에는 ‘명령’이 없음) – 배우자 중 한 명이 불신자일 경우에 이혼을 하는 문제는 배우자의 반응에 따라, 그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말하노니”라고 합니다.
“허락”(쉰-그노메, 6절):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의견”(‘그노메’, 25절):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내 뜻”(‘그노메’, 40절) –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위의 세 경우는 허락, 의견, 뜻 등 3가지로 번역되었지만, 원문은 ‘(쉰)그노메’라는 같은 단어입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일에 대해 조언하는 말입니다. 은사와 사명에 따라 독신으로 살지, 결혼할 지(6절)는 다르게 적용됩니다. 한 청년 성도, 배우자를 사별한 성도가 독신으로 살 지, 결혼할 지(25, 40절).
결혼하는 것이나 독신으로 사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따라야 할 절대적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은사와 소명에 따라 결정할 일’입니다.
개별적인 일을 결정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자와 부모, 경험 있는 성도들을 통해 성령님께서는 지혜를 주시므로 그 조언을 잘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잘 구별해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동시에 구체적인 상황에서 지혜롭게 결정할 수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라는 이 절대적인 명령을 상황을 핑계로 어기는 상대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결혼을 할 지 하지 않을 지, 얼마나 비싼 옷을 살지 하는 것은 각 성도가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해야 할 ‘그노메’인데 이것을 절대화하여 자신과 다른 사람의 자유를 구속해서는 안 됩니다.
참고: 다른 곳에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파랑겔로’, 디모데전서 4:11). 디모데는 명령해야 합니다. 디모데는 하나님처럼 명령을 제정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전달할 때, 하나님의 명령이 디모데의 입을 통해 나오기 때문에 디모데가 하는 일은 ‘명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 허락(쉰-그노메-6절), 의견(그노메, 25절) 내 뜻(그노메, 40절)=구약의 명령하다(숨 타암, 에스라 4:19 등)
“허락”(‘쉰-그노메’-6절), “의견”(‘그노메’, 25절) “내 뜻”(‘그노메’, 40절)에 나오는 ‘그노메’는 구약 헬라어 ‘타암’(טְעֵם 아람어)을 번역한 것입니다.
성경에 19번 중 18번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성전을 건축하는 것과 관련해 왕이 내린 ‘조서’를 말합니다.
한번은 다니엘의 ‘지혜’(다니엘서 2:14)를 말합니다.
같은 아람어는 구약 헬라어 성경에 ‘도그마’로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은 로마 황제의 칙령(눅 2:1, 행 17:7), 사도들의 결정(행 16:4)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에서 결혼과 이혼에 대해 말한 허락/의견/뜻은 왕이 칙령을 내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늘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성령님의 인도로 구체적 상황에 칙령을 내리듯이 적용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떠나 둘이 한 몸이 되라, 간음하지 말라”는 이 말씀을 구체적 상황에서 교회가 어떻게 적용할지를 보여주는 모범이 됩니다.
우리도 성령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말씀을 적용하신 모범을 따라, 오늘날 새롭게 부닥치는 상황에서 새롭게 마주하는 문제들에 대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결정하며 나가야 하겠습니다.
<참고> 13절,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불신자와 결혼 허락은 아님
이것을 흔히 오해합니다. “그리스도인도 불신자와 혼인해도 된다.” 이 뜻이 아닙니다. 원래는 부부가 불신자이다가 한 편만 믿은 경우를 말합니다.
성경은 이미 믿은 성도가 불신지와 결혼하는 것은 금합니다. 고린도후서 6:14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멍에를 갈이 하지 말라”(‘헤테로-쥐고’)는 구약 성경 헬라어 번역본(셉투아 진트, LXX)에 명사(‘헤테로-쥐고스’)로 한번 나옵니다.
레위기 19:19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자(헤테로-쥐고스: 히브리어-칼라임)와 교합하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칼라임)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칼라임)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신명기 22:9 “두 종자(칼라임)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
동물, 곡식, 옷감에서 다른 종류(칼라임)끼리 섞지 말라고 합니다. 이 본문은 구약 백성이 이방인의 우상 숭배와 음행을 따르지 말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9:2),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에 이어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과 이웃 사랑을 올바로 실천하도록 훈련하기 위해서 이방인의 삶과 섞이지 않도록 훈련하려는 목적으로 이 계명을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6:14절도 불신자의 악한 삶과 우상숭배를 본받지 말라는 맥락에서 이 말을 사용합니다. 거룩한 삶을 위해서 서로 다른 종류의 동물을 교배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성도에게 적용합니다. 성도가 믿지 않는 자와 혼인하는 것은 이종교배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구절에 근거하여 불신자와 혼인을 금했습니다. ‘헤테로-쥐고스’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고백서 24장 혼인의 제3절은 “불신자, 삶이 현저하게 악한 자, 이단을 추종하는 자들과 혼인하여 대등하지 않은 멍에를 메지 않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 근거 구절로 고후 6:16을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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