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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다 가기전에 꽃구경하기 위해 오랫만에 운동삼아 집 뒤에 있는 야트막한 야산, 봉산에 올라가 바람을 쐬고 왔다. 오늘 날씨는 봄날씨인데 황사는 없었지만 바람이 약하게 불고 있어서 멀리 보이는 건물들은 희뿌옇게 보였다
♠ 봉산(烽山)의 유래
봉산(烽山)은 일명 봉령산(鳳嶺山)으로 조선시대에 서울 무악(母岳)봉수(烽燧)로 이어지는 봉수대(烽燧臺)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해발고 207.8m로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과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향동동과 경계를 이루며 북쪽으로 1.5~2km위치에 서오능(西五陵)이 있고, 은평구 방향으로는 황금사찰로 유명한 수국사(守國寺)가 있다.
봉산의 다른 이름인 봉령산(鳳嶺山)은 이 산의 정상에서 좌우로 뻗은 산줄기가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펴고 평화롭게 앉아있는 형상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또한 이곳 봉수대 자리는 1919년 3.1운동당시 인근마을 주민들이 남녀노소 모두 모여 횃불을 밝히고 만세시위를 벌였던 의미있는 장소이다.
이곳 봉산 무지개는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여름에 소나기가 온 다음에는 이 곳 봉산(구산동) 에서 백련산(응암동) 방향으로 커다란 무지개가 자주 나타났다고 한다. 선명하고 빛깔이 화려하여 무지개 가운데 최고였으며 그때마다 동네 꼬마들은 무지개를 타고 내려온다는 선녀님을 혹시 만날 수 있을까 하고 모두 집앞에 나와 마음 졸이며 하늘을 쳐다보던 모습이 정겨워 보였다고 한다
봉산 올라가는 입구인 西北 市立病院 뒤에 활짝 피어 있는 벚꽃모습. 하얗다고 할까 연분홍색이라고 할까? 예쁘다
봉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의 중턱에서 만난 진달래꽃. 素月의 진달래꽃 마냥 가는 봄을 아쉬워 하는 듯하다.
지나가는 길 옆에서 정신없이 먹이를 찾고 있는 비둘기 형제들.
등산로 근처에 보이는 벚꽃. 어느덧 봄이 다 가고 있음을 알리듯 활짝 만개하였다.
봉산의 서북쪽에 위치한 구산동과 멀리 보이는 은평 뉴타운 아파트 모습(분양이 아직도 다 안됨)
봉산정에서 동남쪽 방향에 위치한 상암월드컵 경기장을 보고서 촬영한 사진.
등산객들과 은평주민들을 위해 봉산 정상에 설치된 정자 烽山亭
봉수제도는 고려때~조선 말기까지 운영되었지만 실제는 잘 운영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부터는 元나라의 파발제도가 정착되어 중앙에서 지방 8도에 전파하는 중요한 문서가 신속하게 전달되는 체제를 갖추었다.
은평구 북동쪽 방향인 불광역~ 연신내 부근의 모습. 우 상단이 불광역이며 KIM's CLUB 고층 빌딩이 보인다
은평 뉴타운방향의 아파트등 주거지역 모습. 위쪽으로는 북한산의 자락이 보인다.
까치 한마리가 개나리 밑 이곳 저곳을 깡충 뛰어 돌아 다니면서 먹이를 구하고 있는 모습이 귀엽다.
봉산 정상부근에 고려~조선중기까지 운영되었던 그 당시 모습과 똑같이 설치해 놓은 봉수대 연조(아궁이)
♣봉수제도에 대하여
봉수(烽燧)란 횃불(봉 : 烽 혹은 거 : 炬)과 연기(수 : 燧)로써 변방의 긴급한 군사상황을 중앙에 알리던 군사통신제도의 하나이다.
이곳 은평구 갈현동 뒷산인 봉산(烽山)은 고려초기~ 조선중기까지 국가 기간통신망으로 운영되었던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던 곳이며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誌 : 1454년) 기록에는 영서역(迎曙驛) 서산(西山)봉화(烽火),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1530년)에는 봉현(峰峴)봉수(烽燧)로 지칭되기도 한 곳이다.
여기 봉산(烽山)의 봉수(烽燧)는 서쪽에 있던 고양시 고봉산(高峰山)봉화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남쪽 방향의 수도 한양의 안산(鞍山 : 母岳 무악재) 서봉수대(西烽)에 전달하였던 제 4거(炬) 직봉(直烽) 노선(路線)의 봉수이다. 조선후기(18세기 중엽)에는 이곳의 봉수가 대응봉수 노선의 변동으로 인한 듯 現 고양시 덕양구 강매동 소재 해포봉수(해浦烽燧)로 이설되었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1908년)에는 해포와 달리 옛 이름인 봉현(峰峴)으로 표기하면서 경기도 관찰사 소관의 봉수로 기록하고 있다.
봉화(烽火)운영체제는 고려때 4거(炬) 체제였으나 고려말~조선초기에는 2거(炬)체제로 감소했다가 세종때(세종1년 5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5거(炬)체제로 바뀐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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