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의 후손
원주교구 '천사들의 집‘ 원장
최 기 식 베네딕토 신부
“토마스 신부님과 감히 어떻게 비교합니까?”
올해 6월 15일은 한국인 두 번째 사제인 ‘하느님의 종’ 최양업최토마스 신부(1821~1861) 선종 150주년이 되는 날이다. 최 신부의 경주 최 씨 가문의 직계 후손으로 최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사제가 된 원주교구 ‘천사들의 집’ 원장 최기식 베테딕토 신부는 토마스 신부의 선종 150주년을 맞은 소감을 묻자 ‘말하기조차 어려운 분’이라며 손을 내젖는다. “그 분의 어떤 면을 본받으려는가?”하는 물음에도 “본받으려면 어느 정도 따를 수 있고 비교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하찮은 저로서 감히 어떻게 그 높은 성덕을 따를 수 있으며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다. ‘땀의 순교자’, ‘길의 순교자’로 온 교회의 추앙을 받고 있는 최양업 신부에 대한 후손 최기식 신부의 존경심을 한마디로 표현한 응답이라 하겠다. 남겨준 건 가난밖에 없지만 영원한 삶을 주고 가신 선조들에 대한 지극한 고마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최기식 신부에게 최양업 신부는 증조부 희정 님의 큰형님이시고,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1805~1839)과 내포 지방의 사도 이존창의 후손인 이성례 마리아(1800~1840)는 고조부모님이시다. 교회 창설 때부터 천주교를 믿은 최인규, 최인주 님에 이어 3대 째 천주교 신앙을 이어 받은 최경환 성인은 자체높고 부유한 가문의 가장이었으나 조여 오는 박해의 올가미와 외교인 이웃의 밀고를 피해 고향인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을 떠나 서울의 교우촌 벙거지골(笠洞. 지금의 남산)로 이주하였다가 강원도 춘천, 경기도 부평을 거쳐 안양시 만안구 안양 9동 수리산에 정착하였다.
성인은 여기에서 회장으로 신자들과 교우촌을 돌보며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고, 1836년에 큰 아들 최양업을 모방(Maubant, 羅)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마을 교우와 일가 등 40여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포청에서 하루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한 끝에 전신이 헤어진 채 9월 11일에 최후로 곤장 25도를 맞고 그 이튿날인 9월 12일 포청 옥에서 장렬히 순교하였다.
성인의 부인 이성례 마리아님은 당시 국법으로 부모와 함께 어린이를 투옥시키는 일은 금했으나 큰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이유로 희정(羲鼎 당시 15세) 선정(善鼎 당시 12세) 우정(禹鼎 당시 9세) 신정(信鼎 당시 6세) 그리고 젖먹이였던 세 살짜리를 함께 옥살이 시켰다. 한데 갇힌 최 씨 일가의 비극은 그때부터 절정으로 치달았으니 세 살짜리 막내가 어머니의 빈 젖을 빨다가 숨졌다. 첫 옥사자가 되었다. 나머지 아들들도 죽을 것을 두려워한 이성례 님은 일단 배교했다가 모두 동냥 나간 사이 다시 남편 곁으로 가 1840년 1월 31일 당고개에서 참수 치명했다. 이성례님이 치명하기 전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돈 몇 푼과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주면서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로 가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울면서 청했고, 4형제의 눈물겨운 '청탁'에 감동한 희광이들이 그 약속을 지켰다는 기록은 1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들 가슴을 울린다.
썩는 밀알이 되기 위해 시작한 사제 생활
최기식 신부는 최양업 신부를 쳐다볼 자격도 없다고 하면서 1971년 9월 16일 원주교구 주교좌 원동성당에서 지학순 주교로부터 신품성사를 받고 공식적인 첫 미사는 출신 본당인 풍수원 성당에서 봉헌했지만 가족들과 봉헌한 첫 미사는 베론성지 내 초라한 최양업 신부 묘소에서 봉헌했다. 사제생활의 모범을 그분에게서 찾고, 그분처럼 살아가고 싶은 마음에서 결정한 것이라고 한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이 누구신가? 열다섯 살에 부모와 고향을 떠나 유학길에 오르신 분, 김대건 신부님이 순교한 후 서품을 받고 지독한 박해 속에서 한국교회를 지키신 분, 관원들의 눈을 피해 고령준봉을 마다 않고 매일같이 백 리 길을 걸어서 신자들을 찾아다니시며 보살피신 분, 한국 교회의 어머니이자 뿌리가 되신 분이 아니신가? 바로 그 덕에 오늘 날의 한국 교회가, 그리고 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최기식 신부의 고백이다.
최기식 신부는 이날 최양업 신부에게 “제가 하느님께 약속드린 썩는 밀알로 살아갈 수 있게 신부님이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최기식 신부는 사제 서품 기념 상본에 “썩는 밀알이 되게 하소서.”하는 한 마디를 새겼다. 스승 예수를 따라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는 결심이다. 그렇게 시작한 사제 생활의 첫 임지는 학성동본당이었다. 소신학교부터 동기이며 수원에서 교구를 옮겨 온 안승길 신부와 함께 발령이 났다. 안 신부는 ‘본당신부’로, 최 신부는 ‘주임 신부’로 부르기로 하고 신나게 전교하고 사목했다. 하루는 지역 주민 400명을 초청해 영화 상영과 막걸리 파티를 열어 자연스럽게 입교를 권했더니 120명이 교리반에 들어왔고 그 중 99명이 영세하는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어 주교좌 원동 보좌와 단양 본당 주임으로 갔을 때도 젊은 혈기와 ‘썩는 밀알이 되는 자세’로 열심히 뛰었다. 최 신부는 이 무렵 “아무리 작고 가난한 시골 본당, 쉬는 교우들이 많아서 침체된 본당이라 해도 신부가 열성을 가지고 신자들을 찾아 나서기만 하면 신자들이 성당으로 모여오게 되어 있다.”는 소중한 체험을 했다.
신바람 나는 사목을 하는 중에 독일 유학 발령이 갑자기 났다. 연로하신 부모님 걱정도 컸지만 순명으로 받아들이고 서울 복자수녀원에 손님신부로 가 있으면서 남산 독일문화원에 나가 독일어 공부 등 유학 준비를 착실히 했다. 그러던 1974년 7월, 외국 출장에서 돌아오던 교구장 지학순 주교의 구속 사건이 일어났다. 유신독재정권에 대한 반대가 그 이유였다. 최 신부는 유학을 포기하고 서울 명동 가톨릭출판사에 거처를 정하고 지 주교 석방 운동을 펼치면서 전국의 뜻있는 젊은 사제들과 함께 ‘정의구현사제단’을 만들어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교구장은 이후에도 이탈리아로 유학가라고 권했으나 정중히 사양했다. 그러자 34세의 젊은 나이에 주교좌 원동본당 주임으로 발령이 나 부러움을 샀고, 이어 1979년 3월 운명의 교구 사목국장 겸 교육원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광주민주화운동 김현장 숨겨준 건 사제다운 선택”
1980년 6월 초순의 어느 날 밤. 11시가 가까운 시간에 교구청 사회개발부의 직원이자 한국 가톨릭 농민회 부화징인 정인재 형제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방문 목적도 밝히지 않고 급히 찾아뵙겠다고만 하더니 깡마른 청년과 함께 나타났다. 특전사 요원들의 광주 만행을 알리는 유인물을 제작해 뿌렸는데 그 내용이 2시간도 안 돼 북한 방송에서 나온 데다 그걸 부산으로 뿌리러 가던 사람이 중간에 잡혀 수배중인 청년이고 숨을 곳을 좀 제공해 달라는 것이었다.
김현장이 전한 광주의 참상은 차마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학살이었다.
“군인들의 만행으로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1,000여 명, 그중에는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가슴이 짤리운 채 죽어간 미혼 여성과 대검으로 난자당해 태아와 함께 죽어간 임산부도 있었고, 군인들이 주민들을 태우고 가던 버스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마을의 가구 중 절반이 줄초상을 치룬 마을도 있었다. 묶인 손과 굴비처럼 엮어진 사람들, 언제 가슴팍을 뚫고 들어올지 모르는 대검의 치솟은 칼날 위로 평화롭기만 하던 하늘, 총과 대검, 무죄한 시민들을 소품삼아 광란의 군무를 추던 공수대원들, 그 앞에서 뚝뚝 목이 잘리는 생명들, 하늘을 뒤덮는 화염냄새와 피비린내, 폭력과 증오, 살육과 저항, 광란과 희생의 학살 현장! 참혹하다 못해 잔인했고, 그래서 내 나라 내 땅에서 일어난 것이라곤 믿기 힘든, 남미나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 영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최기식 신부는 김현장이 그날 전한 광주를 1997년 사제 수품 25주년 은경축을 맞아 펴낸 ‘로만칼라와 빈 무덤’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김현장이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한 “신부님, 대체 교회는 뭐하는 곳입니까?”라는 물음에 최기식 신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현장은 그 2년후인 1982년년4월 부산에서 일어난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문부식과 김은숙을 숨겨주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최기식 신부는 두 사람과 결국 김현장까지 설득해 자수토록 하고 자신도 투옥돼 옥살이를 했다.
“교회가 망신이다.”고 나무라는 선배 신부들도 있었다. “교회는 뭐하는 곳입니까? 라고 질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망신이다.“고 꾸짖는 사제가 있었던 게 당시 상황이었다. 꾸르실료 교육이나 ME, 농민회의 유기농법 교육 등을 하는 교육원에서 김현장을 강사로 영입해 용공 좌경 이데올로기 교육을 농민들에게 실시했다는 당국과 이를 앵무새처럼 보도한 제도 언론 역시 씻을 수 없는 법죄를 저질렀다.
“이 땅의 무고한 희생양인 그와 광주를 위해 무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 우리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작은 일이긴 하지만 그를 숨겨준 것이 올바른 결정이며 사제다운 선택이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최기식 신부의 신념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쫓기던 그들이 가장 소외되고 가난하며 힘든 사람이라고 최기식 신부는 믿고 있다.
가난한 시골 출신 신부 이제는 사회복지 사업에 전념
최기식 신부는 최관수 바오로님(1988년 100세로 선종)과 송기순 안나 님(1993년 97세로 선종)의 4남 4녀 가운데 막내로 1942년 1월 28일(음력) 태어났다. 당시 아버님은 53세, 어머님은 46세였다. 조상들은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최 신부가 4살 때부터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강원도 첫 번째 본당인 풍수원본당에서 20리 떨어진 증안리에서 살다가 6.25전쟁 후 풍수원으로 나와 살았다. 소신학교인 서울 성신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러 갈 때 난생 처음 버스를 타고 춘천으로 가 교구장께 인사하고 기차로 서울로 올라가 전철을 타고 혜화동 소신학교까지 갔다. 처음 타본 자동차와 기차, 전철로 인해 멀미와 몸살을 앓고 말았다. 시험 두 과목이나 치지 못해 재수 끝에 소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자연이 놀이동산이자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커다란 식당이나 진배없었던 최기식 신부에게 신학교 생활은 꿈만 같았다. 그런 산골에서 자란데다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사제이외의 길은 생각할 수도 없었기에 소신학교 6년, 대신학교 6년과 군 생활 3년을 별 무리 없이 마칠 수 있었다. 대신학교 4학년 때는 총학생회장까지 지내 리더십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1983년 8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뒤 원주교구 사회개발위원회 및 사회복지사업 담당을 맡은 이래 교구 사회사업국장, 독일 연수, 전국 사회복지협의회 회장, 원주 가톨릭 종합사회복지관 관장 등을 거쳐 1990년부터 천사들의 집 원장과 중증 요양원장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두 7세 이상 18세 미만의 정신지체 2~3급과 1급 장애 아이들에게 재활의 꿈을 심어주고 있다. 아프리카 등 해외 원조에도 큰 힘을 쏟고 있다.
“하느님이 지금 여기에 계시듯,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도 지켜져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그 원칙은 바로 ‘지금, 그리고 여기’(hic et nunc),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돕는 것이지요. 즉각적인 사랑의 실천, 그것만이 우리 중에 가난하고 하잘 것 없는 형제의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놓치지 않고 대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언제나 다짐하고 확인해야 할 일입니다.”
글 / 최홍운 alsemffp34@naver.com
사진/ 최주성 ritts2000@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