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3 화성 용주사
●용주사_정조의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진 절
보경스님은 융릉의 이장지를 찾아다니는 정조를 만나기 위해 화성 근처에 머물며 '부모은중경'을 설하고, 이 너머에 능지가 있다고 진언했다. 정조는 부모은중경 설법에 깊이 감동을 받았고, 보경스님은 용주사 중창의 도총섭을 맡아 4년 만에 145칸을 갖춘 대찰을 완성했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니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龍珠寺라 했다.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의 능침사찰로서 제사 시 물자를 준비하기 위한 조포사이며, 능침을 수호하고 명복을 빌게 하는 원당사찰이다.
특기할 점은 용주사 창건이 정조가 직접 명하여 국가공사로 이루어졌으며, 비용도 왕실, 중앙 및 지방의 관가와 전국적인 모금으로 충당하였다.
관주도로 지어서인지 특이한 사찰구조를 이루고 있다. 홍살문이 있고(지금은 기둥만 남아있다) 사천왕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궁궐의 대문처럼 보이는 삼문각이 있다. 삼문 옆으로는 마치 사대붓집 행랑채와 같은 건물이 길게 차지하고 있다. 절기마다 찾아오는 임금의 행차에 필요한 사용처였을 것이다. 삼문을 들어서면 왕궁에서나 이름붙이는 천보루가 웅장하게 막아서고, 천보루 앞에 작은 석탑 한 기가 가람의 중심을 잡고 있다. 탑이 대웅전 앞이 아닌 누각 앞에 놓여 특이하다. 대웅전을 오르는 계단 소맷돌 또한 특이하다. 원형 표면에 비운문, 북 모양의 막음돌에 삼태극과 모란문양을 새겼다. 융릉의 정자각 계단의 소맷돌에도 이와 똑같이 되어 있다. 계단을 올라서면 대웅전을 정면으로 탑이 놓여야 할 자리에 마치 왕릉의 참도와 같은 길이 놓여 있다.
854년 신라 문성왕 16년, 염거화상이 갈양사 창건
970년 고려 광종 21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수륙재를 개설
1636년 인조14년 병자호란으로 소실된 채 폐사
1790년 정조14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크게 다시 짓고 원찰로 삼음
▶사천왕문 : 초창 때에는 없던 요즘 건물
▶입석 : 도차문래到此門來 막존지해莫存知解_이 문에 들어오면 아는체 하지 말라. 일주문인양 입석이 있다.
▶삼문 : 궁궐양식
▶천보루
관아나 궁전의 건물처럼 아래층이 모두 돌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2층 누각 삼면에도 난간을 둘러 웅장하게 만들었다.
▶용주사대웅보전(보물 제1945호)
대웅보전 편액이 정조의 친필이다. 다듬어진 장대석, 지붕위의 용두, 편액좌우의 용, 닫집 등 능침사찰의 주불전으로 권위와 격식, 시대성을 잘 간직하고 있다. 단청을 제외하고 초창 때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도편수는 문언(장흥 천관사 승려)이고, 단청 도편수는 민관으로 당대 최고의 승장들이 건축하였다.
▶목조삼세불좌상
석가모니불은 정읍 내장사의 계초, 아미타불은 지리산 파근사의 봉현, 약사여래불은 간성 건봉사의 상식 등 팔도를 대표하는 조각승들이 모여 각각 조성한 것
▶용주사대웅전후불탱화
김홍도의 감독하에 조성된 대웅전 후불탱화는 우리나라 최초로 탱화에 서양화의 음영기법(일명 태서법)을 도입한 예가 되었다.
탱화 가운데에는 '주상전하 수만세, 자궁저하 수만세, 왕비전하 수만세, 세자저하 수만세'라고 쓰여있다. '자궁저하 수만세慈宮邸下 壽萬歲'는 임금님의 어머니께서는 만수무강하십시오 라는 뜻이다.
대웅전 왼편으로 범종각, 천불전, 시방칠등각이 있다.
▶범종각_용주사동종(국보 제120호)
종머리에 음관과 함께 있는 용조각이 신라 종과는 달리 한 발을 들고 있는 고려 종의 특징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종몸에는 비천상과 함께 결가부좌한 삼존상이 새겨져 있다. 고려 종으로는 처음으로 삼존상이 새겨져 있는 범종이다.신라 문성왕 16년 5월에 갈양사를 창건하고 이 범종을 주조하였다고 종몸에 음각으로 새긴 명문은 후대에 새긴 것이다.
▶천불전(노전or향로전 자리)
▶시방칠등각(삼성각) : 칠성탱이 김홍도 그림으로 알려졌으나 확실치 않다.
대웅전 오른편으로는 전강대종사의 사리탑, 호성전, 부모은중경탑, 지장전, 법고각이 있다.
▶전강대종사의 사리탑
조선말인 1898년 태어나 불교에 출가하여, 당시 대선지식인이었던 해월 해봉 한암 용성 보월 만공선사에게 모두 인가를 받고, 25살에는 만공선사로부터 그 법을 이었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통도사의 조실로 추대되어 전국에 많은 선원을 개설하였다. 1969년 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용주사가 선풍을 날리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974년 12월 2일 인천 용화 선원에서 좌탈입망하였다.
▶부모은중경탑
▶호성전 : 사도세자(정조 부), 혜경궁홍씨(정조 모), 정조, 효의황후(정조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지장전
▶법고각
▶홍제루 : 천보루를 대웅전쪽에서 보면 홍제루이다. 홍제루 현판은 한반도안에 일체유심조를 새긴 김찬균의 낙관이 있다. 홍제루 양 옆으로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이 있다. 내부에는 용주사상량문 판각, 잉어모양의 목어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금강경 백팔배 기도를 드렸다.
▶나유타료(승당, 묘향산 보현사 의섭스님이 도편수)
▶만수리실(선당, 간성 건봉사 운붕스님이 도편수)
▶수각
갈양사 시절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수륙재를 개설한 흔적
▶용주사의 성보박물관은 명칭이 효행박물관이다.
▶부모은중경판
정조는 억울하게 이승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고 추효하기 위해 1796년 목판에 새겼다. 목판 54매는 한역·국역경문·변상도로 되어 있다. 정조는 당대의 화원으로 김홍도를 가장 아끼고 총애했으며, 그림에 관한 한 모든 것을 김홍도와 의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니 그림에 김홍도의 영향이 많았을 것이다.
▶용주사상량문
1790년 정조가 용주사를 건립할 때 정조의 명으로 채제공이 직접 짓고 글씨를 쓴 것이다. 중국의 소주지방에서 생산된 공단에 쓰였는데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퇴색하지 않고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상량문의 내용은 용주사의 건립 내력과 공사날짜 등을 기록하고 있다.
▶전강대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