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7월 5일 대한민국의 가장 모범교사였던 장휘국선생이 해임된 날 6시, 나는 『교육청이 참 교사 목 자르는 데냐?』라는 피켓을 크게 만들어 들고 광주교육청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퇴근하러 나오던 교육감 차와 뒤따르던 차가 모두 다시 청 안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비상이 걸린 것이다. 당시에는 참교육 교사들의 항의 집회가 빈번하여 내 뒤에 많은 데모대가 있는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나 한 명만 말없이 서 있으니 안심하고 모두 퇴근을 했고, 나는 당시 교육청 국장이던 은사님에게 피켓을 빼앗기고 1인 시위를 마쳤다. 그 후 휘국은 단식과 교육 민주화 운동 등 대단히 어렵고 힘든 투쟁을 거쳐 5년 만에 복직이 되었고 다시 모범교사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광주시민들의 인정을 받고 8년간의 교육위원을 거쳐 2010년에 직선 1기 광주광역시교육감에 당선되었고, 내가 저 때문에 1인 시위를 했던 그 교육청 수장이 되었다. 그리고는 하도 훌륭하게 잘하니까 전례 없이 내리 3선을 하였고 무려 12년 동안 그가 꿈꿔 왔던 교육의 혁신 즉, 『촌지 없는 청렴 교육』 『함께 배우고 나누는 행복한 교육』을 실현하였다.
참교육을 위한 원대한 꿈을 이룬 그는 지난 6월 29일 52년 4개월을 아낌없이 몸 바쳐 헌신했던 교육현장을 멋지게 떠났다. 「학력 위주의 주입식 교육이 아닌, 질문이 있는 행복한 학교」를 완성해 놓고……
그는 퇴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린이 청소년 여러분.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스스로가 역사와 삶의 주인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십시오. 다만 자신의 양심이, 하나님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장끼 휘국은 충북 단양 출신으로 고등학교 때는 우리 학교 앞 담 너머 셋집에서 부모님과 5남 2녀 등 아홉 식구가 아주 어렵게 살았다. 그러나 가족 모두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집에 가보면 가족의 행복한 모습이 마치 천사들이 모여 사는 집 같았다. 우리는 함께 광주교육대학에 진학했고 그 착한 장끼는 나를 만나 놀기에 바쁜 2년을 보냈다. 박영길과 셋이는 똑같은 머저리 밥통이어서 마음에 드는 예쁜 여학생이 있어도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못한 채 발령을 받았는데, 휘국이는 어떻게 Slow Island인 완도 청산도 면장님 딸 김덕희 선생님을 꼬셨는지, 평생을 그 아내의 복으로 출세도 했고 잘 살고 있단다. 그 분은 아마도 사람을 볼 줄 아는 선견지명이 있었겠지. 휘국이 첫 발령지가 영광 백수서초등학교 인데, 정진탁군의 고향이라 터도 좋았든갑다. 거기서 짝을 만났으니.
이제 장끼는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박가이버인 영길이는 당장 자기 캠핑카에 휘국을 싣고 내게 달려왔다. 그 옛날 머저리 밥통시절처럼 셋이서 전국을 돌며 바보들의 추억을 더듬어보자고. 그리고 아직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두 발로 걸으며, 정신이 멀쩡해 헛소리 않음을 스스로 축복하자고. 해서, 8월 초에는 셋이 무작정 떠나기로 계획을 세웠다. “장끼 휘국아. 긴 세월 큰 일 하느라 수고 많았다.
인자 싹 다 잊어뿔고 신나게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