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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聖靈(성령)으로 풀어 가는 성경 通讀(통독) 영해’ - 창세기 11장 (9P)
창11:1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 오셨더라.
6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자, 우리가 내려 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 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10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11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2아르박삿은 삼십오 세에 셀라를 낳았고,
13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4셀라는 삼십 세에 에벨을 낳았고,
15에벨을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6에벨은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았고,
17벨렉을 낳은 후에 사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8벨렉은 삼십 세에 르우를 낳았고,
19르우를 낳은 후에 이백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0르우는 삼십이 세에 스룩을 낳았고,
21스룩을 낳은 후에 이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2스룩은 삼십 세에 나홀을 낳았고,
23나홀을 낳은 후에 이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4나홀은 이십구 세에 데라를 낳았고,
25데라를 낳은 후에 백십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6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27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하란은 그 아비 데라 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29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30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지구 연령은 약 46억년이라고 한다.
현생 인류의 출현은 8,000-10,000년 사이이다. 현대인의 조상이라는 크로마뇽인은 약 30,000년 전에 나타 났다. 기원전 3,000년 경에 노아의 대홍수가 있었다.
대홍수가 휩쓸고 지나 간 후에, 사람들은 시날 땅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 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꼭대기가 하늘에까지 닿는 거대한 탑을 세우려 했다. 그들은 당시에 모두 한 가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창11:1절:1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라는 말씀은 이들 모두가 한 입술, 한 언어로 말했다는 것을 알려 주는 말씀이다.
발음이 같았다는 뜻이다.
이 언어는 원시 셈족 방언으로 추정된다.
창11:2절:2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방주가 머문 아라랏 지역을 떠나 유브라데 강변의 바벨론 평지로 이동해 간 것을 말한다. 시날 평지는 바벨론 평야이다. 유브라데와 티그리스 강 사이의 크고 비옥한 지대를 말한다. 이 지역은 최초 고대문명의 발상지 중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비옥한 초승달 지대이다.
창11:3-4절:3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바벨탑 건축은 니므롯의 선동 하에 되어졌다고 본다. 이 때는 홍수 후 약 100여 년이 지난 시간이다. 니므롯은 고대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왕으로 본다. 도중에 건축을 중단한 이 탑은 후에 나보폴라살, 혹은 느부갓네살 2세에 의해 재건축 된다.
사람들은 벽돌을 굽고, 역청을 발라 가며 하늘 높이 탑을 쌓아 올라 갔다. 바벨론 충적 평지에서는 건축용의 큰 돌을 구하기 어려웠으므로, 진흙을 불에 구운 벽돌 제조법이 일찍 발달했다. 팔레스틴의 벽돌들은 햇볕에 말린 것으로, 그 견고성이 희박하다. 그러나 바벨탑의 벽돌은 불에 구운 아주 견고한 것이었다. 역청(아스팔트)이 접착제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하여 열심히, 열심히 탑을 쌓아 갔다. “성”은 도시를 가리키고, “대”는 탑을 가리킨다. 바벨탑은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서남쪽 “힐라” 마을의 북쪽 6 Km 지점에 있다.
바벨탑 기사는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잘 나타 난다. 이 시기는 기원전 3,000년 경으로 추정한다. 바벨탑의 구조는 직사각형의 구조물로서 계단식이며, 비스듬한 경사로 이어지며 꼭대기까지 올라 간 것이다. 맨 위 꼭대기에는 예배 처소가 있었다. 바벨탑의 지구랏은 바로 신전탑이었다. 이것은 가나안의 믹돌(파수대,망대)과는 다른 것이다.
헤로도투스는 이 탑의 맨 아래쪽 기대와 맨 위의 예배소까지를 8층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벨탑이 위치한 면적은 길이 460 미터, 폭 420 미터, 탑 기대의 높이는 91 미터, 성벽의 두께는 15 미터, 탑 높이는 90-92 미터라고 한다.
바벨탑의 구조물을 발굴한 콜드웨이는 헤로도투스의 기록이 아주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7층의 지구라트는 탑의 지계가 91.4 M, 높이가 98.5 M로 최고 높은 상단에는 주신 마르둑을 모신 신전이 있다.
다신교 사상은 바벨탑에서 유래한 것 같다. 언어의 혼란이 다양한 신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 되었다.
왜 바벨탑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나쁜 것인가?
창11:5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 오셨더라.
6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자, 우리가 내려 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 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1.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창11:3-4절:3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인간의 3대 욕구 중의 하나인 헛된 명예욕의 추구이다. 이생의 자랑이다.
요한일서2: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자고 한 것은 자신들의 이름을 천하에 떨쳐야겠다는 인본주의적 발상이기 때문이다. 공명주의는 반신앙적 행위이며, 교만의 극치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나, 주의 일을 하다가 이름 내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힐 때가 많다.
2.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는데, 인간들은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한다.
창1: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시는데, 인간들은 그 하나님을 신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창9:11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2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13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14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 나면,
15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6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그래서 하늘 높이 성을 쌓았다.
창11:3-4절:3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하나님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세계적 단일국가를 만들어 거대한 조직에 기계처럼 움직이는 인간사회를 만들려 한 의도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였던 것이다.
이는 인류 역사 이래 계속되어져 온 사탄의 시도이다.
지금 세상이 이렇게 세계단일정부, 세계전체국가로 흘러 가고 있다. 나찌쯤, 파시즘은 언제나 다시 되돌아 오는 것이다.
전쟁으로 수 없는 생명을 죽이는 러시아의 푸틴의 작태를 보라.
시진핑은 뭐가 다르며, 김정은은 뭐가 다른가?
저 불의했던 주사파 문재인 정권은 뭐가 다른가?
역사 이래 세상에는 분명히 사탄의 정부과 군대가 항상 존재한다.
흩어지는 삶을 가진 교회는 부흥한다.
성도는 영적으로 무장하여 세상으로 흩어져야 한다.
교회는 영적 훈련소이다.
성도는 훈련 받고, 영적 전방으로 재배치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
3.교만 때문이다.
인간들끼리 단합하여 위대한 일을 창조하려 했다. 인간 중심의 단합은 안된다. 하나님 중심으로 뭉쳐야 산다. 하나님 중심으로 뭉쳐야 일이 성사된다.
지상의 언어는 주요 어군이 130여 개, 약 3,000여 종에 달한다. 이들 언어는 유사성이 없이 각자 독자적 언어 체계를 갖고 있다.
바벨탑의 언어 혼란은 오순절의 방언이 터짐으로써, 수습이 되었다. 방언은 언어를 초월한 언어이다.
방언의 은사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천석 목사님이 미국에서 부흥회 하다가 방언으로 설교했더니, 티벳 사람이 통역을 했다.
장차 우리의 언어 장애는 다 해소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창 11:10-32절의 족보
1.택함 받은 사람들
창 11:10-32절까지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르기까지의 셈족의 계보를 말씀한다. 選民(선민)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실 때에, 언제나 사람을 들어 사용하셨다. 청함 받은 자와 택함 입은 자가 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자들을 불러 사명을 맡기시는 것이다. 아브람은 수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님이 들어 쓰시려고 택한 선민의 조상이다.
구원사를 가만히 살펴 보면, 예수님에게 이르기까지는 하나님께서 믿음의 가계를 점점 좁혀 가시다가, 예수님 이후에는 믿음의 가계를 다시 점점 넓게 확산시켜 가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대체적으로 인류 종말의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떳 보면 복음은 땅 끝까지 전해졌으며, 더 이상 복음이 확산 되지 아니하는 시대에 들어 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짜 전도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의 가족, 나의 이웃, 나의 사랑하는 이 등이 그대로 전도 대상자로 남아 있다.
진정한 선교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쉬임없이 이웃에게 나아 가서, 직접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나아 가, 이슬람 제 3세계에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
오래 전에 기도원에 갔더니 강사 목사님이 “지금은 은혜의 문이 점점 닫혀져 가고 있다.”고 말씀했는데, 참 숙고할 만한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초신자들은 은혜를 잘 받고 믿음이 죽죽 자라는데, 기성 신자들은 귀만 닳았을 뿐 행함이 전혀 없는 기형적인 신앙인들이 다 되어 있는 현실이다. 아니, 아예 영적인 입을 다물어 버렸다.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이 희망스럽지 못한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며, 새로운 갱신이 필요함은 우리가 다 인정하는 바이다. 성령의 행함과 실천으로 성령의 파도가 다시 물결치게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보다 분명한 사명을 끊임없이 확인하며,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으로 만들어 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2.수명의 단축
본문에서 나타나는 뚜렷한 사실은 인간의 평균 수명이 800-900세에서 홍수 이후에는 400-500 세로, 바벨탑 사건 이후에는 200여 세로 줄어 들었다는 것이다.
죄의 영향력과 생명력의 감퇴가 그 원인이다. 지금은 평균 수명이 불과 80-90세에 불과해졌다.
성도들의 장례를 집례해 보면, 85세 전후에 대부분이 죽는다. 그것도 강건한 분이 80-85세 전후이다.
우리의 남은 삶을 계산해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그래도 거기에 사고사, 질병사, 재난사는 아예 포함되지 않는다.
1.우리의 죄는 결국 우리를 죽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의 은총으로 우리를 일으키시고, 죽음을 정복하게 하셨다.
2.죄의 오염이 우리를 죽인다.
세상은 각종 죄의 오염의 결과로 신음하고 있다.
3.사고와 재난이 우리를 죽인다.
4.하나님의 죽음의 시간이 우리를 데려 간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여 사명을 감당하다가, 주님의 정하신 시간에 떠나 갈 일이다.
16절에 “에벨”이란 이름이 나온다.
“건너다”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일컫는 “히브리”란 발음이 나왔다.
‘히브리’ 란 원래 그 뜻이 ‘강을 건너 온 사람’ 이란 뜻이다.
18절의 “벨렉”에 이르러 바벨탑 사건으로 인구가 세계 도처로 분산되는 사건이 있었다.
3.아브람의 계보
26절 이하에는 아브람의 직계 계보가 나온다. 아브람의 연대는 기원전 2,166년 경이다. 세계사가 선민사로 넘어 간다.
창1장-11장까지는 원시 세계사이다.
창11장 하반부부터는 선민사, 족장사가 구원사가 펼쳐진다.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롯은 하란의 아들이다. 사래와 밀가는 하란의 딸이었다. 이들은 삼촌과 결혼했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근친 결혼이 많다. 그러나 율법은 근친결혼을 엄격히 금지한다. 근친결혼은 유전학적으로 좋지 못하다.
우리 나라 법에도 직계 8촌 간의 동성 동본의 근친결혼을 금하고 있는데, 타당성이 있다. 2-3만 쌍 전도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곧 폐지된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바람직한 것이라 사료되지만, 성서적 맥락에서 볼 때에는 깊이 숙고할 문제이다.
28절에서 하란은 그 아비 데라 보다 먼저 죽었다. 성경 기록상 자식이 아비 보다 먼저 죽은 최초의 선례이다.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이다. “부모의 무덤은 산에 만들고, 자식의 무덤은 부모의 가슴에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사망의 권세는 나이나 빈부와 상관없이 무차별로 부지불식 간에 찾아 든다. 고난도, 시련도 주어진 대로 고스란히 받으라. 하나님이 고난의 불도가니에서 나를 단련하신다면 피할 길이 있으랴 ?
삶의 평안을 간구하자.
31절에 데라는 온 가족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려고 길을 나섰다. 아브람을 부르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여건을 조성하신 것이다. 갈대아 우르는 현재는 내륙 21 Km에 위치해 있지만, 당시에는 항구였다.
데라는 하란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과 그 도시의 우상숭배 및 타락에 대한 염증, 그리고 아브람의 뜨거운 소명에 감동하여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한 것 같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사의 깊은 섭리가 숨어 있었다.
하나님의 선택과 함께 나의 선택도 중요하다.
물론 성령님이 인도하시지만...
교회 등록도, 세례를 받고 직분을 받음도, 목사를 선택함도 다 나의 선택이요, 성령님의 선택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나의 선택이 남은 내 삶의 축복과 인생의 질을 결정한다. 하나님의 뜻에 항상 귀를 기울이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이다.
1.교회 선택을 잘 하자.
2.나의 멘토인 주의 종에게 전심으로 동역하고,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 되라.
사랑하고, 순종하고, 따르고, 받들라.
2022.9.11.주일. 신창숙 사모 오전 9:29. 나는 나 만큼 하나님의 도움과 은총이 필요한 이가 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때로 나는 한 없이 무력하고 약한 자신을 느끼곤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나는 자신에게 기대할 아무런 힘이 없으니까,
하루 24시간 내내 하나님 만을 의존합니다.
만일 하루가 24시간 보다 몇 시간 더 있다 하더라도,
나는 아마 그 시간 역시 하나님의 도움과 은총을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의 비결은 간단합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나는 그리스도와 사랑 속에서 하나가 됩니다.
짧지만 사랑 속에서 가득 찬 기도를 합니다.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려면,
기도와 가난과 희생의 삶이 필요합니다.
[배종부] [오전 9:30] 신창숙 목사님의 기도의 묵상은
참으로 깊은 감동을 줍니다.
심금을 울리는 말씀을
깊이 가슴에 새깁니다. 아멘.
[신창숙 사모 이석원 목사 새생명교회] [오전 9:35]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치지 않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을 하려면, 먼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곧 가족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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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가족을 가장 사랑해야 합니다.
가족 간에 진정 원수가 많습니다.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남도 사랑합니다.
만일 어떤 이가 이기적으로 가족만 사랑한다면,
그는 천국에 아무 상급이 없습니다.
가족을 넘어
이타적인 넘치는 순수한 사랑으로 나아 가야 합니다...
‘섬김과 나눔’ 의 사랑의 대행진은
우리 일생의 사명이요 숙제요 과업입니다.
[신창숙 사모 이석원 목사 새생명교회] [오전 9:43]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항상 쉬운 일은 아닙니다.
참 사랑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상처를 입히지만,
여전히 기쁨을 줍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기쁨을 나누려고,
오늘 우리가 있는 곳에 존재하도록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아파할지라도
서로 사랑하고, 자신을 내주기를 바라십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것을 주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으로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