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삶, 사람: 사랑하다…
입추(立秋): 2022년, 8월 7일
살다, 삶, 사람: 사랑하다(사모, 思慕), 두루(깊이) 생각하다(사유, 思惟).
사람이 뭣꼬를 구하고자 길을 간다고 하는 경우, 살아있다는 것이 먼저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고, 그 행동을 실행하는 이는 사람, 즉 인간(人間)이다. 사람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나를 중심으로 하기보다 ‘우리’라는 인간 종을 다루게 되며,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느냐?고 물을 수 있다. ‘우리’라는 사람은 간략하게 세 마디로 ‘태어나서 살다가 간다’. 저넘어로,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라는 제목부터 불교 냄새가 난다.
고대 그리스 형이상학이나 대부분의 유일신앙 종교는 태어나기 전에 어디에 있다가 이곳으로 왔다가 다시 어디론가 돌아간다고들 한다. 어디라는 것이 장소, 터전, 공간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온다고 해야 하니 어디서 오느냐고 인과 관계처럼 묻는 것은 당연하다. 현대의 진화론을 생각하면 지구의 움직임(운동)이 단백질을 만들고, 원시 생명체를 만들고, .. 등등으로 기나긴 세월을 거쳐서 인간이 생성되고 형성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런 후자의 설명을 형이심(深)학이라고 하자. 전자의 형이상학은 다른 곳, 또는 어떤 위상에서 이 곳(현존)으로 왔다고 해석하는데 비해, 후자의 형이심학은 자연이 자기에 의해 자기 창조를 하였고, 여러 종은 자기 노력에 의해 물질과 더불어 자기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어째 거나 두 철학적 생각은 어디로부터 또는 무엇으로부터 사람이라는 것이 여기에 살다가 간다고 한다. 둘 사이의 지루한 논쟁거리를 젖혀두면, 한가지 분명한 것은 여기에 현존하는 사람이 ‘산다’, 삶,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형이상(上)학적으로든 형이심(深)학적으로든 산다는 사람은 태어나서 있다가 간다는 과정에서 ‘한 평생’이란 삶이 있다. 한 평생이란 시간적 기간을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할 수 없지만 각자는 각자 나름대로 평생이라는 삶의 “경험적 총체성”이 있다. 두 철학적 방식에서 선전제로서 총체성을 다룬다고 하면, 각각은 자기의 사고방식 또는 사유방식에 따라 일생이라는 총체성을 알 수 있느니 없느니 말할 것이다. 인간으로서 경험의 총체성은 인식의 차원에서는 결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결정된 삶을 알고 있는 이는 없기 때문이다. 단지 미래가 열려있기에 알지 못한다는 것을 넘어서, 과정에서 여러 우여곡절을 하나하나 다 알고 있기에는 인간의 관심과 지성이 너무 좁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수학에서 원의 정의 또는 삼각형의 정의는 단번에 알 수 있다고 한다. 수많은 원들과 삼각형이 있어도, 모든 원은 2πr이며모든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직각이라고 판단하고, 또한 그것이 진리라고 여긴다. 불변하고 완전한 진리로서 도형의 원리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경험으로서 삶의 총체성 또는 단위(통일성)은 어느 누구 하나도 동일한 길을 간 것 같지는 않다. 왜 도(道)가 무엇인가를 라고 묻고, 답도 하지 못하면서 가는 거야 그리고 가는 동안에 노력하는 거야. 수신(修身), 점수(漸修), 물이선소이부지하고...
그런데 모든 삼각형, 즉 삼각형의 ‘전체성’을 안다고 하는 사고와 경험의 ‘총체성’으로 삶의 과정의 일체를 알려는 사유는 왜 다른가? 판단하고 안다는 하는 순수 사변의 영역은 인간의 오성(지성, 이성)이 미리 선전제로서 규정했다는 것을 알아채는 데는 수학적 작업을 하였다고 하는 기록의 3천여년을 지나서야, 그 때야 그게 절대 공간에서 성립하는 거야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원리에 다를 정리와 정의라는 수학적 개념작업은 경험의 총체와는 연관이 없다는 것을 안다.고대의 형이상학이 수학을 그것도 원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완전함과 불변성에 매료되었던 것이 아닌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늘에서 즉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에 비해 한평생 또는 일생을 누구나 겪었고, 겪고 있고 또 겪을 것이고, 살아가는 과정은 하나의 원리로 또는 일반적인 법칙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다양하다는 것이다. 즉 삶에 대한 사유에는 답 아닌 답이 있고, 길 아닌 길이 있다. 원리 없는 원리가 있으니, 공즉시색이고 색즉시공이라는 표현과 닮았다. 이런 사유는 원 또는 삼각형을 정의하고 판단하는 사고와는 다른 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고에는 완전하고 보편적인 진리가 인간 이전에 있고 있었다고 믿고, 사유에서는 경험하면서 규정하고 노력하는 과정은 현실에서 인간 속에 또는 인간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당연히 이런 진리를 아는 능력이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형이심학은 그런 진리는 인간이 삶아오면서 만든 틀에 지나지 않고, 한평생이란 총체성은 보편적 진리라고 말할 수 없지만 하나의 단위(l’unité)로서 통일성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단위들이 각각이 다르지만, 서로가 교감하고 공감하는 흐름이 있다는 점에서 통일성은 이해하는 것을 벩송은 직관이라 부른다.
삶에서 인간을 소개(재소개 또는 재현)하기보다 깊이 있게 인식(재인식)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의 둥치에서 원들의 숫자를 세면서 5백년의 과정을 사고하는 것은 그 나무의 재현을 사고하는 것이다. 5백년이라, 이 나무가 태어나는 시기인에 1520년에는 퇴계가 어렸으니 이 나무를 보았을까? 1620년에는 임란은 겪고 살아있으면서 앞으로 닥칠 호란을 생각했을까? 과정은 길다. 기원전 3천여년, 즉 5천년전에 기제의 피라믿들은 밑변이 나란히 평행한다. 평행선의 원리를 알았고 사용할 줄 안다는 인간의 지성의 기능은 오랜 것이라는 생각, 이에 비해 140미터를 2톤의 돌로 그 당시에 쌓아 올리려는 인간의 노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후자에서 형이심학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완전한 공리체계 인줄 알았던 2천5백년의 지성(이성)이, 지성의 한계가 있다고 여기는 사유의 전개가 15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속 좁은 이성이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고, 지구를 망치는 데는 200여년 밖에 안 걸렸다고 생각해보라.
살다, 삶에서 길(도 道)이 있다고 하는 것도, 수학과 물리학을 동원한 우주선의 길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도 일반 사람들이 잘 안다. 수학과 물리화학을 통해서 아는 만큼이나, 사람의 삶의 총체성을 알고 있는가를 질문해보면, 마치 수학과 물리학을 통해 물체를 아는 만큼이나, 삶과 일생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물어보면 사실은 수학도 잘 모르고 삶은 더더욱 모른다. 그럼에도 인간이 형이상학이라는 지적 체계로 만들어 고등학교까지 평균 교육의 수준을 인정하는 정도에서 세계를 알 듯이, 그 수준에서 인간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계를 아는 형이상(上) 학과 삶의 총체성을 아는 형이심(深)학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
수학의 원리가 물질계에 법칙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처럼 원리와 법칙으로 우리 신체에 접근하였을 때 아는 것은 신체를 물체로 다룰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아는 것이지, 생명체로서 우리 신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성(오성이든, 이성이든)의 인식능력으로 아는 것이 한계가 있다는 것, 그것은 안다는 것이 한계 안에서만 재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체는 지구 역사상 동일한 방식으로 재현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만일 그런 일이 지금이라도 있다면, 지구상의 70억 인구 중에서 동일한 모습 또는 삶의 총체성을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다. 이렇게 보면 형이상학과 형이심학의 차이는 매우 크다. 차히이다.
형이상학은 좁은 한계(경계)에서 자기 완결성을 통한 체계 내의 진리를 강조 한다. 한 경계 안에서 판단이다. 심판하다고 한다. 이에 비해 형이심학에서는 총체성이 70억 다 다름(차히)에도 살아가는 경향의 유사성과 성향의 친화성, 노력의 필요성, 상호부조의 당연시(품앗이) 등을 알고 살아간다. 이런 경향을 이성이니 판단이니 하지 않고, 교감이니 공감이니 라고 말한다. 통일성(단위)들의 계열들 사이에 교감과 공감, 공명과 조화는 노력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어렵다. 이쯤에서, 형이상학의 길은 간단하게 공간적 일반화를 통해 통일성과 보편성을 인정하는 것인데 비해, 형이심학은 시간적 과정에서 차이나는 계열화의 단위들 사이에서 하나의 일반의지로 묶을 수 있는 노력과 계약 그리고 서로 간에 권리의 인정을 포함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각 단위의 총체성을 풀어내고 흐름을 퍼지게 하는 것이다.
산다는,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데, 형이상학을 사고하면서 세계에 도구를 만들면서 편리하고 또한 다른 동물로부터 안정을 유지하고 자연재해로부터 편안을 찾는 노력도 한다. 그 노력에서 사물을 다루는 사고를 하는데 비해, 형이심학에서는 각각이 다른 인간들이 삶에서 합의와 교감을 찾는 것을 쉽지 않은 만큼이나 계약처럼 잘 교집합을 이루어 인간들 사이에 평등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끊임없이 생각하는데, 이 생각에는 먼저 이런 생각을 했던 사람 또는 실행했던 사람을 사랑(사모)하는 길도 찾는다. 소크라테스의 도, 루소의 도가 사랑하는 길에 현존한다. 각자에게서 욕망의 실현이란 사랑하는 이들을 사모하는 방법을 공유하는 길, 두루 살펴서 생각하는 길이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영혼이 잔존한다기 보다 길을 가는 드라마가, 싯달다의 드라마, 플로티노스의 드라마, 벩송의 드라마가 여전히 우리들 주위에 맴돌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회변혁에서는 로베스삐에르가, 생쥐스트가, 레닌이, 마오가 ..
살다, 삶, 사람: 사랑하다(사모, 思慕) 또는 두루(깊이) 생각하다(사유 思惟)는 사는 과정에 연관이 있다. 삶이 먼저이고 철학은 다음이다. 즉 형이심학이 먼저이고 형이상학이 다음이다. 지금까지의 철학사를 뒤집어서 다시 생각하고 두루 깊이 사유하며, 함께 큰 수레를 타고 살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수레를 끌었던 이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삶의 총체를 사유하는 것이, 산다, 삶, 사람의 길이다. 그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유하는 세상, 탐만치에서 벗어나서 고통과 고독을 함께 해소해 나가는 세상, 즉 인도주의(humanitaire)와 인성자유주의(libertaire)를 사유하며 살아가자. 그리고 형이상학의 사고에서 형이심학의 사유로, 인간이 인간을, 가버린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랑(사모)하는 길이다. 현존에서도 8천만을 사랑하며 널리 깊이 생각하자.
인간이 삶에서 탐모치(貪謀癡)를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탐욕, 무모, 치기를 버리자.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극치를 뒤바꾸어 심(深)학을 깊이 사유하자.
자본 그만큼이나 절대적으로, 지성(이성, 로고스)이 완벽하게 있다고 믿는 오만(傲慢), 또한 자본을 통한 자연을 지성에 의해 다스릴 수 있다는 탐욕(貪慾)을 버리라, 이 두 가지를 주장하는 것이 착각이라고 벩송이 창조적 진화 3장에서 말했다. 지성주의라면서 반지성주의를 엄벌하겠다는 그 탐욕과 무모 그리고 오만과 치기(어리석음)가 극에 달한 이 달에, 그 초순에 27퍼센트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 탐모치에 표식이 아니겠는가.
형이상학보다 형이심학으로 팔천만이 함께 수레를 타고 가는 사유에서 새로운 삶, 즐거운 삶이 이루어진다. 진실로!
-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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