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 목록
1)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마른 전투(1914)
2) 1차 이프르 전투: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1914)
지쳐버린 군대
1914년 12월이 되었을 때 서부 전선은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벨기에의 대부분과 북부 프랑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독일은 전선의 주도권을 잡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전략적 우위를 점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 초기부터 밀려나기 급급하였던 프랑스는 마른(Marne)에서 회심의 크로스 카운터를 날렸지만 전세를 뒤집은 역전타는 아니었고 간신히 한숨만 돌린 상황이었다.
예상보다 빨리 참전하여 독일을 놀라게 만들었던 영국은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였지만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하기 곤란할 만큼 지쳐있었다. 전쟁 직전 영국 육군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신속한 참전은 제대로 준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로 전쟁에 뛰어들었다는 의미와 같았다. 더구나 지형적으로 불리한 구역을 담당하다 보니 서부 전선 주요 참전 3국 중 가장 피해가 컸다.
원래 소수의 정예 직업 병사로 구성되어 있었던 영국군은 사격술 같은 개별 병사의 전투력은 뛰어났지만 중화기도 챙기지 못하고 서둘러 대륙으로 건너오다 보니 부대 간 전투에서 상당히 애를 먹어 무려 9만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예상을 벗어난 엄청난 손실에 놀란 영국은 인도 군단처럼 식민지 주둔군을 소환하여 투입하였고 본국은 물론 캐나다, 호주 등의 영연방국에서도 대대적인 병력 동원이 이루어졌다.
(1914년 인도 기병연대 소속의 병사. 전쟁 초기에 자원병으로 구성된 영국군은 대단히 선전하였으나 그해 겨울이 되기 전에 거의 다 소모되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영연방국과 식민지에서 부대가 차출되었다.)
덕분에 서류상으로는 8월보다 2배나 많은 40만의 병력이 서부 전선에 배치되었고 본토에서는 자원하여 모집된 80만의 병력이 추가 투입을 위해 준비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넉달 동안 정예병들이 거의 모두 소모되었기에 전투력은 이전보다 좋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난감했던 것은 숫자를 쉽게 늘릴 수 있는 병력과 달리 즉시 증산이 어려웠던 포탄과 탄약이었다.
크리스마스의 휴전
1915년 1월이 되었을 때 영국은 18파운더 포의 하루 포탄 소모량을 4발로 제한하였을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어렵게 끌고 와 전선에 배치한 중화기가 정작 필요할 때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고는 했다. 프랑스도 10월이 넘어서부터 전선에서 필요로 하는 포탄의 20 퍼센트 정도만 생산되었을 만큼 탄약이 부족하였다. 만일 이때 독일이 공세를 가했다면 연합군이 궤멸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가들도 있지만 독일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1914년 9월 1일 영국 제1기병여단 소속 1개 포대가 독일 제4기병사단의 진격을 4시간 동안 상대한 네리(Nery) 전투의 모습. 시간이 흐를수록 고질적인 포탄 공급 부족으로 영국 원정군은 애를 먹었다.)
상대적으로 생산이 원활하였던 독일도 전선이 급속도로 커지면서 제때 포탄을 공급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결국 이것은 그 어느 쪽도 이 전쟁이 이렇게 장기적인 총력전으로 치닫게 될 것이란 예상을 못했다는 뜻이다. 먼저 침공을 개시한 독일도 전쟁 전에 양면전을 염두에 두고 수립한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에서 불과 6주 안에 프랑스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예상했을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에 다가온 겨울은 본의 아니게 전선에 고요함을 불러왔고 종종 전쟁터와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플랑드르(Flandre) 부근에서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던 영국군과 독일군 병사들이 그해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진지에서 하나 둘씩 나와 중간 지대에서 선물을 주고받고 축구 경기를 벌이는 기적을 연출하였다. 예상치 못한 최전선 병사들의 일탈에 경악한 지휘부의 지시로 잠시나마의 평화는 막을 내리고 곧바로 전투가 속개되었지만 이는 크리스마스의 휴전(Christmas Truce)이라는 미담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1914년 크리스마스 당시에 양측 참호의 중간 무인 지대에서 만나 환담을 하는 양측 병사들의 모습. 비록 잠시 동안이었지만 격렬한 전쟁 중에 있었던 보기 드문 평화였다.)
독일의 전략 변화
이처럼 1차 이프르 전투가 막을 내리면서 전선이 일시적으로 소강 상태에 빠지자 양측 지휘부는 다음 전략을 놓고 고심하였다. 독일군 참모총장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은 영불연합군의 대응이 예상보다 격렬하자 이제 전쟁 초기에 세워 놓았던 단기전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보충이 이루어지면 한시라도 공세를 재개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14년 1차 이프르 전투 당시 수녀의 숲(Nonne Bosschen)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 영국군의 모습을 그린 기록화. 결국 독일은 격렬한 저항에 막혀 그해 서부 전선에서의 공세를 중단하였다.)
예정된 스케줄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뿐이지 서부 전선을 먼저 평정하여야 한다는 슐리펜 계획의 거시적인 부분은 아직 유효한 셈이었다. 그런데 지지부진한 서부 전선과 달리 당시 동부 전선에서 독일은 예상을 벗어날 만큼 잘 싸우고 있었다. 소수의 독일 제8군은 탄넨베르크(Tannenberg)에서 압도적인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둔 후 진격을 계속하여 러시아령 폴란드까지 점령하였다.
그런데 독일과 함께 싸우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상당히 고전 중이었다. 더불어 그동안 동맹국과 연합국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이탈리아와 루마니아의 연합군 참전이 확실해지자 러시아의 기를 확실하고도 조속히 꺾을 필요가 있었다. 연이어 대승을 이끌어 대중적 인기가 높아진 8군 사령관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와 참모장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는 동부 전선을 우선 평정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였다.
빌헬름 2세(Wilhelm II)와 수상 베트만홀베크(Theobald von Bethmann-Hollweg)가 이들의 의견에 동조하자 팔켄하인도 어쩔 수 없이 예비대와 서부 전선의 일부 병력을 동부로 이동시켰다. 비록 그는 이런 선택이 일시적인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이로써 전쟁 전 세워 놓았던 독일의 모든 계획은 완전히 무효화되었다. 결국 현재의 전선을 고수한 상태로 겨울을 나야 했던 서부 전선의 독일군은 더욱 깊게 참호를 파야 했다.
프랑스의 동계 공세
반면 독일의 이런 전략 변화는 지쳐 있던 연합군에게 전력을 회복할 수 있는 결정적인 호기가 되었다. 지난 넉달 동안 정신 없이 사방에서 달려드는 독일군을 물리치는 데만 급급하였던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Joseph Joffre)는 독일군의 움직임이 급격히 둔화되자 이제부터 반격을 개시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독일군을 일거에 섬멸하여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은 아니었고, 사실 당시 연합군에게는 그런 능력도 없었다.
조프르는 파리를 위협하는 요인의 제거가 시급하다고 보고, 랭스(Reims)와 아라스(Arras) 사이의 돌출부를 탈환하기로 결심했다. 20년 후 발발한 2차 대전 당시라면 좌우로 기갑부대를 돌파시켜 배후를 절단하고 일거에 포위 섬멸하는 전략을 사용했겠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이상을 실현시킬 수단이 없었다. 오로지 땅따먹기처럼 하나하나 점령하여야 했다. 그는 엄청난 소모전이 될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180km에 이르는 전선 전체에서 마치 빗자루로 쓸고 다니듯이 작전을 펼칠 수는 없었다. 조프르는 독일군의 보급로로 사용 중인 주요 철도와 도로망을 차단하여 압박을 가하는 방식으로 후퇴를 유도하기로 하였지만 정작 작전에 나설 수 있는 부대는 아르투아(Artois) 지역을 담당하던 10군과 샹파뉴(Champagne)에 포진한 4군 정도밖에 없었다. 여전히 프랑스군은 장비와 병력이 절대 부족한 상황이었다.
사실 조프르는 너무 조급하였다. 일단 지도 위에 그어진 전선 상황만 놓고 본다면 프랑스가 밀리고 있는 것이 맞으므로 어떻게든 빨리 점령지를 탈환하고 싶어했다. 이처럼 아직 부족한 것이 많았음에도 12월 17일, 제10군이 수쉐즈(Souchez) 방향으로 포격을 가하면서 프랑스의 동계 공세가 시작되었다. 3일 후에 남쪽에 있던 4군이 진지를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갔고 12월 말까지 프랑스의 공세는 성공적으로 보였다.
1차 아르투아 전투의 결과
프랑스의 공세는 보름도 되지 않아 서서히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애당초 충분한 포병 전력을 준비하지 못했기에 곳곳에서 문제가 속출하였던 것이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화력 지원에 나섰지만 중포들은 기동력이 부족하였고 애당초 설정한 작전 구역도 너무 넓었다. 반면 독일은 지난 1차 이프르 전투 이후 동부 전선으로 일부 전력이 차출되었지만 방어로 전환하면서 진지는 더욱 단단하게 축성된 상태였다.
프랑스는 독일의 방어막에 막혀 계속 제자리를 맴돌아야 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희생만 늘어나 1915년 1월 20일이 되었을 때 결국 진격을 멈추어야 했다. 그러자 곧바로 독일군이 반격을 개시하여 프랑스군을 밀어냈으나 그들도 기세를 계속 유지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프랑스는 2월 16일 다시 공세를 재개하였지만 상황은 한달전과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건 독일이건 계속하여 전선의 주도권을 잡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처럼 주고받기 식으로 이루어진 격전은 돌출부 양쪽으로도 확산되어 어느덧 서부 전선 전체에서 일상화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1차 대전 당시에 서부 전선에서 벌어진 지옥의 격전들이 워낙 많다 보니 1914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프랑스가 벌인 동계 공세를 소홀히 취급하는 경향이 많지만 프랑스가 25만, 독일이 15만의 사상자를 냈을 정도로 내용은 상당히 격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선의 변화는 없다시피 하였고 결국 3월이 되자 프랑스는 작전을 중지해야 했다. 조프르는 “이제 프랑스가 우위에 섰다”고 선언하지만 군사적으로 1차 아르투아 전투(First Battle of Artois)는 참담하게 실패한 작전이었다. 그런데도 우위를 주장하였던 이유는 프랑스의 패망을 막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1870년에 있었던 보불전쟁처럼 프랑스가 참담하게 굴복할 가능성은 사라진 것이 확실했다.
따로 놀기
조프르는 처음 동계 공세를 준비할 때 전선 북쪽을 담당하던 영국군도 함께 공격에 나설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영국군은 아직 손실을 회복하는 데 급급할 만큼 상황이 나빴고 더구나 오스만 제국을 침공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차출하기까지 했다. 결국 마음만 급했던 프랑스는 공세로 전환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서둘러 작전을 펼치다가 낭패를 보았던 셈이다.
어이없지만 이처럼 같은 편 정황까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을 만큼 프랑스와 영국은 별개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던 1918년에 가서야 겨우 연합사령부 결성에 합의할 정도였으니 그 이전의 난맥상은 굳이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다. 영국 원정군 사령관 존 프렌치(John French)의 주도로 1915년 3월 10일부터 실시된 누브 샤펠 전투(Battle of Neuve Chapelle)도 전쟁 초기의 협조 미비를 여실히 보여주었던 예다.
어처구니 없지만 프랑스의 동계 공세가 막을 내리던 그 시기에 영국은 별도의 공세를 계획하고 있었다. 당연히 공세를 벌인다면 프랑스와 영국이 사전에 치밀히 협조하여 함께 움직이는 것이 좋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영국군이 한창 재편 중일 때 제대로 의사타진도 하지 않고 부족한 전력으로 서둘러 공세에 들어갔고 정작 영국군이 준비를 마치고 공격에 나서려 하자 2달간 이어진 공세를 유야무야 끝내버렸다.
결국 3월 10일 영국은 단독으로 공세에 나서야 했다. 프렌치는 영국군 쪽으로 돌출된 누브 샤펠을 점령하고 있던 독일군 바바리아 7군단을 몰아내고 전선을 단축하기로 결심했다. 인도 군단과 4군단으로 구성된 영국 1군이 작전에 나설 예정이었는데, 지휘는 헤이그(Douglas Haig)가 담당하였다. 프렌치는 영국 원정군이 보유한 재고의 20퍼센트에 해당되는 포탄 10만발과 4.5인치 중포를 포함한 60여문의 야포를 헤이그에게 지원해 주었다.
누브 샤펠 전투의 결과
서둘러 참전하면서 그동안 화력 부족 때문에 겪었던 고통이 이번에는 없을 것 같았다. 또한 사전 항공 정찰을 통해 독일군의 배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포병에게 공세와 더불어 타격할 목표물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알려주었다. 한달 전에 실패로 끝난 프랑스의 동계 공세에 비해 작전 규모가 훨씬 작았지만 준비는 철저하였다. 그런 만큼 초전의 모습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누브 샤펠 전투 기록화. 영국은 초전 기습으로 돌출부 제거에 성공하였지만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여야 했다.)
35분간 90여발의 포탄이 독일군 참호에 정확히 내리꽂혔고 곧바로 약 3km의 전선에서 보병들이 일제히 진격하여 우왕좌왕하던 독일군을 몰아내고 1km를 전진하는 데 성공하였다. 적어도 작전 첫날 프렌치가 목표로 하였던 돌출부를 제거하면서 목표를 달성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곧바로 독일군의 증원 부대가 속속 투입되면서 이미 후방에 견고하게 구축하여 놓은 방어 진지를 점령하고 강력히 저항하자 더 이상 전과를 확대하기 어려웠다.
보병의 진격에 발맞추어 포병도 이동을 하면서 화력을 계속 지원해 주어야 하지만 영국은 그런 점을 소홀히 하였다. 초전의 모습은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였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덕분에 하루가 지나자 전선의 모습은 이전처럼 상대편 참호로 진격하다가 기관총의 세례에 사라져가는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둘째 날이 되자 오히려 노출되어 있던 영국군의 희생이 더욱 늘어났다.
헤이그는 포병의 이동을 완료하였지만 정작 이렇게 피아가 가까이 엉겨붙어서 싸울 때는 지원할 수 없었다. 결국 늘어나는 희생을 감당할 수 없던 헤이그가 3월 12일에 공세를 중단하면서 누브 샤펠 전투는 막을 내렸다. 영국은 일단 돌출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불과 3일 동안 13,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독일도 12,00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애당초 전력이 열세였고 초전 기습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선방한 전투였다.
혈전의 무대가 될 운명
1차 이프르 전투 이후부터 이처럼 벨기에의 플랑드르와 연결된 프랑스 북부의 아르투아 일대에서 치열한 교전이 계속 벌어지면서 이곳은 서부 전선의 핵심 지역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곳을 중심으로 전선이 돌출되었기 때문이다. 고착된 전선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지물을 따라 형성되기는 하지만 어느 한 곳이 툭 튀어 나온 것은 경계나 전력의 운용 면에서 상당히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되도록 돌출부를 제거하여 전선을 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한국전쟁 당시 휴전선의 전략적 위치를 고려하여 개성을 포기한 사례도 있지만 한창 공방이 오갈 경우에는 일단 자신들이 점령하고 있는 곳을 기준으로 전선을 일직선으로 단축시키고자 한다.
(전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면 되도록 돌출부를 제거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독일군과 연합군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선이 정리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전쟁 내내 양측의 전략이 상충된 아르투아 일대에서 격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돌출부를 제거하겠다는 명분은 같았지만 독일은 솜(Somme) 강까지 진격함으로써, 반대로 프랑스는 아벤느(Avesnes)까지 탈환함으로써 이루기를 원했다.
아르투아는 이처럼 양측 모두 제일 먼저 돌파하여야 할 곳에 위치하여 결국 어느 한 쪽이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 않는 한 혈전의 무대가 될 운명이었다. 더구나 참호전으로 상징되는 1차 대전의 서부 전선은 1914년 11월을 넘어서면서부터 지도상에 그어진 전선의 움직임이 거의 없을 정도로 팽팽한 대치가 계속되다 보니, 대치의 양상이 상당히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전선이 고착된 이후부터 더 이상 전쟁 초기의 폭풍같은 진격이 불가능하여 비록 어느 한 쪽이 전선의 일각을 점령하였더라도 곧바로 반격이 이루어졌기에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같은 곳을 두고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진 것은 당연하였다. 그중 1914년 가을에 전투가 벌어졌던 이프르(Ypres)가 가장 대표적인 격전지였다. 당시 어느 쪽도 승리를 주장하지 못한 상태로 전투가 종결되었기에 다시 싸움이 벌어질 것은 확실하였다.
양측의 상황
일단 여론에 밀려 동부 전선을 우선하게 되었지만 팔켄하인은 여전히 서부 전선에 미련이 많았다. 1914년 여름처럼 대대적인 공세를 펼칠 수는 없어도 전략적 우위는 계속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나름대로 지금까지는 선방하고 있었지만 독일이 방어로 전환한 직후부터 연이어 가해지고 있는 연합군의 공세를 그저 방관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서서히 살아나고 있는 연합군의 기를 꺾기로 결심하였다.
팔켄하인의 눈에 이프르가 들어왔다. 지난번 공세에서 돌파구를 열었지만 8만의 희생을 보고 제풀에 주저앉았던 이유를 면밀히 분석한 그는 너무 목표가 과했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돌출부 제거보다 이제르(Yser) 강에서 이프르에 이르는 중간에 위치한 필켐 능선(Pilckem Ridge)을 장악하는 제한적인 작전을 구상하였다. 사실 전력 보충은 커녕 오히려 동부 전선으로 차출당한 형편이다 보니 대대적인 공세로 나갈 수도 없었다.
만일 이곳을 독일이 점령한다면 연합군의 후퇴를 유도할 수는 없어도 이프르, 랑에마르크(Langemarck)를 견제할 수 있어 추후 작전을 펼치는 데 용이할 것은 틀림없었다. 이번에도 알브레히트 공작(Albrecht, Duke of Württemberg)이 이끄는, 7개 사단으로 구성된 독일 4군이 공격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이들은 지난 1차 이프르 전투에서 손실을 입은 후 간신히 재편되었지만 전력이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독일 4군)
반면 이곳의 방어는 인도,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에서 온 부대들로 구성된 영국 2군과 알제리, 모로코 식민지에서 동원된 병력으로 구성된 프랑스군, 그리고 약간의 벨기에군으로 이루어진 총 8개 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다. 지난 전투 후 긴급 충원된 말 그대로 다국적 연합군들로, 병력은 약간 앞섰지만 우세를 장담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워낙 출신이 다양하여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악마의 노란색 안개
이처럼 독일이 쉽게 선공에 나설 수 있을 만큼 전력이 앞섰던 것은 아니었지만 팔켄하인이 공세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새롭게 투입한 무기의 효과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1차 대전의 지옥 같은 잔인함을 상징하는 또 다른 단어가 되어버린 독가스였다. 독일의 화학자인 프리츠 하버(Fritz Haber)가 만든 염소 가스는 인류의 전쟁사에 등장한 최초의 독가스는 아니었지만 전후 1925년에 있었던 제네바 협정에서 사용을 금지하였을 만큼 치명적이고 잔인한 무기였다.
(독가스를 살포하는 모습. 바람의 방향을 맞추어야 했으므로 공격을 하는 이들도 사용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무기였지만 살상력이 워낙 뛰어나 전쟁 후 국제 조약을 통해 공식적으로 사용을 금지하였다.)
종전 이후 전쟁사 위원회에서 그라벤스타펠(Gravenstafel) 능선이라 명명한 이제르 강 남측에 위치한 프랑스군 진지를 향해 1915년 4월 22일 독일이 대대적인 포격을 개시하면서 2차 이프르 전투(Second Battle of Ypres)의 막이 올랐다. 포격이 끝난 후 진지에 매복해 있던 프랑스군은 곧바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 독일군을 상대하기 위해 경계를 펼쳤지만 그들이 보았던 것은 마치 안개처럼 다가오는 노란색의 연기였다.
독일군의 포격 종료 후 5,730개의 가스통에서 분출된 염소 가스가 프랑스군 방향으로 흘러들자 6km에 이르는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1만명 정도의 프랑스군 병사 중 절반이 순식간에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일시적으로 눈이 멀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틈을 노려 마스크를 착용한 독일군이 랑에마르크와 필켐을 순식간에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더 이상의 공격은 단념하였다.
일단 예비대가 부족하기도 했지만 독가스에 의한 참상을 직접 목도하면서 아직 가스가 제거되지 않은 곳까지 섣불리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사실 독가스는 1월 31일에 있었던 동부 전선의 볼리모우 전투(Battle of Bolimów)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먼저 사용되었으나 풍향이 맞지 않고 가스통이 동결되어 성공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2차 이프르 전투에 등장한 독가스는 사용하는 이조차 두려워할 만큼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였다.
(프랑스군 참호를 점령한 독일군이 독가스 공격을 받고 고통 속에 죽어간 프랑스 병사를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참상을 목도한 병사들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꺼릴 정도였다.)
위기 속의 갈등
잔인한 대량 살상 무기의 사용에 따른 비난과 별개로, 이처럼 독일은 돌파구를 신속히 열었지만 정작 후속 작전이 미흡하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목표로 하였던 필켐 능선을 확보하였기에 팔켄하인이 그 정도에서 만족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프르와 랑에마르크 사이가 텅 비어 있던 바로 이 순간이 1차 대전을 통틀어 독일 쪽에서 전쟁의 향방을 가를 수 있었던 결정적 순간이었다.
만일 이때 독일이 충분한 예비대가 있어서 진격을 계속하였다면 영불 해협까지 신속히 내달릴 가능성도 높았다. 이처럼 준비 부족과 안이함이 겹쳐서 독일 4군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 스미스-도리언(Horace Smith-Dorrien)이 이끄는 영국 2군이 생줄리앙(St. Julien)에 신속히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우물쭈물하던 독일군이 다시 진격을 계속하려 했지만 격렬한 영국군의 저항에 막히기 시작했다.
4월 24일, 독일이 다시 독가스를 앞세워 공격을 개시하였고 6,000여명에 이르는 캐나다군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공포에 질려 도망가던 프랑스군과 달리 영연방군은 손수건을 물에 적셔 입을 틀어막고 격렬히 저항하였다. 이 정도면 상당히 분투하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대단한 선전이었지만 영국 원정군 사령관 프렌치는 스미스-도리언에게 즉각 반격을 개시하여 실지 탈환에 나서라고 명령했다.
(캐나다군도 독가스 공격에 엄청난 피해를 보았지만 손수건 등으로 마스크를 만들어 격렬히 저항하였다.)
일단 명령이 과도하기도 했지만 공세로 나서려면 프랑스 포병의 지원이 절대 필요하였다. 하지만 장담과 달리 도움을 받을 수 없자 실망한 스미스-도리언은 안전 지대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재구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분노한 프렌치는 스미스-도리언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5군단장 플러머(Herbert Plumer)를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현지에 부임한 플러머도 추후 공세를 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후퇴가 불가피함을 역설했다.
2차 이프르 전투의 결과
이 때 조프르의 대리인으로 북부 전선의 프랑스군을 총괄하는 포슈(Ferdinand Foch)가 나름대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2개 사단을 동원하여 공격에 나섰지만 독일군의 반격에 막혀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의도는 좋았지만 각각 작전을 따로 벌이는 연합군 간의 불협화음은 여전하였다. 결국 프렌치는 플러머에게 철수를 허락하였고 영국 2군은 5월 1일을 기해 5km 후방으로 물러나 이프르 전방에 방어선을 새롭게 구축하였다.
영국군이 물러나자 독일군이 진격을 개시하여 5월 5일, 생줄리앙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연합군이 비록 전략적으로 후퇴를 선택하였어도 순순히 공간을 내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광활한 아르투아 지역이 그렇듯이 이프르 일대도 대부분 평야 지대다. 따라서 구릉에 불과한 조그만 무명의 언덕들에 마치 한국전쟁 당시의 격전으로 말미암아 명명된 수많은 고지들처럼 이름이 부여되었다.
앞서 언급한 필켐, 그라벤스타펠이 그런 곳인데, 그만큼 이 일대에서 많은 격전이 벌어졌다는 의미다. 이프르 동남쪽 호허(Hooge) 인근에 있는 프레첸베르크(Frezenberg)와 벨레바르드(Bellewaarde) 능선도 마찬가지다. 독일은 이프르로 향하는 길목인 이곳을 공격하여 5월 25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프르 70km 남쪽의 아라스(Arras)와 비미(Vimy) 일대에서 벌어진 격전으로 인해 독일 4군은 공세를 멈추어야 했다.
(독일은 이프르 점령에는 실패하였지만 도시의 3면을 감싸는 전략적 포위망을 완성하였다.)
약 한달간에 걸쳐 벌어진 2차 이프르 전투에서 연합군은 이프르를 지켜내는 데는 성공하였다. 하지만 35,000여명의 독일군 사상자보다 2배나 많은 88,000여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고 5km 정도 밀려나 이프르의 삼면이 독일에게 점령당했다. 이렇게 미완의 상태로 구축된 전선은 앞으로도 2년간 계속 이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이프르에 흘려야 할 피가 지금까지 있었던 2차례의 혈전으로도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피로 얼룩진 능선
3월 초에 있었던 프랑스의 동계 공세는 단지 자존심을 세울 명분만 만들고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조프르가 아르투아 탈환을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영국 원정군이 관할하는 이프르 일대에서 연일 격전이 벌어지는 틈을 타서 프랑스는 무너진 전력을 보충하였다. 특히 화력 지원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애를 먹었던 지난 전과를 교훈 삼아 포병 전력 확충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5월 초, 이프르 일대에 대한 독일의 압박이 강해지고 동부 전선에서 위기에 몰린 러시아가 도움을 요청하자 프랑스는 공세를 재개하기로 결심하였다. 해당 지역을 담당하던 포슈는 총사령관 조프르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200여문의 야포와 충분한 포탄을 라 바세(La Bassee)에서 아라스(Arras)에 이르는 12km 전선에 촘촘히 배치할 수 있었다. 이들이 대대적으로 포격을 가해 독일군 진지를 강타하면 프랑스 10군이 일제히 진격할 예정이었다.
마침내 5월 9일 새벽, 모든 준비를 마친 야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충분한 준비를 갖추었던 만큼 초탄부터 정확히 상대 진지를 가격하는 데 성공했고 불의의 기습을 당한 독일군은 일단 뒤에 편성하여 놓은 후방 진지로 후퇴하였다. 수쉐즈(Souchez)에 배치되어 있던 예하 33군단이 즉각 진격을 개시하여 일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비미(Vimy) 능선을 순식간에 점령하였다. 하지만 정작 10군 사령관 뒤르발(Victor d'Urbal)은 경악했다.
33군단의 진격이 워낙 빨라서 후위에 있던 예비대와의 간격이 순식간에 벌어진 것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예비대를 너무 뒤에 배치해 두고 있었다는 표현이 보다 적절한 상황이었다. 이처럼 예하 부대의 배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뒤르발의 무능은 이후 비미 능선 일대를 피바다로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33군단이 능선을 점령하고 난 후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이자 여지없이 그새 전력을 회복한 독일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2차 아르투아 전투의 결과
군단장 페탱(Philippe Pétain)은 즉각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뒤르발은 예비대에게 빨리 움직이라는 재촉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만일 신속 점령 후 즉각 예비대가 투입되어 방어 전면을 강화하였으면 충분히 사수할 수 있었던 비미 능선은 결국 점령한 지 하루 만에 독일에게 다시 빼앗겼다. 이후부터 능선 일대에 확고한 거점을 확보하지 못한 프랑스와 독일은 무려 5주 동안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여야 했다.
이곳은 기관총과 더불어 서부 전선을 상징하는 백병전이 가장 대표적으로 벌어졌던 전장이었다. 프랑스는 6월 초까지 비록 8km 정도 전진하는 데 성공했지만 비미 능선 탈환에는 실패하였고 무려 10만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독일은 약 6만 정도의 인명 피해를 입었는데, 당시 독일은 동부 전선에 주력하고 있었기에 이곳을 담당한 독일 6군은 후방 지원이 충분하지 못하였음을 감안할 때 상당히 선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우측의 프랑스가 무의미한 소모전으로 일관하고 있을 때 좌측에 있던 영국 1군은 지난 3월에 점령하는 데 실패한 누브 샤펠에서 다시 한 번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보기 드물게 프랑스와 작전 개시 일을 사전에 조율하여 5월 9일 함께 공격을 시작했지만 포탄을 비롯한 모든 준비가 부족한 상태였다. 반면 어느덧 6개월 넘게 참호전이 계속되다 보니 어지간한 포격을 감당할 정도로 양측의 진지는 강화된 상태였다.
결국 영국은 포병의 지원이 미미한 상태로 누브 샤펠 동측방의 오베르(Aubers) 능선으로 돌격을 감행하였으나 하루 만에 1만명의 인명 피해를 당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영국 1군은 6월 초까지 약 1km를 전진하였지만 전사상자가 약 3만에 이르렀고 독일도 1만 정도의 손실을 보았다. 이렇게 해서 2차 아르투아 전투(Second Battle of Artois)라고도 하는 연합군의 춘계 공세는 전선에 피만 묻힌 채 막을 내렸다.
(누브 샤펠 동측방에 위치한 오베르 능선에 설치된 독일군 참호. 영국군은 이곳을 노리고 공격을 감행하였지만 엄청난 피해를 입고 점령을 포기하여야 했다.)
1915년의 마지막 격전
3월과 5월에 있었던 2번의 공세에서 좌절을 맛본 연합군은 날이 갈수록 강화된 독일군 진지 때문에 완벽한 공세 준비, 특히 중포와 탄약 재고의 확보 없이 무조건 공격을 가하다가는 희생만 늘어날 것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나마 독일이 동부 전선에 주력하기로 전략을 수정하면서 수세적인 방어전만 펼쳤는데도 이 정도였으니 만일 전쟁 초기처럼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면 더욱 암담한 상황이었을 것임은 명확하였다.
연합군은 독일보다 전력이 우세한 이 시점에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작전보다 규모를 더욱 키워서 독일군의 소모를 최대한 증폭시킴으로써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연이어 격전의 무대가 되었던 아르투아는 물론,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강 상태였던 샹파뉴가 결전의 장소로 선택되었다. 약 80km에 이르는 전선에는 북에서 남으로 47개 사단으로 구성된 프랑스 제10, 2, 4군이 차례대로 배치되었다.
함께 공세에 나설 예정이었던 영국 1군은 라 바세 남측에 위치한 루스(Loos) 지역을 거쳐 누브 샤펠로 파고들어 갈 생각이었지만 여전히 포탄이 부족하였다. 포탄을 비롯한 전쟁 물자 공급에 크게 문제가 있다는 점 때문에 정계에 불어닥친 이른바 ‘포탄 위기(Shell Crisis)'로 인하여 연립정부가 구성되고 탄약성(Minister of Munitions)이 생겼지만 고질적인 포탄 부족은 아직 해결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1915년 공장에서 포탄을 생산하는 영국 여성들. 영국 원정군의 고질적인 포탄 부족은 정쟁까지 불러왔을 만큼 문제가 심각하였다.)
사실 시간으로만 본다면 거의 4개월 만이었으므로 충분히 대규모 작전을 펼칠 시기는 되었지만 여전히 부족한 것이 많았다.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뭔가 이루겠다는 조급증으로 인하여 9월 25일 마침내 연합군의 추계 공세가 개시되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대대적인 선제 포격 후에 보병들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이후 두고두고 말이 많았지만 1차 대전의 서부 전선에서는 사실 이 방법 외에 구사할 전술이 없었다.
의의
수세적인 입장이었던 독일은 방어선을 2중, 3중으로 더욱 강화해 놓은 상태였다. 연합군은 우세한 병력을 바탕으로 최대 4km까지 전진하였지만 이미 2차 방어 진지로 대피해 방어에 나선 독일의 반격으로 인해 곧바로 진격을 멈추어야 했다. 우려대로 작전 다음날부터 포병의 지원이 줄어든 영국군은 사상 처음으로 독가스를 살포하며 공세를 계속하였지만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독가스 공격을 준비 중인 영국군. 루스 전투에서 영국은 최초로 독가스를 살포하였다.)
그리고 처음 의도대로 엄청난 소모전으로 전선이 불타올랐다. 사실 처음부터 실지 탈환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점령은 그다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조프르는 최대한 독일군을 많이 소모시켜 전쟁을 끝내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예상과 달리 연합군의 소모가 더 컸다는 사실이었다. 사실상 이것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온 패턴이었는데도 조프르는 이런 엄연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11월 6일, 결국 먼저 지쳐버린 연합군이 손수건을 던지면서 3차 아르투아 전투(Third Battle of Artois)와 2차 샹파뉴 전투(Second Battle of Champagne)는 종결되었다. 전선의 모습은 변한 것이 없었지만 아르투아, 샹파뉴, 루스 일대에서 25만의 연합군 사상자가 생긴 반면, 침착하게 방어전을 펼친 독일군은 절반 정도인 13만의 피해를 입었다. 물론 이후에도 800여 km에 이르는 전선에서 소소한 싸움이 계속되었지만 서부 전선에서의 1915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1915년 서부 전선은 욕심만 앞섰던 연합군과 전쟁 전략의 변경으로 수세적인 입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독일군 사이에 벌어진 연속된 격전의 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서로의 목표가 상충한 아르투아 지방은 그야말로 초토화되다시피 하였다. 불과 1년 전에 전쟁을 찬양하며 달려들었던 교전 당사국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이듬해에 펼쳐질 지옥에 비하면 그나마 양호한 수준이었다.
출처 : 네이버 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