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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원문보기 글쓴이: 영심이
어찌하오리까 주의 재림이 임박한데
정말 종말이 다 되었나?
<아주 귀한 메시지입니다.끝까지 읽으시면 큰 은혜를 받게되실것입니다.^.~마라나타
예수님은 2,30대의 젊은이들로 제자를 삼으셨다. 그것은 신의 선택이었다. 그들은 원래 순수함이 있었고 신앙의 열정이 있었다. 젊기 때문에 순수한 열정으로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면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거룩한 사업을 위하여 몸을 바쳤다.
그들은 젊었지만 세상의 쾌락과 모든 야망을 던져버리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걸었다. 그들의 기대는 결코 헛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든 소경이든 무슨 병이라도 다 고칠수 있었고 귀신을 쫓아내며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오천명을 먹이는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런 기적들을 체험할 때마다 자기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훌훌 벗어던지고 예수님을 따른 것이 참 잘했다고 생각되었다. 예수님은 어부들이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실 수 있고 바다의 풍랑을 멈추게도 하시며 물위로 걸어다닐 수도 있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분이었다. 그런 예수님을 따르면서 제자들은 결코 장래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예수님께서는 힘한번 써보지 못하고 군병들에게 붙잡혀 돌아가시고 말았다. 참으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수난은 여러번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일이었지만 너무 많은 능력과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이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막연하게 생각되었을 뿐 그런 말씀을 들을 때는 현실성이 없어서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현실로 이루어졌고 제자들은 엄청난 충격과 실망으로 타격을 받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 충격은 이상하게 제자들을 어둠의 구렁텅이로 몰아갔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힘을 낼 수가 없었다. 분주하던 전도사업은 중단되어 다음에 방문 할 예정지를 알아보는 일도, 재정을 계산해 보는 일도, 몰려든 군중들을 질서있게 인도하는 일도 모두 필요없게 되었다.
예수님은 아무런 사후 대책 없이 남긴 유산도 없이 허망하게 알거지 제자들을 남겨둔채 떠나 버리셨다. 다만 약속이 있었다면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것과 하늘로 올라가실 때의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겠다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실 성령님을 대망하면서 기도에 전념하였다.
약속대로 성령님은 오셨다. 성령님의 오심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불같이 뜨겁게 임하신 성령께서는 맥이 빠져있던 제자들에게 위대한 힘을 쏟아 부어 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곁에 계시면서 막강한 능력을 행하실 때 보다 더 큰 믿음과 용기가 북받쳤다. 군병들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놀라서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던 그들이지만, 작은 계집종 앞에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손사례 쳤던 힘도 용기도 없는 그들이었지만 성령께서 오셨을 때는 그들은 강하고 능력있는 용사들로 변해 있었다. 그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내가 사람의 말을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과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라”고 외쳤다. 이빨을 드러낸 사자앞에서도 평정을 잃치 않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옥에 갇혀서도 복음을 증거하면서 나의 몸은 매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어떠한 권세나 영화라도 그들을 억누르고 묶어 놓을 수 없었다. 성령께서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리라고 하셨던 것처럼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확인시켜 주셨다.
그런데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증거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은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증거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이야말로 제자들의 원동력이었고, 그들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주는 놀라운 힘이었다. 제자들은 기회만 있으면 외쳤다.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외칠 때 마다 그들의 가슴은 불이 붙었고 폭발하는 힘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사도들이 세우는 교회는 어디서나 똑같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교회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신앙은 교회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시라 재림이 없다면 성경은 모두 헛된 고문서가 되고, 하나님은 거짓말하시는 분이며, 예수님은 12제자를 비롯하여 예수님께 일생을 걸었던 많은 추종자들을 등쳐먹은 사기꾼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 십자가의 수난, 부활, 승천, 모두 중요하지만 재림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 재림에 의해서만 그런 모든 사실들이 완성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의 구속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되지 않았다. 아직도 세상에는 죄악이 물결치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와 고통과 사망의 그늘 아래서 신음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이 다 해결되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새하늘과 새땅이 완성되어야 비로서 하나님의 구속사는 완결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예언은 456회인데 반하여 재림에 대한 예언은 1200회이상 신약에서도 300회 이상 재림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다. 교회는 진정으로 재림을 대망할 때 교회일 수 있다. 재림 대망을 잃어버린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냥 이 땅에서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일 뿐이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이 땅에서의 삶은 잠간이고 상대적으로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무엇을 추구하고 어디에 목숨을 거는가?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벧후3:3-4)고 하신 말씀은 이시대를 향한 예언이었다. 실제로 예수님의 재림을 반대하던지 예수님의 재림을 허구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게 되면 예수님의 영이 심령속에 오시므로 그것이 바로 재림이라고 한다. 또는 오순절 성령강림 때 예수님은 영으로 재림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는 사람들이 실수를 많이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의 실수를 들추면서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에 충실하지 못하고 결국 교회와 사회에 혼란을 가져온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의 실수나 부족함이 예수님의 재림을 허상으로 만들 수는 없다
재림 대망신앙이 희석되고 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지금 이시대를 마지막 때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나 신학자들이 마지막 때에 대한 인식을 불식시키고 이 땅에서 편안하고 걱정없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재림대망신앙이 사라지게 된 것은 몇가지 이유가 있다.
1) 마지막 때라고 한다면 삶의 목표가 흔들린다.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계획하고 노력해서 쌓아올리고 더 좋은 장래를 기대하던 생활과 인생의 기조가 완전히 뒤집혀야 하기 때문이다. 재림대망신앙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다. 예수님께서 빨리 오셔서 죄악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나님나라를 건설하여 주님과 영원히 살기를 소망하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재림대망신앙은 이땅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신앙이 되고 말았다.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이 세상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2) 마귀의 궤계는 말세에 대하여 말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말세를 외치면서 예수님재림이 임박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했던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열심있는 성도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열정적인 신앙은 파급효과가 크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각심을 줘 영적부흥을 일으켰다. 그러므로 마귀는 재림대망신앙을 매우 싫어할 수 밖에 없었다. 재림 대망신앙이 뜨꺼워지기만 하면 마귀가 좋아하는 육신의 일들을 모두 멀리하고 예수님만 바라보는 생활로 돌이켜 버리니 마귀의 분노와 심술이 극에 달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말세를 외치고 영적 부흥을 일으키는 몇 몇 성도들이나 교계 지도자들을 넘어뜨리는데 성공 했다. 이단이 되기도 하고 재림의 때와 장소등을 계시로 알게 되었다고 발표해서 교계와 사회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교계에서 말세를 외치는 신앙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게 되고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되었다. 결국 강단에서 재림대망에 대한 설교가 없어지고 여기에 대한 연구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마귀의 확실한 승리이다. 가장 중요한 신앙에 대하여 함구하도록 만들었으니 말이다.
3) 종말을 말하기에는 너무 살기 좋은 세상이다
세상에 먹고 입을 것이 너무 많고 모든 것이 불편이 없도록 발달 되었기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전쟁이나 질병, 기근같은 어려움에 쫒길 때는 자연스럽게 세상에 대한 애착이 적어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된다. 북한의 그리스도인이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랍계 국가나 중국같은 공산국가의 지하교회 성도들은 지금도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복지국가에서 큰 고통없이 살아가는 성도들은 철야하고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려야 할 이유가 없다. 기도원을 찾아가거나 생활현장에서라도 작정기도를 한다던지 절실하게 매달려야 할 어려움들이 없다. 위험과 고통이 닥쳐와야 비로서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4) 예수님의 재림을 상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곧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셨으나 실제로 2000년이 지나도 오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한복음 14장 3절) 라고 하셨고 예루살렘 공회에서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도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고 증언 하셨다. 그후 예수님이 승천 하실때 천사들이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고 말했다. 이처럼 당장이라도 오실것 처럼 말씀하시면서 당시의 제자들에게도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라라고 하셨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제자들이 하나 둘 순교 당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당하고 있어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에 있어서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다시 오신다는 주장을 절대로 굽히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외쳤다. 바울 서신이나 베드로서 히브리서 어디서든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있으라고 계속 권면 한다. 결국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60년도 넘었는데 그리고 모든 사도들이 순교하였고 사도 요한만 남았는데 그때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총체적인 계획서 요한 계시록을 주셨다.
예수님이 이렇게 늦게 오실 것이었다면 차라리 약2000년쯤 뒤에 올 것이라고 귀뜸을 해주셨다면 지금까지만이라도 마음 푹놓고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예수님은 얼마나 심통이 커서 2000년 동안이나 모든 성도들이 마음을 놓지못하고 살도록 하셨는가? 그럼 그동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다 옥에 갇히고 재산을 몰수 당하고 가족과 헤어져 방랑자가 되기도 하고 결국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그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가서 보상을 받고 어디에 가서 그들의 인생을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대답은 너무 간단하다. 하늘에 가서 예수님께 보상 받아야지 이세상 어디에 가서 어느 누구에게 보상 받겠는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1-2)고 하셨고 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5:11-12)고 하셨다.
결론은 그것이다. 예수님이 언제 오시던 그것은 예수님 사정이고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 오시기만 목빠지게 기다리면서 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 기다리는 마음을 빼앗기면 바로 세상에 눈을 돌리고 육신 생활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외국에 출장간 남편을 빨리 오지 않는다고 기다리지 말까? 오기전까지는 이웃집 남자하고 바람이나 피울까?
초대교회 당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이 땅에서 사람 사는 것처럼 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오늘날에는 기독교인이 세상사람들보다 더 잘 살고 더 성공하고 더 위에서 군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이땅에서는 나그네라고 하셨다. 이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고 하셨다. 먹을 것 입을 것 염려하지 말고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천국을 바라보면서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위하여 의를 추구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나라를 애타게 사모하는가? 불의로 가득찬 음란하고 악한 세대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오기를 눈물로 기도하는가? 더러운 세상에 합류되지 않고 주님의 의와 거룩함에 참여하고자 몸부림 치고 있는가? 아무래도 그런 몸부림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게 될 것이다.
전에는 부흥회를 하면 대개 울며 불며 죄를 회개하고 가슴을 치고 통곡하면서 자신이 잘못 살아왔음에 대하여 원통해하고 돌이켰다. 성경의 역사에서도 언제나 영적부흥은 재를 뒤집어 쓰고 눈물로 회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부흥회를 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배꼽을 잡고 웃다가 세상의 육적인 욕심으로 가득채운채 끝이난다. 긍정의 힘으로 내 인생을 다시 개척하자. 믿음으로 사업에 열중하여 무지막지하게 벌어보자. 개그맨을 능가하는 목사가 아무래도 훌륭하다. 재미없는 설교는 듣기 싫다. 오늘날 얼마나 구미에 딱 맞는 설교가 많은데 그런 설교 때문에 시간낭비 할 수 있나? 이런 세상이 되고 말았다. 전에는 부흥회를 하면 “주님고대가” 가 대표적인 곡이었다. “낯에나 밤에나 눈물머금고 내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때 다시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라고 찬송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요즘은 무슨 락밴드를 불러놓은 광경이다. 마이클 잭슨이라도 불러온 것같다. 복잡한 세상에서 많이 시달렸으니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예배에서 어떻게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북받쳐 오르는 참회를 할 수가 있을까?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할 때 신랑 맞을 준비를 위해서 내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재림대망신앙으로 마지막때를 준비해야
성경은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표현했다. 예수님도 그렇게 비유해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사랑하는 신부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아낌없이 당신의 몸을 주셨다. 신랑신부의 관계는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다. 요즘 사람들의 결혼이야 여러가지 조건이 앞서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아무런 조건없는 사랑의 관계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신앙에는 다른 어떤 이유가 앞서서도 아니된다. 신부가 신랑을 사모하는 순수한 사랑만이 이유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신부라고 하는 오늘날의 교회들은 신랑되신 예수께서 오신다고 하니까 제발 오시지 말라고 재림얘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궐기를 하고 있다. 오늘날 바람난 교회들이 세상과 짝이 되어 바람 피우기에 바빠서 예수님께서 안부를 묻고 예수님이 전화하면 전화를 확 꺼버린다. 요즘 교회는 무슨 할일이 그렇게 많은지 목사들은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교인들은 날마다 몰려 다니면서 구역예배, 바자회, 무슨 경연 대회등으로 정신없다. 그러면서 그것이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번에 여동생에게 “구역예배를 뭐하러 모이냐”고 질문을 하니까 여동생 왈 “구역예배 헌금이 주일 예배 헌금보다 더 많이 나와요”라고 명답을 해주었다. 예수님과 상관없는 종교행사들 때문에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이사야1:11-15절 말씀이 기억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어떤 일이든지 다른 목적이나 동기가 개입 되어서는 아니된다. 사회봉사도 불우이웃 돕기도 전도를 위한 문화 행사도 세계선교도 성도간의 친교도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일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전도를 위해 열린 예배를 드린다고 유명가수를 불러서 예배를 유명가수 공연장으로 만들어 놓고 모든 영광을 출연한 가수와 예배를 기획하고 예배에 출연한 여러 스탭진들에게 다 돌리고 그 예배의 시종에 예수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시대에 옛 성인들의 삶과 기도를 상기하며 참 신앙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분도 요셉 라브르는 거지 성자로 유명한 분이다. 그는 1748년 3월26일, 프랑스 아메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의 18세기 전유럽 상류 사회는 신앙심을 잃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던 시대였는데 하나님께서는 라브르 같은 거지 성인을 일으켜 그 시대를 반성케 하였다. 라브르는 수도사가 되려고 수도원에 들어가고자 일곱 번이나 애썼지만, 거절당하고 할 수 없이 자기 혼자서 거지 순례자로 나섰다. 세상과 모든 쾌락을 버리고 거칠고 긴 수도복을 입고 다리의 반은 살을 드러낸 채 노끈을 허리에 묶고, 가슴에는 십자가를 걸고, 자루 하나를 얻어 그 속에 성경책, 준주성범책, 성무일과, 바늘, 실, 빵 등을 넣고 지팡이 끝에 걸어 어깨에 메고 다녔다. 때로는 일부러 무겁게 하려고 자루 속에 돌을 넣고 다니기도 했다. 이 모양으로 걸어가면서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였다. 그의 기도는 “오소서, 내 주여! 오소서. 나 당신을 고대고대 하나이다. 나 당신만 탐합니다. 당신 기다리는 잠시가 내게는 천 년과 같습니다” 하였다.
13년 동안, 프랑스, 스페인,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를 3만 킬로미터나 도보로 순례했다. 한 번 떠난 후 고향엔 다시 돌아가지도 않았고, 편지 한 장 부치지도 않았다. 춘하추동 언제나 단벌옷을 입고, 돌베게를 베고 땅바닥에서 자고, 대부분의 밤은 철야기도로 보냈고, 추운 겨울에도 불을 쬐지 않았다. 때로는 큰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메고 다니며 예수님의 골고다를 연상했고, 춥고 궂은 날이면 더 많은 여행을 했다. 하루 한 끼만 먹었고, 구걸하여 좋은 빵을 주면, “거지에겐 너무 좋은 것입니다” 하며 남에게 주고 자기는 사람들이 먹다 버린 것이나 밟혔던 것을 먹었다. 쓰레기통을 뒤져 실과껍질, 구역질 나는 것을 잘 먹었다. “거지가 목마른데 해갈을 위해선 개천물이면 넉넉합니다”하면서 필요 이상의 것은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살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였다.
어두운 밤에 성당에서 불 끄고 기도할 때면, 그의 몸과 머리에서는 광채가 났다. 여자들이 그가 성인인 줄 알고 예배 드릴 때 그의 곁에 가서 앉으려 해도 일생동안 목욕하지 않은 몸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곁에 앉을 수가 없었다. 그의 가슴은 예수님을 너무 갈망하기에 불타서 실제 추운 겨울에도 앞가슴을 헤치고 다녔다. 1783년 4월 16일, 그의 나이 35세 때 극도로 쇠약한 몸으로도 끝까지 골고다의 주님 따라간다고 성당에 가서 예배드리고 나오다가 쓰러져 죽었다. 성인이 죽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거리거리에 퍼졌다.
그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이 너무 많아서 군대를 동원해서 질서를 잡으려고 해도 몰려드는 군중을 감당할 수 없었다. 몇백리 떨어진 곳에서까지 몰려와서 로마시 전체를 마비 시켜버렸다. 그의 시체에서는 향기가 나고 손만 만져도 식물인간처럼 되었던 중병환자가 일순간에 일어났다. 소경이 보고 벙어리가 말하고 암이든 역병이든 그의 시체를 구경만해도 모두 나았다. 그가 무덤에 묻혔는데도 기적은 계속되었다. 그의 무덤에 다녀오기만 해도 부러진 다리가 온전해지고 악성 종양으로 혹이 커지는 병도 순식간에 치료되었다.
그가 살아있을 때는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는 업적이 아무것도 없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충분히 알고 계셨던 것이다. 종교적인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탐하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을 요즘교회들은 모른다.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일을 하기 전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번씩이나 질문하셨던 사실을 기억하자. 그래서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면 곧장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게 된다. 그게 그렇게 되어있다. 오늘 TV 프로그램 아침마당에서 연애시절 이제는 남편된 사람이 3년간 단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자기를 보기 위해 집앞에서 기다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잠간 얼굴을 보는 것인데 아무런 생산성도 없고 유익한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은 단 하루라도 자기 애인을 보지 못하면 잠을 이룰수가 없었나보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소모시키는 것이 그렇게 즐거웠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잘하면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소모시키려고는 하지않는다. 오직 뭐든 달라고만 한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만나고 싶어지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재림을 대망하게 되어있는 것을.
그럼 과연 이 시대는 말세지말인가?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말세의 징조와 현실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성경에 계시된 종말의 징조들
1) 이스라엘 민족이 고토로 돌아오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 후손들,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그 혈통을 따라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별한 선택을 받은 민족이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유일하게 사용된 축복받은 민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기다리던 메시야 왔을때는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로 하나님께 버림받아 A.D.70년경 로마제국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전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갖은 수난을 다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아주 버리시지 않고 다시 불러모아 고토 가나안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겔39:28-29) 여기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로마서11장에서 자세하게 언급하면서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넘어갔다. 이유는 이방인의 수를 충만히 채우기 위함이었다고 가르쳐준다. 이방인의 수가 차면 이제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다시 불러 모으시는 것이다. 그들이 회개하며 뉘우치는 일은 7년대환난때 일어날일이다. 그를 위하여 이스라엘백성을 불러모으시는 것이므로 이스라엘백성들의 고토귀환은 마지막때가 가까왔음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징조인 것이다.
19세기 후반 유럽각지에서 유대인 배척운동이 일어나자 1896년에 데오돌 헤즐(T.Herzr)이 “유대나라”라는 소책자를 발행하면서 시오니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1897년 바젤(Bazel)에서 제1회 시오니스트 대회를 열었다. 이 시오니즘운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유대인들은 본토 팔레스틴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17년 영국의 “발포어(Balfour) 선언”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이었고 이스라엘백성들이 고토로 돌아올 수 있는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대환란에 들어가서 구원받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이 현재 고토로 귀환하는 것을 볼 때 마지막 때가 임박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2) 천하만국에 복음이 전파됨
마태복음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면 그때가 끝이라는 말씀이다. 마지막 때까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게 하는 이유는 위에서 말한대로 구원받은 이방인의 수를 충만히 채우기 위함이다. 성령께서 강림하신 때부터 복음이 처음에는 예루살렘에 다음에는 유대와 사마리아에 전파되었고, 사도 바울을 통하여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을 복음화 하였고, 그 후 수많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은 라디오나 텔레비젼, 인터넷 같은 전파매체들을 통하여 온 세계에 복음이 계속 활발하게 증거되고 있다. 최근 보고에 의하면 몇년 안에 미전도종족에게 빠짐없이 복음이 전파될 것으로 보고 있다.
3) 교통 수단과 지식의 고도 발달
다니엘12: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다니엘 시대에는 교통수단이 말이나 마차를 이용하였는데 현재는 급속도로 발달하여 초고속 비행기나 고속 열차등을 만들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왕래하는 시대가 되었다. 또한 지식이 더하리라고 하였는데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엄청나게 많은 지식들이 서적과 잡지 등을 통하여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특히 인터넷의 발달은 상상을 초월하여 엄청난 량의 지식을 초고속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4) 지진과 기근 등 천재지변이 심각하게 나타남
마24:6-8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현대에 들어와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더욱 최근에는 테러를 통하여 민족간의 증오와 복수가 지나치게 드러나고 있다.
한편 자연 환경의 변화 곧 공해, 지진과 화산폭발, 홍수와 한발, 에너지 고갈과 기근, 물 부족, 질병의 만연 등 자연 환경의 급격한 악화는 마지막 때를 잘 가르쳐주고 있다. 세계적으로 지진의 발생 건수가 14세기에는 137건 15세기에는 174건 16세기에는 253건 17세기에는 378건이었는데 19세기에 들어와서는 2119건으로 껑충 뛰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2250건으로 늘어났다.
5) 말세에 고통하는 세태를 보면 알 수 있다 딤후3:1-5“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바울사도는 거의 2000년 전에 말세의 세태가 어떤 모습인지 기록했는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보다도 더 생생하게 표현을 하고 있다. 본문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읽어보시라. 바울사도는 타임머신을 타고 오늘날의 T.V뉴스를 봤었나 보다. 어떻게 요즘 세태를 그렇게 정확하게 그려낼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런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예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예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재림하신다.
예수님 재림의 목적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의 목적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재림의 목적을 알면 마지막 때의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1) 익은 열매를 추수함
막4:26-29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예수님은 마지막 때를 세상끝이라고 하면서 그때는 추수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마13:37-43) 그런데 그 추수의 조건은 익은 열매는 추수하시지만 싹이 났으나 아직 익지 않은 열매는 추수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 곡식은 가라지가 아니라할지라도 추수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완전히 성숙해서 열매로서의 가치가 있는 익은 열매를 추수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익은 열매란 신앙의 성숙도를 의미하는데 그것을 3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요일2:12-13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이 말씀은 당시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인데 이와 같이 자녀, 청년, 아비의 3단계로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이런 구분은 육체의 나이를 가지고 구분한 것은 아니다. 물론 영적 성숙도를 가지고 구분하였다. 이런 구분에 대하여 다른 성경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위에서 예수님은 싹, 이삭, 충실한 곡식으로 구분하셨다. 고전3:1-2 “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어린 아이같은 신앙은 육에 속한 자로서 신령한 자와 구별된다는 말씀이다. 히5:13-14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이 말씀도 어린 아이와 장성한 자에 대하여 구별해 주고 있는 말씀인데 장성한 자는 연단에 의하여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생명을 얻는다. 새로 태어난다. 하나님께로 부터 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태어나면 성장이 있어야 하고 장성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추수 때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라고 하셨다. 쭉정이는 불신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신자 중에서 성숙하지 못하고 속이 빈 사람을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교회는 선교가 최대의 목표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고 전도해서 사람들을 채우고 기독교가 전세계에 확장되는 일에만 매달려왔다. 그러나 예수님은 추수때에 아직 익지 못하여 쭉정이가 된 신자는 거두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 어느 목사님은 한국교회는 유치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탄식한다. 이제 우리는 전도도 좋지만 이미 교회안에 들어와 있는 신자들의 성숙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져야할 때가 된것이다.
2) 대환난으로 죄악세상을 심판하심
성경이 구원에 대한 책이라면 그것은 심판의 책이기도 하다. 구원과 심판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이다. 심판이 없다면 구원도 없다. 심판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기 때문에 그 멸망 가운데서 구원을 받는 감사함이 생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 끝에 심판 하실 것을 누차 생생하게 말씀하셨다.(마25:31-46, 13:37-43 등) 또한 베드로 사도는 노아홍수심판,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예로 들면서 마지막 때에 심판하실 것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벧후2:5-10)
예수님은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하시면서 추수때가 되면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 불사를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악인들이 더 잘 살고 그들의 횡포가 아무리 심해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다.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추수 때는 분명히 세상의 마지막에 올 7년대환난을 말한다. 7년대환난은 악인을 심판하고 아직 충분하게 익지 못한 성도들을 충실한 곡식으로 익게 하는 타작마당이 되는 것이다.
3) 천년 지상낙원 시대를 열어주심
예수님은 7년대환난이 끝난 후 불행과 고통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가득찬 지상천국을 열어주시기 위하여 재림하신다. 이를 천년왕국이라 한다. 요한계시록에는 천년왕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 되어 있다.
계20:1-4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부활이라“
이 말씀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천년왕국에 들어갈 성도들이 세종류로 구분되고 있다는 것이다. 보좌에 앉아 심판하는 권세를 받은 분들, 순교자들,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살아 남아서 육체를 가지고 들어가는 성도들이다.
여기서 심판하는 권세를 받은 분들은 7년대환난을 통과하지 않고 휴거된 분들이다. 앞으로 여기에 대하여 명백하게 설명할 것이다. 그 다음 순교자들은 7년대환난을 통과하면서 순교한 분들을 말한다. 나머지 성도들은 7년대환난동안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않고 그의 표도 받지 아니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쯤되면 이제 휴거에 대한 논쟁이 불이 붙는다. 성도라면 모두 휴거된다는 사람, 휴거가 없다는 사람, 준비된 성도만 휴거된다고 하는 사람 각양 각색의 이론들을 나름대로 논리있게 주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어떻게 가르쳐 주는가 하는 것이다. 휴거에 대한 논쟁은 또 성도들이 7년대환난을 통과 하느냐 않하느냐 하는 문제로 발전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결론을 먼저 말하고 차근차근 살펴볼 일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환난을 통과 한다. 가장 쉬운 답은 환난중에 성도들이 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7년대환난 중에 성도들은 짐승의 세력과 싸우기도하고 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큰 인내를 가져야 하고 순교를 당하기도 한다.(계13:7, 14:2, 16:6) 결정적인 근거는 계7:14에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는 말씀이다. 셀 수 없이 많은 흰옷 입은 무리들이 환난 가운데서 나오고 있다. 그럼 휴거되는 성도들은 어떤 성도들인가?
◐ 휴거 되는 성도들
계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이 말씀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 즉 목회자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는 예수님께 인정받아 장차 온 세상에 임하는 시험의 때를 면제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 시험의 때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는 시험의 때라고 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있었던 국지적인 전쟁이나 천재지변, 전염병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온 세상 전체에 미치는 환난 즉 7년대환난을 의미하고 있다. 결국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는 7년대환난을 면제받는다는 말씀이다. 다시말해서 휴거된다는 말씀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가 휴거 되는 이유는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 즉”이다.주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오래 참고 견디며 세상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예수님의 시험의 기준에 합격했다는 말씀이다. 그들은 지금 당장 천국에 들어가서도 싸우지 않고 천국의 법도에 맞게 잘 살 수 있는 분들이다.
영과 혼 그리고 육체 여기서 잠간 영혼육에 대한 개념을 정리해 보자. 사람은 영혼육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육체에 대해서만 잘 알고 있을 뿐 영과 혼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사실은 자기 자신을 모르고 사는 셈이다. 그냥 막연하게 생각하기를 호리병에 담겨진 연기 같다고도 한다. 또는 하얀 기체처럼 공중에 떠나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사실은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없이 그냥 막연하게 살고 있다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이 그렇게 막연한 것이 아니다. 아주 고유한 개성을 가진 확실한 존재이다.
육은 육신 또는 육체라고 한다.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자기 육체에 대해서 얼마나 구석구석 잘 알고 있는가? 영혼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육체에서 영혼이 떠나면 그것을 사망이라고 한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셨다고 했다. 스데반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순교하였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라”(약2:26)고 했다. 영혼이 떠나면 육체는 죽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죽지 않는다. 영원히 산다. 그러므로 영혼이 얼마나 중요한가? 육체는 껍데기에 불과 하다. 허물 벗듯 벗고나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한줌 흙으로 돌아가버리며 영혼만이 영의 세계에 가서 영원히 산다. 실제의 나는 나의 영혼이다. 사람들이 정작 자기의 실체는 버려두고 껍데기 육체만 붙잡고 먹이고 입히고 바르느라 여념없다. 자기 영혼은 말라 비틀어지고 썩어가고 있음에도.
그럼 그 영혼은 어떻게 생겼는가? 육을 육체라고 하듯 영은 영체라고 부른다. 즉 영의 몸이 있다는 뜻이다. 그 영체는 생김새가 그 사람의 육체와 똑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죽은 영혼들끼리 서로 알아 볼 수 있고 각 개체들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연기나 무슨 하얀 기체 같은 것이라면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으며 사람마다의 개성을 구별 할 수 있겠는가? 육체에 고유의 지문이 있고 눈동자의 생김새가 사람마다 달라서 홍체인식 장치로 보안에도 사용을 한다. 그와 같이 영체에도 고유한 형체가 있고 특징들이 있어서 분명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지금 나의 영체가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도 거울을 보면 나의 영체의 모습이 나타난다. 거울에 비치는 나의 육체의 모습이 곧 영체의 모습이니까. 영체도 눈, 코, 입이 다 있고 팔, 다리가 다 있어서 자기의 모습과 똑같은 것이다.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심폐소생술이라는 방법이 있다. 전기 충격도 있고 심장 마사지도 있는데 심장마사지를 할 때는 갈비뼈가 부러지든 말든 그렇게 세게 누른다. 죽었다가 심폐소생술로 살아난 사람이 미국에만 천만명이나 된다. 테네시 대학의 모리스 롤링스 교수는 심장 전문의로서 미국 심장협회 교수단의 일원이다. 그는 하나님도 부정하고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던 의사로서 병원에서 사망선고를 내리는 일을 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모리스 롤링스 교수는 1980. 10. 18일 저녁 심장 발작으로 죽었다. 심장 전문의도 죽음 앞에서는 별 도리가 없었던가 보다. 그는 죽어 있는 동안 지옥을 잠간 경험하고 돌아왔다. 그는 그런 경험을 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고 그리스쳔이 되었고 “지옥에 다녀온 사람들” 이라는 책을 써서 수 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소개하고 있다. 병원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임사체험이라고 하는데 모리스 롤링스 교수는 임사체험자들의 경험을 토대로 공통적인 사실을 몇가지 발견했다.
임사체험자들이 말하는 공통적인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임상학적 죽음을 겪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은 자기 몸을 떠난다. 이 때 고양된 각성과 환희를 경험하며, 또한 자기를 닮은 무언가가 뒤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며 놀라는 과정을 겪는다.(남겨 두고 온 육체를 말한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의식을 잃은 사람들도 똑같은 경험을 하는 경우가 많다.) 2. 밑을 내려다 보면서 그는 그 방안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목격하기 시작한다. 한편 그 방에 있는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과 대화내용을 알아차린다. (대개 의사나 간호사들을 말한다.) 하지만 자신은 그 살아 있는 사람들과 전혀 의사 소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그래서 의사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다시 살려보려고 심폐소생술을 실행하는 모습들을 보는 것이다.) 3. 그는 대개는 어떤 터널을 거쳐서 곧 다른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영의 세계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4. 영의 세계에서 전에 죽은 친척이나 친구,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영화 사랑과 영혼에 보면 이런 사실들이 아주 구체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영체가 영의 세계에 들어가면 주변의 많은 것이 달라지지만 자기의 기억이나 습관, 지식, 의지등은 달라지지 않는다. 육체를 벗었을 뿐 자기의 실체를 그대로 가지고 가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될까? 혼이 육체를 떠나서 빠져 나갈 수는 있지만 영체를 떠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 그 혼이 무엇인지 혼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육은 육체라고 하고 영은 영체라고 하지만 혼은 혼체라고 하지 않는다. 혼은 어떤 형체를 가진 개체가 아니고 영체와 육체를 움직이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은 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식별하고 판단하는 기능은 혼이 하는 일이다. 생각하는 것은 뇌세포를 사용하지만 생각의 주체는 혼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준수한 육체와 영체를 가지고 있다 해도 혼이 없다면 쓸모가 없다. 아무리 좋은 컴퓨더라 할지라도 전원을 연결할 수 없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그 좋은 기억장치나 유용한 프로그램들이 무용지물이 된다. 그처럼 반드시 혼이 있어야 육체나 영체가 사람구실을 할 수 있다.
그럼 혼의 기능들은 어떤 것들이 있나? 기억하고, 인식하고, 생각하고, 감정이 있고,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람답게 하려면 혼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어야 한다. 비정상적인 사람을 가리켜 혼이 나간 사람이라고 한다. 영혼이 나간 사람이라 하지 않고 혼이 나갔다. 혼이 빠졌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혼은 그 사람의 인격과 됨됨이를 결정해 주고 그가 하고자 하는 일, 그의 지향하는 목표등을 결정하게 된다. 죽은 다음에 아는 사람의 영체를 보면서 알아보고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일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혼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혼은 보이지 않지만, 형체도 없지만 혼이 어떠냐에 따라서 육체와 영체의 모양이 만들어 진다. 그래서 흉칙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겉 모습도 흉칙하게 보이고, 사랑과 인자함이 많은 사람은 그렇게 예수님처럼 보이는 것이다. 영체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의 영성에 따라서 영체의 모습이 변하는 것이다. 즉 혼의 성질에 따라서 영체의 모습이 변한다. 그래서 천국에 가보면 모두가 최고로 아름답고 건강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지옥에 가보면 모두 괴물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 그 사람의 성질대로 변해있다는 것이다. 머리가 대책없이 큰 사람, 눈이 너무 커서 얼굴의 절반도 더 덮고 있는 사람, 손발이 일그러지고 비틀린 사람, 입술이 열접시도 넘는 사람, 괴물들의 전시장이다.
그런데 이제 중요한 대목에 와 있다. 혼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혼은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혼은 죽은 다음에도 과거의 기억과 지식을 바탕으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래서 기독지혜사의 대표 강도환집사는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기 외가댁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구원하여 주십사 간청을 한다. 이 세상 살 때 그 생각을 많이 했었기 때문이다. 죽은 다음에 영계에 들어가지만 영혼의 상태는 죽기전과 똑같이 연결되고 이어지는 것이다. 죽은 다음에도 여전히 사랑 할 것은 사랑하고 미워할 것은 미워하며 죽기 직전의 상태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죽은 다음에 천국으로 곧장 간다면 천국이 어떻게 될까? 천국에서 갑자기 원수로 지내던 철수 엄마를 만났다면 욕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내 전재산을 떼먹고 도망간 사람을 만났는데 가서 멱살이라도 잡아야지 그래야 속이 시원하지 어떻게 그냥 둘 수 있나? 천국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이 땅에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육체에 가려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다른 사람이 내 속을 훤이 들여다 보고 나도 다른 사람속을 훤히 들여다 보는데 나를 그렇게 미워하는 남편과 어떻게 사이좋게 지내겠는가? 나를 그렇게 원망하는 아내와 어떻게 사이좋게 지내겠나? 지금 그냥 천국에 간다면 쉽고 편해서 좋겠지만 천국은 순식간에 싸움판이 될 것이다. 지상에 있는 교회에서도 싸움이 나면 멱살잡고, 업어치기하고, 어떤 사나운 여집사님은 상대방 입을 찢어서 교회에 유혈이 낭자하고, 경찰이 출동하고, 하나님도 못 말려서 속수무책인데 천국가면 좀 나아질까?
여기에 마지막 때 7년대환난이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 만약 지금 예수님 오셔서 즉시 천년왕국을 만드신다면 그 천년왕국은 온 갖 범죄와 싸움으로 얼룩질 것인데 그리스도의 왕국이라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천년왕국이 유지될 수 있을까? 오늘까지 온갖 악한 생각과 시기, 질투, 증오를 가지고 살던 사람들이 예수님 오셨다고 하루 아침에 변하겠나? 아니다. 절대 그럴 수 없다. 7년대환난을 통하여 우리의 그런 모든 죄악성을 끊어 내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싸우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실 계획인 것이다.
계7:9절에 보니까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서 감사 찬송을 하고 있다. 14절에는 흰옷 입은 무리들이 누군지 설명해 주고 있다. 그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했다고 했다. 여기서 큰 환난은 7년대환난을 의미한다.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했다는 것은 7년대환난을 통과하면서 많은 회개를 하면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였음을 의미한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19:8) 그러므로 7년대환난은 천국백성을 만드는 과정이다.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만드는 과정이다. 모든 죄를 회개하고 행실을 고쳐 깨끗하고 흠없는 진짜 성도를 만드는 과정이다.
그럼 꼭 환난을 통해서만 할 수 있나? 그렇다. 환난이 없을 때는 자신의 죄악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거룩한 목사님이죠. 근엄한 장로님이지요. 인자한 권사님이죠. 충성되고 친절한 집사님이죠. 환난이 없는데 본성을 들러낼 이유가 어디 있겠나? 환난이 와야 자기 욕심이 채워지지 않고 괴로운 일이 많이 생기니까 화가 치밀고, 포악성이 폭발하고 야수의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속에 이런 마귀적인 성질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내가 이렇게 무서운 죄인이었으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수 밖에 없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왜 필요한지를 알게 된다. 이런 어마어마한 프로젝트가 바로 7년대환난이다.
7년대환난 직전에 예수님은 공중에 강림하시고 그때 익은 열매 즉 장성한 성도들을 공중으로 끌어 올려 천국으로 함께 들어 가실 것이다. 익은 열매들은 7년대환난을 거치면서 더 이상 연단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 성도들은 이땅에 남아서 7년대환난이라는 연단과정을 거쳐 정결케 되고 장성한 신앙이 되어 천년왕국에 들어갈 것이다.
상급 걱정 좀 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이 고양 되었다면 상급에 대해서 논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상급에 대하여 많이 가르쳐 주고 있다. 성경적인 상급은 이땅에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상급은 분명히 크고 작은 구분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평등을 좋아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평등한 것은 몇가지 않되고 대부분 계급이 다르든지 크고 작은 구분이 있다. 평등한 것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 받는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 외에는 뭐든지 다 다르다. 예수님은 남을 섬기는 자가 큰자라고 하셨다. 비유에서도 누구에게는 다섯 달란트, 누구에게는 두달란트, 한달란트씩 차이가 나게 주셨다. 기왕 똑같이 주시지. 바울사도는 금그릇, 은그릇, 질그릇이 있다고 하면서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다고 했다. 사람들을 보면 수많은 차이가 있어서 70억이라는 인구가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고 모두 다른 개성과 특징을 가지고 있다. 피부의 색깔, 키가 크고 작음, 더 많이 배우고 못 배운 사람, 부자, 가난한 사람, 건강한 사람, 병약한 사람.
미국에서는 하루에도 수십가지 인종을 만날 수 있다. 백인, 흑인, 중국사람, 일본사람, 월남사람, 멕시코사람, 아랍인등. 그런 여러 종류의 인종을 보면서 참으로 하나님의 취미는 다양해서 우리 인간으로서 가늠할 수 없구나라는 고백이 절로 나온다. 사람에게는 여러가지 차이가 있고 그런 차이 때문에 상급에서도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받을 상급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상급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누구든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잘보이려고 노력한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또는 자기와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에게는 잘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그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고 해도 맞는 말이다. 하물며 사랑하는 주님 앞에 가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님앞에 가서 받을 상급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면 어떻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천국에서 받을 상급에 대해서는 아무리 욕심을 내어도 지나칠 것이 없다.
1) 천국에서 상 받을 수 있는 행실
마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여기서 구제를 하는 사람이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그는 이땅에서 이미 사람들에게 상을 받았으므로 하늘에 가서 받을 상이 없다는 말씀이다. 특히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은 자기 자신 조차도 내가 지금 구제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자신을 대견스럽게 생각한다면 자신의 만족과 영광을 위하여 하는 일이었으니 하나님께 받을 상급은 없다는 말씀이다. 하물며 자신의 이미지나 자기가 경영하는 기업의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하여 언론에 크게 보도 될 기회를 찾아서 구제를 한다면 더욱 하나님께 상급받을 생각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좋겠는가? 아무리 사람에게 칭찬 받을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어느새 내 마음속에 그놈의 생각이 쏙 들어와 있는걸. 내것 주고 봉사 했는데도 상급이 없다니 차라리 하지 말까? 그러면 주님앞에 가서 심판 받을 때 곤란할 것 같고 봉사를 하자니 자랑스런 마음이 더 먼저 들어와 있고 사람 미치겠네. 그러나 너무 속단할 일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자랑스런 마음없이 봉사 할 수 있는 때가 온다. 갈등을 겪으면서도 상급이 될 수 있는 봉사를 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는 사람에게 그런 때가 온다. 다시말해서 봉사하면서 자랑스런 마음이 들어오면 숨을 멈추고서라도 너 이놈의 못된 생각이 빨리 도망가지 못하겠나!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그런 믿음을 가지는 자신의 부족을 깊이 뉘우치고 주님 앞에 회개하는 훌련을 많이 해야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혹시 봉사에 대한 상급은 없을지 몰라도 그런 마음을 가지기 위하여 애쓰고 노력한 사실에 대해서는 큰 상급이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상급은 회개를 많이 한 것이 가장 큰 상급이 된다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 전도와 기적을 행하는 일
예수님께서 70인의 제자들을 전도를 위하여 파송하신다.(눅10:17-20) 제자들은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하면서 기뻐하였다. 이 때 예수님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귀신들이 항복하고 기적이 일어난 사실이 너무 기뻐서 우쭐하다가 자기들이 한 없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이다. 오히려 겸손하게 오직 하나님께서 권능을 나타내셔서 기적이 일어났노라고 고백했다면 하늘에서 받을 상급이 컷을 것이다.
전도를 아무리 잘 하는 사람도 그가 전도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열매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의 결과를 모두 하나님께 돌려야 할텐데 자기의 능력으로 전도를 많이 한것으로 생각한다면 천국에서 상급은 없다는 말씀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도왕을 뽑아서 시상식도 하고 상품도 주고 있는 실정이니 얼마나 기가막히는 현실인가? 설교자들도 마찬가지다. 요즘 설교는 코미디언처럼 설교를 해야 유명세를 탄다. 그래서 인기가 좋아야 훌륭한 목사가 된다. 많은 칭찬과 존경을 받는다. 하늘에 가서 받을 상급에는 관심이 없다.
◐ 기도
마6:5-8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구변이 좋은 어떤 성도들은 그 기도 소리만 들어도 은혜가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산다. 그런 성도들은 대개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기도하기를 좋아하고 오랜시간 청산 유수와 같이 기도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교회마다 기도 전문가가 있다. 무슨 행사나 대외적인 장소에서 폼나게 기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 교회가 돋보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앞에 솔직한 고백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듣고 아 정말 기도 잘하네라고 인정받기를 원하고 있다 또 교회마다 기도 대장이 있다. 특별히 기도를 많이 하는 기도 대장들은 대개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나보다 기도 더 많이 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은 상받을 일인데 그 자부심 때문에 상급을 다까먹어 버린다.
◐ 금식
마6:16-18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면서 철저하게 자신의 육신의 세력을 죽이려고 하는 것인데 자기가 신앙이 높은 경지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금식을 혼자서만 하는 것처럼 표시를 내기 위하여 얼굴을 흉하게 한다면 하나님께 받을 상이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금식할 때는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도록 은밀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금식이 되어야 하늘에서 상이 있다는 말씀이다. 어떤 부흥강사 프로필에는 “40일 금식기도 3회” 라는 내용도 있다. 남들은 한번도 못하는 40일 금식기도를 세번이나 했으니 대단한 분이긴 한데 그걸 그렇게 자랑하고 다녔으니 어쩌나 하늘에서 상급은 하나도 없겠네
◐ 이웃을 대접하는 일
눅14:12-14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성도들이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이웃이나 존경하는 사람에게 식사대접을 하던지 선물을 주는 경우 자신에게 돌아올 유익을 계산한다면 하늘에서 상급이 없다는 말씀이다. 가난하고 병들고 천하여 다른 사람들이 돌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접한다면 진정한 사랑으로 후한 대접을 한다면 하늘에서 상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중에라도 자기 만족을 얻거나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듣게 된다면 하늘에서 상이 없을 것이다.
2) 사랑과 상급
고전 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서 방언, 예언, 믿음, 구제, 헌신 등은 많은 상급을 쌓고 하나님의 일에 크게 헌신할 수 있는 은사들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믿음의 행위가 사랑이 없이 행하여진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유익이 없다는 것은 구원을 못 받는다는 말씀이 아니다. 세상에서 위로나 축복이 없다는 말씀도 아니다. 천국에 가서 받을 상급이 없다는 말씀이다.
고전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러가지의 많은 은사를 가지고 훌륭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이웃을 돕고 많은 공을 세우는 사람일수록 성내고 교만하기 쉽고 자기가 하는 일에 걸림돌이 될 때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다고 하면서 혈기를 참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는 많은 일을 했지만 사랑 없이 했으므로 상급이 없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의 한 촌에 들어 가셨는데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저희를 멸하리이까”라고 엄청난 말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동네로 돌아가셨다. (눅9:51-56)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감히 박대하느냐고 일과 상황의 중요성만을 생각하고 혈기를 내면서 무서운 말을 했으나 예수님은 사랑으로 그들을 용서하시고 당신이 피하여 주시는 덕을 보여 주셨다. 큰 교회의 목회자, 유명한 부흥사, 신유의 은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분들, 교회에서 헌금을 많이하고, 여러가지 봉사를 많이 해서 칭찬을 많이 받는 사람들일수록 이런 교만과 혈기, 질투, 아집등에 빠지기 쉽고 사랑을 잃어버리기 쉽다.
3) 공력과 상급
고전3:12-15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여기서 “그날”이란 사람들의 영혼이 사후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을 가리켜 말하고, “공력”이란 성도들이 이 땅에 살면서 쌓은 모든 행실을 가리켜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공력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공력인가 상급을 받을 수 없는 공력인가를 정확히 심판하신다. 이 심판대에서 공력을 분별할 때는 빛과 어두움에 대한 진리를 기준으로 한다. 그러므로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쌓은 공력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행한 빛된 행실을 말하고 이런 행실은 선한 동기에서 비롯하여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행한 행실들이다. 이런 행실에 대해서는 당연히 상급을 받을 것이다. 반면에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쌓은 공력 즉 타버리는 공력들은 선한 것 같으나 위선과 외식과 온갖 불순한 동기로 더럽혀진 행실이기 때문에 상급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공력을 분별하는 방법은 불가운데 던져서 타는지 안타는지 알아보시겠다는 말씀이다. 그 불은 물론 시험을 말한다. 흔히 보편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평소에는 잘하다가 시험을 당하면 실망, 원망, 짜증, 혈기 할 것없이 모든 죄악성이 다 나온다. 그래서 시험을 주셔서 상받을 만큼 온전한 믿음을 가졌는지 그렇지 못한지 판단하게 된다.
4) 상급과 빛
“죽음저편”의 저자 마빈포드는 1972년 1월1일 병원에서 30분간 완전히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는 30분동안 천국에 가서 많은 것을 보고 예수님께 재림이 가깝다는 말씀을 듣고 돌아왔다. 그는 천국에 다녀온 뒤로 큰 부흥사가 되어서 남미, 인도, 아프리카, 대만, 미국등 여러나라를 다니면서 대규모의 전도집회를 인도하며 많은 능력을 행하게 되었다. 마빈포드의 천국 경험을 일부분 소개한다.
“멀리서 본 우주의 그 대도시는 하나의 성안에 세 개의 도시가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한 도시 위에 다른 도시가 떠 있는 것 같았다. 가장 큰 도시가 아래에 있었고 가장 작은 도시는 꼭대기에 있어서 피라미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측면에서 그 성을 접근했을 때 나는 그것이 3층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았는데 각층은 위로 올라갈수록 더 화려했다……… 천성에 있는 모든 사람과 천사들은 무지개 빛깔의 후광이 둘러싸고 있으므로 인간의 눈으로는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광채가 나게 된다. 그 후광은 비록 성 중앙에서 반사되는 그 큰 광채의 반사광이긴 하지만 각 개인에게서 발산되는 것처럼 보인다.
각 개인이 도달한 영적 수준에 따라 후광은 그 사람을 티 하나 없는 흰옷을 입은 것처럼 보이게도 하고 동시에 여러 가지 빛깔의 아름다운 채색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이게도 한다. 천성의 위층에 사는 사람들은 가장 밝은 빛을 발하여 그들의 영광이 워낙 찬란하므로 그 아래층의 사람들은 그들을 쳐다볼 수가 없다. 아래층에 속한 성도들이 위층에 방문할 수는 있으나 그들이 보다 큰 영광의 광채 앞에 설 수 있기 위해서는 특별한 준비를 갖추거나 얼굴을 가려햐 한다. 아마 이것은 저 세상으로 영원히 들어가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상급의 정도를 부분적이나마 설명해 줄지 모른다. (마빈포드저 죽음저편)
연단 하시는 하나님
1) 연단은 힘들어
연단이란 무엇인지? 왜 연단하시는지? 어떻게 연단하시는지? 하나님의 연단에 대한 계획을 알아야한다. 계3:17-18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회자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는 매우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심하게 책망하신다. 그는 영적으로 매우 가난하면서도 부요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책망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자
곤고하다 – 영적 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정욕과 죄악성을 잘 극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정욕과 죄악성을 잘 이기지 못하고 영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있다. 인내의 열매를 맺어야 할 상황에서 참지 못하고 화를 잘 낸다든지 청빈한 목회자가 되어야 할텐데 사례비가 많은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한다든지. 가련하고 가난하다 – 외모로 볼 때는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연단받은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영적으로 부요하지 못하여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 많은 감투를 쓰고 학벌도 좋고 큰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만족하고 있지만 무릎꿇고 기도하지 못한다든지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 눈이 멀었다 – 양심의 눈이 멀어서 영적인 행실과 육적인 행실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어두움과 빛을 구별할 수 없는 상태이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귀족처럼 생활을 한다든지 교회가 세속화되고 교인들이 죄에 빠져도 날카롭게 찿아내어 회개하도록 할 수 없다. 벌거벗었다 – 옳은 행실은 없고 정욕과 죄악성의 지배를 받아서 부끄러운 행실만 가득하다. 고급 레스또랑을 좋아하고 세상사람들처럼 허랑방탕한다. 요즘 한국에서는 호화판으로 사는 귀족 목사들 때문에 시끄럽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회자와 똑같은 모습들이다. 지금은 참으로 한국교회의 위기이다.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신앙의 적이되는 물질과, 성공, 쾌락을 신앙의 열매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셨다. 불같은 시험으로 연단을 받아 금같이 귀한 믿음을 소유하라는 말씀이다. 평온한 상태에서 연단이 될 수는 없다. 연단 받기 위해서는 불같은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벧전1:7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공동번역)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신앙은 세상에서 모든 소유를 다 버리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다. 그런데 몇억씩이나 나가는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고 몇십억짜리 별장을 가지고 있는 재벌같은 목사가 어떻게 청빈에 대하여 설교 할 수 있겠는가? 그냥 고급 승용차를 탄다고 하면 눈 한번 질끈 감고 나는 못봤네 하면 되겠는데 스포츠카 라니 아연실색하여 입을 다물수가 없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의 목회자는 세상에서는 가난하고 실패자같이 보일지라도 연단받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사실은 부요한자라고 말씀하신다. 계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 연단의 목적
히5: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장성한 성도를 원하신다. 장성하기 위해서는 연단을 받아야 한다 장성한 성도가 휴거된다고 하였는데 그들은 연단을 받아 선과 악을 정확하게 분별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2) 연단은 필수적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큰 틀을 가지고 계시다. 그 하나님의 계획은 벌써 만세전부터 세워진 것이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고 있다. 하나님의 그 계획 가운데 중요한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연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신다는 것이다.
슥13:7-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목자를 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 당하신 것을 의미한다. 그 후로 예수님 지상재림하실 때까지 온 땅에서 2/3는 멸절하고 1/3만 구원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1/3을 불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고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여기에 예외가 없으며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단을 받아야 한다는 진리를 천명하셨다.
이 진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와 상충되지 않는다. 연단받아 정결케 되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예수님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아야 하는 회개의 생활이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선행이 있어도 자신의 죄를 씻을 수는 없다. 반드시 연단을 통하여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혈에 의해서만 정결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성도의 연단의 과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속에 벌써 예시되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구원으로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들은 애굽에서 가나안땅까지 일주일 정도면 들어갈 수 있는 길을 40년동안이나 광야에서 지내야 했다. 그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기적도 많이 체험하고 말씀(율법)도 받고 외적과 전쟁도 많이 치루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애굽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백성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도 배워서 하나님나라의 백성답게 성장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건은 오늘날 성도들이 예수님을 처음 알고 믿음생활을 시작하여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형이었다.
◐ 모형진리 해설
* 가나안 땅 :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 * 애굽 땅 : 죄악세상 * 바로 : 악령세계의 최고 통치자로서 타락한 루시퍼 천사장 혹은 사탄, 마귀, 용이라고도 한다. * 이스라엘 백성 : 천국에 들어갈 성도들 * 애굽백성 : 지옥에 들어갈 불신자들 * 모세 : 성도들을 인도하는 예수님 또는 성령님 * 출애굽 : 성도가 구원받는 성령체험 즉 신앙생활의 출발점 * 광야 : 구원받은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준비하는 과정이나 장소 * 바로 군대, 아말렉 군대, 아모리와 바산과 미디안 군대들 : 광야의 길에서 성도들을 유혹하고 방해하고 대적하는 악령들 * 할례산 : 심령의 할례 즉 성결은총을 받는 장소
이제 연단과 7년대환난과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만세전부터 7년대환난을 계획하셨다. 다니엘12장은 대환난에 대한 말씀이다. 단12: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개국이래 없던 큰 환난이란 대환난을 의미하는데 그때는 곧 대환난 때에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백성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그 대환난의 목적은 무엇인지 단12:10절에 잘 나타나 있다.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대환난을 통과하는 성도들이 연단받아 정결케하고 희게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은 여러가지 험악한 환경속에서 오히려 더욱 악해져서 지옥백성으로 준비될 것이라는 말씀까지 빼놓지 않으셨다.
그래서 계시록에서 성도들이 연단받는 장소를 “광야”라고 표현하고 있다. (계12:6, 17:3)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연단받게 하셨던 것처럼 대환난은 성도들을 연단하기 위한 광야과정이라는 말씀이다.
4) 악령의 역사와 연단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가기까지 바로의 군대, 아말렉 군대, 아모리. 바산, 미디안 군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고 많은 피해를 주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는 군대들은 모두 악령들의 모형으로 성도들이 악령들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보여준다. 광야를 통과하는 성도들은 악령들의 유혹과 방해를 받으면서 연단을 받아 정결하게 된다. 악령들은 성도들의 생활에 수많은 시험과 유혹, 고통을 주면서 범죄하기 쉬운 환경을 만든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범죄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혹 넘어져 범죄했을 때는 철저하게 회개하면서 성도들은 정결하게 되고 영적으로 성장해간다. 그러므로 이런 악령들의 역사는 성도들의 연단에 필수적이다.
매듭짓는 말
종말론을 사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6.25전쟁을 사상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상때문에 생겼을지는 몰라도 6.25는 사상이 아니고 엄연한 현실이었고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며 죽었고 온 동네가 불바다가 되고 부모형제가 서로 죽이고 죽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실제로 벌어졌다. 그처럼 종말론은 사상이 아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역사이다. 이론이나 희망사항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언젠가 때가 되면 생생한 현실로 나타날 역사라는 것이다. 종말론을 교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무슨 타다만 부지깽이 같은 말인지 모르겠다. 종말론은 교리가 아니고 예언이다. 성경의 예언은 살아있고 언제 터질지 모르지만 분명이 살아있는 화산과 같은 존재이다.
출처:어찌하오리까 주의 재림이 임박한데 우슬초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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