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거蟄居
1
석류꽃 뚝뚝 지고 풍경이 귀를 울리다. 오래도록 헤쳐모인 서늘한 눈들이, 선정적으로 개개비들의 짝이룸 엿보다. 아 무거운 것들, 잠시 기대고 싶었던, 늙은 둥치와 뚝 그친 그 적멸의 무수한 길과, 길 위에 찍혀진 매미 울음들. 뜰아래 탑 선 자리에 주저앉으면 적거謫居의 빗소리만 지나가다.
아둑시니여,
너무 멀리 달아난
2
그래서 잔설 분분한 산 속의, 장독대 옆 비구니
주고받는 말씀 돌담 넘어 도란도란 피는 새소리
길목에 주울 것 다 주운 종종종 새 발자국
첨공尖拱까지 몸뚱아리로, 밀고 밀어올린 길의
대나무 흔드는. 소리 구멍 너무 깊은 울음 무늬
새기는 마른 고백에 걸린 총총총 은초롱눈꽃
<시작 노트>
사물과 인간 사이에 관계하는 어떤 비극적 서정 또는 그 관계의 징조徵兆를 탐색하려 한다. 그것은 연기緣機로서의 인식이 아니라, 그냥 무위無爲하거나, 희론戱論하거나 한다. 사물과 사물의 사이, 혹은 인간과 대상 사이에 경계를 짓는 미묘한 공간, 그리고 그 공간 속에서 제 목소리를 감추고 있는, 다양하지만 미분화된 동식물적 이미지들을 몽환적 색채로 그려보려 한다.
첫댓글 윤희수 시인님의 시 한 편 더 올립니다.
이끼
그대가 쏟아낸
구정물 같은 얼룩이
켜켜이 층진 시간, 묵은
놋그릇 퍼런 이끼 하나를
10년이 지나도록 벗겨내지 못했다
그대 두고 간
구두 밑창 같은 금줄이
목에 걸린 길이, 만큼
파란 철문 굳게 닫힌 녹 하나를
이순의 때에도 씻어내지 못했다
겨우 기억할 수 있는 내 발 끝에
흰 나비는 날고, 헐거운 뒷축의 밑바닥을
날 선 낯빛이 움켜쥐는 것
보였다 턱걸이하듯
왜 또다시 그대 생각인가
아직 식지 않은 이 소슬한 상처
-⟪대구문학⟫(2022.8 '작품 깊이 읽기')에서
부끄럼 나무가 몸을 비비 꼬고
석류나무가 꽃잎을 들어 떨이는
사찰에 가셔서 칩거하고 계셨나 봅니다
풍경소리가 너무 깊어 귀를 울리는 것이
무겁게 느껴지는
번뇌의 경계를 떠날 수 있는 것입니까?
무수한 갈래 난 길, 매미기 아닌 중생의 울음소리로 무늬 진 길
탑이 섰던 자리에 주저앉아 있으면
공중 멀리서 귀양 온 빗소리들이 종종종 지나갔습니까.?
어두운 밤에 보이는 헛것 같은 두려움조차 멀리 달아난
잔설 분분한 장독대 뒤의
비구니들의 도란도란 이야기가 새소리 같았습니까?
그게 무엇이 됐건
세속에서 행해지는 따지고 다투는
모든 것은 전부 쓸데없는 것 맞습니까?
나와 너 이것과 저것
지구와 우주 동물과 식물
서로 의존하면서 법 없이도 존재한다면 낙원이겠지요
대나무 만든 대금의 깊은 울림은 시인의 고백입니까?
시인의 뜻대로 몽환적 색채가 짙어 새벽에 깬 것 같은
긴기민가 하며 눈 비비는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