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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행 18 : 5-11
제 목 : 붙잡히라. 말씀에! 2016.7.17am/진관
[성경본문]--------------------------------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밝히 증거하니,
(6)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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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거룩한 주일에 하나님의 전에 나온 성도들을 환영하며 축복한다.
-서로 인사하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붙잡고 계십니다.’
ex) 저는 십여년 전에 캐나다 밴쿠버에 갔을 때에 노스밴쿠버의 클리블랜드 댐 주위에 연어 부화장을 볼 기회가 있었다. 회귀성 동물인 연어들이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떠나 태평양 바다를 헤매고 다니다가 성장하여 3년 만에 자기 고향으로 돌아온다. 연어들은 세차게 흐르는 강물을 퍼득거리며 헤험쳐 올라간다. 때로는 폭포를 만나기도 하고 계단처럼 층계가 되어 있는 곳을 뛰어 올라서
더 이상 갈수 없는, 자기가 태어난 곳, 부화장까지 와서 거기서 알을 낳고 죽는 것을 보았다.
이런 연어를 회귀성 동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회귀성은 물고기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ex) 오래전에 ‘해피’ 라는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다. 하루는 시들시들했다.
당시만 해도 강아지가 장염이 걸리면 살수 없었다. 그런데 강아지가 장염이 들었다.
그런데 죽을 때 자기를 가장 좋아했던 아들의 옷이 있는 곳까지 힘을 다해 기어가더니 그 옷을
끌어안고 거기서 숨을 거두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포유류 가운데서도 많은 짐승들이 죽을 때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 거기서 생을 마친다.
-왜 그럴까? 과학자들이 연구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다.
-과연 무엇에 붙잡혀 끌려가는 것인가?
-연어가 무엇에 붙들려 3년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동물은 본능(Instinct)에 붙들려 산다. 기본적으로 원천적 본능에 이끌려서
그 생을 살고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은 어떠한가? 마찬가지로 본능대로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다.
-물론 사람의 본능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보다 높은 차원의 본능이다.
그 본능은 바로 이성과 양심이다. 누가 가르치든 안 가르치든, 육법전서를 알던 모르든,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성과 그리고 그 양심이 그를 인도한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아무 아무개는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다.' 라고 한다.
이런 사람이 볼 때는 괜히 많은 법을 만들어 가지고 골치 아픈 것이다.
인간은 이성과 양심에 붙들려 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간다.
-그렇지만 아담의 죄를 지음으로 그 이성과 양심이 더럽혀지고 어두워졌다. /더군다나 이 세상의 험한 일들, /악한 영의 세계가 이성과 양심을 마비시키고 더럽혀서 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이성과 양심이 아닌 것들에 붙잡혀 살아간다. /돈이나. 마약에 붙잡힌 사람이 있다. /알콜이나 니코틴에 붙잡힌 사람이 있다. /명예욕에 붙잡히거나 권력욕에 붙잡힌 자들이 있다.
ex) 요즘 드라마를 보면 한 결 같이 주인공의 출생의 비밀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런 주인공은 복수에 붙잡혀 지금껏 억울하고 서러운 인생살이를 복수한다는 내용으로
마친다. -이렇듯 사람들은 이 세상의 다양한 것들에게 붙잡혀 있다.
-그렇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리스도를 보내 주사 구속을 이루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 주셨다. 이런 사람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
물론 우리그리스도인들은 바른 이성과 깨끗한 양심에 붙잡혀 사는 자들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집사의 자격을 딤전 3:8에 언급한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했다.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는 ‘술에 붙들리지 아니하고’ 라는 말이다.
-딤전 3:9절에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했다.
-디모데를 소개할 때 딤후 1:3절에서는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5절에는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라 했다.
-깨끗한 양심. 청결한 양심, 거짓이 없는 믿음 등은 모두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가져야 할
청결한 이성과 양심이다.
◼ 그렇지만 성도들은 무엇에 붙잡혀 살아야 하는가?
성도들은 말씀에 붙잡혀 살아가야 한다.
-5절에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 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데살로니가에 남아있었던 실라와 디모데가 왔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로 인하여 힘을 얻었을 것이다.
/-이들이 데살로니가교회의 좋은 소식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살전 3:6-8에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했다.
/-그리고 재정적 도움도 힘이 되었다. 천막을 깁는 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려 하니 힘들었다.
그런데 실라와 디모데가 빌립보교회와 데살로니가교회를 비롯한 마게도냐의 교회들로부터
선교비를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 빌1:16절에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소식이 있거나, 먹을거리가 해결된다고 전도가 그저 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전도할 수 있었던 힘은 그가 “말씀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에 붙잡혔다.' 라는 말은 '쑤네케토' (Occupied)라고 하는 말인데, ‘점령되었다.' ‘완전히 포로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바울은 말씀으로 완전히 점령되고, 완전히 붙잡힌 그런 상태가
된 것이다. 바울은 그의 생각도 의지도 운명도 이제는 다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고전 9:16절에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 한다.
선택권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아 말씀을 전하게 만든 것이다.
성도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살아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까닭은
a.소극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대적자가 많기 때문이다. /
6절에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였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좋은 일만 일어나면 얼마나 좋으련만, 믿은 후에 가까운 친척들이 멀리하고 친구들이 사라진다. 도리어 우리를 공격한다.
바로 사탄이 우리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탄의 궤계와 악한 대적자들을 물리치려면 말씀에 붙잡혀야 한다.
b.적극적으로 열매가 있기 때문이다./ 말씀에 붙잡히면 길도, 열매도 열린다.
-7절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 머물게 되었다.
-8절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하였다.
바울이 말씀에 붙잡히니 예수는 그리스도라 담대히 전하게 되고 그랬더니 길이 열리고
열매들이 맺혔는데 회당장 그리스도가 믿고 그 집안 모든 식구가 다 믿는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말씀으로 행하니 열매들이 맺힌 것이다.
◼ 왜 말씀에 붙잡히면 이런 역사들이 일어나는가?
말씀에 붙잡히니 대적을 극복하고 열매들이 맺혔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씀의 능력 때문이다.
-히브리서 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고 한다. 그래서 강한 운동력으로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 말씀하시니 온 천지의 우주와 삼라만상이 만들어 졌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시니 기적이
일어났다. 물이 포도주가 되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이 먹었다.
-말씀하시니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떴다.
◻ 성도여러분! 왜 이렇게 말씀이 능력이 있는가?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장1절이하에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러하다. 말씀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능력이 있다.
ex) 대표기도 하시는 분들이 설교자를 위해 기도한다. “우리 목사님이 말씀에 사로잡혀
설교를 하게 하옵소서!” 오늘의 주의 종들이, 특히 선교사들이 말씀에 사로잡혀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파송하거나 협력하는 선교사들이 중국이나 태국 일본 아프리카의 기니시디우,
그리고 한국 등 세계도처에서 사역하고 있다.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복음 곧 말씀에 붙잡혀 사역하도록 기도해 주어야 한다.
여러분도 말씀에 붙잡힌 자들이 되도록 기도하라.
◼ 그렇다면 말씀에 붙잡히면 어떻게 되는가?
1. 신앙의 명확성이 있다.
말씀에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은 그 신앙의 정체성이 명확하다.
-5절을 다시 읽자.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바울사도는 말씀에 붙잡혀서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 한 것이다.
-주께서 주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존감을
가지고 자신의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밝히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
-믿음의 사람들은 다 그랬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라 한다.(창39:9) 바로의 꿈을 해석할 때도 꿈을 해석하는 자가 하나님이라 말한다.
-창41:16에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라 한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갔을 때도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를 거절한다. 그리고 그도 역시
느브갓네살의 꿈을 해석할 때도 하나님이 하신다고 고백한다.
-단 2:28절에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
일을 자기가 한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심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도 예수는 그리스도라 분명하게 밝히 전한다.
그러하다. 말씀에 붙잡힌 자는 언제나 신앙을 명확하게 밝히며 살아간다.
-성도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밝히 전하고 부끄러워하지 말라.
주님께서는 –막 8:38 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성도가 주님을 부끄러워한다면 주님께서도 심판 날에 우리를 부끄러워하신다.
성도들은 비밀스럽게 살지 말고 말씀에 붙잡혀 그리스도인 됨을 당당히 밝히라.
나아가 예수만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심을 밝히 전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2. 신앙의 연속성이 있다.
말씀에 붙잡힌 자는 신앙생활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한다.
-9절을 읽자.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사역할 때 유대인들은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추격하니 바울은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3 절에 보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 가운데에 있을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신변의 안전을 생각하여 잠시라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중단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도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바울에게 환상가운데 찾아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하셨다.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라는 것이다.
-그러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자는 복음전파에 연속성이 있다. .
ex)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다가 미문에 앉은뱅이가 구걸할 때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여 그의 오른 손을 잡고 일으킨다.(행3:6)
이 일로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에 의하여 두 사람은 붙잡혔다.
이때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는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 고 심문한다. -베드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다.” 하며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고 전한다.
그러자 그들은 위협한다.“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그러자 –행 4:19-20에 사도들은 이렇게 말한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담대한 까닭은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한 것이다. 그러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의 일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두려워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하셨다.
3. 신앙의 사명성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쓰시려고 말씀으로 그를 붙잡으신 것이다.
-어떤 일인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내는 일이다.
그래서 –10절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고린도 성안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고 알리신다.
그들을 구원의 자리로 이끌어내야 하는데 바로 바울을 사용하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
-왜 하나님께서는 고린도의 많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데 바울을 사용하시려 하시는가?
그것은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1절에는 “일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했다.
바울은 말씀에 붙잡혀 고린도 성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 내신 것이다.
ex)영국수상을 네 차례나 역임했던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에게
한 젊은이가 물었다. "인간의 가슴 속 깊이 박혀 있는 슬픔을 어떻게 하면 확실히 치료할 수 있습니까?" 글래드스턴이 대답했다. "복음이요. 오직 복음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소"
성도여러분! 여기 은평뉴타운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다.
그리고 여러분이 살아가는 동네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명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에 붙잡히시기 바란다.
-바울은 행 20:20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내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했다.
-말씀에 붙잡혔기에 복음전하는 이 사명을 위해 생명조차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성도여러분은 말씀에 붙잡히라.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시라.
ex) 유명한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임종을 맞았다. 세상 떠나기 직전에 제자들은 될 수 있는 대로 귀한 말씀을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모여 앉았다.
아직도 그 의식이 분명할 때에 제자들은 물어보았다. "선생님, 선생님께로부터 배운 예정론 중에 이중예정이라는 문제는 좀 납득이 가지 않는데 선생님 혹 그 문제에 대한 의심은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칼빈은 이 때 유명한 대답을 한다.
"성경이 그렇게 말했다.(Bible said so.)"
“성경이 시작하는 데서 시작하고, 성경이 가는 대로 가고, 성경이 멎은 데서 멎었노라. 성경이 그와 같이 말한다,”
-실로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사람이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살아가고 있는가?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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