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르네상스
민재와 우야꼬가 백화점에서 르네상스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프런트로 가서 우야꼬가 직원에게 물었다.
그간의 사정 이야기를 마치고, 호텔 방 하나 있냐고. 보호자가 필요한 터라 이 호텔에서 하룻밤 자겠다고.
직원이 컴퓨터로 숙박 현황을 조회하더니, 미안하다며 대답했다.
“808호. 강민재씨는 오늘밤 내일 밤, 이박이 예약돼 있는데요. 조식만 제공되고요. 죄송하지만, 지금 빈 방이 없는데요.”
그때, 상급 매니저가 내려와 무슨 일이냐고 직원에게 물었다. 상황을 파악한 매니저가 절충안을 내놓았다.
“보호자라니까. 일단 가능하면 808호에서 함께 보내시고요. 침구류는 한 벌 보내겠습니다.
공항테러범 잡은 공로도 있는데요. 함께하는 분, 추가 비용은 없습니다. 내일 아침 조식까지요.“
“고맙습니다.”
우야꼬가 공손하게 매니저와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다.
“우야꼬. 어서 올라갔다 오자. 배고프다. 포장마차 가야지.”
둘 다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때 직원이 이불과 베개를 가져왔다.
“민재야. 내가 바닥에서 잘게. 너는 아프니까 푹신한 침대에서 자고.”
“우야꼬. 난 등이 아프니까, 누워서는 못 자. 그냥 모로 누워 자야지. 여기 소파에서.
우야꼬 네가 침대에서 자면 되잖아. 넌 여자잖아. 몸이 따뜻해야 해.“
“민재야. 그래도 되니? 모르겠다. 우선 나가 보자. 서울의 밤 풍경. 그냥 놓치면 안 되지.”
서울의 밤은 그야말로 불야성이었다. 지금 저녁 시간이면 뉴질랜드는 모든 상가가 문을 닫고 조용한데.
호텔에서 나오니 저녁바람이 선선했다. 데이트 족이 팔짱을 끼고 활보했다. 우야꼬가 그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민재야. 우리도 팔짱끼고 걸어볼까?”
“공주님 맘대로 하셔. 여긴 뉴질랜드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야. 서울에 왔으니까 서울식으로 해야지.”
“알았어. 자. 이렇게. 됐지?”
우야꼬가 민재 오른팔에 왼팔을 걸었다. 민재로서는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우야꼬. 참 좋다. 누군가 그랬어. 뉴질랜드는 재미없는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뉴질랜드는 평일 이 시간이면 다 집에 들어가는데. 좋은 말로 저녁이 있는 삶속으로.
주말 밤이나 돼야 술집 빠나 카페가 좀 붐비고. 평상시 저녁은 조용해서. 젊은이들은 못 견뎌하지.“
“민재야. 저쪽 포장마차. 운치 있어 보인다. 아줌마가 후덕하니 잘 해주실 것 같아.”
“그래. 저 집으로 가자. 고향집 동네 아줌마 같아. 왠지 훈훈해 보여.”
“어서 오세요. 젊은 잉꼬 커플님. 뭐 드실까. 여기 신선한 횟감도. 골벵이도. 산 낙지도. 떡볶이도. 오뎅도.”
“네. 사장님. 전 저 골벵이와 소라요. 오뎅 국물도 주셔요.”
우야꼬 입이 벌써부터 오물거렸다. 식성하나는 참 타고 난 아가씨다. 민재도 우야꼬 하는 대로 따라서 했다.
우야꼬가 소라를 들고 바늘 같은 나무 꼬챙이로 파서 꺼내 먹었다. 민재가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민재. 너도 하나 먹어봐. 자. 입!”
우야꼬가 제법 큰 소라에서 속 알맹이를 꺼내 민재 입에 쏙 넣어주었다, 민재가 소라 맛을 음미하며 잘근 잘근 씹었다.
“젊은 잉꼬 커플님. 소주 한 병 따줄까?”
“아. 죄송해요. 지금은 술 먹을 상태가 아니라서요. 포장마차 음식 맛 좀 보려고요. 이런 포장마차가 그리웠거든요.”
민재의 대답에 우야꼬가 고개를 끄덕였다. 등에 상처가 깊지 않아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지만.
피를 흘린 터라 소주는 삼가 하려는 민재 마음을 따르기로 했다. 대신 기분은 내고 싶었다.
“사장님. 소주잔 두 개 주세요. 물이라도 마시며 기분 내게요.”
“오라. 아가씨 배려심이 좋네. 그랴. 술 못 마실 사정이라도 기분은 내야제.”
아줌마가 빈 소주병을 물로 헹궈냈다. 한번. 두 번. 세 번. 그 빈 병 두 개에 물을 따랐다. 남이 안 보는 사이에.
순간, 물이 소주로 둔갑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을 들어봤는데. 참.
“고마워요. 사장님. 물 한 병에 소주 두병 값 드릴게요. 오늘 밤. 취하고 싶은데. 잘 됐네요.
이렇게라도 해주시니 기분 좀 내겠어요. 역시 사장님은 짱이세요.“
아줌마가 분위기를 맞춰 주려고 애를 써 주었다. 다른 사람 음식 챙겨주면서도. 아줌마 인정이 따뜻했다.
아줌마가 먼저 건배 제의를 했다. 나라와 가정과 자신을 위하여. 나가자로. 소주잔 세 개가 탁하고 부딪쳤다.
“나가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끔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흐뭇한 풍경으로 이해하고 지나갔다.
정말 남들 보기에 단골과 아줌마가 대단한 사이려니 여길 광경이었다. 아줌마와 손발이 척척 맞았다.
물맛이 술맛으로 변했다. 기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싶었다.
“우리가 지금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는 건가? 딱 그럼 느낌인데.”
민재가 작은 유리잔을 우야꼬에게 건넸다. 소주병을 들어 잔에 가득 한잔 따랐다. 우야꼬도 민재 잔에 가득 채웠다.
유리잔이 부딪쳤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소주잔 마주치는 소린가. 우야꼬가 소주잔을 목에 털어 넣었다.
떡볶이도. 순대에 간도. 꼼장어까지. 우야꼬 입이 빨개졌다. 민재가 티슈로 닦아 주었다.
우야꼬가 싱긋 웃었다. 민재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줌마가 한 마디 했다.
“두 잉꼬는 서울 사람 아닌가벼. 내 말이 맞제? 많이 묵어. 이건 내 싸비스야.
닭 똥집. 이거 먹어야 둘이 오래 간댜. 알았제. 그쟈?“
“싸비스요? 정말 오래가는 게 맞아요?”
“그라믄. 나가 시방 거짓말 하긌어? 있는 걸 있다고 한 겨. 어서 퍼뜩 넣어봐. 자. 입. 아!”
민재가 입을 벌리자 구운 닭똥집 큰 것이 쏙 들어왔다. 잘 구운 고기에 참기름 소금장까지 찍었으니.
“사장님. 싸비스. 맛이 끝내주네요.”
“자. 샥씨도 아! 입 좀 벌려 보제. 요것이 그렇게도 꼬습당게. 그쟈?”
우야꼬가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민재가 보기에 딱 새 새끼였다. 엄마 새가 물어오는 먹이를 기다리는.
이번 싸비스는 작은 닭똥집이었다. 우야꼬가 눈을 감고 입을 오물거렸다. 서울의 밤이 포장마차 소주잔에 흥청거렸다.
“외국 나가 살면 이런 게 참 그립단 말이에요. 사장님도 한잔 받으셔유. 제 잔 받아야 왕창 돈 벌어요.”
“워메. 왕창 돈 벌라고라. 그럼 말 나온 김에 한 잔 더 부어 부러. 내사 오늘 밤만 사는 게 아니제. 그쟈?”
아줌마가 잔을 쫙 비우더니. 머리위에 잔을 털었다.
“아줌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우야꼬가 놀란 눈빛으로 쳐다보자, 우야꼬 귀에 대고 아줌마가 속삭였다.
“이렇게 마셔야. 아를 쑥쑥 낳는 거여. 큰 힘 안 쓰고도. 알았제? 내 잔도 받아봐. 예쁜 샥씨!”
우야꼬가 키득 키득 웃었다. 입에 손을 막고. 민재가 흐뭇하게 바라봤다.
아줌마가 우야꼬 잔에 가득 따랐다. 우야꼬가 작정한 듯 마셨다.
‘어라? 우야꼬가 아줌마 잔을 단박에 비우고 머리에 털다니?’
좌판 위에 수북하게 쌓인 음식. 그릇. 우야꼬가 배를 두드렸다.
“민재야. 우리. 참 많이도 먹었다. 취한다. 그쟈?”
“어라? 우야꼬. 언제 그런 말도 배웠댜?”
우야꼬가 배시시 웃었다. 민재가 계산하고 일어섰다.
민재가 지폐 한 장을 꺼냈다. 아줌마 손에 꼭 쥐어주었다.
민재가 우야꼬와 어깨동무하고 천천히 걸었다. 우야꼬가 계속 흥얼거렸다. 평소 풀지 못한 스트레스를 날려서 그런가?
민재 입에서도 콧 노래가 흘러나왔다. 웃고 먹고 마시고. 언제 이런 시간을 가졌던가?
그때. 갑자기 우야꼬가 보드 블록에 앉으며 울었다. 민재가 화들짝 놀랐다. 우야꼬. 감성이 약한 건가.
‘술도 안 마셨는데. 술 취한 것보다 더 하게 마음이 여려진 우야꼬.
그동안 긴장 연속의 비즈니스에 매진하다 맛본 여유에 정신 줄이 놓였나. 강한 사람이 순간 약해지기도 하지.‘
발에 힘이 풀린 우야꼬를 부축해서 호텔 룸에 들어왔다. 우야꼬를 침대에 뉘였다. 가벼운 요를 우야꼬위에 덮어주었다.
민재가 욕실로 갔다. 매일 일마치고 잠들기 전, 씻던 생활을 하다 어제 오늘 못했더니 몸이 거추장스러웠다.
윗옷을 벗고 거울로 비춰가며 등 쪽 상처 부위 붕대를 조심스레 떼어보았다.
약이 좋아서 인지, 민재 상처 회복력이 빨라서 인지. 별 아픔도 없고 잘 아문 느낌이었다.
‘회귀 후. 이 정도 상처는 처음인데. 회귀자의 몸이 보통 사람들 보다 강한 게 판정난 거네. 이제 툴툴 털고 일어서자.’
민재가 등 쪽을 빼놓고 물로 씻었다. 역시 개운했다. 하루를 열심히 살고 샤워하면 피로 회복이 빨랐다.
민재가 소파에 요를 깔고 그대로 모로 누웠다. 이불을 덮자마자 통나무처럼 쓰러져 잠이 들었다.
얼마를 잔 걸까. 새벽녘이었다. 그때, 어슴푸레 샤워장 물소리가 잠결에 둘렸다.
‘뭐지? 우야꼬가 일어나 샤워를 하나? 아는 척 하기도 그러네. 그냥 눈 붙이자.‘
다시 민재가 잠속에 빠져들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민재 등 뒤에 밀착하는 접촉이 느껴졌다.
갑자기 우야꼬가 민재 목을 확 껴안았다. 순간이었다. 무방비 상태의 민재가 우야꼬 위로 넘어졌다.
우야꼬가 민재 입술을 훔쳤다. 눈 깜짝할 새. 바로 민재 입 속에 우야꼬가 빨려 들어갔다.
“어~ ”
민재가 놀라서 당황한 사이. 그대로 무너져버렸다. 남자와 여자였다. 그것도 팔팔한 스물아홉 나이.
순간. 이성은 본성에 꼼짝없이 쓰러졌다. 원초적 본능이라는 게 이런 건가. 일본이 한국을 기습공격 했다고?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개인과 개인에서. 국가와 국가로 치달아 올랐다.
일본 열도 최남단부터 최북단까지 완전히 초토화해 나갔다. 지진에 화산 발에 용암 분출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갔다. 새벽 내, 천둥치고 벼락이 내리쳤다.
아침이 될 무렵, 들끓던 일본 열도가 결국 잠잠해졌다. 한국 반도가 제자리로 물러났다.
우야꼬가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냈다. 잔 두 개에 물을 따랐다. 민재 옆으로 와 물 잔을 권했다.
“민재야. 미안해. 잠이 든 널 보고. 그만 내 욕망에 무너져서.”
우야꼬가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민재가 가볍게 말했다.
“어쨌든 역사를 써버렸네. 나도 모르겠어.”
둘이 아무 말 없이 물을 마셨다. 순간. 우야꼬가 민재 품에 안겼다.
우야꼬 눈에 눈물이 어렸다. 민재가 우야꼬 입술에 입을 포갰다. 우야꼬가 와락 민재 목을 껴안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우야꼬가 가만히 말했다.
“민재야. 어떡해. 우리. 이대로 세상이 영원히 멈춰버렸으면 좋겠어.”
“우야꼬. 내말이. 이런 경험은 내 생에 처음이었어. 정말 르네상스였어.”
우야꼬가 민재 가슴에 대고 울면서 흐느적거렸다. 민재가 우야꼬 등을 토닥여 주었다.
벽시계가 7시 반을 가리키며 움직였다. 9시면 시상식 장에 가야 하는데. 민재 머리에 또 그 말이 떠올랐다.
‘‘헤어질 것을 전제로 한 사랑이야 말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다.’
어제. 인천 국제공항에 입국해서 민재와 우야꼬가 헤어질 때, 떠오른 말이었다.
오늘. 서울 르네상스 호텔에서 우야꼬와 민재가 헤어지며 또 이 말이 떠오르다니?
이 말이 어제 오늘로 그칠지. 아니면 또 이어질지. 그건 둘의 소관이 아니라 생각했다.
위에서 맺어주는 대로. 내일은 없고 오늘 순간이 끝 날이라고. 오늘 주어진 일에 몰입하기로.
각자 떠날 준비를 마친 후. 민재가 우야꼬를 꼭 껴안아 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헤어질 것을 전제로 한 사랑이야 말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래.“
우야꼬가 눈물어린 눈으로 민재 가슴에 파고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야. 우리 르네상스가 또 올 거야. 미야지마에 와. 노벨문학상 작품 탈고 하러. 사랑해. 민재야”
“우야꼬.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하늘이 주는 때를 또 기다리자. 고마워. 우야꼬.” *
99화 끝(5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