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무박이 시작되었다.
동그란 랜턴 불빛을 쫓아 걷는 갑갑함과
캄캄한 어둠에 혼자 놓일 것 같은 두려움,
서서히 드러나는 사위를 통해 보게 되는
신비로운 시간의 흐름.
양면의 무게가 양팔 저울의 균형을 이룬다.
백두대간에서 만나는 고갯길 중
지능선의 고개를 빼고 세어도
진부령서 성삼재까지 총 37개이다.
‘재’가 붙은 고갯길은 16, ‘령’은 14, ‘치’는 1, ‘마을’은 2,
‘재’로도 ‘령’으로도 불리우는 곳은 4이다.
고갯길을 일컫는 말의 다름이 궁금하여
찾아볼수록 더 애매하다.
‘‘재’와 ‘령’은 모두 길이 나 있는 높은 고개‘라고 하는데
그 경계가 명확하게 설명되지가 않는다.
다만 ’재‘는 순수 우리말, ’령‘은 한자어라는 사실 뿐.
’치‘는 지세가 가파른 고개를 의미하며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통로라는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높이와 넓이의 기준으로 보면 ’령‘>’재‘>’치‘의 순으로 이해된다.
’령‘은 마차가 다니던 고개로써 대체로 500m 이상의 고개들이 많고
’재‘는 사람이 주로 다니던 고개로 낮으며
’치‘는 더 작은 고개이거나 마을을 연결하는 통로라고 개념지으면.
지금도
’령‘은 모두 찻길이 나 있고
’재‘는 일부 찻길이 나 있고
’치‘는 찻길이 나 있지 않다고 한다.
(정령치는 찻길이 나 있는데...???)
어쨌든 교통의 수단으로 도보나 우마에 의지하였던 때의
’고개‘가 차지했던 교통상의 지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매우 중요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퇴색되고 기능을 많이 상실한 듯 보이지만
백두대간을 이어가는 데는 아직도 소중한 고개들이다.
버리미기재에 떨어진 시간은 새벽 3시 가까이.
벌초와 수면 부족 등으로 피로도가 높아선지
이 시간에 뭐하는 짓인고~라는 자괴감 때문인지
곰넘이봉까지의 발걸음은 비틀하고 우물쭈물하며 위태롭다.
그러나 정신 빠짝 차리지 않으면
한순간 한방에 저 아래 어딘가로 뿅 사라질 수도 있는
낭떠러지, 직벽의 로프구간들이 쉴 틈없이 등장하니
기대감에 더하여 근육이 긴장하는 게 느껴지며
오소소 기분좋은 소름이 살짝 돋는다.
깊은 갱으로 광부들이 줄지어 들어가듯
랜턴 불빛에 의지하여 아래로 때로는 위로 오르는
낙동산악회원들의 고군분투가 아름답게 다가와
감동이 뭉클~~하였는데
모든 대장님과 남성동지분들께서 여성동지분을 챙기던 그 알뜰한 보살핌은 더욱이나 감동 잡채^^
빈 속에 독주 한모금 털어넣을 때의
위장벽을 타고 흐르는 그 짜리리~함이랄까......
며칠 몇 날을 앓고서 에소프레소 한 샷 들이킬 때의
고소한 향과 맛에 더 깊이 취하는 행복감이랄까......
아무튼 그랬다.
불과 3시간여의 전투 같았던 대야산까지의 초반 행군에서 이미 기력이 소진되었는데
운무에 가려졌지만 붉게 돋아나는 새아침의 생동감에
왠지 모를 자신감이 탱천하고 뿌듯하여
절로 기운이 돋는다.
대야산 정상석의 뒷모습을 보며
’출입금지‘ 팻말이 붙은 펜스를 넘어 오르는 일은 처음이라
기분이 묘하다.
대야산(930.7m) 정상석 주변에서 잠시 쉬며
조항산~청화산, 더 멀리 속리산자락까지의 능선을 바라본다.
온 길의 2배를 더 가야하는 산행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어쩌랴.
발걸음 멈추지 않으면 늘 그곳에 도착한다는 진리를 아는데.
늦게 올라오시는 분들이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드리고
밀재로 향한다.
웅장한 대문바위에서 이리저리 조망을 하거나
잠시 쉬거나 가벼운 아침을 먹거나 한다.
한길님, 배미정님, 나는 제대로 아침을 챙겨먹는다.
위산 역류가 영 불편하여 가볍게 먹으려고 하였으나
먹성이 어디 가겠는가..ㅠ
대문바위 사이를 지나 능선 옆길로 가면 전망대 바위가 있다.
풍광이 끝내주는 곳인데 대기 가스가 많아 조금 아쉽다.
밀재에서 1시간 여만에 고모치(샘)에 이른다.
이팔청춘, 승승장구님을 만나고 샘에서 물도 한통 채운다.
고모샘에서부터는 야생화 천국이다.
여유로운 발걸음은 힐링과 치유다.
투구꽃을 기다렸는데 이제야 꽃망울이 뾰족하게 나온다.
조항산 가기 전까지 크게 위험한 구간은 없으나
좁은 등로를 지날 때가 많아 덥고 답답하며 성가시다.
다들 초반에 힘을 빼서 발걸음이 무거운지 터덜터덜 하신다.
그러함에도 어찌 조항산에 이른다.
조항산은 여전하다.
같이 걸음한 여성회원분의 선글라스를 냉큼 삼켰지만.
구름 사이 드러나는 하늘빛이 이쁘다며
순애님이 사진을 다시 찍어주신다.
과일과 빵을 조금씩 나눠먹으며
청화산에 갈 마음의 채비를 한다.
조항산에서 청화산까지는 약 4.2km,
제법 거리가 길지만 풍광이 아주 멋진 길이다.
멀리 속리산 전경이 보이는 곳의 암릉구간에 오르자
속까지 시원해지는 깨끗하고 정갈한 바람이 불어온다.
시원하다~~ 시원하다~~온 마음으로 감사하며
지나온 조항산을 뒤돌아보고 툭 튀어나온 시루 바위도 마주본다.
더러더러 조망이 터지는 곳이 많다.
거친 바람에 시달려 한쪽으로 가지를 뻗긴 했지만
조야하지 않고 기품있는 소나무를 보니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습인 듯하여 숙연해진다.
갓바위재 안내목에서 익숙한 산악회의 시그널을 보며 반가워하고
발걸음 맞춰 걷는 분과의 대화도 즐거웁고
아름다운 길을 걷긴 하지만
청화산까지의 구간은 길고 길게만 생각된다.
앞의 봉을 두 번이나 지나야 만나게 되는 청화산은
’너무나 먼 당신‘이다.
청화산을 1km 남긴 지점에서
힘들어하는 분들을 뒤로 하고
발걸음에 억지로라도 힘을 실어 오르다가
청화산 정상에서 눈이 빠져라 우리를 기다리다 걱정되어
시루봉 갈림길까지 되돌아 마중나온
네오 선두대장님을 만난다.
버리미기재~대야산 오름길부터 여기 마지막 구간까지
함께하여 주는 따뜻함에 마음이 몽글해진다.
청화산에 도착하니 한낮의 더위가 깊고 고요하게 앉았다.
먼저 와서 데크에서 편안히 누워 쉬고 있는 회원님이 부럽다.
이제 늘재까지는 2.6km,
밧줄이 있고 큰 비에 훼손된 듯한 까탈스런 구간이 있으나
큰 무리없이 내려간다.
긴 구간이 아니니 곧 하산하여
승승장구님이 준비한 시원한 맥주 원샷하며
’그래, 바로 이 맛이야~‘를 만끽하고 싶었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정국기원단‘에 다다라서야 휴~이젠 다 내려왔구나 싶다.
’정국‘이 일본의 ’야스쿠니‘라고 ’개일본‘이라며 훼손하고 말 많았던 기원단이다.
표현은 달랐으나 국토민안을 위한 마음들은 동색이라 생각되지만
헤프닝으로 끝난 일이 누구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낙동강과 한강의 분수령이 되는 지점인 늘재의 키 큰 표식에 다다랐다.
야호~~~속으로 크게 만세를 부르며
버스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신발벗고 양말벗고 편하게 앉아
정말로 시원한 맥주를 마시게 된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늘티라고 부르는 늘재에는
수령이 350여년에 이르는 성황당 음나무가 있는데
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산행을 종료하고
버스에 올라타 잠시 꿀잠을 잔다.
다 내려오신 이후 계곡을 찾아 몸의 땀내를 씻어 낸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
시간을 공유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관계다.
시간과 사랑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었을 거라는 생각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사랑이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니......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공간과 사람......
나는
지금
광활한 백두대간에서
낙동산악회 19기 회원분들과 함께 한다.
사랑하는 공간과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곳,
사랑하는 공간과 사람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는 것,
이런 사실들 덕분에 삶을 영위하고
이 삶의 동력으로 힘겨운 순간에도
속절없이 무너내리지 않을 수 있다.
첫댓글 버리미기재 첫 개구멍통과를 축하드립니다 ~ㅎ
백두대간길은 걷는다면 필연적으로 금줄을 넘어서 가야될 길이라 모두들 망설임 없이 금줄을 넘어 가지요~~ㅋ
앞으로 졸업때 까지 수없는 개구멍통과가 기다리고 있어요~ㅠ
령.재.치의 구분은 알았으나 대간길에 37개가 있는줄 처음 알았네요 ~(또 이렇게 배웁니다)
캄캄한 어두움에 혼자놓일것 같은 두려움은 무박 회수가 지날수록 점점 야산에 익숙해집니다!!
대야산 직벽구간 밧줄잡고 오르는모습(산이랑님사진)보기좋았습니다~~ㅎ
어려운 구간 무사히 마치고시원한
맥주한캔은 완전피로회복제가 되지요!!(*이맛이 최고지요!!😄)
점점더 대간길 매력에 빠져드시는것 같네요~~ㅎ
수고하셨습니다!!!
대장님, 개구멍 입문이 완전 벅찹니다.ㅠ
평생 올바른 길로만 댕기던 사람이
새벽에 금줄 넘어가려니
다리가 옴짤거려 제대로 걸어지지가 않더라구요ㅋ
온 사방에 랜턴 불빛 방사하며
드러내놓고 걷는 갱단이랄까~~^^
어찌어찌 이리 빠져들어가고 있습니다.
한발 한발 깊숙히 들어가니
빠져나오기 힘들겠죠.
청화산서 늘재의 내리막길이 너무 지루하여
급 내려왔더니만 도가니가 시큰거렸답니다.
응원에 힘입어 담 구간도 무사 완주하도록 하겠습니다 🥰
온갖야생화와 독버섯으로 가득한 어둠을 뜷고 뚜벅 뚜벅 걸었습니다 맑고 쾌청한 날씨에 푹푹찌는 무더위 어느새 목적지에 다달았을때 안도의숨을 몰아쉬었죠
많은사진과 정성이 가득담긴 후기글이 다시 그곳으로 잠시 머뭅니다
보석같은 란선님이 계시기에 편안하고 쉽게 그곳으로 다시 갈수 있었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매 힘든 구간이 올 때마다 기운돋우는 응원으로
다독거려 주시는 홍님 덕분에 많은 힘을 얻는답니다.
무거운 음료도 챙겨주시고 먹는 음식의 영양분석까지도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란선 착하신 마음 전해 받으니 참 따뜻하네요 오히려 제가 배울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저를 치켜 주시고 항상 밝은미소 가득 주셔서 힘이 납니다
멋진 대간길 함께여서 참 감사합니다 한걸음 한걸음이 승리고를 울릴테죠~~♡
명절 잘 보내십시오 곧 벅찬 대간길에서 뵙겠습니다
@hong '승리고를 울린다'는 표현이 적확해 보입니다~^^
가슴 벅찰 일이 있는 사실만으로도
삶의 승리고를 이미 울렸음을 알고 계시죠^^
["시간을 공유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관계다.
시간과 사랑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었을 거라는 생각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햐아아!
란선님의 '시간과 사랑'이 추상적인 것 같은데, 여기에 기록된 '시간과 사랑'은 사유가 응축되고 육화되어 구체성 있는 가라사대로 들립니다
마치 '힘의 의지' 명제를 사유했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에너지 가득한 역동성에 놀라고 있습니다.
우짜둥둥, 미지의 갱 속에서 울려나오는 음성으로 버리미기재가 또 와야만 한다고 저를 부르는 것 같습니다(란선님이 묘사한 문장을 훔쳐옴)~~ㅋ
오늘은 제가 저를 향해 곱게 미친 것 맞냐고?, 곱게 미쳐가고 있는 안쪽에 시간과 사랑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자평하고 싶어집니다.
고맙습니다.
버리미기재 다시 갈 때 연락주십시오ㅋ ㅋ
무쏘꿈님의 걸음에 따를 날이 오기를 기다릴게요.
누가 말했지요.
'치료는 고통을 사라지게 하지만
마취는 고통을 건너가게 한다고'
치료할 수 없다면 마취라도 하는 게 맞죠?ㅋ
가장 좋은 마취제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손을 잡으면 건너오는 체온이 마취제니까요.
손끝에서 온 몸으로 흐르는 체온에 마취되어
서로의 어려운 시간을 건널 수 있겠죠.
대야산 직전의 직벽 로프구간서 체험하였던 것처럼요.
그리고 다행한건 우리 모두 손이 둘씩이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책읽는것을 싫어하는데 넘 글을 잘 써놓으셔서 정독했네요~^^
수고많으셨고 추석연휴 잘 보내세요~^^
책읽는 거 좋아했었는데
이젠 저도 F형으로만 읽으려고 하네요ㅠ
책과 내가 마주보고 서로를 읽는 것이 독서라면
책은 맨날 똑같은 나를 읽으며 재미없어할 것 같아요ㅠ
정독하셨다니 고맙습니다 🥰
명절 연휴, 행복하세요 ㅎㅎ
무박산행.
야간산행.
랜턴의 불빛.
역사드라마에 횃불 들고 침공하는 장면, 피난 가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재, 령, 치 를 알게 되고
버리미기재는
자식들을 벌어 먹이려고 넘나들던 고개 라는 뜻을 찾게 되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침공하고 피난가고~~
수난의 랜턴 부대들였어요.ㅋ
찾아내신 버리미기재의 진의에 완전 빵~~터졌습니다.
해학이 풍부하시고 언어 농담의 대가이십니다.
* 점심상 찍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ㅎㅎ
시골에서 소를 키울 때, 아니 곁에서 소를 지켜볼 때 소가 풀을 뜯고 나서
편안한 곳에 앉거나 서서 피로에 겨운 듯 지긋이 눈을 감거나 반쯤 뜨고 '되새김'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다른 동물에서는 보기 어려운 소 만이 가진 습성이고 소화 방법이다.
바쁜 삶 가운데 자신과 지난 날,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바쁘다는 핑계도 '여유'를 갖지 못한 좁디좁은 마음에서 오는 굳은 습관이기도 하다.
지나온 길을 이리도 아름다운 생각을 입혀 반추하게 만드는 솜씨. 역시 대단한 문학가입니다.
한 편의 서사시처럼 지나온 백두대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생각의 조각들을 물 흐르듯
유려한 필치로 엮어내는 글 솜씨에 감동을 받습니다.
다시 대간 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계절을 옮아감을 거역하는 무더운 더위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이래저래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되새김의 시간이 늦어져서인지
적은 글을 읽으며 다시 되새겨 보니
혼돈되는 기억들이 부분 부분 있네요ㅠ
그래서 한길님처럼 제 때 기록하는 좋은 습관을 부러워만 합니다.
매일의 일을 시간대별로 정리하는 일,
그것도 손글씨로 반복하는 습관이
치매를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데
치매를 피하고는 싶어하면서도 실천하기가 쉽지 않네요.
그런 면에서도 한길님은 대단하십니다 👍👍👍
여러 좋은 삶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심에
존경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