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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평전을 통해서 본 문선명 선생의 공산주의 붕괴 노력(참고는 오종필이 올린 것임)
유명한 스크린셀러인 <명량>이나 <국제시장> 등을 펴낸 저자 김호경이 쓴 <문선명 평전>을 인용하여 문선명 선생께서 공산주의와 어떤 투쟁을 했는지 옮겨 적어본다. 새삼 김진명 작가의 <예언>을 읽으면서 문선명 선생의 업적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라고 본다.
-참고1... 1985년 8월 13~17일 스위스 제네바, 제2차 세계평화교수협의회 세계대회에서 문선명 선생 지시로 몰튼 카플란 박사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종언 선언(당시 대회 사진과 카플란 박사 )
김호경 작가의 <평전> p.211 이하의 글을 부분적으로 올려 본다.
북한에서 태어났고 한국전쟁 시기에 흥남 감옥에 수감되었던 문선명은 공산주의의 모순을 잘 알기에 전 세계적으로 승공운동을 펼쳐나갔다. 우선 1960년대부터 전 국민, 특히 경찰 간부를 대상으로 사상교육을 시작했다. 이후 승공계몽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까지 등불처럼 번져나갔다. 오늘날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 국가들이 민주국가로 전환되고, 중국과 베트남이 개방되어 세계가 40~50년 전보다 공산주의에 의한 전쟁 위협이 줄어든 바탕에는 국제승공연합의 목숨을 건 치열한 투쟁이 있었다. 1965년 11월 문선명은 각 도별로 반공계몽단을 만들도록 했다. 그 첫 번째는 강원도였다. 목표는 “공산주의 사상을 학술적으로 비판함으로써 그 사악한 진실을 전 국민에게 인식시키고 철저한 반공사상으로 무장해 반공 대열에 참여시킨다.”는 것이었다.
(중략) 그리하여 1968년 1월 13일 국제승공연합을 창립했다. (중략) 2월에는 승공이론의 교과서와 같은 <새공산주의 비판>을 발행했다. (중략) 이 책은 승공운동의 길잡이가 되었으며, 곧 일본어판이 발간돼 일본에서도 선풍을 일으켰다. (중략) 전 세계에서 공산주의를 물리치는데 큰 힘을 발휘했다.
-참고2... 1960년대에 통일교에서 출판한 서적 <새공산주의 비판>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제1장 마르크스 시대의 환경과 마르크스주의의 성립 제2장 마르크스의 가치론과 그 비판과 대안(pp29~124) 제3장 변증법적 유물론 및 그 비판과 대안(pp.125~202) 제4장 유물사관 및 그 비판과 대안(pp.203~302) ... 또한 1980년대에 두 번째 출판한 <공산주의의 종언>은 제1장 마르크스의 인간소외론(pp.21~50) 제2장 공산주의유물론의 비판과 그 대안(pp.51~87) 제3장 유물변증법의 비판과 그 대안(pp.88~130) 제4장 유물사관의 비판과 그 대안(pp.131~201) 제5장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의 비판과 그 대안(pp.202~232) 제6장 마르크스 경제학의 비판과 그 대안(pp.233~298) 제7장 사회주의 경제의 파탄과 그 원인(pp.299~334) 제8장 마르크스의 인간소외론의 비판과 대안(pp.335~366) 결론
(중략) 1970년 6월에 시작된 (한국의 승공연합연수원에서 실시한) 승공연수교육은 1989년까지 87만 명이 교육을 받아 우리나라 승공운동에서 가장 찬란한 금자탑을 쌓았다.
(중략) (일본의 대학들이 공산주의 영향으로 사상적으로 매우 혼란했을 때) 문선명은 일본 신도들을 대학가 현장에 보냈다. 이들 중에는 강한 신념과 실천력을 지닌 에리카와 야수에도 포함되었다. (중략) 그녀는 22살의 처녀였다. 문선명은 그녀에게 “너는 조선대학교 앞에서 생명을 걸고 3년 동안 승공 연설을 해야 한다, 너는 총격을 당할 수도 있고, 트럭에 치일 수도 있다. 네가 가는 곳마다 죽음의 위협을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너는 매일 조선대학교에 가서 연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3년 동안 전단을 나누어주고 캠퍼스 앞에서 연설하며 반공을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러는 동안 지옥과 같은 시련을 겪었다. 담뱃불로 지지는 사람도 있었으며, 혹독한 겨울에 양동이에 담긴 차가운 물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다. 한번은 그녀를 붙잡아 캠퍼스 근처에 흐르는 강에 던지기도 했다. 그런 일이 생길수록 그녀(에리카와)는 더 강해졌고 일본 전역에서 널리 존경받는 승공의 상징이 되었다.
(중략) 1969년 10월 도쿄 하비야공원에서 첫 번째 국제승공대회를 열었으며 좌파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언론들은 앞다투어 이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 순간까지도 일본 공산화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일본 공산당에게 이 사건은 이 사건은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승공운동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던 많은 일본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는 위대한 성과를 올렸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에서 미군의 패배로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되자 세계, 특히 아시아는 불안에 떨었다. 문선명은 공산주의자들이 침략 야욕에 쐐기를 박고 조국을 사수하기 위해 구국세계대회를 열었다. 구국세계대회는 우리나라 국민들뿐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 승공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준 중요한 행사였다. 1975년 6월 7일 오후 3시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대회에는 61개국 1천여 명의 대표 등 120만 명이 참석해 승공의 염원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중략) 문선명이 파견한 선교사들은 세계 각국으로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동시에 승공사상을 전파하는데도 앞장섰다. 그들은 유럽과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활동했으며 승공연합 지부는 거의 300개 도시에 이르렀다. 적화되어 가고 있던 남미에서 1980년대부터 카우사 운동을 벌여 열띤 호응을 받은 것은 세계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다.
-참고3... 남북미에서 하고 있는 카우사 운동은 우리나라의 승공활동과 같다. 1980년 10월 남북미 대륙의 통일과 협력을 통한 세계평화 실현을 위해 전직 국가수반을 중심으로 남북미통일연합(CAUSA)이 창설되었고, 1983년 중남미 국가들이 참여하는 중남미통일연합(AULA)도 결성하였다. 또한 남미의 게릴라 전에 대비하기 위해 미국의 예비역 장성들로 구성된 군사고문단을 남미에 배치하여 고급 군사정보와 게릴라전에 대해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남미에서는 주로 공산주의라는 환란을 받는 나라부터 시작했다. 남미의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과테말라와 같은 나라이다. 현재는 남미에서 카우사 활동을 국가 차원에서 전개하고 있고, 남미 26개국에 카우사 교육 세미나를 통한 카우사 조직을 완료한 뒤 북미에까지 카우사 활동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에서 카우사 회원 1천만 명 모집운동이 1986년 9월 1일을 기해서 시작됐고 1986년 11월 24일 미국에 도착한 그날 저녁에 1천만 명 회원 모집이 다 끝났다. 미국 사람들은 사인을 하고 어떤 단체에 가입한다는 것에 대해 자기 전 생명과 전 재산이 연결된다고 생각하기에 사인을 하고 가입한다는 일은 우리 동양 사람들과 개념이 다르다. 그 일을 시작할 때 미국의 통일교 회원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통일교가 불가능한 일을 지금까지 해왔기 때문에 시도했고, 결국 승리하게 되었다.
기타... 1970년대 문 총재와 함께 니카라과 등 중남미에서 카우사 운동을 펼친 공로와 전 세계적으로 여성 평화운동을 전개한 업적을 높이 인정받았다. 이 자리에서 (니카라과 마나과 국립 과학대학교) 파디자 총장은 “과거 소련의 위협을 받던 시절, 문 총재와 한 총재가 니카라과에서 펼친 평화운동이 (니카라과의 자유를 지키는 데) 중요했음을 알게 돼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게 됐다”고 전했다.
(기사 : 가정연합 한학자 총재, 니카라과 국립대 명예박사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0830_0010256947&cID=10701&pID=10700)
(중략) 1976년 12월에 미국에서 <뉴스월드>를 창간해 1981년 대통령선거에서 레이건 후보가 당선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뉴스월드>를 접고) 1982년 <워싱턴타임즈>를 창간해 레이건 대통령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레이건독트린을 구축하는 핵심 역할도 했다. 레이건은 SDI 방위구상을 정책화시켜 소련의 붕괴를 이끌었다.
(중략) (문선명의 승공) 행적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공산국가에서 문선명을 제거하려고 테러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문선명은 그들을 미워하거나 원수로 여기지 않았다. 냉전의 끝자락인 1990년 4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나고, 그 이듬해 11월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난 것은 단순히 목숨을 건 모험이 아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찾아간 것은 하늘의 뜻을 전하기 위해 문선명이 걸어야 할 숙명이었다. 모스크바를 영어로 발음하면 머스트 고(must go)였기 때문에 ‘가지 않으면 안 될 곳’이라고 역설했다. (중략) 1980년내 초까지만 해도 공산주의는 금방 세계를 덮을 기세였다. (중략) 남미에서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 공산주의가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밀림에서 활동하는 게릴라부대가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는 일도 다반사였다. 문선명은 이러한 불행한 사태를 막기 위해 모스크바로의 행진을 관철시키려 했다.
(중략) 오래 전부터 꿈꾸어왔던 모스크바로의 행진이 모양새를 갖춰나갔다. 1990년 4월 10~13일까지 제11차 세계 언론인 대회가 모스크바에서 노보스티 통신사와 공동 주최로 열렸다. 세계 각국에서 온 600명의 기자들과 41개국의 전진 국가수반들이 모여 대회장은 몹시 북적거렸다. 문선명은 그 대회에서 원론적이고 별 의미 없는 내용 대신 직설적이고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다. (중략) (그 행사에 참석한) 기자들은 “소련인들에게 아담과 해와에 대한 강의를 했다. … 이것이 새로운 시대가 아니라면 그 무엇이 새로운 시대란 말인가?”라고 논평했다. 연설을 마친 4월 10일 오후,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만나겠다는 연락을 전해왔다. 다음날 크렘린 궁전을 방문해 고르바초프와 무릎을 맞대고 앉아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께서는 페레스트로이카로 이미 훌륭한 성공을 거두고 계시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개혁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소련 땅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십시오, 하나님 없이 물질세계만을 개혁하려 한다면 페레스트로이카는 반드시 실패합니다. 이 나라에 종교의 자유를 불어넣는 것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입니다. 이제는 러시아를 개방한 용기로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세계의 대통령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종교의 자유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뛰어나오자 고르바초프는 적잖이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렇지만 독일 통일을 허락한 사람답게 곧 굳어진 얼굴을 펴며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문선명은 곧바로 “한국과 소련은 이제 서로 국교를 맺어야 한다.”고 강조한 뒤 한국과 소련이 수교하면 어떤 점들이 좋은지도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그날 문선명은 고르바초프와 헤어지면서 손목시계를 풀어 그의 손에 채워주었다. 마치 옛 친구를 대하듯 스스럼없는 태도에 당황하는 고르바초프를 향해 “대통령께서 지금 추진하는 개혁 정책이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이 시계를 보면서 나와의 약속을 생각하면 하늘이 분명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고르바초프와의 만남으로 절정을 이룬 ‘모스크바로의 행진’은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각국 언론은 이 소식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한국과 소련 양국 간에 1년 내에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했다.”고 전했으며, 특히 폐쇄적인 소련의 국영언론 <이스베티아>와 <프라우다>는 문선명의 연설 내용까지 포함해 대대적으로 기사를 실었다. 4월 20일에는 TV에서 특별 프로그램도 반영되었다.
그리고 그해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르바초프와 노태우 대통령이 만나 한소정상회담을 가졌다. 마침내 1990년 9월 30일 한국과 소련은 86년 만에 역사적인 국교를 맺었다. 문선명의 말처럼, 정치는 정치가가, 외교는 외교관이 할 일이지만 오랫동안 막힌 물꼬를 트는 일에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종교인의 역할이 더 효과적이기도 했다. 이후 세계 역사는 획기적으로 변했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에 봄이 찾아온 것이다.
그 후 문선명이 소련 고위 관료들과 국회의원들을 미국으로 초대하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1991년 4월 30일~ 5월 2일까지 소련연방 내 15개 공화국의 200명에 달하는 고위 관료와 정치 지도자들이 미국지도자대회에 참석했다. 역사 이해 그 누구도 15개 공화국 대표자들을 그렇게 한꺼번에 움직이게 한 적은 없었다. 미국을 방문한 소련 관료들은 카우사 교육을 받았으며 워싱턴DC에서 미국 고위 관료들을 만났고, 뉴욕에서는 사업가들을 만나 경제협력에 대해 협의했다. 이어 3천 명의 소련 젊은이들도 문선명의 후원으로 미국을 방문해 국제교육재단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이러한 문선명의 길고 긴 노력 끝에 소련은 공산주의의 잘못된 가면을 벗어 던졌다. 독일 역시 통일되었으며 동유럽의 모든 국가들도 공산주의 울타리에서 벗어났다. 이 모든 놀라운 성과들은 1970년부터 꾸준히 뿌려온 승공의 씨앗에 의해 맺어진 열매였다.
(중략) 문선명이 본래 북한에 가려 한 이유가 고향에 가고 싶어서도 아니고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김일성을 만나 조국의 장래를 놓고 담판을 지으려 간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에 들어간 지) 6일이 지나도록 김일성을 만나게 해준다는 아무런 언질도 없다가 7일째가 되어서야 만났다. 함경남도 마전에 있는 주석공관에 들어서자 김일성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서로 얼싸안았다.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사냥이며 낚시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갑자기 할 말이 너무 많아져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문선명이 일주일의 일정을 마치고 평양을 떠나자마자 연형묵 총리를 수반으로 한 북한 대표단이 서울에 왔으며, 연 총리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조인했다. 문선명은 북한을 내 고향, 내 형제의 집으로 여기고 찾아 갔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을 주려고 간 것이었다. 김일성을 만나고 온 후 북한에서 평화자동차공장을 비롯해 보통강호텔, 세계평화센터 등을 운영했다. 이런 일들은 남북교류와 통일을 위한 평화 활동등리지 경제적 이득을 얻기 이한 사업이 아니었다. 문선명의 방북은 뚜렷한 결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평화자동차 등의 기업을 통해 남북화해 조성에 일정한 몫을 했으며, 리틀엔젤스 공연을 계기로 문화 교류도 이어졌다.
(중략) 남미에서 출발해 전 세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몰아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카우사 운동이었다. <워싱턴타임즈> 창설과 더불어 소련을 붕괴로 이끈 쌍두마차였으며, 1980년~1991년 소련 붕괴에 이르기까지 11년 동안 오대양 육대주를 풍미하며 세계 도처에서 공산 세력을 수세에 몰아넣었다.
(중략) 한국과 일본에서 일취월장 성공을 거둔 승공운동은 서구에서는 먹히지 않았다. ‘반공’이란 단어조차 꺼리는 미국에서 어찌 ‘승공’이란 말을 외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내세운 것이 ‘하나님주의’였다. 그곳에서는 승공은 말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다. 카우사는 남북미통일연합의 약자이다. 그러면서도 스페인어로 ‘제1원인, 곧 하나님’으로 통용되는 말이었다. 카우사 운동은 곧 하나님주의 운동이 된 것이다.
(중략) 1980년부터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카우사운동이 시작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이 날뛰는 곳에서 기자들을 모아 통일사상을 소개하고, 카우사운동의 필요성을 선언했다. 이와 같은 선언은 메마른 땅에 단비와도 같았다. 신문에 기자회견 내용이 대서특필되면서 우루과이, 파라과이 정부들이 카우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사상적 대안은 당시 남미에서는 복음 중의 복음이었다.
(중략) 1980년 4월에 아르헨티나 반공지도자 20여 명을 뉴욕에 초청해 승공사상 교육을 시키고 문선명의 숙소인 이스트가든으로 초대했다. 그 후 남미에서 제일 먼저 카우사 현지교육을 신청한 나라는 볼리비아였다. 45명의 영특한 젊은 엘리트들을 모아놓고 카우사 교육을 부탁한 것이다. 1980년 12월 강사진이 남미로 떠나기 전에 문선명은 그들을 불러 지침을 주었다. 이 지침은 카우사의 영원한 강령이 되었다.
“카우사운동은 곧 하나님주의로, 인간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운동입니다. 좌경된 인사마저 개조하여 승공의 용사로 만들어야 합니다. 카우사운동은 학술운동이 아니라 사상운동입니다. 인간변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영원을 녹여 부어야 합니다. 2시간 강의하기 위해서는 6시간을 기도해야 합니다. 곧 영력으로 인간 개조 역사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중략) 45명의 젊은이들이 애국청년으로 변하자 볼리비아 정부는 3만 명의 대학생 교육을 카우사에 부탁했다. 이 성공을 발판으로 카우사는 남미 전역을 순회하며 연달아 세미나를 열었다.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에콰도르, 온두라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브라질 등을 순회하며 승공운동을 펼쳤고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다.
남미 대부분의 나라는 가톨릭 국가다. 카우사가 남미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는 일에 헌신하자 곧 로마교황청이 감동을 받아 격려를 보냈다. 아르헨티나의 라플라타 가톨릭대학에서 카우사 세미나가 열렸는데 이를 주재한 사람은 안토니오 플라자 대주교였다. 라플라타대학은 훗날 문선명이 댄버리에 수감되자 크게 분개했고 옥중에 있는 문선명을 응원하기 위해 명예박사학위를 들고 직접 미국으로 왔다.
1983년이 밝아오자 남미에서의 성공을 밑거름으로 카우사를 미국에 상륙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북미대륙 최초의 카우사 세미나를 미국이 아닌 자메이카에서 열고 미국의 저명인사 200명을 초청했다. 이후 승공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자 1983년 7월, 뉴욕 5번가의 티파니빌딩에 카우사 국제본부를 세웠다.
그런 후 1984년 5월부터 15개월의 댄버리 옥중생활에 들어갔다. 문선명이 교도소에 갇힌 몸이 되었지만 통일교 관련 조직들은 단 한시도 쉬지 않았다. 특히 카우사 동지들은 이를 악물고 분투했다. 한편으로는 문선명의 부당한 투옥에 항의해 전국에서 집회가 열렸다. 각 도시마다 종교 탄압에 항의하는 데모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문선명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면회를 온 사람들에게 “나는 옥중에 있지만 하나님과 더불어 있습니다. 나를 진정 사랑하고 위해주려거든 데모하는 대신 카우사 세미나에 가서 내 사상을 배우십시오.”라고 당부했다.
그리하여 7만 명의 미국 목사들이 카우사 사상을 배웠다. 이것이 훗날 미국을 공산적화에서 막아내는 교두보가 될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1985년 7월 댄버리에서 출감한 문선명은 4일 후에 카우사 간부들을 초대해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또 앞으로 할 일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남미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카우사는 이념운동의 중추가 되었다. 대도시에서 카우사 세미나가 열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정치인들은 카우사의 가치를 발견하고 정치철학과 결부시켰다. 주 의회의원, 시의원, 국회의원들이 카우사 이념을 배우고 미국의 애국운동으로 받아들였다. 카우사에서 파생된 애국단체들이 속속 만들어졌는데 미국헌법위원회, 미국자유연합, 중남미통합기구, 세계평화연합, 국제소수민족연합 등이다. 공산적화를 정책 차원에서 방어하기 위해 국제안보문제연구소도 세워졌다. 그리하여 1991년 12월 소련의 붕괴에 이르기까지 카우사는 <워싱턴 타임즈>와 쌍벽을 이루며 드디어 공산주의의 몰락을 보고야만 것이다.
-참고4-1... “레이건이 83년 3월에 발표한 미사일방위구상(SDI)은 소련에 충격을 가했고, 고르바초프가 군사대결 노선으로부터 후퇴하는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알렉산더 베스 스메르토 루이프 (고르바초프 정권 당시 외무부장관) 저서 ‘소비에트 비극’ 중에서
-참고4-2... “만약 레이건과 내가 군축협정에 서명하고 양국관계를 정상화하지 않았다면 그 이후 전개된 사태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소련이 개혁정책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나와 레이건은 그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자서전 ‘선택’ 중에서
-참고5-1... 레이건을 당선시키는데 결정적 배경이 된 뉴스월드의 예언기사와 레이건
-참고5-2... SDI 구상을 현실화 시키고자 노력한 워싱턴타임즈 기사
-참고6... 노동신문에 실린 문선명 선생의 연설문 전문
이날 문선명 선생의 연설 전문이 김 주석의 지시로 다음날 ‘로동신문’에 실렸다. ‘로동신문’에는 아무리 유명 인사의 연설문이라 해도 간단히 소개하는 것이 관례임을 비춰 볼 때 가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연설문에는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시어 우리에게 통일의 기회를 주셨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 분단 46년 만에 ‘하나님’이란 글자가 ‘로동신문’에 처음으로 실리게 되는 기록을 남기게 됐다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문 총재는 김달현 부총리와 윤기복 부위원장 등 북측 고위관리가 참석한 가운데 만수대 국회의사당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주제로 두 시간에 걸쳐 그의 평소 신념인 ‘하나님주의’와 ‘두익사상(頭瀷思想)’, ‘참사랑에 의한 남북통일방안’등에 대해 설명했다.
윤 부위원장의 주체사상 소개와 한국문화재단 박보희회장의 통일교회 선교현황과 ‘통일원리’(교리)의 소개에 이어 문 총재는 신자들을 앞에 놓고 설교하듯이 “주체사상을 가지고 남과 북을 통일할 수 없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인간이 주체가 될 수 없다. 통일조국은 하나님주의로서만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이따금씩 테이블을 내리치며 남침을 전세계 앞에 사과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북한의 한 관계자는 나중에 박 회장에게 “의사당에서 그럴 수 있느냐, 테이블을 칠 수 있느냐”며 항의를 했다는 후문이다.
신을 부정하고 ‘김일성주의’로 무장된 북측 지도급 인사들에게 하나님주의를 주창한 것이나, 좌익도 우익도 아닌 통합적 사상체계인 ‘두익사상’을 설파하면서 그들이 금기시하는 사상문제를 들고 나왔다는 것은 파격적이었고, 문 총재가 아니면 감히 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 당시 참석자들의 설명이다. 여기다가 “연설내용이 너무 강력하셔서 저들의 감정이 상한 것 같다”는 박 회장의 보고에 대해 문 총재는 “내가 북한 땅에 와서 할 말을 안 하고 가면 천법에 걸린다. 김일성 주석을 못 만나도 할 말은 다 하겠다”며 태연해했다.
기타...
북한정부 대표와 합의한 공동성명(1991년 12월 5일)
1. 쌍방은 반드시 가까운 장래에 통일을 이룩하는 데 대하여 강조하였다.
2. 쌍방은 자주적인 대화와 협상을 통해 평화적 통일에 견해 일치를 본다.
3. 남과 북이 서로 공존, 공영하는 기초 위에 통일국가를 세우며,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민주주의적으로 하여야 한다.
4. 남북 불가침에 합의하고, 핵무기의 제조나 배치가 없어야 한다.
5. 정치∙ 군사적 대결 상태 해소하고, 다각적 협력, 교류 실현을 목적으로 남북 고위급 회담이 성과적으로 진전되기를 희망한다.
6. 남북고위급회담의 진전으로 하루빨리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길 기원한다.
7. 민족 대단결의 원칙으로 조국통일 실현에 적극 이바지한다.
8. 세계평화연합측은 북한에서 추진하는 경제사업에 투자할 용의가 있다.
9. 1992년 리틀엔젤스 평양초대공연과 평양예술단의 서울공연을 실현한다.
10. 1천만 이산가족 고통을 덜기 위해 남북 사이의 자유왕래와 전면 개방을 실현하는 데 노력하며, 그 일환으로 1992년 안으로 이산가족 면회소와 편지교환소를 설치하고, 먼저 노령자의 만남부터 실시토록 노력한다.
기타...
김일성 주석과의 합의사항(1991년 12월 6일)
1. 한반도 통일의 1단계 인도적 사업 추진의 일환으로 1992년부터 이산가족 찾아주기 사업을 추진한다. 이산가족 상봉과 결합은 노령자부터 실시한다.
2. 핵에너지는 평화적 목적에만 사용할 것이며, 공화국(북한)은 순리적인 국제 핵사찰을 받을 것이다.
3. 공화국은 해외교포를 위시한 모든 국가의 대북한 경제투자를 환영하며, 군수산업을 제외한 평화적 경제사업에 통일그룹이 지원하는 대원칙에 합의한다.
4. 공화국은 남북 정상이 만나서 통일 방식을 토론 및 결의할 수 있다면, 정상회담에 응할 용의가 있다.
-참고7... 역사적인 문선명-김일성 포옹 장면 : 북한 정권과 주체사상을 세운 김일성과의 영적 차원에서의 통일 장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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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생님 좋은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