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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위 순교자 현양동산 - 무명순교자 일만 위의 영혼을 기리다 |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 1486(바다의 별 청소년 수련원 내)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고비고개로741번길 107
일만 위 순교자 현양동산 조성 경위
100여 년의 박해시대를 거친 한국 천주교회에는 최소한 1만 명의 순교자들이 있지만 이름 정도라도 알려진 순교자는 약 1,000여 명에 불과하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목숨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수많은 신앙 선조들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이름이나 행적을 모른다고 해서 그들의 신앙과 고귀한 순교 정신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1996년 가을 인천가톨릭대학교가 주축이 되어 시작한 한국 일만 위 순교자 현양동산 조성사업은 순교자들의 위대한 정신과 삶을 현양하고 널리 전함으로써 하느님과 선조 순교자들에게 영광을 드린다는 취지에서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인천교구는 섬 전체가 역사 유적지이자 순교 터이기도 한 강화도의 강화 청소년 야영장(현 바다의 별 청소년 수련원) 내 일부 부지에 한국 일만 위 순교자 현양동산을 조성해 2002년 8월 14일 최기산 주교의 주례로 한국의 순교자들, 특히 무명 순교자들에게 봉헌하였다.
2002년 조성 초기에 성모당과 십자가의 길에 이어서 전국 유명 성지의 상징물이 있는 순교자의 길이 조성되었고, 무명 순교자상과 일만 위 순교자 현양탑, 연못을 돌며 묵주기도를 바칠 수 있는 묵주 연못 등이 조성되었다.
2005년 11월 3일에는 기존의 강당 건물을 리모델링한 무명관 2층에 70여 평 규모의 일만 위 순교자 기념성당을 마련했다.
2007년 6월 26일에는 청소년 수련원 우측 계곡 옆으로 주님 위로의 동산과 위로의 주님상, 그리고 무명순교자의 길을 조성하여 축복식을 거행했다.
2007년 10월 26일에는 순교자 기념 성당 옆에 성 남종삼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이 기념관에는 성인의 유해 10여 점과 성인의 생애에 대한 소개 자료, 기적 증거 자료 등이 보존 · 전시되어 있다.
2018년 11월 24일에는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내에 순례자들의 침묵 순례를 돕기 위해 조성한 혼자 걷는 묵주기도 4 신비길 축복식을 거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점심식사 후 3시30분 경 택시로 도착을 했다. 택시 기사에게 30분 정도 대기해주기로 양해를 구하고 순례에 들어갔다. 비도 뿌려서 우산 없이는 다니지 못할 정도이다. 거기다 바람까지 불어서 보행에 지장을 줄 정도다.
안내도에는 숨은 기도처가 5군데 있으니 보물 찾듯이 몰래 혼자 찾아가며 기도하라고 한다. 그 5군데는 (1)성 남종삼 기념관 유해실 (2)위로의 주님동산 (3)무명순교자상 (4)성모당 (5)일 만위 순교자 현양탑이다.
기념성당 건물 밑 에 이르니 판넬 벽에 성당이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쓰여 있고 그 아래 순례의 시작은 침묵입니다라는 멘트가 있다. 이뿐 아니라 성지 구내에 침묵을 강조하는 문구를 도처에 볼 수 있다. 건물은 2층인데 1층은 성물방, 사무실, 쉼터이고 2층은 성당과 남종삼기념관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일만 위 순교자 기념성당
먼저 성당부터 참배했다. 2층 성당 입구에 위로의 예수님께서 두 팔 벌리시고 맞아주시고 그 옆에 미사 안내문이 있다. “무의미의 유혹”을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문이 이색적이다. 물론 사랑의 의미가 중요하지만 미움보다 더한 적은 무의미, 무관심이다.
성당 내부 역시 수수하다. 평범한 타일벽에는 아무 장식도 없고 단지 제대만은 눈길이 간다. 4개의 호롱불에 무명 순교자 조각상 모형이 감실 앞에 놓여있고 제대 전면에는 가시관이 걸렸다. 제대 후벽 좌우에는 본 성지에 조성된 성모당의 성모상과 무명순교자상이 사진으로 걸렸다.
성당을 나서면 성 남종삼 기념관으로 연결된다. 복도 같은 길을 통과하는데 강복길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전능하신 천주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이 길을 지나는 모든이에게 강복하소서”라는 구절을 몇 자씩 끊어 매달아 놓았다.
성 남종삼 기념관 - 제1기도처 -
이 기념관에 안치 중인 성 남종삼의 유해는 성인의 고종손인 남기윤(베네딕토) 이 큰고모인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남형우 수녀가 보존해오던 것을 인도받아 인천교구에 기증한 것이다. 성인의 묘는 양주시 장흥에 있으나 유해는 자손 중 남형우 수녀가 보관해 왔다고 한다. 2004년 8월31일 남기윤씨 아들 재현(디모데오)가 사제로 서품 된 것을 계기로 보다 많은 사람이 친견할 수 있도록 교구에 기증한 것이다.
유해의 내용은 척추뼈 1점, 치아 4점, 슬개골 1점, 머리카락과 부위가 불명확한 부스러기 뼈 등이다. 인천교구는 2004년 8월 31일 유해 봉안 예식을 갖고 임시로 주교관 경당 감실로 옮겨 모셨다.
인천교구에서는 2004년 9월2일 11시 40분부터 교구청에서 유해 방부작업을 하였다. 유해를 알콜에 담는 작업 중 40여분이 지나면서 유해에서 갑자기 피가 우러나오기 시작하였고 점차 담배연기가 피어오르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퍼져 나왔다. 1866년 3월7일 순교하신 후 이미 150년(148년 6개월)이 지났는데 피가 우러나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일은 당시 인천교구장이시던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님을 비롯하여 인천교구청 관계자들이 직접 목격하였다. 그 거룩한 피가 우러나온 알콜을 밀봉하여 이곳 유해와 함께 보존하고 있다.
이처럼 유해에 대한 방부 처리를 거쳐 일부는 2004년 9월 7일 갑곶 순교성지에 봉안하였고, 나머지는 2007년 10월 26일 축복식을 가진 성 남종삼 기념관에 모셨다.
기념관 내부는 아주 조촐하다. 형구 칼 모양의 조형물에 고상을 새기고 제대 안에 투명 유리로 성 남종삼의 유해를 모셨다. 기념관 뒤편에 도자기 모양의 독특한 성수대가 있는데 성당에 있는 것과 비슷하다.
유해 내용은 왼쪽으로부터 엄지발가락 뼈, 치아, 발꿈치뼈, 척추뼈, 발등뼈이며 오른쪽 두 개의 용기 중, 하나는 는 두발과 상투, 맨 오른쪽은 피가 섞인 알콜이다.
숨은 기도처 제1처가 여기이다. 이곳에서의 기도는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이다. 유해 앞이라 더욱 엄숙한 마음으로 합송하였다.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 주소서.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 주소서.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당신들은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으니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 주시어 교회를 이 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와 수도자를 많이 나게 하시고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냉담 교우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 하나 되고비신자들은 참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 주시어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 주소서.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성당을 나와 순교자 현양동산에 오른다. 순교자 현양동산은 바다의 별 청소년 수련장 광장 위쪽에 조성되어 있다. 다음은 제2기도처 위로의 주님 동산으로 간다.
위로의 주님 동산으로 가자면 순교자 믿음길을 가야한다. 순교자 믿음길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시복하신 124위 복자 중 부자관계, 모녀관계, 양반, 중인, 서민, 천민, 장애인, 여성 등 다양한 분들의 행적을 15처 안에 담은 것으로 한국순교복자 성직수도회 강석진 요셉 신부가 뽑았다. 이 길은 계절 따라 야생초가 앞 다투어 피고 진다. 우리 순교자의 삶이 마치 야생초와 닮았다는 생각에 뽑지 않고 그대로 둔다고 한다. 모쪼록 순례자들이 이 길에서 선한 고집 한 가지씩 가져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제일 먼저 장애 복자 김시우 알렉시오(1782-1815)다. 그는 반신불수 장애자라서 일도 못하고 결혼도 못한 채 가난하게 혼자 살았던 교우다. 1815년 을해박해시 경북 영양 머루산에서 교우들이 체포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니 포졸들이 우는 이유를 묻자 “나도 천주교 신자인데 불구자의 몸이라고 잡아가지 않으니 서글퍼서 웁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그도 잡혀가서 순교했다.
다음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이다. 정약용 형제 중 가장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했던 정약종(1760-1801)은 그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사형을 받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천주는 큰 임금이자 큰 어버이시니 사람이 천주를 섬기는 도리를 못하면 이는 살아도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했다. 또 그가 형장에 도착하자 하늘로 보며 누워 “하늘을 쳐다보면서 죽는 것이 땅을 내려보면서 죽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다.
위로의 주님상 - 제2기도처 -
순교자 믿음길 중간쯤에 위로의 제2기도처 위로의 주님 동산과 현양동산 표지석이 있다. 우리가 주변에서 만나는 예수성심상은 왜 꼭 심장에 칼이 박혀 있는 모습일까? 예수성심을 달리 만날 수는 없을까? 이를 고민하는 사제가 작가에게 위로가 묻어나는 예수성심상을 의뢰하여 위로의 주님상이 제작되었다.
조각가 조숙의 교수가 제작한 위로의 주님상은 고통으로 신음하는 예수님이 아닌 자상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근심에 쌓인 인간을 품에 안아 주시려 두 팔을 벌린 예수님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위로의 주님상’이 세워진 위로의 주님 동산은 세상 근심과 걱정에 지친 신자들이 자비로우신 예수 성심께 기도하며 참된 위로와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조성되는데 ‘위로의 주님상’은 원래 동산 아래에 있던 것을 2017년 이곳으로 옮겼다. 제2기도처에서의 기도는 위로의 주님께 바치는 기도이다.
위로의 주님께 바치는 기도
모든 위로의 샘이신 주님!
주님께서는 역사 안에 계신 임마누엘이시고 구세주이시며,
항상 저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이심을 믿습니다.
온갖 시련과 고통 속에서 보듬어 안아주시고,
삶의 고단함에 지친 어깨를 두드려주시는
주님의 위로하심에 언제나 새로운 힘을 얻게 해주십시오.
모든 위로의 샘이신 주님!
당신만이 아시는 구원의 시간을
신뢰와 인내로 기다리는 지혜를 주시어
저희 삶의 고통마저 기쁘게 바치게 해주십시오.
모든 위로의 샘이신 주님!
주님 앞에서의 가난을 깨달음으로써
욕망과 이기심에서 벗어나
이웃에게 하느님의 거저주시는 사랑의 표지가 되어
저희 온 생애가 경탄하올 하느님 사람의 찬미가 되게 해주십시오.
모든 위로의 샘이신 주님!
온갖 미움과 폭력과 전쟁을 이길 용기를 주시어
마침내 당신의 사랑과 평화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게 해주십시오.
모든 위로의 샘이신 주님!
항상 저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남으로써
언제나 끝없이 솟아나는 당신 사랑의 샘에서
기쁨을 긷게 해주십시오.
평화를 심게 해주십시오.
행복을 살게 해주십시오.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니이다.
(천주교 인천교구 최 보니파시오 주교 인준)
이 순교자 믿음길을 계속 가면 무명순교자의 길이 나오고 이어서 묵주 연못과 마지막으로 무명순교자상이 나온다. 악천후라서 일단 4번째 기도처인 성모당과 5번째 기도처인 일만위 순교자현양탑이 가까워 가기가 쉬울 것 같아 그리로 향했다.
성모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고통의 신비길을 걸어야 한다. 상당한 오르막이다. 고통의 신비가 끝나는 곳에 제법 넓은 평지가 있고 거기에 성모당이 있다.
성모당 - 제4기도처 -
성모당 앞 넓은 공터에는 비와 햇볕을 가릴 수 있는 쉼터가 있다. 여기서도 침묵이다. 순례의 시작은 침묵입니다라는 구절이 곳곳에 있다. 그리고 좀더 구체적인 주의문도 함께 붙어 있다. 성지 내에서는 자리를 깔거나 도시락이나 다과를 나눌 수 없다는 내용이다.
순례객들이 얼마나 먹고 떠들고 했으면 이런 삼엄한 주의문이 붙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움츠려들어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성모상과 성모당 안내문에는 성모당의 대문이 왜 반쯤 열렸는가가 잘 설명이 되고 있다. 성모 마리아는 우리의 기도를 대신 전구하시는 어머니다. 그러나 그저 앉은 채로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다. 자녀의 방문에 자리를 박차고 급하게 마중 나오느라 맨발인 줄도 모르고, 옷깃을 휘날리며 뛰어나오는 환대의 어머니이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를 살리고자 성모당의 한옥 대문을 반쯤 열어두었다. 성모 마리아는 성모당을 올라오시는 우리네의 인기척에 지금 막 뛰어나오시는 우리네 어머니이다.
옛글에도 집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문에 기대어 바랜다’는 의문지망(依門之望)이라는 사자성어(四字成語)를 썼다. 우리는 이러한 성모님의 기다림에 얼마만큼의 응답을 하고 있나?
제4의처 성모당 기도문은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 기도(초를 봉헌할 때 드리는 기도)이다.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 기도
저보다 저를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
이 초를 내려놓으면서
주님과 성모님 앞에 제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주님께 간절히 바라는 저와 제 가정의 소망들도
주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시기를 바라며 내려놓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주시고
주님께서는 가장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시고
주님께서는 가장 옳을 일을 선택해주시리라는
굳은 큰 믿음을 갖게 해주소서.
또한 맡기는 만큼, 받아들이는 만큼
제 믿음이 성장하게 되리라는 깨달음을 주소서.
이제 제 마음속 불편했던 마음들을 내려놓고 갑니다.
순교자 어머니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성모당 앞에 마치 성모칠고처럼 성모님의 생애를 나타내는 5가지 조각상이 있다.(박선환 다미아노 작)
멀지 않는 곳에 성모칠고상(성모마리아가 겪은 일곱 가지 고통)이 있다. 가톨릭교회는 오래 전부터 성모마리아의 일곱 가지 기쁨(성모칠락)과 짝을 이루어 일곱 가지 고통(성모칠고)를 기억하는 신심이 있었다. 스타밧 마떼르(고통의 어머니 십자가 곁에 서시어)로 대표되는 고통의 성모신심은 아직도 전례력에 그 흔적이 남아 매년 9월15일에 성모통고 기념일을 지내고 있다. 이 성모칠고 작품은 일만 위 순교자현양동산 조성 초기인 2003년에 어느 익명의 수녀님이 직접 만들어 기증해주신 것이다. 제목과 성구는 자료마다 제각각인데, 여기서는 백관 신부님의 '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을 따랐다.
성모당 가까이 성지순례 확인 스탬프 찍는 곳이 있다. 다른 성지에는 성지 입구나 사무실에 스탬프를 배치하고 있는데 이곳은 성지 깊숙히 있는 것이 다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에서 찾을 수 있다.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같은 날 여러 성지를 다니다보면 일정상 성지마다 충분히 시간을 할애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도 ‘한 시간 이상 순례’라는 구절은 반은 공감을 하나 반은 공감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볼거리가 많은 성지와 그렇지 않은 성지가 있기 마련이기에 일률적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특히 전국 순례는 시간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받지 않는다면 몇년이 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순례 후 순례기를 정리하는 입장에서는 그래도 꼼꼼히 보아야기에 다른 사람보다 항상 시간에 쫓긴다. 그것이 오히려 성지순례를 망치게 하지나 않는지 반성도 하고 있다. 특히 이번의 경우처럼 택시를 부르고 대기시키고 하는 것은 정말 할 바가 못 된다.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한다고 했듯, 묵주기도 네 신비의 길, 곧 환희의 신비길, 고통의 신비길, 영광의 신비길, 빛의 신비길이 모두 이곳 스탬프 찍는 곳으로 모아진다. 그리고 동시에 모아지는 곳이자 동시에 갈라지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 환희의 신비길을 통해 제5기도처인 일만위순교자 현양탑으로 간다.
일만위 순교자 현양탑 - 제5기도처 -
이 탑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현양탑 상부의 청동 십자가와 순교자의 행렬은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희생되신 예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길'을 따라간 많은 순교자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현양탑 상부 양쪽 모서리가 잘려 나간 것은 지상에서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말하고 있다.
중앙에 하늘로 뚫린 부활의 십자가는 그 아래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부활의 십자가 좌우에는 머리에 칼을 쓴 무명순교자 두 분이 목숨을 바쳐 증거한 신앙의 표징으로 서 있다.
마지막으로 현양탑 아래의 문은 순교자들이 남겨 주신 영원한 사랑과 희망의 문을 상징하고 있으며, 오늘도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다.(2003. 조광호 시몬 신부 작)
일만위 순교자 현양 기도문
○ 아무것도 아닌 데서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 아버지,
신앙의 불모지서 복음의 밭을 이룬
일만위 순교자들을 주심에 감사하나이다.
● 그 이름도, 수도 헤아릴 수 없는 이 땅의 무명(無名) 순교자들이
당신을 만나 새로 태어났듯이,
저희 또한 그들을 통하여 당신을 뵙게 되었나이다.
○ 아브라함의 이름을 바꾸어주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이끌어주셨듯이,
그들의 무명(無名)을 통하여 저희 삶을 인도해 주소서.
● 이름조차 버림으로네 삶을 온전히 봉헌한 그들을 본받아,
더욱 낮아지게 하소서.
○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목적을 버린 그들을 본받아,
무의미의 유혹을 이기게 하소서.
● 당신만으로 부족함이 없던 그들을 본받아,
보유의 늪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 당신만이 그들의 사연을 아시고, 당신만이 그들을 위로해주시듯,
저희 삶의 여정에도 늘 함께 하심을 깨닫게 하소서.
◎ 마침내 무명 순교자들 앞에 선 저희들로 하여금
저희 삶을 돌아보게 하시고,
스스로를 옭아매는 욕망에서 벗어나,
성숙한 신앙인으로 당신 앞에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순교자의 모후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이동로 중에서 본 기억날 만한 조각이다. 나무 심는 사제는 2015년에 선종한 인천교구 유영훈(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추모비이다. 그는 나무 심기를 좋아하여 이곳 현양동산에 그와 연이 닿지 않은 나무가 거의 없을 정도다.
그리고 품에 안기다는 인천가톨릭 대학에서 이곳으로 도보순례 중 뜻밖에 교통사고로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간 세 생명을 기억하는 추모비이다. 소속본당인 소사성당과 이곳에 2017년에 세웠다.
일만 위 순교자현양동산 순례는 이 정도로 마친다. 악천후이기도 하지만 택시를 대기시켜 놓고 무한정 시간을 보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안내도를 보면 무명순교자의 길을 통해 묵주연못을 거쳐 계속 오르면 무명순교자상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십자가의 길을 통해 내려오면 순례 확인 스탬프 찍는 곳이다.
결국 미루어두었다가 가지 못한 제5기도처의 기도문은 아쉬움에 사전 자료에서 몇 장의 사진을 곁들어 올린다.
무명순교자상 - 제5기도처
이 조형물을 만든 익명의 작가는 강화도에 많이 볼 수 있는 고인돌로 '참수형을 당하는 순교자'를 연상케 하고자 이 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양손이 뒤로 묶인 채 꿀어 앉아 돌(단두대) 위에 머리를 올려 놓고 죽음의 캍을 기다리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십자가가 무명순교자의 등과 가슴을 관통한 채로 꽂혀 있다.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자신도 모르게 던져버릴 것을 걱정이라도 한 듯이 말이다.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무명순교자 상 앞에서
자비로운신 하느님
이것이 마지막 방법이라는 듯이,
마치 아픈 자식이라도 끌어안은 듯이,
십자가를 자기 등에 꽂아 버린 무명순교자상 앞에 왔나이다.
주님, 제 완고함을 뜬금없이 흔들어주소서.
굳어있는 제 마음을 오늘 느닷없이 무너뜨려 주소서.
잔잔한 호수의 동심원처럼 저를 건드려주소서.
이득 앞에서 망설이고, 변화를 두려워하며,
속물처럼 사는 데 익숙했나이다.
‘받아들이기’ 보다는 가급적 모면하고, 대안과 자구책을 찾으며,
십자가 대신 저희를 보존해왔나이다.
심지어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무명순교자의 조각 앞에서도
십자가 외에 다른 길을 청하고 있나이다.
‘돌로 된 마음을 치워버리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시는 주님,
남의 것으로 치장하고 꾸며왔던 저를 무장해제 시켜주소서.
요청한 것보다 필요한 것을 주시는 주님,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에제키엘 11,19)
묵주 연못
오후 4시가 지난 시간. 비는 멈추지 않는다. 대기한 택시로 바로 갑곶 성지로 향한다. 약 30분 소요하여 도착.
갑곶 순교성지 - 순교자의 피로 물든 강화 앞바다를 지켜보다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00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1366번길 35
갑곶 돈대(사적 제306호)의 순교사적 의미
갑곶이라는 말은 고지도엔 갑비고차(甲比古次)로 나온다. 이는 갑곶의 이두식 표기이다. 곶은 육지가 돌출한 지형이며 한자로는 岬(갑)이다. 고려 때 몽골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하며 안타까워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돈대(墩臺)란 해안을 지키는 작은 보루로 일종의 소규모 요새를 말한다. 강화대교를 건너면서 강화도 왼쪽으로 보이는 갑곶 돈대는 조선 숙종 때인 1679년에 축조되어 8문의 대포를 설치한 포대를 두었다. 당시 강화에는 모두 5진(鎭) 7보(堡) 53돈대(墩坮)의 국방시설이 설치됐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조선 정부가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강화도를 점령하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으로 처음에는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후퇴했으나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병인박해라고 불리는 새로운 박해를 받게 되어 갑곶 순교성지에서 바라보이는 바닷가 백사장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가 이슬로 사라졌다.
이름이 밝혀진 강화도의 순교자를 살펴보면, 프랑스 함대를 방문하여 리델 신부를 만나 교회 소식을 전했던 성연순(成連順)과 원윤철(元允哲)이 1866년 10월 순무영(巡撫營)에 넘겨져 양화진에서 효수형을 받았다. 그리고 1868년에는 최인서(崔仁瑞, 요한), 장치선(張致善),박순집(朴順集)의 형 박 서방, 50세 된 조참봉의 부친 등이 병인양요와 연루되어 진무영에서 순교하였다.
병인양요 이후인 1871(辛未)년 4월에 강화도 해역에 미국 함대 4척이 나타나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평양에서 조선인에 의해 방화된 사건의 책임을 묻고 통상을 요구했으나 대원군은 이를 거절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이때에 이승훈의 증손인 연구(李蓮龜)와 균규(筠龜)가 제물포에서 잡혀 군문효수 되고, 이승훈의 손자인 이재겸(李在謙)의 처 정(鄭)씨와 그의 손자 이명현(李明玄)과 백용석(白用石) 등도 이와 관련하여 순교하였다. 미국 군함이 물러간 5월 25일 고종(高宗)은 더욱 철저하게 천주교도를 잡아 처벌할 것을 좌우 포도대장에게 교서를 내리게 되고, 이때에 미국 함대에 왕래한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이 잡혀가 이곳 갑곶진두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게 된 것이다.
갑곶 순교성지 조성
문헌상으로 갑곶 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은 인천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는 그 터를 자리를 매입하여 순교성지를 조성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후 2001년 7월 제대 및 십자가의 길과 성모상 축복식을 거행했다. 그해 9월 20일에는 갑곶 해안에서 순교한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순교자비 제막식과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이며 인천교구 역사의 증인인 박순집(베드로) 증거자의 유해 안장식을 가졌다. 2005년 4월에는 1997년 성지 부지를 인수할 당시 낡은 관공서 건물을 수리해서 사용하던 기존 경당을 재단장해서 성당 축복식을 거행하고 김대건 성인과 남종삼 성인의 유해 일부를 모셨다. 성당 아래에는 넓은 야외행사장과 묵주기도 길, 쉼터 등을 조성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였다. 인천교구는 2011년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갑곶 성지와 연결하여 바로 옆에 인천교구 50주년 기념 영성센터 건립을 추진하였다. 교구 신자들의 신앙을 심화하고 영성의 내면화를 위해 시작한 영성센터는 신자들의 정성으로 2012년 11월 20일 준공하여 2013년 12월 8일 영성센터 축복미사를 봉헌하였다. 모두 세 개 동의 건물로 건립된 영성센터는 신미양요 때 이곳에서 순교한 세 순교자를 기리고자 박상손관(A관), 우윤집관(B관), 최순복관(C관)으로 명명되었다. 최순복관에는 기념성당과 사제관, 사무실, 성물방 등이 들어섰다.
박순집(베드로)은 누구인가?
박순집(베드로)은 1830년 10월 9일 서울 남문 밖 전생서(典牲署. 현 용산구 후암동)에서 순교자 박 바오로와 김 아가타 사이에서 태어났다.
훈련도감 포수(訓練都監 砲手)로 봉직하고 있었던 아버지 박 바오로는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치명한 앵베르 주교, 샤스탕, 모방 신부의 시신을 목숨을 걸고 노고산에 매장하였다가 4년 후에 시흥(현 서울 관악구) 삼성산에 안전하게 이장하였다. 그때 아버지는 아들 박순집 베드로에게 “후일 성교회에서 성직자 무덤을 찾을 터이니 네가 잘 보아 두었다가 가르쳐 드려야 한다.”고 전하였다.
박 바오로는 1868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아들 내외와 동생과 함께 포도청 옥에서 치명하였다. 병인박해 전후 박순집 가문에 16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25세에 그의 부친과 같이 훈련도감의 군인이 된 박순집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1866년 병인박해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 주교, 브르뜨니에르(白) 신부, 보리외(徐) 신부, 도리(金) 신부, 프티니콜라(朴) 신부, 푸르티에(申) 신부와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등 7명의 시신을 박순지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3월 28(음) 시신을 찾아내어 왜고개에 이장하였다. 그리고 서소문에서 처형된 남종삼 요한과 최형 베드로 시신도 찾아내어 왜고개에 안장하였다. 3월 9일에 순교한 전장운(全長雲, 요한), 3월 11일에 순교한 뒤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진 정의배(마르코) 회장의 시신도 훗날 노고산에 안장되었다.
공식적인 박해가 철회된 1888년, 박순집은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白) 주교가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도록 하자 박순집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과 순교자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자신의 집안과 다른 순교자들의 행적을 교회 법정에서 증언하도록 하였다. 이 증언록이 병인사적 박순집 증언록(丙寅事蹟 朴順集證言錄)으로 3권에 153명의 순교자 행적이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처럼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과 유해 발굴에 큰 공을 세운 박순집은 1878년에 홍제원(현 홍제동) 장거리 고개 밑에서 살았는데 교회를 위해 자신의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1888년에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자 셋째 딸 박황월(朴黃月.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을 수녀회에 입회시켰다. 그래서 박 수녀는 조선인 최초 5명의 수녀 중 한 분이 되었다. 그녀도 95세의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어릴 때부터 보고 들은 것을 자세히 기록하여 놓았는데 이 글에는 자신의 가족들의 순교 행적과 신앙생활, 수도회 역사의 내용으로 아버지 박순집 증언록처럼 교회의 산 기록이 되고 있다
1889년 이후 만년에는 인천에 사는 한 교우의 권유로 인천 제물포(濟物浦)에 전가족을 데리고 내려와서 선교의 삶을 살았다. 그는 답동본당(초대 주임 빌렘 신부) 사목을 도우며 전력을 다하여 전교에 힘썼다. 1893년에 박순집의 집터가 경인 철도 부설로 인하여 철도 부지로 편입되어 부득이 외곽지역인 주안 숙골(현 도화동)에 밭을 사서 이주하여 생활을 하다가 1911년 6월 27일 82세의 나이로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며 선종 하였다. 박순집 베드로의 시신은 독쟁이(현 용현동)에 묻혔다.
박순집 베드로의 일생은 순교자의 정신으로 신앙생활을 실천한 증언자의 삶이었다. 그리고 인천으로 이주한 만년의 20여년은 평신도 사도직을 성실히 수행하여 오늘날 인천교구 발전에 초석이 된 삶이었다.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에서는 교구 신자들의 순교자 현양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용현동(독생이)에 묻혔다가 1961년 8월 31일 천주교 서울교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내로 천묘된 박순집 베드로의 유해를 서울교구의 도움으로 2001년 5월 24일 그가 말년에 살았던 도화동과 인연이 있는 도화동 성당 내에 봉안하여 순교자 현양 기도 모임을 갖고, 같은 해 9월 순교자 성월에 강화 갑곶 성지 내에 천묘하였다.
오후 4시 40분 경 갑곶 성지에 도착. 비는 점점 많이 오고 있다. 성지 안내도를 참고하여 이동했다. 안내도의 왼쪽은 건물 지역이고 오른쪽은 야외성지 지역이다.
건물 지역에는 새로 지은 영성센터 앞에 성체조배실이 있고 그 앞에 봉안당과 대성당이 있다. 영성센터 오른쪽 옆으로 기념성당, 사무실, 성물방과 쉼터가 있다.
먼저 건물 지역인 기념성당 등으로 갔다가 야외 성지를 가기로 한다.
야외성지로 오르는 길은 녹음이 무성하여 입구의 성모동굴을 뒤덮고 있다. 성모님은 얼굴과 손만 보일뿐 매우 간소화된 모습이다.
야외 성지에 오르니 언덕 위에는 갑곶 성지 십자가와 갑곶 성지 순교자 삼위의 비, 박순집 베드로의 묘가 있고, 십자가의 길 따라 내려가면 예수님 상이 있는 야외 마당과 우물터가 있다.
삼위비 ( 三位碑 ) 기도문
늘 품어 안아주시는 주님
갈 길을 찾으러 온 저에게 가야할 길을 알려 주소서.
목적지가 아니라 길이라 하신 말씀을 따라
제 시선을 결과에서 과정으로 돌리게 하소서.
박상순 우윤집 최순복 3위가 걸어갔던 순교의 여정이
주님께 맡기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듯이
제기 붙잡고자했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겨두고 가게 해주소서.
맡기고 나서 생기는 미련마저도 이곳에 남겨두고 가게 하소서.
주님께 맡겨둔 일이 어떤 것이든지 그것이 끝이 아니라
소중한 과정임을 믿게 해주시고 속단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주소서.
또한 그것이 주님께서 저희에게 마련해 주시는
최선의 길임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느낌표을 원했던 저희를 꾸짖어주시고
물음표의 십자가를 지고, 안고 가게 하소서.
아니 또 생기게 될 물음표 앞에서 당황하지 않을 지혜를 주소서.
고요한 곳에 오면 더욱 커지는 제 안의 소란함을 죽여주시고
이곳 순교자들처럼 침묵하게해 주소서.
마침내 이 순례를 통하여 저희의 영역에 주님을 모시려 했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당신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저희 마음을 변화시켜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순교자의 모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인천교구 최기산 보나파시오 주교 인준)
안내문에 의하면 옛날 이 동네는 강화 외성을 둘러싼 6개 문 중의 하나인 진해루가 있었던 자리다. 강화의 물길을 오가는 배가 다니던 곳으로 많은 사람이 찾았고 왕래하는 것을 증거라도 하는 듯 우물이 곳곳에 남아 있다. 순교자 3분이 이곳에서 효수당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물터 안내문에는 우물과 관련한 다음의 요한복음 말씀이 나타나 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요한 4,13-14)
오후 5시. 이제 강화도 성지 순례는 3군데로써 끝이 났다. 그러니 딱히 강화도에 숙박할 필요가 없어졌다. 갑곶 순교성지를 떠나 이제 인천시내에 가야하는데 거리가 멀어 버스를 타고 간다. 그런데 또 일정에 대한 욕심이 발동. 인천에 가는 도중에 있는 김포 성체순례성지 한 군데를 오늘 보면 내일 일정은 빨리 끝나고 잘만 하면 성지 한 군데를 더 순례할 수 있다.
오후 6시 40분쯤 성체성지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