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98. 남종선 도입과 구산선문 개창
곳곳에 禪門 개산 사상적 대안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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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법흥사 징효대사 탑비> |
사진설명: 사자산문을 크게 부흥시킨 징효절중선사의 탑비. 보물 612호로 신라말 고려초 선종사 및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 |
9세기 전반 교종 사찰에 의탁해 기반을 닦은 선종은 서기(西紀) 800년대 중반을 고비로 신라 곳곳에 ‘아홉 개의 선문(九山禪門)’을 개창, ‘통일신라 말 고려 초’의 사상계를 주도했다. 9세기 초 당나라로 유학 간 신라 유학승들이 9세기 중반 대거 귀국한 것이 신라 구산선문 성립의 결정적 계기였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 귀국했지만, 신라유학승들이 9세기 중반 귀국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841년부터 846년까지 진행된 ‘회창폐불’ 당시, 당나라는 외국유학승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귀환령을 내렸던 것.
이 조치로 많은 유학승들이 신라로 돌아왔고, 조짐을 미리 눈치 챈 스님들은 한 발 앞서 귀환하기도 했다. 최치원(857~?)이 찬한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엔 귀환승 가운데 ‘왕의 스승’(왕사) 노릇을 할만한 이들로 12명이 나온다. 그러나 기록이 없거나, 소략한 스님이 대부분이어서 자세한 행적을 알기엔 부족하다.
“하지만 전하는 선사들의 비문과〈조당집〉등의 자료를 가지고도 9세기 중반 이후 선종사를 검토할 수 있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비문과 자료들을 토대로 구산선문에 대해 결론적으로 말하면,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늦게 세워진 수미산문의 진철리엄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전인 915년 영각산사에 터를 닦았고, 후삼국통일 이전인 932년 해주 광조사에 자리했다. 따라서 “구산선문의 성립은 신라 하대인 9세기 중반부터 후삼국시대인 935년 이전까지 완료됐다”고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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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조계종조 도의선사가 은거했던 설악산 진전사지에 있는 도의선사 부도. |
9세기 중반 선사들 중 가장 주목되는 선사가 신라 헌덕왕 13년(821) 귀국한 도의선사, 도의선사를 중심으로 구산선문 개창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알아보자.
대한불교 조계종 종조인 도의선사의 사상과 행적을 알려주는 자료는 드물지만, 한국불교사에서 스님의 위치는 대단히 크고 높다. 통일신라 말 고려 초, 불교사상의 흐름이 ‘화엄’에서 ‘선’으로 바뀌는 데 스님은 일조(一助)했고, 면면부절한 우리 나라 남종선(禪)의 흐름을 시작시킨 시원(始源)에 해당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위인들처럼 스님도 당대엔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교학불교가 흥행한 풍토 속에서 스님이 초전(初傳)한 남종선은 환영받을 수 없었고, 결국 설악산 진전사로 은둔해야만 했다. 제자 염거선사가 설산 억성사에서 수행하고, 그의 제자 체징선사가 보림사에서 가지산문을 개창하자 ‘스님의 사상’은 비로소 만개했다.
손상좌 대에 이르러 사상의 꽃이 피지만, 도의국사가 이 땅에 뿌린 ‘남종선’이라는 씨앗은 주지하다시피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에 이어지고 있다. 한국 남종선맥의 남상(濫觴)에 위치하는 인물이 바로 도의국사인 것이다. 조선불교 조계종 종정 한암스님(1876~1951)이〈불교〉제70호(1930)에 발표한 ‘해동초조에 대하야’를 통해 “도의국사가 해동초조임”을 밝힌 것도 이 때문이었다.
조계종조 도의선사 821년 귀국 이후 구산선문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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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범일선사가 사굴산문을 열었던 강릉 굴산사지에 있는 당간지주. |
귀국한 도의선사가 남종선의 뿌리를 기른 곳이 진전사지다. 행정구역상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 위치한 진전사지는 한국불교 1700년의 전통과 역사를 이어온 조계종의 시원에 해당하는 성지라 할 수 있다. 속초공항에서 설악산을 바라보며 4.8km 정도에 석교리가 있고, 여기서 3km쯤 더 들어가면 계곡 한편에 넓은 밭이 나타난다.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밭 가운데 진전사지 3층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석탑을 끼고 돌아 산비탈을 30분 정도 올라가면 진전사지가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도의선사가 살았던 신라 하대(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780~935)는 방계 김씨 왕실이 등장해 치열한 왕위 쟁탈전을 벌이는 등 어지러움에 빠져든 시기였다. 46대 문성왕에 이르러 사회가 일시 안정되지만, 그것도 잠시. 50대 진성여왕의 실정(失政)으로 통일신라는 이내 난세로 돌아가 버렸다. 신라 통일의 사상적 원천이 됐던 화엄 등 교학불교 또한 이 때에 이르러 ‘현학적이고 사제(司祭)적인 불교’로 흐르고, 사원은 왕실귀족의 선왕열조(先王列祖)를 봉덕하는 장소로 변하고 말았다.
이즈음 중국으로부터 선사상이 전래된다. 진덕왕 무렵 법랑(法郞)선사가 중국 선종 4조 쌍봉도신의 동산종을 전래한 일이 있지만, 본격적인 선의 도입은 41대 헌덕왕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헌덕왕 13년(821) 도의(道義)선사가 서당지장(육조혜능 쭻 남악회양 쭻 마조도일 법맥)의 선법을 도입한 후 고려 초에 이르기까지, 선의 유입이 쉼 없이 이뤄져 구산선문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9세기 전반 ‘수용의 진통’을 겪은 선은 9세기 중반을 고비로 신라 지방 곳곳에 ‘산문의 기반’을 닦게 된다.
도의선사와 관련된 자료 중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장흥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체징비와 쌍계사 진감선사비. 물론 〈조당집〉 권17에 실린 ‘도의전’도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조당집〉엔 이렇게 나온다. “서당의 법을 이었고, 명주(溟州)에 살았다. 선사의 휘는 도의요, 속성은 왕(王)씨이며, 북한군 사람이었다. 임신되기 전에 그의 아버지는 흰 무지개가 뻗어서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깨어나니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중략) 상서(祥瑞)로 인해 출가하였기에 법호를 명적(明寂)이라 했는데, 건중(建中) 5년 갑자(784)에 사신인 한찬(韓粲) 김양공(金讓恭)을 따라 바다를 건너 당(唐)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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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무염선사가 성주산문을 열였던 성주사지에 있는 5층석탑. |
〈조당집〉을 보면 당시 도의선사의 집은 지방 세력가로 추정된다. 성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왕씨 성이 개성 지역의 토성(土姓)으로 나와 있으나, 한산(漢山. 북한군) 지역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는 점에서 도의국사의 집안은 강력한 기반을 가진 토착호족 세력은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당집〉 ‘도의전’을 좀 더 보자. “도의선사는 건중 5년(784) 갑자세에 사신으로 가는 한찬 김양공을 따라 바다를 건너 당에 들어갔다. 그는 바로 오대산으로 가서 문수의 감흥을 받았는데, 공중에서 성종(聖鐘)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으며, 산 속에서 신조(神鳥)가 비상하는 모습을 보았다. 드디어 광부(廣府)의 보단사(寶壇寺)에 머물며 비로소 구족계를 받았다.
후에 그는 조계(曹溪)에 이르러 조사당을 참례하려 했는데, 문빗장이 스스로 열려 세 번 첨례하고는, 밖으로 나오고자 하니 역시 문빗장이 스스로 열렸다. 다음으로 강서(江西)의 홍주 개원사(開元寺)에 이르러 서당지장대사의 처소로 나아갔다. 대사를 알현하니 의문점이 해결되고 막혔던 부분이 해석됐다. 서당대사가 도의선사를 맞음이 마치 돌 사이에서 아름다운 옥을 캐는 것과 같고, 조개 속에서 진주를 모으는 것 같아서, ‘진실로 가히 법을 전할 자가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이겠느냐’며 도의(道義)로 이름을 고치게 했다. 이어 두타의 길을 떠나 백장산 회해화상에게 가 서당화상에게서와 같이 하니, 백장이 이렇게 말했다. ‘강서의 선맥(禪脈)이 몽땅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江西禪脈 摠屬東國之僧).’ 그 밖의 것은 비문과 같다.”
당나라에서 선리를 깨닫고 821년 귀국했지만, 신라에서는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최치원이 찬한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에 기록이 보인다. “장경 초에 도의가 서쪽으로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서당지장의 깊은 법력을 보고, 지혜의 광명을 서당지장에게 배워서 돌아왔으니, 처음으로 선종을 전래한 스님이다. 분주한 망상에 얽매여서 북으로 달아나는 얕은 길을 옹호하고 뱁새가 날개를 자랑해서 남으로 길이 날아가려는 높은 의지를 비웃음이라. 종래 교종에 심취하여 선법(禪法)을 마어(魔語)라고 비방했다. 이를 본 스님은 아직 선법의 시기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자기의 빛을 행랑채 아래에 감추고 자취를 깊은 곳에 숨기었다. 신라의 왕성을 버리고 마침내 설악산에 은둔하고 말았다.”
“중국 禪脈이 몽땅 신라로 가는구나”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에도 비슷한 내용이 남아있다. “처음 도의선사가 서당에게서 심인을 전수받고 후일 우리나라에 돌아와 그 선의 이치를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경의 가르침과 관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법만을 숭상하여 무위임운(無爲任運)의 종에 모이지 아니하고 허탄한 것으로 여기니, 마치 달마조사가 양무제를 만났음에도 뜻이 통하지 못한 것과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함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법을 염거(廉居)선사(?~844)에게 부촉했다. 이에 염거선사가 설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체징(體澄)선사(813~880)가 가서 그를 섬겼다. 선사가 맑게 일심을 닦고 삼계에서 벗어나기를 구하여, 목숨을 자기의 목숨으로, 몸을 자기의 몸으로 여기지 아니했다. 염거선사가 그 뜻과 기개에 짝할 만한 이가 없고 타고난 바탕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 현주(玄珠)를 부촉하고 법인(法印)을 전해 주었다.”
결국 도의선사-염거선사-체징선사로 이어져 가지산문이 개창(858년경)된다. 이후 도의국사는 우리나라 남종선의 제1조로 추앙받고, 진전사 도의선사 영탑은 조사당의 의미를 점점 더해갔다. 가지산문 창건을 전후해 신라 지방 곳곳에 ‘아홉 산문’(도표참조)이 개창,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사상적 대안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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