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晩步) - 이황
가을날 저녁에 산책을 하며 성취하지 못한 학문에 대한 소망을 표출하고 있는 작품이다.
□ 원문 및 국역
苦忘亂抽書 잊음 많아 어지러이 책을 뽑아 놓았다가, 고망난추서 散漫還復整 이리저리 흩어진 책을 다시 정리하네. 산만환복정 曜靈忽西頹 해는 문득 서쪽으로 기울어지는데, 요령홀소퇴 江光搖林影 강 빛에는 숲 그림자 흔들리누나. 강광요림영 扶筇下中庭 막대 짚고 뜨락으로 내려가 부공하중정 嬌首望雲嶺 고개 들고 구름 재를 바라다보네. 교수망운령 漠漠炊烟生 아득하게 밥 짓는 연기가 일고, 막막취연생 蕭蕭原野冷 으스스 산과 벌은 싸늘하구나. 소소원야랭 田家近秋穫 농삿집 가을걷이 가까워지니, 전가근추확 喜色動臼井 방앗간 우물터에 기쁜 빛 돌아. 희색동구정 鴉還天機熟 갈가마귀 날아드니 절기 익었고, 아환천기숙 鷺立風標迵 해오라비 우뚝 서니 모습 훤칠해. 로입풍표동 我生獨何爲 내 인생은 홀로 무얼 하는 건지, 아생독하위 宿願久相梗 숙원이 오래도록 풀리질 않네. 숙원구상경 無人語此懷 이 회포를 뉘에게 얘기할거나, 무인어차회 搖琴彈夜靜 거문고만 둥둥 탄다, 고요한 밤에. 요금탄야정
□ 핵심정리
* 성 격 : 사색적, 반성적, 성찰적 * 주 제 : 성취하지 못한 학문에 대한 소망, 가을날 저녁의 자아 성찰 * 특 징 : 수확의 계절인 가을날 해질 녘 수확의 기쁨에 들떠 있는 사람들과 풍요로운 자연의 모습을 보며 학문적으로 숙원을 이루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작품이다. 퇴계와 같은 대학자가 이룬 것이 없다는 말은 실제로 이룬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이 그만큼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 시어연구
* 晩步(만보) : 늦은 저녁에 산책함 * 筇(공) : 지팡이 * 漠漠(막막) : 아득한 모양 * 蕭蕭(소소) : 으스스한 모양, 쓸쓸한 분위기 * 臼井(구정) : 방앗간과 우물가
□ 구절연구
* 잊음 많아 이 책 저 책 뽑아 놓고서, 이리저리 흩어진 책을 다시 정리하네 : 잊음이 많다고 한 것은 학문하는 사람으로서의 겸손함을 표현했다. 이리 저리 흩어졌던 책을 다시 정리하는 행위는 다소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려는 의도가 행동으로 표출된 모습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 구절은 진리 또는 학문에 대한 끝없는 탐구정신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농삿집 가을걷이 가까워지니, 방앗간 우물터에 기쁜 빛 돌아 : 추수의 계절인 가을이기 때문에 방앗간과 우물터에서는 수확에 기뻐하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넘쳐난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와는 달리 시인은 오히려 큰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공부에 대해 아쉬워하는 마음이 추수철의 즐거움과 대비되어 표현되었다.
* 내 인생은 홀로 무얼 하는 건지, 숙원이 오래도록 풀리질 않네 : 겸손하면서도 성실한 대학자의 목소리가 짙게 베어난 표현이다. 학문적 성취의 미진함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이 회포를 뉘에게 얘기할거나, 거문고만 둥둥 탄다, 고요한 밤에 : 일 년의 결실을 확인하는 추수의 계절에 가을에 왠지 모를 공허함만 물밀 듯이 밀려오는 저녁이다. 시인은 아쉬움과 회포를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 고요한 밤에 거문고를 끌어다가 연주한다. 곡조에 자신의 시름을 섞여 날려 보내려는 심사일 게다.
□ 이해와 감상
작품의 시간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해는 지고 멀리 저녁이 오고 있으며, 하루의 끝을 알리는 시간이다. 눈을 멀리 들어 들로 던지니 가을걷이가 가까워져 무르익은 들녘이 보이는 한 해의 마무리를 알리는 계절이다. 그래서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또, 방앗간이며 우물터에서는 사람들이 수확의 기쁨에 들떠 있고 모든 것이 성취의 기쁨을 맛보는 시간이다. 밥 짓는 연기며 방앗간 우물터의 기쁜 빛이 그런 뜻을 함축한다. 그래서 날아드는 갈가마귀나 우뚝 서 있다고 한 해오라비까지도 기쁨과 자랑에 차 있다. 그런데 나만 오로지 이룬 것이 없다. 책을 뽑아 놓고 흩어진 걸 정리하면서 그 공허함이 새삼 뼈에 사무친다. 숙원을 가진 지 오래지만, 하루 일이나 농사일 같은 소득이 없다. 그 말을 누구에게 할 수 있으랴, 거문고만 탈 뿐이다. 이처럼 바라보는 사물과 대비되는 나를 발견하면서 학문적 성취에 대한 미진함을 생각하면서 삶에 대한 깊은 내면의 성찰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