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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묘비의 비밀과 삼국통일신라 전성기에 만든 화려한 김유신묘. 김유신은 사후 흥무대왕으로 추증됐다. 이후 김춘추 인생은 백제 복수를 향했다. 647년 왜(倭)에도 원병을 청했다.(647년 일본서기 효덕천황) 그리고 이듬해 동아시아 최강대국 당나라 태종에게 원병을 청했다. 그때 맺은 조약에 이런 조건이 있었다. "평양 이남 백제 땅은 신라에 준다." 그리되었다. 고구려는 안중에 없었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었다. 화백회의를 주재한 김유신이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했다. 태종무열왕이다. 망한 가문이 왕위를 되찾았다. 이듬해 김유신은 김춘추의 딸 지조와 결혼했다. 예순한 살이었다. 첫 결혼이 아니라는 기록이 있다. 660년 음력 7월 9일 김유신이 계백 결사대를 황산벌에서 전멸시켰다. 5만 대군이 5000을 겨우 이겼으니 힘든 싸움이었다. 8월 2일 백제가 멸망했다. 신라왕이 된 김춘추가 부여를 찾았다. 김춘추는 배신자 검일을 소 네 마리에 묶어 찢어 죽이고 백마강에 시체를 버렸다. 김춘추는 이듬해 죽었다. 김유신의 조카이자 처남인 법민이 뒤를 이었다. 그가 문무왕이다. 고구려를 먹고, 김춘추와 당태종이 맺은 밀약을 어기고 신라까지 넘보는 당나라는 김유신이 정리해줬다. 태종 아들 고종이 김유신에게 평양 개국공 벼슬을 주며 회유했지만, 김유신은 무시했다. 김유신은 673년 일흔아홉에 죽었다. 문무왕이 비단 1000필과 벼 2000석을 내렸다. 162년 뒤인 835년 김유신은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됐다. 망국 가야 후손이 죽어서나마 왕이 된 것이다. 몰락한 가문 두 사내의 꿈은 완성되었다. 여기까지가 김춘추와 김유신이 합작한 드라마 전말이다. 통일은 없었다 '김춘추가 김유신과 함께 삼한을 통일하고(一統三韓) 큰 공을 세웠다. 하여 묘호를 태종이라 했다'(삼국유사, 태종 춘추공) 신라가 남긴 기록에는 삼한 통일 주역을 대개 김춘추로 꼽았다. 고구려를 멸한 왕은 문무왕이다. 그런데 일통삼한 주역은 김춘추다. 무슨 뜻인가. "그때 민족 개념은 없었다. 백제에 대한 복수가 결과적으로 삼국통일로 이어졌다."(경주남산연구소 소장 김구석) 그럼에도 세상은 신라가 민족을 통일하고 통일신라가 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렇게 배웠다. 경주에 가면 힌트가 보인다. 경주에는 삼국통일 주인공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김유신을 모신 통일전이 있다. 통일전은 1977년 건립됐다. 시내 황성공원에는 김유신 동상이 있다. 같은 시기에 건립됐다. 김춘추 동상은 없다. 남쪽을 향해 있던 동상은 1980년대 북쪽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건립 취지문은 작가 노산 이은상이 썼고 글자는 서예가 일중 김충현이 썼다. 자세히 보면 호인 '노산'이 지워지고 '전주'라 새겨놨다. 또 '일중'을 지우고 '안동'이라 바꿔놓았다. 영호남 통합과 고구려가 있는 북쪽을 향한 군인의 동상. 의미는 적나라하다. 신라인이 생각지 않았던 삼국통일이 1970년대 갑자기 민족의 염원이 돼 버린 것이다. 김유신 묘비의 비밀조선 숙종 때인 1710년 만든 왼쪽 비석에는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묘'라고 새겨져 있다. 오른쪽 비석에는 '개국공 순충장열 흥무대왕릉'이라고 돼 있다.
조선일보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김유신 묘비 끝 글자 '陵' 비가 오면 '墓'자로 변해
망국 가야 왕족 김유신과 몰락 왕족 김춘추, 가문 부활과 딸 복수 꿈꾼 두 사내의 결합, 김춘추는 살아서 왕좌, 김유신은 죽어서 왕 추증
김유신 사후 106년 뒤 김유신 혼백이 신세 한탄했다는 기록
김유신 묘비 '墓'자, 20세기 누군가가 '陵' 덧씌워
'삼국통일'은 결과적인 것… 어디에도 '통일' 염원은 없어
연전에 신문, 방송에 대서특필된 이야기다. 경상북도 경주 충효동 김유신 무덤 비석에 물을 부으면 陵(릉)이라 새겨진 글자가 짙은 색 墓(묘) 자로 확 바뀐다는 것이다. 물을 부을 필요도 없다. 맨눈으로도 시멘트 같은 물질로 墓 자를 채워 넣고 새겨놓은 陵 자가 보인다. 신기하다뿐이겠는가. 신라 삼국통일의 비밀이, 파란만장하게 살다간 김유신과 김춘추의 인생이 숨어 있다.
서막(序幕), 몰락 왕족의 만남
금관가야 마지막 왕은 구형왕이다. 서기 532년 스물여덟 살 먹은 젊은 신라왕 김진흥에게 나라를 물려주고 양왕(讓王)이라 이름을 받은 왕이다. 무덤은 경상남도 산청에 있다. 양왕에게 아들이 셋 있었는데, 셋째는 무력(武力)이다. 550년 진흥왕이 충청도 단양을 정복하고 세운 단양적성비에는 武另(무령)으로 나온다. 성은 아직 없었다. 중국 기록에 따르면 법흥왕은 성이 없었고(521년, 중국 남사 동이열전), 손자 진흥왕이 처음 김씨를 썼다(신라국왕 김진흥이 사절을 보냈다, 新羅國王金眞興爲使持節).(565년 중국 북제서)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신라 장군 이사부는 이름이 이사부다. 성은 모른다. 아니면 없었거나.
단양은 당시 신라 북쪽 변경이다. 단양을 정복당한 백제 성왕이 4년 뒤 신라 관산성을 공격했다. 김무력 부대가 관산성에 급파됐다. 성왕을 죽였다. 성왕을 죽일 때 무력은 6등인 아찬이었다. 14년 뒤인 568년 무력은 3등인 잡찬이었다. 진흥왕이 벌인 영토 확장 전쟁 최전방에는 늘 무력이 있었다. 승진이 느렸다.
김유신은 김춘추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신라 전성기를 연 주인공이다. 그가 죽고 106년이 지난 서기 779년 김유신묘에서 김유신 유령과 군사 40명이 나와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이곳 대릉원에 있는 미추왕릉으로 들어갔다. 김유신은 왕에게 처지를 한탄하고 자기 묘로 돌아갔다.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 공히 기록된 사건이다. 사진은 대릉원 황남대총. /박종인 기자
무력의 아들은 서현이다. 김서현은 만노군, 그러니까 지금 충청도 진천 땅 태수가 되었다. 이곳 또한 신라 북쪽 변경이다. 그 무렵 만명과 '야합(野合)'을 했다.(삼국사기) 만명은 진흥왕의 조카딸이다. 왕족이다. 망국 가야 후손이 감히 왕족을? 사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만명을 집에 가두자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벽이 무너졌다. 만명은 서현과 도주했다. 아들을 낳았다. 그가 김유신이다. 가야 최후의 왕인 증조부, 평생 전쟁터를 지켰으되 승진이 느렸던 야전 군인 조부, 그리고 축복받지 못한 아비와 어미. 김유신이 개척해야 할 운명은 험했다.
김춘추는 어떤가. 김춘추의 할아버지는 25대 진지왕이다. 진지왕은 정사가 어지럽고 음란하였다(政亂荒媱).(삼국유사) 진골 귀족회의인 화백에 의해 진지왕은 4년 만에 폐위됐고 후손은 왕족에서 진골로 강등됐다. 족강(族降)이라고 한다. 그 손자가 김춘추다. 다른 귀족에 의해 배타당하고 소외된 족강 귀족이다. 능력은 있되 차별받는 신분. 두 사람은 닮았다. 두 사람은 정치적인 파트너로 서로를 찍었다. 김유신이 여덟 살 형이었다.
서기 625년 정월, 화형식
김유신과 김춘추가 축국을 했다. 조기축구 같은 운동이다. 기록에 따르면 경기 도중 김유신이 잘못해서 김춘추 옷고름을 밟았다. 옷고름은 저고리에 있다. 땅에 끌릴 만큼 길지 않다면, 김유신이 일부러 잡아당겨 뜯어버렸다는 말이다. 유신은 춘추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둘째 여동생 문희가 꿰매주었다. 아명은 아지(阿之)다. '아지가 옅은 화장과 가벼운 옷차림을 하였는데, 빛이 곱게 사람을 비추는 모습이었다(淡糚輕服光艶炤人).'(삼국사기) 이에 '공이 유신의 뜻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아지와 통하였다(公知庾信之意遂幸之).'(삼국유사) 그리고 일 년쯤 지나 여동생이 임신을 했다. 김유신은 선덕여왕 행차에 맞춰 여동생 화형식을 거행하고 여왕 왕명에 의해 여동생과 김춘추를 정식으로 혼인시켰다.
대릉원 솔숲을 즐기는 사람들.
위서라고 무시당하는, 하지만 토박이 신라 연구자들에게는 신뢰받는 사서 '화랑세기(花郞世記)'에 따르면 그때 이미 김춘추는 보라 궁주라는 아내가 있었다. 경주남산연구소 소장 김구식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아무리 자유분방한 신라 사회라도 문희는 첩이 될 운명이었다. 김유신도 김춘추도 원치 않는 일이다. 그래서 왕명을 통해 정식 부인으로 인정받으려 한 거다." 보라 궁주는 아이를 낳다가 죽고 문희가 정식 부인이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 옷고름 사건으로 태어난 아들 이름은 법민이다. 김춘추는 문희의 언니 보희도 첩으로 삼았다. 몰락한 두 왕족이 맺어졌다.
김춘추의 恨, 대야성
642년 음력 8월 의자왕이 보낸 백제 장군 윤충 부대가 합천에 있는 대야성을 공격했다. 성이 무너졌다. 야심만만한 왕의 영토확장전이었다. 554년 성왕을 죽인 복수극이기도 했다. 백제 장수 윤충은 성주 품석이 처자와 항복하자 모두 죽이고 목을 베어 부여로 보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목은 부여에 있는 감옥 바닥에 묻었다. 품석은 부하 검일의 아내를 빼앗은 자였다. 대야성 함락은 원한을 품은 검일이 백제 편을 든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탐욕스러운 성주 품석은 김춘추의 사위다. 품석의 아내 고타소가 김춘추의 딸이다(삼국사기는 고타소 어머니를 문희라 했고 화랑세기는 보라 궁주라고 했다).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삼국사기) 얼마 뒤 그가 말했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백제에 원수를 갚으리라."
두 사내의 드라마
김춘추는 바로 그해인 642년 고구려로 떠나 원군을 요청했다가 사로잡혔다. 이에 김유신이 군사를 일으키자 고구려는 김춘추를 석방했다. 김유신은 이후 전쟁터에서 백제와 끝없이 전쟁을 치렀다. 645년 정월 전투를 치르고 서라벌로 귀환하던 중 백제가 매리포성을 공격했다. 김유신은 자기 집 우물물을 한 바가지 마신 뒤 뒤돌아보지 않고 전장으로 돌아갔다. 2000여 백제군 목을 베었다. 그리고 648년 김유신은 매제이자 동지 김춘추의 원수를 갚았다. 김유신은 경주 남서쪽 옥문곡에서 백제군을 대파하고 사로잡은 장수 여덟 명을 돌려주고 품석 부부 유골을 반환받았다.
신라 전성기에 만든 화려한 김유신묘. 김유신은 사후 흥무대왕으로 추증됐다.
이후 김춘추 인생은 백제 복수를 향했다. 647년 왜(倭)에도 원병을 청했다.(647년 일본서기 효덕천황) 그리고 이듬해 동아시아 최강대국 당나라 태종에게 원병을 청했다. 그때 맺은 조약에 이런 조건이 있었다. "평양 이남 백제 땅은 신라에 준다." 그리되었다. 고구려는 안중에 없었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었다. 화백회의를 주재한 김유신이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했다. 태종무열왕이다. 망한 가문이 왕위를 되찾았다. 이듬해 김유신은 김춘추의 딸 지조와 결혼했다. 예순한 살이었다. 첫 결혼이 아니라는 기록이 있다.
660년 음력 7월 9일 김유신이 계백 결사대를 황산벌에서 전멸시켰다. 5만 대군이 5000을 겨우 이겼으니 힘든 싸움이었다. 8월 2일 백제가 멸망했다. 신라왕이 된 김춘추가 부여를 찾았다. 김춘추는 배신자 검일을 소 네 마리에 묶어 찢어 죽이고 백마강에 시체를 버렸다. 김춘추는 이듬해 죽었다. 김유신의 조카이자 처남인 법민이 뒤를 이었다. 그가 문무왕이다.
고구려를 먹고, 김춘추와 당태종이 맺은 밀약을 어기고 신라까지 넘보는 당나라는 김유신이 정리해줬다. 태종 아들 고종이 김유신에게 평양 개국공 벼슬을 주며 회유했지만, 김유신은 무시했다.
김유신은 673년 일흔아홉에 죽었다. 문무왕이 비단 1000필과 벼 2000석을 내렸다. 162년 뒤인 835년 김유신은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됐다. 망국 가야 후손이 죽어서나마 왕이 된 것이다.
몰락한 가문 두 사내의 꿈은 완성되었다. 여기까지가 김춘추와 김유신이 합작한 드라마 전말이다. 통일은 없었다
'김춘추가 김유신과 함께 삼한을 통일하고(一統三韓) 큰 공을 세웠다. 하여 묘호를 태종이라 했다'(삼국유사, 태종 춘추공) 신라가 남긴 기록에는 삼한 통일 주역을 대개 김춘추로 꼽았다. 고구려를 멸한 왕은 문무왕이다. 그런데 일통삼한 주역은 김춘추다. 무슨 뜻인가. "그때 민족 개념은 없었다. 백제에 대한 복수가 결과적으로 삼국통일로 이어졌다."(경주남산연구소 소장 김구석) 그럼에도 세상은 신라가 민족을 통일하고 통일신라가 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렇게 배웠다. 경주에 가면 힌트가 보인다.
경주에는 삼국통일 주인공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김유신을 모신 통일전이 있다. 통일전은 1977년 건립됐다. 시내 황성공원에는 김유신 동상이 있다. 같은 시기에 건립됐다. 김춘추 동상은 없다. 남쪽을 향해 있던 동상은 1980년대 북쪽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건립 취지문은 작가 노산 이은상이 썼고 글자는 서예가 일중 김충현이 썼다. 자세히 보면 호인 '노산'이 지워지고 '전주'라 새겨놨다. 또 '일중'을 지우고 '안동'이라 바꿔놓았다. 영호남 통합과 고구려가 있는 북쪽을 향한 군인의 동상. 의미는 적나라하다. 신라인이 생각지 않았던 삼국통일이 1970년대 갑자기 민족의 염원이 돼 버린 것이다.
김유신 묘비의 비밀
조선 숙종 때인 1710년 만든 왼쪽 비석에는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묘'라고 새겨져 있다. 오른쪽 비석에는 '개국공 순충장열 흥무대왕릉'이라고 돼 있다.
1934년 김해 김씨 김유신 후손 김용희가 쓴 비석이다.
1934년 만든 김유신묘 오른편 비석 글씨. 오른쪽은 원래 있던 ‘墓’, 왼쪽은 이후 이 글자를 덮고 새긴 ‘陵’.
건립 당시 김용희가 '묘(墓)'라고 새겼던 글자를 20세기 어느 시점 누군가가 '릉(陵)'으로 바꿔놓았다. 누군지는 모른다. 비만 내리면 시멘트로 채워넣은 '墓'자가 시커멓게 드러나 세상에 화제가 됐다. 그러자 또 어느 시점에 누군가가 아예 비석 자체를 새로 만들어 바꿔치기해버렸다. 이게 문제가 되자 또 어느 시점에 옛 비석을 제자리에 반납해 지금까지 무덤 오른쪽에 서 있게 되었다.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가 죽고 106년 뒤인 서기 779년 김유신 혼백이 무덤에서 군사를 끌고 나와 회오리바람을 타고 미추왕릉으로 들어갔다. 미추왕은 박씨와 김씨와 석씨가 나눠가지던 왕위를 김씨가 세습한 첫 왕이다. 김유신 혼백은 왕에게 자기 후손이 푸대접 받는다고 한탄하고서 무덤으로 돌아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기록돼 있다. 김유신의 후손이 반란에 연루된 이후 두 번 다시 김유신 가문은 신라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역사라는 것이, 냉정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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