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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이장우목사/네 의로움이 되리라 (신 24:5-15)
13절 끝에 보시면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의로움이 되리라고 합니다. 이것의 최소한의 문맥은 10절부터 보아야 합니다. 이웃에게 돈을 꾸어줄 때에 전집물(典執物)을 잡기 위하여 그 집에 들어가서 직접 취하여 오지 말라고 합니다. 전집물은 담보물을 말합니다. 빌려주는 사람은 집 밖에 섰고 돈을 빌리는 사람이 담보물을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라고 합니다. 돈을 빌리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인데 빌려주는 사람이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돈이 될 만한 것을 가져오게 되면 그것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그래서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담보물을 취하여 오지 말고 빌리는 사람이 주는 것으로 받으라고 합니다.
물론 그 담보물이 빌려주는 돈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빌려주는 사람의 입장보다 빌리는 사람 즉 가난한 자의 입장에서 배려하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서 담보물을 취하였을 때에 그 담보물을 해질 때에 반드시 그에게 돌려주라고 합니다. 그 담보물이 겉옷입니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밤에 덮고 잘 이불로 사용하는 겉옷인데 그 옷을 담보물을 넘겨주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옷을 해지기 전에 돌려줌으로 그 가난한 사람이 그런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 축복을 하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의로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이 여호와 앞에서 의로움이 된다고 해서 이것 하나만 행하여서는 되는 것이 아니고 이런 규례를 다 지켜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겉옷을 돌려주었지만 14-15절처럼 곤고하고 빈한한 품꾼을 학대하여 그 품삯을 당일에 주지 아니하여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규례를 다 지켜 행하여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다른 규례들도 함께 봅니다. 5절은 새롭게 결혼한 사람은 일 년 동안 군대든지 어떤 자른 직무든지 맡기지 말고 그의 아내를 즐겁게 하라는 것입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였다고 사람이 부족하다고 아무나 군대에 데려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전쟁의 승리가 사람의 수나 마병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달려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될 사람들에 대하여는 이미 신명기 20장에서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약혼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결혼 한지 일 년이 되지 아니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도 여성에 대한 배려인 것입니다.
6절에서 맷돌을 전집하는 것은 그 생명을 전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자들이야 곡식이 넉넉하여 매일 곡식을 갈아서 양식을 마련하지 않아도 됩니다. 고운 밀가루를 얼마든지 미리 맷돌질 하여 넉넉하게 준비해 둘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한 자들은 하루 일하여 품삯으로 곡식을 받아오면 그날 갈아서 먹어야 생존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맷돌이 없으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 살 수가 없는 것이기에 맷돌을 담보물로 잡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맷돌을 담보물로 잡는 것은 생명을 전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7절입니다. 인신매매를 금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유인하여 잡아와서는 종을 삼거나 판 것이 발각되면 그런 자는 죽이라고 합니다. 이런 법들은 어기는 것은 자기들이 어떤 자들이었는지를 완전히 망각한 자들의 행위입니다. 22절을 봅니다. 자신들의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법들을 주시는 것은 너희가 종으로 살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받아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를 보이지 못하는 행동들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나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거듭거듭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옷을 저당 잡더라도 해질 때는 돌려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켰습니까? 아모서2:6-8절을 봅니다.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7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8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왜 망하여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8-9절은 문둥병에 대하여 삼가고 레위 사람 제사장이 가르치는 대로 힘써 행하고 그들에게 명한 대로 주의하여 행하라고 합니다. 문둥병에 대하여 레위기에서 아주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왜 주의하라고 하는가 하면 미리암의 일을 기억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을 못 마땅하게 여겨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만 말했느냐고 합니다. 미리암도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비방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의 편을 드십니다. 왜 모세를 대적하느냐는 것입니다. 모세의 그 결혼은 이방인이 이스라엘에 편입 되는 것을 보여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시기한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들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둥병에 주의하라는 것은 교만으로 인하여 징벌적인 문둥병이 임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게하시와 웃시야 왕이 징벌로 문둥병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게하시는 엘리사의 사환으로 아람의 군대장관에게서 선물을 요구하여 받고서는 엘리사에게 거짓말을 하였다가 문둥병이 들었습니다. 웃시야는 왕인데 교만하여져서 제사장이 하는 분향을 자신이 하려다가 성전에서 문둥병이 이마에 발하여 쫓겨난 것입니다. 이런 문둥병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영적인 감각이 마비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문둥병의 특징이 고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도 영적인 감각이 마비되어 있으면 자신의 죄가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14-15절입니다.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을 학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네 형제이든지 이방인이라도 네 성문 안에 우거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학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학대하지 아니하는 방법이 품삯을 제때 주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때에 품삯을 주지 아니하면 그 사람이 빈궁하기에 마음에 품삯을 사모하여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저도 사회생활을 해보았습니다. 월급날이 되었는데 사장이 잊어버리고 주지 아니하면 굉장히 섭섭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장이야 그 정도의 돈을 아무것도 아니라서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압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들의 신전에서 전당잡은 옷 위에 누워서 벌금으로 받은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고리대금을 하여 형제의 자녀들을 종으로 삼았습니다. 성경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고 하라고 하는 것은 하지 아니한 것을 보게 됩니다. 혹 하라는 것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아도 그들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을 자기의 의로움으로 삼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 이러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야고보서 2:1-10절을 봅니다. “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구약 시대만 인간들의 죄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초대교회 때에도 이런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렇게 자본주의가 극심한 세상에는 더더구나 말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을 보십시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기업체 사장이라면 외국인 노동자의 품삯을 제대로 계산해 주겠습니까? 그것도 불법 이주 노동자라면 그들의 약점을 잡아서 임금을 착취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종종 그런 보도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들이 하늘을 향하여 하소연 하지 않겠습니까?
이 나라의 정책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고 하면서 대통령과 권력의 핵심층에 교회 다닌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모든 정책들은 이 성경과 정 반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물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기에 모든 주권이 국민에게 있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정책의 수장으로 있다면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는가를 조금은 눈여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야고보가 고발하는 이 내용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거저 세상의 부와 영광을 따라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에 높은 사람이 되어도 여전한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간에 우리가 스스로 의롭게 되는 길은 없는 것입니다. 어떤 법을 지켜 의롭게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나오는 것은 그 바탕이 인간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바탕이 아닙니다. 믿음에다가 무슨 행함을 보태어서 온전한 믿음을 만들어 내자는 것이 아닙니다. 방금 본 야고보서 2:13절의 말씀입니다. 네게서 긍휼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면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긍휼을 심판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이러한 율법과 규례를 주신 것은 너희가 어떤 긍휼을 입고 사느냐를 늘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22절에서 너희가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주님의 긍휼을 덧입어 사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3장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합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로움이 되는 것은 우리의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긍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의 행함으로 나오는 믿음이라는 것이 다 긍휼에 기초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2:14-6절입니다. “봉독” 방금 우리가 읽은 구약의 규례와 별다를 바 없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긍휼을 잊어버리고 자기들의 행위를 자기 의로 삼았을 때 그들이 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은 그 기초가 긍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로 이루어진 긍휼은 심판을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는 것입니다(고전10:30). 그 안에서만 정죄함이 없습니다(롬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