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신성중고등학교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에 있는 일반계 사립고등학교이자 개신교 미션스쿨이다.
최초 설립자는 정창선이다. 인덕원에 위치한 신성교회 재단이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원천재단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개신교 미션 스쿨인데 재단은 원불교 재단이다.
1969년11월20일 : 학교법인신성학원 설립인가
1970년 3월 2일 : 안양동중학교 개교
1974년 3월 5일 : 안양동고등학교 개교
1980년 3월 1일 : 신성중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1996년 5월 10일 : 학교 이전(수리산 기슭)
2004년 8월 10일 안대종 이사장 취임
2008년 학교법인 변경(학교법인 원천학원)
1969년 12월27일(11월20일) 중학교 설립인가, 1970년 인덕원사거리에 개교한 안양동중고등학교(안양동고-1974년)의 연혁이다.
1980년 3월 학교명이 신성중고등학교로 바뀌고 1996년 인덕원 학교부지를 매각 지금의 안양시 만안구 소곡안으로 이전한다.
2004년 8월 10일 원천의료재단 안대종 중화한방병원장이 신성학원 9대 재단이사장으로 취임, 학교법인 신성학원을 인수한다.
학교법인은 양수·양도의 대상이 되지 않는데, 당시 감정가 700억 재단을 80억에 넘겼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신성학원 경영권을 둘러싼 논쟁이 법정 비화로 이어지는 진통을 겪다가 안대종 이사장의 경영권이 인정되고, 2008년 학교법인 원천학원으로 법인명이 변경된다.
개신교 미션스쿨 신성(信聖)을 신성(新星)으로 바꾸고 교훈도 바뀌었다.
신성중고교 설립과정의 이야기다.
신성중고등학교가 북한에 있던 신성중학교 후신이라고 하는데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안양광역신문에서 신성중학교 설립과정에 직접 관여했던 인물을 인터뷰한 기사 이다.
신성중은 1956년 5월 7일 관양동 부림교회(지금의 동은교회 전신) 앞에서 성경구락부 교명과 천막교실 1개로 시작하여 성림중학원, 성림고등공민학교, 안양동중, 신성중고로 이어졌다.
1957년 교회에 나오던 대학생들의 제안으로 교사와 학생들이 흙벽돌을 찍으며 만든 학교는 3년후에 인덕원에 1,000여평 땅을 구입하여 교실 4개 교무실1 숙직실 1 건축하였으며 학생들과 교사들이 지었다는 관계자의 증언이 있다.
또한 나머지 땅은 그 후 전 국회부의장을 지낸 지역 정치 원로인 이재형씨가 약 4.000평을 사서 학교부지로 기증했다고 한다.
[자료]신성학원 역사 이렇습니다
[2004/08/31 안양광역신문]
신성학원 역사
信聖의 뿌리는 聖林이 眞實이다.
한간에 안양 교육계를 뒤흔들고 있는 신성 문제를 놓고 교육계의 원로이시고 信聖(구 東中) 설립의 산파역할을 하신 한 분을 만나 말 많은 信聖의 뿌리를 알아 볼 수 있었다.
☆.선생님은 신성과 언제부터 인연이 맺어지게 되었습니까?
나는 1967년 신성의 전신인 聖林高等公民學校부터 시작해서 1970년 안양동중으로 승격시켜놓고 1974년에 그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그럼 지금 하시는 일은?
1999년 교원 정년단축 바람에 명퇴를 당하고 지금은 교육계에서 물러나와있습니다.
☆.안양문화원에 관계하고 계시다는데?
지금 이곳저곳 사회에 봉사 좀 하고 있습니다.
☆.지금 안양교육계에 가장 화제거리가 되어있는 신성의 근원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신성의 시작은 한국기독교(장로교)의 성경구락부라는 것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청소년들이 중학교로 진학하지 못하는 농촌청소년에게 성경과 일반 중등교과 과목을 지도한데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시작이 1956. 5. 7, 관양동 부림교회(지금의 동은교회 전신) 앞에 천막교실 1개로 시작하여 학교명은 성경구락부 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성림중학원, 그 다음은 성림고등공민학교 그 다음이 안양동중 입니다. 그 다음이 지금의 신성이지요, 처음 시작할때 학생 수는 약30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시작 당시 교사는 당시 부림교회 청년들(작고한 전 정창선 이사장은 당시 전도사 였고, 라달윤(작고), 정진완(전 안양예고교장), 문동호, 문성용, 강덕환(전 신성서무과장), 안동철(재미) 등이 처음 시작 한 분들이었고, 2진으로 정어진 정은구 음정배등이었다. 나는 1967년부터 관계하였다.
1957년 가을에 학생들의 제안으로 교사와 학생들이 흙벽돌을 찍어서 인덕원 송재수씨 땅에 교실 2칸과 사무실 겸 숙소를 건축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전기가 없어 매일 저녁 교사들과 뜻 있는 학생들이 먼저 와서 호야(조명기구)를 닦아서 불을 켜고 12시까지 수업한 후 4Km 정도 거리가 되는 학생들을 일일이 데려다 주고 숙소에 돌아오면 보통 새벽 한시 두시였습니다.
3년후 인덕원(전 학교위치)에 1.000평정도 땅을 구입(평당 90원으로 기억 )하고 교실 4개 교무실1 숙직실 1 건축하였습니다. 건축비는 한푼도 들지 않고 학생들과 교사들이 직접 지었습니다. 나머지 땅은 그 후 전 국회부의장을 지낸 이 지역 정치 원로이신 이재형씨가 약4,000평을 사서 학교부지로 기증(당시 평당 300원정도)하였습니다. 당시 학생들과 교사들의 피땀의 결정체가 오늘의 신성입니다.
정식인가가 나기 이전까지는 모두가 무보수로 오르지 불우한 청소년들을 지도한다는 일념으로, 학생들과 주위의 학부모들은 그러한 열정의 젊은 선생님들의 보답을 위해 형편되는대로 수업료라고 이름하여 얼마식 내면 그것으로 경상비에 보태어 사용하였습니다.
정식 중학교로 승격준비를 할때에도 학교부지가 규정에 미달하여 우리 처가집 땅을 차입 확보하여 인가를 받았다.
동중으로 승격하고 난 후 동쪽 신축건물을 지은 땅 구입에 대한 비화도 있지만 차마 밝히기 어려운 말이라 접어두겠다.
한가지 더 일화를 소개한다면 당시 학교에 우물이 없어 늘 학생들이 주위 개인 집 우물을 사용하는 불편이 있었다.
어느 한해 당시 읍사무소에서 송충이 구제를 위해 학생들에게 송충이를 잡게하고 대가를 주었다. 그 돈으로 당시 정문 앞에 있는 우물을 판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학교가 어떻게 북한에 있는 신성과 뿌리가 같다고 말할수 있어요? 옛 어른들의 말에 “소살 떼어서 말살에 붙이지 못 한다”고 했어요,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진 학교를 지금에 와서 얼마에 팔아먹어?
☆.이러한 기회에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하시지요.
예, 먼저 전 이사장님께 드리지요.
혹시 당신이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아십니까? 그 기를 한번 읽어 보시지요, (열왕기 상 12장)입니다.
두번째로 신성교회와 학교 교목님들; 하나님 앞에, 그리고 돌아가신 정창선 이사장님께 뭐라 말할실꺼요, 할 말 있어요?
세번째로 이사장 주변을 맴돌던 분들, 이사님들, 두분의 교장님, 정말 너무하네요. 귀하께서는 돌아가신 정창선 이사장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고 그 학교 지켜달라는 명을 받지 않았나요? 어떻게 학교가 이지경에까지 가도록 묵과하였나요, 교육자로서 양심 보다 자리가 그렇게 탐났나요?
☆.장시간 좋은 말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신성(信聖)중학교
민족대표 33인 양전백(梁甸伯), 김석창(金錫昌)등이 1906년 선교사와 함께 평북 宣川에 설립,
신성학교는 정주 오산학교(이승훈1907), 평양 대성학교(안창호1907)와 함께 관서지방의 3대 민족사학으로 불렸다.
105인 사건, 3.1독림운동, 1929년의 학생만세시위 등 대일항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관서지방의 민중봉기를 항일투쟁을 선도하기도 했다. 일본붕괴 직전 학교의 교패(校牌)마저 빼았겼던 교육구국과 신앙교육으로 출발한 신성학교는 나라의 비탈길에서 항일 저항의 동산이었다.
연세대총장을 지낸 白락준박사(5회), 신사참배 거부로 일제에 대들고 '밀턴'의 저항시를 읊으며 항일의식을 고취한 뒤 8.15후 연세대 교수를 지낸 沈인곤(11회), 전남지사를 지낸 李하영(15회),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며 항일 반독재투쟁으로 생을 마친 장준하(張俊河)(29회,1918-1975 ), 차병원 이사장인 車경섭(29회)등의 유명인사가 있다.
안양동중학교의 1970년대 통학버스로 안양시 자료집에서 발견한 사진이다.
첫댓글 1980년 신성중고등학교로 바뀌는데, 설립자인 정창선 교장께서 평북 선천의 신성중학교 출신이라는게 첫째 이유다.
아마도 그 무렵에 학교법인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사립학원 특성상 학원 운영권이 설립자인 정창선 교장에게 집중되어 자연스럽게 신성중고등학교로 바뀌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동중학교 동고등학교는 발음상 똥중 똥고로 불리워져 학교 이미지가 나쁘다는게 두번째 이유다.
신성학원은 1980년부터 설립자인 정창선 교장의 의지에 따라 평북 선천의 신성중학교 후신이 되었고, 평북 선천의 신성중학교 출신이셨던 백낙준박사(연세대학교 총장)께서 방문하셔서 학생들에게 특강을 해주셨던 일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신성중고등학교는 선천의 신성중학교 후신이 맞다,
인터뷰 내용으로 보면 신성학원은 당시 어려웠던 우리나라의 모습, 교육환경 그리고 국민의 교육열을 알게 하고 가슴뭉클하다.
학교법인 신성학원은 1980년 학교명을 변경하면서 함께 바꾸지않았나 싶은데 학교연혁에는 처음부터 신성학원으로 되어있다.
1980년 여름 설립자 정창선 교장의 갑작스런 죽음, 부인과 아들이 이사장에 있으면서 학교는 조국가족의 웅동학원과 비슷한 과정을 겪었나보다. 다행스럽게도 학교는 발전하여 명문사학으로 인정받고 있다.
부영그룹으로부터 기숙사를 건축 기증받았다.
학교의 한자 명칭 신성(信聖)을 신성(新星)으로 바뀌었는데 되찾고 싶다.
양전백(梁甸伯,1869-1933)은 한국의 장로교 목사, 독립운동가. 아호는 격헌(格軒), 평안북도 선천 출생. 1894년 기독교에 입교, 1897년 전도사가 되었고, 1907년 평양신학교를 1회졸업하여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 일곱명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길선주와 함께 민족대표 33인 이고 평양신학교 동기생이다.
선교사들과 더불어 선천에 신성중학교와 보성여학교를 설립하고 YMCA 집회 강사로 활동하면서 평양의 안창호, 정주의 이승훈과 함께 평안도 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 교육 사업가로 꼽히던 중, 1911년 105인 사건에 신민회 인사들과같이 연루되어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2년간 복역하다 무죄로 석방되었다.
근현대사 양전백 김석창 참조~
신성중학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양전백 목사가 1906년 7월 선천남교회당에서 김석창, 노창권과 함께 설립한 기독교 학교였다.
초기 신성중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가장 어린 사람이 20세였고 연장자의 경우 25세가 넘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 학교는 1909년과 1910년에 각각 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기독교 정신을 가진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1911년 105인 사건의 주요 인사들이 신성중학교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