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 74년 ` 애심' 으로 데뷔, 75~89년 ` 돌아이' 등
영화 25편 출연, 82~84년 ` 젊음의 음악캠프' (MBC) 진행,84~86년 `밤을 잊은 그대에게'(KBS)
진행, 79~89년 MBC 10대 가수상 수상, 80~89년 KBS 가요대상 수상,
86~89년 가수왕 수상.
1980년대 가요계를 이끌었던 최고의 톱스타 4인방은
조용필, 이용, 김수철, 전영록이었습니다. 1980년대는 사실상 조용필의 적수가 없는 1인 독주시대였고, 조용필은 80년대뿐만 아니라 한국 대중가요 100년 역사에서도 불세출의 가요계 황제로 통하고 있습니다. 한국
대중가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조용필의 독주체제 속에서 라이벌의 존재 자체가 무색하게 느껴졌던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러한 조용필의 대항마로 떠오르며 1980년대 가요계의 한 축을
형성했던 대표적인 라이벌이 바로 이용과 김수철, 그리고 전영록이었습니다.
전영록의 집안은 우리나라 연예계에서도
대표적인 연예인 가문으로 유명합니다. 전영록의 아버지는 원로배우 황해 선생, 어머니는 원로가수 백설희 선생입니다. 그리고 전영록은 여배우 이미영
씨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나중에 재혼을 했는데, 전 부인인 이미영 씨의 동생이 바로 우리에게는 “맹구”로
잘 알려진 이창훈 씨입니다. 즉, 당시 “맹구” 이창훈 씨가
전영록의 처남이었던 관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전영록과 전 부인인 이미영 씨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
중에 전보람 양이 2009년에 가요계에 데뷔한 뒤, 여자
아이돌 그룹인 “티아라”의 멤버로 합류했습니다.
오늘날 전영록은 “7080세대”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추억세대들에게는 “원조 아이돌”, “만능
엔터테이너”, “영원한 오빠”, “돌아이”로 기억되고 있으며, 신세대들에게는 “티아라 전보람의 아버지”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전영록은 50세가 한참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소년과도 같이 해맑은 동안 외모의 소유자로서 동년배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기도 합니다. 비록 어려 보이는 외모의 소유자이기는 하지만, 전영록의
연예계 데뷔 시기는 1970년대까지 거슬러올라갑니다. 그리고 1980년대 가요계의 4대 톱스타인 조용필, 이용, 김수철, 전영록
중에서도 전영록은 조용필 다음으로 나이와 가요계 데뷔 시기가 빠른 선배이기도 합니다.
1954년생인 전영록은 1971년에 CBS 라디오의 “영 페스티벌”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18세의
나이로 연예계에 데뷔했습니다. 1972년에는 “KBS 전국
노래자랑”에서 “듀오”라는 그룹으로 출연해서 장려상을 받으며 가요계에 데뷔했습니다. 전영록은 1973년에 솔로가수로 데뷔하며 그의 데뷔곡인 “애심”을 발표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전영록은 드라마에서는 “제3교실”, 영화에서는
“내 마음의 풍차”에 출연하며 연기자로 데뷔했습니다. 전영록은
1970~80년대에 걸쳐서 가수 이외에도 탤런트, 영화배우, 작곡가, MC, DJ 등의 다방면에 걸쳐서 “만능 엔터테이너”로
활약했습니다.
1976년에 발표된 영화 “푸른 교실”은 전영록의 데뷔 초창기의 대표적인 출세작으로
떠올랐습니다. “푸른 교실”에는 전영록, 임예진, 이덕화 등이 출연했는데, 당시 풋풋한 모습의 전영록과 임예진은 이
영화에서 주연을 맡으며 당대의 대표적인 하이틴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가수 겸 배우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던 전영록은 1976년에 군에 입대한 후 약 3년의
공백기를 가지고 1979년에 컴백했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군대 한번 다녀오고 나면
“사실상 가수로서의 생명은 끝났다”고 할 만한 시기에, “만능 엔터테이너” 전영록의 본격적인 전성기는
이제부터 막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전영록이 제대하고 컴백할 무렵인
1979~1980년은 “가왕” 조용필이 본격적으로 국내 가요계를 평정하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조용필의 나이는 30대에 갓 접어들 무렵이었고, 전영록은 20대 중반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아이돌 가수들에게는 거의 “환갑”처럼
느껴질 만한 나이에 조용필과 전영록은 본격적인 전성기의 막을 열면서 전설을 써내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가요계에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조용필에게는 그에 필적할 만한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의 라이벌을 손으로
꼽아본다면, 1970년대 중후반~ 1980년대 초중반에 걸쳐서
남자가수 중에서는 이용, 전영록, 김수철, 김범룡, 구창모, 최백호, 최성수, 윤수일, 함중아, 송창식 등이 자천타천으로 라이벌로 거론이 되었고, 여자가수 중에서는
혜은이, 이은하, 윤시내,
정수라, 이선희, 인순이 등이 자천타천으로 라이벌로
거론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조용필의 아성을 위협했던 가장 강력했던 라이벌은 이용과 김수철, 그리고 전영록이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제가 “대중가요, 대중가수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1980년대의 국내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4대 톱스타의 이름을 나열할 때, 일단은 “조용필-이용-김수철-전영록”의
순서로 나열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순서로 나열한 것이 반드시 전영록이 “80년대 서열 4위”를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이러한 순서로 이름을 나열한 이유를 설명해본다면, 조용필이 MBC와 KBS의 연말 가요 시상식의 대상을 휩쓸던 시절에 조용필의
아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조용필을 제치고 대상까지 수상했던 가장 위협적인 라이벌을 꼽을 때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1982년의 이용”, “1984년의 김수철”, “1986년의
전영록”의 순서였기 때문입니다.
조용필은 이미 1970년대 중~후반에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국민가요를 탄생시킨
데 이어서, 1980~81년에 걸쳐서 “창밖의 여자”, “고추잠자리”
등이 연달아서 빅히트를 치면서 최고의 국민가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1982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용은 “잊혀진 계절”이라는 초대박 히트곡을 남기며 조용필의 아성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졌고, 당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조용필을 제치고 “최고 인기가수”(가수왕)를 수상했습니다. 1984년에는
김수철이 “못다핀 꽃 한 송이”, “젊은 그대”의 빅히트에 힘입어서 “KBS 가요대상”에서 조용필을 제치고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따라서 조용필의 전성기가 최고의 절정을
이루던 시절에 그의 아성을 위협했던 가장 강력한 도전자로서의 측면에 포커스를 맞췄을 때는 그 순서가 “1982년의
이용 -> 1984년의 김수철”의 순서로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노래 자체의 히트에 포커스를 맞췄을 경우에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 “고추잠자리”와 같은 초대박 히트곡 퍼레이드에 필적할 만한 대형 히트곡으로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 김수철의 “못다핀 꽃 한 송이”, “젊은
그대”가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영록은 조용필의 전성기가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인 1986년에 “KBS 가요대상”에서 조용필을
제치고 “남자가수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조용필의 최전성기였던
1980~86년에 걸쳐서 조용필이 대상을 독식하던 시절에 조용필에게 정면으로 도전해서 가요대상 수상자의 반열에 이름이 오른 인물은
이용, 김수철, 전영록, 이렇게 3명뿐이었습니다. 역대 가요대상 수상자의 이름이 실린 리스트를 검색할
때도 조용필과 함께 “이용(1982년)-김수철(1984년)-전영록(1986년)”의 순서로 검색이 되기 때문에, 일단 필자인 저는 80년대 4대 톱스타의 이름을 “조용필-이용-김수철-전영록”의
순서로 나열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의 필자인 저 역시 1980년대 초반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고, 세월이 한참 흐른 2000년대 이후에 인터넷 검색과 TV, 신문기사 등을 통해서 과거의
기록을 복원해나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당시의 사실이나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데 있어서는
많은 고충이 따르고 있으며, 최대한 객관적인 사실에 가깝게 전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그 시절에 청소년, 청년기를 거치며 대중가요
팬문화를 향유했던 “7080세대” 선배님들의 증언을 적극 수집하고, 이를
최대한 생생하게 전달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7080세대” 선배님들의 증언을 토대로 해서 그 시절의 분위기를 전달한다면, 조용필의
독주체제가 견고하게 자리를 잡았던 1980년대 초반에 대중들의 이미지에 각인된 대표적인 “청춘스타”
빅3는 조용필과 이용, 전영록이었습니다. 대체적으로는 조용필의 독주 속에서 이용과 전영록의 2인자 다툼이
불을 뿜는 양상이었고, 실제로 그 당시 대중들의 기억 속에는 전영록은 “조용필 시대의 2인자 내지는 3인자”로 각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라이벌 구도 자체에 포커스를 맞췄을
경우에는 그래도 “조용필 vs 이용”의 라이벌 구도가 가장 대표적으로 거론이 되고 있습니다. 이용에게는 “잊혀진 계절”이라는 초대박 히트곡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
노래의 단발성 히트만으로도 “조용필의 가장 위협적인 라이벌”로서 그대로 각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조용필의 또 한 명의 위협적인 도전자였던 김수철에게도 “못다핀 꽃 한 송이”, “젊은 그대”라는
초대박 히트곡이 존재했고, 따라서 오늘날 “역대 가요대상 수상자 리스트”만을 검색할 경우에는 조용필의
이름에 이어서 이용, 김수철의 이름이 좀더 우선적으로 눈에 띄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영록은 “단일 히트곡 또는 단일 시즌”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조용필의 아성을 뛰어넘기에는 다소 역부족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걸쳐서 조용필과 함께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꾸준하게 정상의 자리를 지킨 가수는 전영록이 거의 유일했습니다. 이용과 김수철이 모두 전성기가
그렇게 길지는 못했던 반면에 전영록은 1980년대 내내 조용필과 함께 거의 해마다 꾸준히 “10대가수”의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실제로 가수로서의 활동년수, 히트곡의 수, 연말 시상식의 수상실적 같은 측면에 포커스를 맞췄을
경우에는 1980년대의 대표적인 슈퍼스타였던 조용필의 거의 유일한 대항마로서, 그에 필적하는 활동실적을 올린 전영록이 “실질적인 2인자”로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당대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본상격인 “10대가수상”의 수상실적을 살펴보면
전영록의 진가가 더욱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전영록은 1979년~1989년에 걸쳐서 통산 10차례나 “10대가수상”을 수상하면서 이 부문의 최다 수상자로서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종전
기록은 이미자가 1960~70년대에 걸쳐서 “10년 연속 10대가수” 수상자로 기록되고 있었는데, 전영록이 이미자의 기록과
타이기록을 이뤘습니다. 이 부문에서 조용필은 “10대가수상”을
통산 8회 수상하면서 이 부문 역대 3위를 기록중이고, 남진은 “10대가수상”을 통산 6회
수상하면서 이부문 역대 4위를 기록중입니다.
게다가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대상격인 “최고 인기가수”(가수왕)의 역대 수상자 리스트에서는 조용필이 통산 6회로 이 부문 최다 수상자로서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이미자와 남진이 통산 3회 수상으로
이 부문 공동 2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영록은 비록 MBC에서 대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본상격인 “10대가수상”의 수상 실적에서는 이미자, 남진, 조용필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역대 최다 수상자”로서 이름을 올렸다는 점에서 그의 기록이 더욱 돋보이고 있습니다.
전영록은 또한 “KBS 가요대상”에서도 거의 해마다 꾸준히 본상을 수상했고, 1986년과 87년에는 2년 연속으로 KBS에서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한편 1987년에는 “MBC 10대가수 가요제”의 개최가 무산되었고, “가요대제전”이 개최되었는데, 이는 1993~1997년까지의 “가요대제전”과도 비슷했습니다. 전영록은 공식적으로는 MBC에서 “가수왕”을 수상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과거 신문기사나 전영록의 프로필을 검색해 보면 “1987년 MBC, KBS 통합 가수왕”으로 표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를 “비공식 기록”으로 간주할 경우 전영록은 “1980년대의 MBC, KBS 시상식 본상 최다 수상자”인 동시에 “1987년의 MBC, KBS 통합 가수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TV나신문, 인터넷등을통해서검색되는전영록의프로필에서는“1979~1991년까지 MBC 10대가수최다수상자”라고표시되고있습니다. 하지만연도별수상자를검색했을때는전영록이 1979년~1989년까지의기간중에서시상식개최가무산된 1987년을제외하고는모두 10대가수본상을수상하며통산 10회를수상한것으로나와있습니다. 다소의오차가능성이존재하기는하지만, “MBC 10대가수(본상) 통산최다수상자”는전영록이단독으로, 또는전영록과이미자가공동으로보유하고있는것으로정리할수있을것같습니다.]
이와 같이 통계상으로 나타난 기록만을
살펴볼 경우에는 198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가요계의 톱스타 중에서 “가왕” 조용필이 압도적인 독주체제를
이뤘고, 조용필과 함께 거의 해마다 꾸준히 “10대가수”의
반열에 오르며 조용필에 필적하는 활동실적을 올린 전영록이 그 시절의 실질적인 2인자였음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전영록은 가수로서뿐만이 아니라, TV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배우로서 종횡무진 활약했고, CF를 통해서도 스타덤에 오르며 당시 조용필의 거의 유일한 대항마로서
그 시절의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는 대표적인 청춘스타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전반적인 가요계 패권의 추이를
살펴볼 때도 조용필이 1979년의 컴백에 이어서 1980~81년
사이에 가요계를 완벽하게 석권할 무렵, 조용필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가요계에 컴백하고 10대가수의 반열에 올랐던 대표적인 라이벌 가수가 전영록이었습니다. 1982년에는
이용이 워낙에 초대박의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에 그 당시의 엄청났던 임팩트로 인해서 오늘날까지도 1980년대의
대표적인 라이벌 구도는 “조용필 vs 이용”의 라이벌 구도가 대표적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용이 한바탕 돌풍을 일으키고 난 뒤, 1983년부터는 다시 조용필이 견고한 독주체제를 이어가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이용과 전영록의 2인자 다툼이 불을 뿜었습니다. 1984년에는
김수철이 한바탕 돌풍을 일으키면서 조용필의 강력한 대항마로 떠올랐습니다. 1985년에는 이용이 치명적인
스캔들에 휘말리며 오랫동안 가요계를 떠나야 했고, 1986년 이후부터는 김수철의 전성기도 다소 시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용과 김수철의 돌풍의 열기가 잠잠해질 무렵인 1980년대
중반까지도 조용필의 1인 독주체제의 아성은 견고했고, 조용필의
뒤를 이은 2인자의 자리를 놓고 전영록, 김범룡, 구창모 등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조용필이 1986년을 마지막으로 “방송 은퇴와 가요대상 사양”을 선언한 이후, 본격적으로
세대교체의 물결이 일었던 과도기 시절에도 전영록은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세대교체기였던 1986~88년에 걸쳐서는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에서 전영록, 이문세, 주현미 등이 각축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전영록은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까지 마지막으로 전성기를 누린 뒤, 1992년 이후부터 가요계를 한동안 떠나 있었습니다.
전영록은 가수로서 활동하는 동안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불티”,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 “내 사랑 울보”, “나그네길”,
“종이학”, “저녁놀”, “하얀 밤에” 등의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배출했습니다. 또한 작곡가로서도 “나를 잊지 말아요”(김희애),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양수경), “돌이키지 마”(이은하), “얄미운 사람”(김지애), “바람아
멈추어다오”(이지연) 등의 히트곡들을 배출했습니다.
전영록은 영화배우와 라디오 DJ로서도 종횡무진 활약했는데, 특히 영화 “돌아이” 시리즈를 통해서
전영록은 발군의 무술실력을 뽐내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당시 전영록에게는 “한국의 성룡”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실제로 홍콩의 스타 배우인 성룡과의 만남이 성사되면서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친분을 맺기도
했습니다.
전영록은 가수로서도 1970년대에 데뷔해서 1980년대를 대표하는 톱스타 4인방의 반열에 들어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요계의 “레전드(전설)”의 반열에 올라 있는 인물입니다. 특히 전영록은 가수 이외에도 작곡가, 배우, DJ, CF 스타로서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만능 엔터테이너”로
활약했습니다. 특히 “한국의 성룡”이라는 별명이 말해 주는 것처럼 영화 “돌아이”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모았고 전영록은 초특급 액션배우로서도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2007년에 SBS에서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인
“옛날 TV”에서는 전영록이 액션 영화배우로서 최고의 주가를 올렸던 작품인 “돌아이”를 선후배들간에
합동으로 재연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날 방송에서 전영록의 과거의 화려하고 영광스럽던 시절에 대한
영상물이 나온 뒤, MC들이 전영록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던 중 “80년대
비”라는 발언이 나왔습니다. 이는 왕년의 인기 여배우 임예진씨에게 “70년대
문근영”이라는 별명이 붙었거나, 또는 김수미씨의 과거 젊은시절 사진이 김태희씨의 외모를 닮은 것으로
화제를 모은 사례와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음악 매니아층이나 과거 80년대에 사춘기를 보낸 선배 세대의 팬들의 입장에서는 다소 불쾌하게 느껴지는 발언일 수도 있습니다. 비를 “2000년대 전영록”이라고 하거나 문근영을 “2000년대 임예진”이라고 부르지 않고, 거꾸로 전영록을 “80년대 비”라고 부르거나 임예진을 “70년대 문근영”이라고 부르는
것이 선후배간의 위계나 역사적 흐름에 관한 최소한의 상식이나 예의를 망각한 것처럼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의 칼럼이 직접 기사화된 사례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예능 프로그램에서 과거의 전설적인
스타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방법이 좀 서투른 감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1980년대에 전영록이 당시의 대중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오늘날의 신세대 팬들의 눈높이에서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최근에
TV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과거에 영광을 누렸던 대선배 연예인들이 출연할 때 2000년대
이후에 전성기를 누린 신세대 스타들에 비유해서 그들을 설명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아이돌 가수들에게 열광하는 신세대 팬들의 눈높이에서 과거 선배들이 그 시절에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를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한 나름의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비록
1980년대 당시에는 “한류열풍”이라는 키워드 자체가 존재하기 이전이지만, 전영록은 한국
가요계에서 “만능 엔터테이너”라는 존재감을 부각시킨 일종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고, 실제로 중화권 최고의
액션배우인 성룡과의 교분을 맺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80년대의
전영록 이후로는 2000년대의 비(Rain)가 최고의 “만능
엔터테이너”로 부각되면서 가수 겸 배우로서 높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전영록이 가수활동 이외에도 영화배우로서
발군의 활약을 보여준 것처럼, 비(Rain)는 초창기에 드라마를
통해서 배우로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가수로서의 인기도 동반 상승하는 효과를 얻었고, 미국 진출
이후로도 영화배우로서의 활동에 좀더 주력하고 있습니다.
“가수로서의 활동 실적”만을 놓고 봤을
때는 1970~80년대에 걸쳐서 롱런하며 꾸준한 실적을 올린 전영록에 비해서, 비의 가수 경력이 현저하게 짧은 편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가수
외적인 활동”, 즉 연기자로서 활동하며 해외진출로 “월드스타”의 반열에 오른 비(Rain)가 “만능 엔터테이너”로서는 한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는 평을 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옛날 TV”의 MC들이 전영록과 비(Rain)를 비교한 것이 어느 정도의 일리는
있다고 보여지기도 합니다.
물론
1980년대의 전영록이 활동하던 시대와 2000년대의 비(Rain)가
활동하는 시대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데는 다소 무리가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요계 전설”로서의
면모를 살펴봤을 때도, 대선배인 전영록과 까마득한 후배인 비(Rain)를
비교하는 발언 자체가 “7080세대” 선배님들이 불같이 화를 낼 수도 있는 다소 위험한 발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가수로서의 경력 자체도 그만큼 현격한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다만 가수 외적인 활동에서의 실적까지를
모두 고려했을 때, 1980년대 당시 전영록이 당대 최고의 “만능 엔터테이너”였다는 것을 오늘날의 신세대
팬층이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는 역시 비(Rain)를 비교대상으로 했을 때 가장 피부에 와닿는 느낌이
빠를 것 같습니다. 이 글의 필자인 저 역시 “7080 추억세대의
스타 전영록”을 “오늘날의 신세대 팬들”에게 소개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옛날 TV”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MC들이 가볍게 던진 발언 내용을 굳이
인용을 하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다소간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아무튼 전영록의 전성기 시절에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7080세대” 선배님들의 증언을 취합했을 때도 알 수 있듯이, 전영록은 조용필, 이용과 함께 “빅3”로 불리며,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는 대표적인 청춘스타로서 팬들의
기억 속에 자리매김하며 한시대를 풍미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 팬덤문화를 형성했던 세대의 대중들은 오늘날까지도
“조용필 시대의 2인자”가 이용과 전영록 중에서 누구였는지에 대해서 갑론을박으로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기도 합니다.
“단일 시즌, 단일 히트곡”을 기준으로 할 때는 “1982년 이용-잊혀진 계절”이 워낙에 초대박의 임팩트를 남겼기 때문에 지금도 라이벌 구도 자체에 포커스가 맞춰졌을 때는 “조용필 vs 이용”의 라이벌 구도가 1980년대를 상징하는 라이벌 구도로
각인되며 이슈를 선점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가수로서의 경력 전체를 포괄하는 활동실적과 통계자료에 의하면
전영록은 조용필 다음으로 화려한 경력을 쌓은 그 시절의 실질적인 2인자였습니다. 다만 전영록은 “조용필 시대”의 초창기부터 막바지까지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2인자의 지위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조용필의 아성을 위협할 만한 초대박
히트곡의 부재가 다소 아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전영록의 대표곡으로
알려져 있는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는 1980년대 가요계를 풍미한 국민가요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수많은 대중들은 전영록의 가수로서의 히트곡인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내사랑 울보”, “불티”, “종이학”, “저녁놀”, “애심” 등의 노래들을 기억하고 있으며, 전영록의 영화배우로서의 출세작인 “돌아이”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편 전영록의 딸인 전보람 양은 2009년에 가수로 데뷔한 뒤, 여자 아이돌 그룹인 “티아라”의 멤버로
합류했습니다. 전영록의 딸인 전보람 양이 대를 이어서 가수활동에 나서면서 전영록의 이름은 오늘날 아이돌
가수들에게 열광하는 신세대 팬들 사이에서도 다시금 그 존재감이 부각되었습니다. 또한 “황해, 백설희 - 전영록 - 전보람”으로 3대째 대를 이어서 가수활동을 이어가는 대표적인 “연예인 가문”으로서 또한번 화제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2010년에는 원로가수이자 전영록의 모친인 백설희 선생이 타계했습니다. 전영록은
모친상의 슬픔을 뒤로하고, 이후 음악활동과 후배양성 등의 활동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2011년 새해 들어서는 전영록의 딸인 전보람 양이 여자 아이돌 그룹 “티아라”의
리더 직책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티아라의 복고풍 분위기의 뮤직비디오에는 왕년의 하이틴 스타였던 전영록과
임예진이 직접 출연하며 화제를 모았습니다. 전영록의 전폭적인 지원사격과 함께 전보람 양이 소속된 여자
아이돌 그룹 “티아라”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편 전영록은 2011년에 KBS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예능 프로그램인 “낭만을 부탁해”에
출연하면서 왕성한 방송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전영록은 최수종, 김정민, 허경환, 정주리, 가애란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시청자들에게 추억과 웃음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전영록은
여전히 소년같은 해맑은 미소와 감미로운 목소리를 통해서 “7080 추억세대”와 “신세대”들 모두에게
친숙하게 다가서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출처: 과거 신문기사와 TV 방송
등을 기본 토대로 해서, 인터넷 검색(네이버, 다음, 가수 홈페이지)을
통해서 얻은 정보들을 참고했습니다. 특히, 옛날 가요 부분은
네이버 지식인,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백과 등의 자료에 더욱
많은 부분을 의존했습니다.}
조용필과 함께 우리나라 연예계에서 ‘영원한 오빠’로 불리는 전영록씨가 팬들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36년 만의 연예활동
중 처음으로 디너쇼를 갖는다. ‘동창’이란 제목의 콘서트
이름은 함께 공연을 하는 개그맨 이홍렬씨와 관계가 깊다.
“팬들은 잘 모르시는데 홍렬이하고는 중학교 동창이에요. 디너쇼를 처음으로 해보는데
남들과 똑같은 모양새로 하기 싫어서 친구인 홍렬이와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홍렬이가 MC를 보기로 했는데 노래도 시킬 생각이에요. 중장년 세대들에게 친숙했던
노래들을 중심으로 관객들과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도록 꾸밀 예정입니다.”
우리나이로 쉰 넷. 불혹을 넘긴 나이지만 뿔테 안경을 쓴 모습이나 목소리는 예전
그대로다. 최근 몇 년 동안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것 같다는 질문에 그는 ‘오해’라고 답한다.
“공중파 TV에 안 나오면 활동 안 하는 줄 아는 경우가 많아요. 그동안 팬들과 직접 호흡하는 콘서트와 작곡 등 작품 활동은 계속해왔습니다. 영화
기획과 드라마 촬영도 계획 중이에요.” 전영록씨는 지난 4월까지
라디오 DJ로 활동하다 사고로 인한 건강상의 이유로 그만두기도 했다.
전영록씨가 가장 공을 들이는 분야는 역시 음악과 영화. ‘불티’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종이학’
등 수많은 히트곡을 부른 전씨는 최근에는 선후배 가수들에게 곡을 써주는 데 몰두해 있다. 얼마
전에는 가수 남진씨에게 곡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한 장르가 유행하면 비슷한 곡들이 쏟아져 나와 팬들을 식상하게 하는 일이 많아요. 똑같은
음악은 만들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어요.”
내년 봄에는 직접 노래한 앨범도 나온다. 92년 이후 15년 만이다.
“신곡을 중심으로 듣기 편한 ‘이지리스닝(Easy
Listening)’ 계열의 음악입니다. 최근 인터넷 때문에 앨범 판매가 잘 되지는 않지만
팬들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앨범이 나온 뒤에는 전국 콘서트도 생각하고 있어요.”
영화 기획에도 열심이다.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검토하며 작품을 기획하고 있다. 전영록씨 스스로도 70년대의 하이틴스타, 80년대 액션스타로 충무로에서 이름을 날렸다. 이두용 감독과 함께
만든 3편의 ‘돌아이’ 시리즈는
당시 할리우드 영화와 흥행 경쟁이 붙을 만큼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90년대 초반을 끝으로 영화 출연을 하지 않았어요. 드라마도 95년이 마지막이었죠. 영화
쪽은 기획 작업을 계속해나갈 생각입니다.”
전공을 살려 최근에는 틈나는 대로 음악사전과 DVD사전도 집필 중이다. 음악과 영화의 길라잡이를 만들어 보겠다는 계획. 전영록씨는 1만5000장이 넘는 DVD를
수집해 보유하고 있다.
한국 연예계에 큰 획을 그었지만, 재테크에서 만큼은 ‘젬병’이라고 스스로 표현한다. 모든
수입은 부인에게 다 갖다 준다. “한 달에 100만~150만원을 용돈으로 받아서 사용합니다. 신용카드도 안 써요. 쓰다 남은 돈은 다시 모아 부인에게 줍니다.”
하지만 집에 맡기는 전씨의 재테크 전략은 성공을 거뒀다고 해도 과분하지 않을 정도.
전영록씨는 현재 분당 정자동 주상복합아파트에 거주하고 있고, 용인에도 아파트를
보유 중이다. 직접적인 활동에서 나오는 수입 외에도 그동안의 수많은 작품활동을 통해서 나오는 저작료가
상당하다.
98년과 99년 부산에서 라이브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던 전씨는 사업 쪽에는 마음을 접었다.
“사업을 하다 보니 자기 활동은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하는 일이 생기더군요.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직접 현역에서 뛰는 게 제 체질입니다. 앞으로도 현장에서 팬들을 만날 생각이에요. 재테크 쪽에 큰 목표는 없고 나중에 조용한 시골에 집을 하나 갖는 정도예요.”
전영록씨는 저작권에 대한 관심이 높다.
전영록의
딸 걸그룹 ‘티아라’ 멤버 전보람
2010년 7월 23일 리더로 선임되었고, 2011년 6월 일본 활동과 '롤리폴리' 활동을 앞두고 리더 자리를 효민에게 넘겨주었다.
여담으로 '슈가프리' 활동 땐 기존의 귀여운
이미지와는 달리 복근까지 있는 탄탄한 몸매로 컴백하여 팬들을 놀라게 하였다. 다만, 본인이 의도해서 만든 복근은 아니고 체중 감량을 위해 운동을 하다 보니 저절로 생긴 복근이라고 한다. 그리고, 활동 몇 주 후 체중이 다시 돌아갔는지 거짓말처럼
복근이 사라졌다.
2017년 3월 23일, MBK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이 곧 만료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팀에서의 탈퇴 여부에 대해서는 2017년 3월 25일
자신의 생일 파티에서 "MBK는 나가지만 티아라를 나가는건 아니다. 우리만 믿고 걱정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2017년 5월, MBK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이 만료되었고 소연과 함께 티아라에서 탈퇴했다.
티아라로 활동하기 전인 2008년에 솔로로 앨범 2개를 내서
타이틀 모두 음악차트 TOP 100위 안에 진입했던 적이 있다. 그 외에도 키비의 'Feeling You' 뮤직비디오에
주연(?)으로 나온 적도 있었고, KBS2에서 방송했었던 <노래가 좋다>에 나오기도 했다.
2010년 드라마 스페셜 <보라색 하이힐을 신고 저승사자가 온다>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어느 사이트에 저승사자에게 소원을
남기면 저승사자가 소원을 접수해서 이루어 준다는 내용으로 연기력은 상당한 호평을 얻었었다.
2010년 뮤지컬 <진짜 진짜 좋아해>에서
오정화 역을 맡으며 뮤지컬계에 데뷔, 2014년 <로스트
가든>에 머시 역으로 김태우와 무대에
섰다.
가창력은 그냥 평범. 미니 8집 더블 타이틀 곡 '느낌
아니까'에서 본격적으로 랩 파트를 담당하였다. 랩 파트 이외에도
보컬 파트도 많이 늘어서 처음으로 활동곡 중 보람 중심의 곡을 부르게 되었다. 미니 9집 '나 어떡해' 활동
당시에도 기존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파트 배분을 받았다. 기존 메인보컬 라인과 비교해도 비슷한 분량에
오히려 비중 있는 파트를 소화하게 되었다. 파트가 거의 없던 곡들
(<yayaya>에서 "Uhee- uhee-"라든지 Cry cry에서 "Let's dance" 파트를
받은 경우가 대표적)도 있던 걸 생각하면 놀라운 분배 변화. 뒤이어 '슈가프리'에서도 나름 적절하게 파트를 받아 안정적인 라이브를 했다.
데뷔초에는 큐리와 더불어 팀 내에서 가장 노래 못하는 멤버로 거론되고는
했다. 그러나 점차 실력이 꽤 늘었고 현재는 큐리보다 잘한다. 소속사 측에서도 이를
인지했는지 'TIAMO'에서는 심지어 애드리브 파트를 보람에게 맡겼다.
여러 예능프로그램에서 제일 정리정돈이 안되는 멤버로 지목되었다.본인은 그럴 때마다
늘 "눈에 띄거나 찾기 쉬운 데에 둔다"라고는
하지만 방을 같이 씀에도 나름대로 깔끔하게 정리된 큐리의 공간과 달리 보람은(...) 어머니인
이미영씨도 정리는 잘 안 하는데 한번 맘먹고 하면 미친듯이 열심히 하는 타입이라고. 다이어트도
그렇고 평소에는 안 그렇다가 한번 근성을 발휘하면 제대로 하는 경향인 듯.
가수이자 영화배우인 전영록의 딸이며 보람의 할아버지는
1950~1960년대 액션 배우로 이름을 날린 황해(본명 전홍구, 1920~2005), 할머니는
원로 가수 백설희 (본명 김희숙)이다. 또한 어머니 역시 탤런트 이미영이렇게 3대가 연예인집안이다. 보람은 장녀이고 여동생인
전우람이 있는데, 전우람도 디유닛의 람(RAM)이라는 예명으로
활동을 하다가 밴드 FIVE RUN STRIKE에서 라미(RAMI)라는
예명으로 보컬 활동 중이다.
이런 배경 덕에 티아라데뷔 초에는 언론 노출도가
가장 빈번한 편이었다.
2012년에는 아버지 전영록, 동생 전우람과 '우람씨네 가족캠프'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고 오란씨광고 모델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여담이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 덕분에 네이버옛날신문 서비스에 유일하게 이름이 검색 가능한 현존 걸그룹 멤버가
되었다.(...) 1989년 8월 2일 동아일보기사에서 딱 한 번 검색된다.
프로필에는 155cm라고 나오나 실제로는 더 작다고 한다. 주간아이돌에서 직접 밝혔으나 이
키가 아니라 148cm라고 소연이 신명이 나게 깠다. 가수
벤과 키가 비슷하다. 키는 12년 2월 주간아이돌에서, 혈액형은 데뷔 초 경제투데이 <두근두근 라이브채팅>에서 직접 B형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할아버지 황해와 아빠 전영록은 불교, 할머니 백설희와 삼촌 전진영은
천주교, 엄마 이미영은 개신교라 전보람의 종교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보람의 친할머니인 백설희는 한국전쟁중 군부대 위문 공연을 했던 공로로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었다. 백설희의 히트곡으로는 <봄날은 간다>, <물새 우는 강언덕> 등이 있고, 백설희가 별세한 후 이미자를 비롯하여 인순이, 이자연, 배일호 등의 후배
가수들이 방문하였고, 보람이 속한 티아라도 빈소를 방문하였다. 전영록
또한 <종이학>,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불티>,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 등의 히트곡으로 80년대 중반에 큰 인기를 누린 가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