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면서 바로 역마에 태워 보내니, 한 세대 영광이 이와 같은 즉 휘가 <용성지>에 수록되었다.
같은 방에 적힌 사람 중에는 문장가로 출중한 사람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빼어난 사람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이다.
卽令乘馹以送榮動一世此則載於龍城誌盖當時榜下諸人多文章之士而其中表著可稱者寒暄堂金先生
경자식년시는 다른 과거와 마찬가지로 생원, 진사, 문과, 무과를 함께 치렀고, 생원, 진사, 문과, 무과 모두 지방에서 초시(初試)=향시(鄕試)를 치르고, 합격자만 서울에 모여 복시(覆試)=회시(會試)를 치러 최종 합격자를 결정하고, 최종 합격자만 다시 전시(殿試)를 치러 등급을 정하였다.
네 종류 과거를 같은 날 한꺼번에 치른 것이 아니므로 예를 들어 생원시 먼저, 이어서 진사시, 문과 등 시험마다 날짜를 달리 해서 치렀다.
암계공도 아마 문과에도 응시했을 가능성이 있다. 서울에서 남원 지사방은 매우 먼 거리이다.
그런 상황에서 며칠만 기다리면 발표일인데 합격자 발표를 보지 않고 먼 길을 내려와 버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 되지 않는다.
또 아직 발표하지도 않았는데 전라도 관찰사는 어떻게 암계공이 장원인줄을 알았겠는가?
이 글은 조상을 미화하기 위하여 지어낸 이야기인 것 같다.
성종 20년(1489) 기유식년시 병과 16위(26/33)
생원 최연손(崔連孫)
자 : 자윤(子胤)
본관 : 전주(全州)
거주지 : 남원(南原)
아버지 : 최대(崔岱)
조부 : 최주(崔淍)
증조부 : 최덕지(崔德之) 문과에 급제하여 태종 을유방에 수록되었다.
외조부 : 이계무(李季茂)
처부 : 최전(崔湔)
암계공은 나이 30세에 성균 생원으로서 문과에 급제, 사관(史官)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1492년 예문관 봉교, 1493년 사간원 헌납, 선무랑(6품) 사간원 정언, 1495년(연산 1) 평양 서윤, 1501년(연산 7) 함양 군수, 1506년(중종 1) 사헌부 집의, 1507년(중종 2) 암행어사, 봉상시 정, 1509년(중종 4) 사제감 정, 강릉 부사, 1518년(중종 13) 형조 참의가 되었으나,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1527년(중종 22) 홍문관 교리, 1537년(중종 32) 승정원 도승지 등을 거쳐서 이조 참판에 올랐다.
암계공은 연산군 때 지방관으로 나가 무오사화나 갑자사화 등 사화를 비롯한 연산군 폭정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지방관 이력이 짧지 않았다.
대개 높은 벼슬에 오르는 사람은 지방관으로 나가지 않거나 임기를 채우지 않고 조정으로 돌아갔다.
연촌공은 1425년(세종 7) 함양 군수로 내려와 20년 넘게 지방관만 맴돌다가 1446년(세종 28) 남원부사에서 은퇴하였다. 서울에 배경이 없었기 때문이다.
암계공도 평양 서윤으로 내려와 함양 군수를 거쳤는데, 중종반정으로 정권이 바뀐 다음 조정에 복귀하였다.
만약 중종반정이 없었다면 암계공도 연촌공처럼 계속 지방관으로 맴돌았을 수도 있다.
암계공은 높은 벼슬에 오래 머문 이력에 비추어 문집 등 전해오는 문헌이 거의 없는 편에 속할 정도로 적다.
대개 문집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 후손이 정리하여 만드는 것인데 문집을 만들 만한 후손이 없지도 않았었다.
암계공사실(巖溪公事實) 9세손 처렴(處濂)
8세조 통덕랑공이 선조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나시므로 방계 할아버지 감찰공은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함양으로 이사를 가면서 선조님의 문집과 직첩 등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갔는데 집에 불이 나서 모두 다 타버리고 하나도 전해오지 않게 되었으니 후손에게 있어서 매우 불행한 일이다.
통덕랑공 최윤조(崔潤祖)가 20세 젊은 나이로 순창에 있는 처가에서 일찍 사망하므로 둘째 아들 감찰공 최엄조(崔渰祖)가 함양 뇌산(磊山)에서 남원양씨와 혼인하여 처가살이를 하면서 모든 문헌을 가져가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집에 불이 나서 불타버리고 전해오지 않게 되었다고 전해 오고 있지만 의심스러운 곳이 없지 않다.
감찰공은 1451년 암계공이 함양 군수로 부임한 이후 함양 뇌산에서 살고 있는 남원양씨와 혼인하여 처가에서 살았고, 장손 부장공 최완(崔琬)은 1499년 태어나 남원 주암촌에서 살았다.
암계공은 그 후에도 30년 가까이 높은 벼슬에 있었으므로 모든 문헌을 감찰공이 가지고 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첫댓글 머물다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