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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5일 주일 아침, 유일한 언어인 침묵의 긴 시간을 끝내고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유명한 쨈과 빵으로 간단히 아침을 먹습니다.
트라피스트의 추억을 기억의 강물로 흘러 보내고 죽림굴로 갑니다.
언양인터체인지에서 빠져 나와 24번 국도를 따라 석남사입구에서 좌측으로 돌아가면 살티공소가 나옵니다. 살티공소는 지난 번에 순례했던 곳이라 그냥 지나쳐 간월산 고개를 넘어갑니다. 산마루를 지나가는 흰구름이 참 아름답습니다. 고개를 넘어가니 배내골 오토캠핑장 안내표지가 나옵니다. 캠핑 동호회카페에 자주 소개된 곳이라 한 번 오고 싶었던 곳인데... 눈도장만 찍고 계속 직진하니 휴가 차량이 아주 많습니다. 죽림굴 가는 길에 거의 도착한 것 같은 데... 네비양이 갑자기 요란을 떱니다. 아무래도 이상하여 마을 초입에 들어서서 평상에서 쉬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죽림골을 물어보니 모른답니다. 오던 길을 다시 거슬러 100m 정도 가서 주차장 관리하는 아저씨에게 물어 봅니다. 여기가 죽림굴 가는 입구인데 차는 못들어 간답니다. 길가에 주차를 하고 건너편 작은 가게에서 얼음물과 "설레임"을 사서 죽림굴을 향해 출발합니다. 저만치 앞서서 데이트하는 청춘 남-여가 다정히 걷고 있습니다. 산을 해치지 않고 지나치는 구름처럼 저의 발걸음도 가볍습니다. 많이 가고 싶었던 곳인데 드뎌 가게 되었습니다. 좋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죽림굴로 향하는 행복함을 "설레임"으로 대신 표현합니다.
산허리를 돌아서면 시원한 바람이 순례객보다 먼저 도착해 마중을 나옵니다. 신앙의 흔적을 찾아 산길을 걷는 순례객의 뺨을 가볍게 흘러 내리는 땀방울을 주님께서도 보석처럼 아름답게 보실 겁니다.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땀방울을 찍어 냅니다. 아름드리 적송도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가지에 올라가고 픈 동심의 세계가 그립습니다.
내리막길로 접어드니 신불산 휴양림이 나왔습니다. 직원 아가씨에게 죽림굴을 물어보니 가는 길을 지나쳐 왔다고 합니다. 500m 정도를 다시 거슬러 올라가 우측으로 임도를 따라 가랍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다시 올라가는 길도 새로운 길을 걷는 것처럼 행복합니다.
바른 길을 찾아 비포장도로에 접어드니 길 옆에 빛바랜 이정표가 죽림굴을 희미하게 안내합니다.
쉬엄쉬엄 1시간 30분 정도 산길을 걸어 죽림굴에 도착합니다. 거리는 약 3,6Km입니다.
동굴 안에 들어서니 깜깜하여 보이지 않습니다. ㅋ "수리수리 마수리 손전등아 나와랏" 아이고~ 신성한 성지에서 마술 주문이 뭣이여? 그래도 희미한 전등이 있어 다행입니다.
동굴 맨 위에 편평한 독립 공간이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께서 여기에 머물러 계셨을 것입니다. 저도 올라가 앉아보고 싶었지만 너무 어두워 포기했습니다.
죽림굴(대재공소) 소개 오랫동안 잊혀졌던 죽림굴은 1986년 언양본당 김영곤 주임신부와 신자들이 발견해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본당사 발간 작업을 위해 관련 자료를 수집하던 김영곤 신부는 노인 신자들한테서 "선조들이 박해를 피해 간월산 동굴에 들어가 기도했다"는 얘기를 듣고 3차례에 걸쳐 이 일대를 샅샅이 뒤졌으나 찾지 못하다가, 마침내 11월9일 신자 4명이 정상 부근에서 폭 7m, 높이 1.2m 입구의 동굴을 찾아냈다. 앞이 대나무로 가려진 데다 입구가 낮고 작아 은신처로 사용하기에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동굴이다. 1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이 동굴은 기해박해(1839) 때 충청도 일대와 영남 각처에서 피난 온 교우들이 감시의 눈을 피해 은신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기해박해(1839년) 당시 천주교 교우에 대해서는 인정 사정 없이 잔혹했던 관아의 손길을 피해 더욱 안전한 곳을 찾던 신자들이 모여 움막을 짓고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다. 재너머 간월쪽에서 포졸들의 움직임이 보이면 100여명의 신자가 한꺼번에 숨어 불을 피울 수 없었으므로 곡식을 물에 불여 생식을 하며 생활하였다는 이 천연석굴 공소는 대나무와 풀로 덮인 낮은 입구 덕분에 위장이 용이하였다. 경신박해(1860년) 때, 최양업 신부는 이곳에서 약4개월간 은신하며 미사를 집전하였고, 1860년 9월 3일자로 된 그의 마지막 서한을 남겼다. 울산장대의 3인 순교자 (진목정의 3인순교자)- 이양등(베드로) 허인백(야고보) 김종륜(루가)도 한때 이곳에서 생활하였으며, 병인박해의 여파로 해체되었다. ■ 최양업 토마 신부의 마지막 편지 중에서- 1860. 9.3 죽림굴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부산교구의 대표적인 성지임에도 관리가 너무 허술하여 마음이 아팠습니다. 신자들이 마음대로 놓아둔 성물들과 제대 그리고 쓰레기들..동굴밖엔 그 흔한 벤치도 없습니다. 주변까지 전기시설이 들어오니 동굴에 어울리게 조명등을 설치하고 상징적인 성물을 놓아두면 순례자들이 차분하게 기도하며 묵상할 수 있을 텐데 ...법적으로 관리하기가 어려운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아쉬움을 남겨두고 오던 길을 되돌아 늦은 점심을 먹으러 출발했습니다. 길옆엔 아낙네들이 팔려고 내놓은 미나리가 산뜻한 향내를 풍기며 순례객의 마음을 설레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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