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문학회 카페에서 쉰 한 번째: 선정자 이선희
---박분필 [나의 고도를 찾아서], 박용숙 [공동 경비구역], 김연종 [비핵화 선언]
나의 고도를 찾아서
박분필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고 다시 달이 지고 해가 떠올랐다
낭떠러지에 걸린 철길 위로 벽도 창문도 없는 열차를
타고 철컥철컥 협곡을 지나 협곡으로 접어드는 길
접어들수록 세상이 아득하다
나의 고도를 찾아서
하늘 끝에 닿아있는 아슬아슬한 시월의 산
너무 높아서 , 번개가 내리칠 때는 머리보다
배꼽을 조심해야 한다는 산이 배꼽을
감았던 구름을 한 겹 한 겹 풀어낸다
산꼭대기에 태양이 걸린다 , 어제 쏟아진 함박눈이
하얀 외뿔고래처럼 헤엄치고 파랗게 담긴 시간이
넘실대고 단풍은 완벽한 색채의 춤사위다
산이 대뜸 , 위풍당당한 그림자를 길게 끌며
협곡바닥 푸른 물속에 발을 담근다
물에 비친 마음을 들여다본다
맑은 물에 마음을 닦는 일과
순수한 저 여유로움이 나의 고도였을까
사람이 늙는 일과 단풍으로 물드는 일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길 , 모두 물이었으니까
한 방울의 물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까
---애지 봄호에서
공동경비구역
박용숙
엘리베이터 가운데 둔
아파트 공동경비구역
남북의 문 열리고 예견치 않은
회담 성사될 때마다
열대야에도 찬바람 휑하다
애써 외면한 얼굴, 무표정한 근육
어색한 시선은 애꿎은 거울 겨냥한다
누가 이곳에
거울을 달아 놓을 생각했을까?
잠시 딴청 피우지만
매번 낯선 몇 년째 통성명 없는 앞집 여자의
장바구니와
피부와 옷차림새, 액세서리 슬쩍 훑어보며
유기농일까, 아닐까
순금일까, 아닐까
별별 생각 스친다
언제쯤 우리 무장 해제하고
봄꽃 따뜻이 피워낼 수 있을까?
----애지 , 2024 년 봄호에서
비핵화 선언
김연종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만남을 갖자고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서로를 닦달하며 맹세했다
완전하진 않더라도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평화를 이어가자고
그래도 살아가리라 이왕이면 두 손 꼭 붙잡고
궁벽한 초야를 마치고 서약했다
불완전하고 검증 불가능하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전쟁만은 피하자고
전쟁 같은 30년이 흘렀다
침대와 부엌엔
미사일과 핵잠수함이 떠다니고
거실과 현관엔
철조망과 핵 쓰레기가 널려있다
DMZ의 긴장과 권태
긴박한 일탈과 지루한 일상
비핵화를 포기했다
불완전하고
검증 불가능하며
언제든 돌이킬 수 있을지라도
비무장지대 같은 혼인만은 유지하자고
----애지 여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