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들 어떠하며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성계의 아들이자 훗날 태종으로 즉위하는 이방원은 조선의 건국에 방해가 될 듯한 정몽주를 이 시조로 회유한다. 하지만 고려 말 삼은의 한사람이었던 정몽주가 자신의 뜻을 꺾을리는 없었다. 결국 정몽주는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 의해 선죽교에서 살해되고 만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어떻게든 지나가는 한 세상, 위의 시조처럼 이렇게 산들 어떠하고, 저렇게 살아간들 어떠할까 싶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다 자신의 뜻이 있고 의미가 있었다.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흔히 정도와 권도를 꼽는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을 정도라 한다면, 시의 적절하게 또는 임기웅변으로 살길을 도모하는 것이 권도일 것이다. 복잡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작정 정도를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이야기하긴 어려울지도 모른다. 특히 약자이 처지에서, 서민의 입장에서는 사회와 권력의 옳지 않는 폭력 아래에서는 정도 보다는 오히려 권도의 길을 걷는 것이 더 나은 방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삶 만을 위하여 권도의 길을 걷는다면, 그 사회는 유지 될 수 없다. 잠시 권도를 선택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 방법의 선택은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루고 있는 그 밑바탕에는 자신의 숭고한 희생을 통해 삶의 올바른 길, 즉 정도를 걸어간 수많은 이들의 피와 땀이 배여 있어 정의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이방원에게 있어 정몽주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의 높은 학식과 덕망 그리고 출중한 능력은 새 나라를 건설하는데 있어 분명 중요하였다. 그러나 정몽주의 이러한 능력은 오히려 그의 운명을 재촉하는 빌미가 되어버렸다. 장자의 말대로 곧은 나무는 쓸모가 많지만, 그 쓸모 덕에 인간에게 배임을 당하는 것이요 쓸모없이 굽어진 나무는 오래토록 생명을 이어갈 수가 있다.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있는 것처럼 말이다.
드렁칡처럼 얽혀서 흘러가는 삶이 일신의 평안을 추구할 수 잇다 하더라도, 과연 그 삶은 올바른 삶인가? 이 시조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것은 바로 삶에 태도에 관한 근본적 물음을 더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 하여가 ]
차역하여 피역하여 此亦何如 彼亦何如
성황당후원 퇴락역하여 城皇堂後垣 頹落亦何如
아베약차위 불사역하여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
출처 : 한국 시조감상
[이방원 李芳遠 1367~1422 ]
조선의 태종 임금이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 휘하에서 신진정객들을 포섭하여
구세력의 ㅈ제거에 큰 공을 세우고 조선 개국에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2번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조선 제 3 대왕으로 즉위하였다. 조선 초기 왕권을 확립하고, 국가의 기초를 닦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점에서 조선의 기틀을 다잡은 왕으로 평가할 수 있다.
출처: 한국 시조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