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 실패의 원인 3 (삿 1:33-36)
33. 납달리는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이 그들에게 노역을 하였더라 34.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35.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 36.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
"정복 실패의 원인" 마지막 시간입니다. 우리가 믿은지 오래 됐음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어야 할 텐데 아직도 세상 사람이라면 왜 그런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점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7. 세상을 멀리하지 못해서입니다.
33절 "납달리는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이 그들에게 노역을 하였더라"
여기 벧세메스는 '태양의 집'이라는 뜻으로 태양신의 신전을 가리킵니다. 또 '벧아낫'은 '아낫의 집'이라는 뜻으로 아낫 여신의 신전을 뜻합니다. 모두 당시 이방 신전의 이름들이다. 아낫은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여신으로 바알신의 누이요 부인으로 전쟁과 사랑의 신으로 아낫신전은 매춘부들의 소굴입니다. 그들의 성적인 교제가 그들의 제의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종교가 타락한 것은 국가 정책적인 것입니다. 백성의 수효가 국력이다 보니 왕들이 이런 방법으로 백성을 늘려보려고 했습니다. 다음은 종교 역시 성적인 욕망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둘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알과 아세라가 들어왔다 하면 순식간에 무서운 타락을 불러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걸 통해서 이스라엘의 청년들이 미혹되어 많은 징계를 받았습니다.
납달리 지파의 문제점은 33절에 나오듯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이것이 실패의 원인입니다. 우리가 몸을 가졌으므로 세상과 아주 결별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세속문화와 멀리해야 합니다.
벧후2:7-9에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했습니다. 의인들도 세상 것을 자주 보고 듣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때가 묻습니다. 마음이 부패해지고 악의 잔상들이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그래서 몸은 씻었어도 발은 늘 씻어야 합니다.
딤후3:5-7에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끊을 것 끊지 못하면 항상 배워도 진리 가운데 이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딤후3:1-5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 서라" 했습니다. 고기가 바다에서 살지만 소금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세상의 유혹과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8. 믿음의 용기가 없을 때입니다.
34-35절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했습니다.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가장 못난 지파가 단지파입니다. 단지파는 지파의 수효에 비해 작은 땅을 분배 받아 충분히 점령할 힘이 있었음에도 믿음이 없었습니다. 용기도 없고 담대함도 없었습니다. 반면 아모리 족속이 대단한 족속입니다. 여호수아에게 그토록 진멸하기까지 당해놓고도 남은 사람들이 단단히 결심하고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습니다.
단지파의 상태를 보려면 아모리족의 반대로 보면 됩니다. 아모리족이 결심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위협을 느꼈음을 전제한 표현입니다. 단지파가 결심하고 가서 차지했으면 당할 수밖에 없는데 믿음이 없으니까 아주 무시해버린 것입니다.
여기 '헤레스'는 '태양'이라는 의미로 태양신의 신전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그러면 밝아야 하는데 왜 어둡게 삽니까? 하나님을 소망 삼지 못하고 세상 것을 소망 삼기 때문입니다. 아얄론은 '사슴의 들판'으로 여호수아가 아모리와 전쟁할 때 달이 머문 곳입니다. 사슴들의 들판은 평화로운 것 같지만 맹수의 사냥터입니다. 이처럼 왜 두렵습니까?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알빔'은 '여우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알빔 여우들은 의심이나 여러 육신의 생각들입니다. 역시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여호수아가 태양을 명하고 달을 명하였던 그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에 담대가 없으면 죽은 믿음입니다. 어디에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의 보이는 대로 행하지 말고 믿음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브록 목사가 호숫가에 있는 호머 씨의 집의 초대를 받았는데 마침 그 때가 해가 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거기 초청된 사람들이 해지는 석양의 아름다움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호레이스라는 맹인이 곁에 있다가 자기도 "아 아름답군요. 이런 아름다움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브록 목사가 으하해서 "어떻게 보시는 것처럼 말씀하십니까?" 물으니 "저는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하여 모든 것을 본답니다. 비록 장님이지만 해지는 저 편까지 볼 수 있답니다." 이 말에 감동을 받은 브록 목사가 찬송시를 썼는데 그 찬송이 그 유명한 '해지는 저 편'이라는 찬송입니다. 이처럼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고 그 약속을 보고 천국을 봅니다.
그러므로 행 27장의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바울처럼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여망마저 사라졌지만 다윗은 담대히 외쳤습니다. 행27:23-25에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단지파는 이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단지파는 육신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저 북방으로 멀리 이주하여 사이비이단을 섬기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롬8:6-7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했습니다.
9.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5-36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 요셉지파가 도왔기 때문입니다. 요셉지파는 에브라엠과 므낫새라는 두 지파입니다. 여기 단을 도왔던 요셉의 가문은 므낫새 지파입니다. 므낫새 지파는 둘로 갈라져서 하나는 동편 하나는 서편에 있었는데 동편의 므낫새 지파가 단지파를 도왔습니다.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바로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체의 도움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므낫새라 하지 않고 요셉 가문이라고 한 것은 왜 그랬을까요? 요셉이 칠년 기근을 만난 가나안 땅의 가족들을 애굽으로 인도하여 구한 그 공로를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정신을 가진 요셉의 가문의 도움으로 아모리 족속들이 노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 발이라도 먼저 앞선 사람들이 섬겨야 합니다. 요일4:12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했습니다. 요셉이가 섬겼기 때문에 기업도 가장 많이 받고 가장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천국의 기업도 섬기는 자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 지파의 강성을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구속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요, 교회론적으로는 주의 종들을 가리킵니다. 주의 종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종들이 더욱 영적으로 강성해질 때 우리 모두가 은혜를 받고 영육 간에 승리하고 형통합니다. 주의 종을 살려내면 모두가 살아납니다.
행 12장을 보면 헤롯이 베드로도 죽이려고 감옥에 가두었을 때 온 교인들이 교회 나와서 기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베드로를 건져내는데 얼마나 삼엄한 경계에 겹겹이 쌓인 안전장치가 많았습니까?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꼼짝할 수도 없고, 첫째파수 둘째파수 그리고 성문까지, 4겹 5겹 그러나 기도할 때 저절로 열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종들이 많은 것들에 의해 결박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결박은 스스로 헤어 나오기 어렵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교인들에게 결박당하기도 합니다. 디모데와 같은 젊은 일군들은 교회의 사랑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고전16:10에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단지파처럼 이 세상에 살아가지만 주일마다 강성한 사역자들의 도움을 통해서 또 다시 회복하고 또 다시 회복합니다. 요셉 족속의 강성 비결은 그들이 벧엘을 정복한 때문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우리에게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벧엘의 삶이 있을 때 온전히 승리함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영적으로 승리하려면 이런 영적기초가 잘 놓여야 합니다. 기계가 한 부분만 고장 나도 돌아가지 않은 것처럼 한 부분이라도 잘못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오늘 세상을 멀리하라. 믿음의 용기를 가져라. 그리고 지체를 위해 기도하고 주의 종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이 세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