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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료바구니(기독) 원문보기 글쓴이: 자료바구니
로마서는 머리말인 서언(1:1-17), 본론(Body)(1:18-15:13), 그리고 결언(15:14-16:27)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ABA'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언(A)과 결언(A')은 바울의 모든 서신 중 가장 길며, 똑같이 문안 인사, 기도, 여행 계획, 편지의 타이틀에 해당하는 복음의 진술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바울이 편지의 서언과 결언에 많은 비중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매우 용의주도하게 구성하였음을 보여준다.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서가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그는 로마서를 쓰기 전에 편지의 목적을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편지를 구성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지를 심사숙고 하였을 것이다.
고대 헬라-로마 사회는 말과 글의 기술인 수사학(修辭學)이 고도로 발달되었고, 당대 교육의 주 내용이 수사학이었다. 바울이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에 다소와 예루살렘에서 누구보다도 뛰어난 교육을 받은 점은 로마서를 쓸 때, 그가 배운 당대의 문학적 기교(文學的 技巧)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하게 한다.123) 실제로 로마서를 비롯하여 바울의 서신서들은 매우 정교하고 뛰어난 문학적 기법들을 보여주고 있다. 로마서의 서언은 인사문단(1:1-7), 감사문단(1:8-15), 주제문단(1:16-17)으로 구성되어있다.
1. 인사문단(1:1-7)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1)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124)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2)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3)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4)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5)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6)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7).”125)
본문개관
본문인 1:1-7절은 로마서의 서문(序文)에 해당된다. 바울 당대 헬라-로마의 편지는 보내는 “발신자”, “수신자”, 그리고 “문안 인사”로 되어 있는 짧은 서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로마서의 서문은 헬라-로마 세계의 편지 서문은 물론, 바울의 다른 어떤 편지 서문보다 길다.126) 사실상 로마서의 서문은 신약성경에 수록된 바울의 13서신중에서 가장 길다.
바울의 편지를 가지고 로마교회에 간 뵈뵈(16:1)가 교회 회중들 앞에서 로마서를 낭독하였다면 로마 교회 크리스천들은 예외적인 긴 서문을 듣고 다소 놀라움을 표했을 것이다. 왜 바울이 로마서의 서문을 이처럼 길게 썼는가? 대부분의 바울 서신들은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러나 로마서의 경우 바울 자신이 설립하지도 않았고, 개인적으로 만남도 없는 교회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름과 활동이 수신자들인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단편적으로 알려졌었다고 하더라도, 바울에 대한 로마교회의 이해 범위도 로마교회에 대한 바울의 이해 범위도 제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인식하고 있는 바울은(1:5; 11:13; 15:16) 이방인이 다수이며 로마 제국의 수도에 위치한 로마교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의 결언 부분을 볼 때, 바울은 자신의 스페인 선교, 예루살렘 교회 방문 등과 관련하여 로마교회의 영적, 정신적, 인적, 물질적인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15:22-32). 그래서 그는 예외적인 긴 서문을 통해 자신과 그의 복음에 관한 정중하고 절제된 소개와 함께, 로마교회 성도들에 대한 관심, 격려 및 인사를 표명하려고 한 것 같다.127) 왜냐하면 자신에 대한 로마교회의 호의 없이는 로마서의 내용 전달은 물론, 바울의 스페인 선교와 예루살렘 방문과 관련하여 로마교회의 정신적, 물질적 지원도 기대하기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구문(構文)상으로 로마서의 서문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문장의 주어는 1절 초두에 나타나 있는 편지의 발신자인 ‘바울’이다. 문장의 간접 목적어는 7절 상반 절에 언급되어 있는 편지의 수신자인 ‘로마의 크리스천들’이고, 직접 목적어는 7절 하반 절에 나타나 있는 ‘은혜와 평강’이고, 주동사는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서문을 1절, 2-4절, 그리고 5-7절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절에서 바울은 먼저 초면의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정체성(Identity), 곧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선택된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부름 받은 사도’임을 밝힌다. 그 다음 2-4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메시야,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주(主)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런 다음 5-7절에서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의 정체성으로 다른 지역의 신자들처럼 ‘믿음과 순종을 가진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임을 밝히고,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비는 인사를 한다.
본문 주해
①편지를 보내는 사도 바울
바울은 1:1절 상반 절에서 먼저 편지를 보내는 자신의 이름이 ‘바울’128)이라는 것과,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부름 받은 사도’임을 밝힌다. 바울이 자신을 이렇게 2중적으로 소개를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바울서신의 여러 서문 인사를 살펴보면,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라는 역설적인 두 호칭으로 소개하는 곳은 오직 로마서 밖에 없다. 고전 1:1절, 고후 1:1절, 갈라디아서 1:1절, 에베소서 1:1절, 골로새서 1:1절. 디모데전서 1:1절에서는 ‘사도’라는 호칭만을, 빌립보서 1:1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는 호칭만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서 서두에서 초면인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부름 받은 ‘사도’라는 호칭을 동시에 사용하여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종’이라는 말에 ‘그리스도의’라는 말을, 그리고 ‘사도’라는 말에 ‘부름 받은’이란 말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이란 말을 각각 덧붙이고 있다.
왜 바울이 이와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는가? 편지를 받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이라는 이름은 결코 생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로마교회 성도들은 이미 바울의 이름과 그의 활동에 대하여 어느 정도 듣고 있었을 것이다. 로마서 16장에 소개되고 있는 적지 않은 로마교회의 사람들이 바울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수년 동안 바울의 선교 사역에 동참하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당시 로마교회에 돌아와 있었다는 점은 이것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바울이 초면의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연령과 출신 배경을 쓰지 않은 점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당시 로마교회 성도들이 바울에 대해 얼마나 정보를 갖고 있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바울이 한때 초창기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하는데 가장 앞장을 섰던 열렬한 유대교 지도자였으나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극적으로 바뀌어 이제 열렬한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129) 그리고 그가 이방인들에게 유대교의 할례와 모세의 율법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이 된다고 가르쳐서 유대인들로부터 미움과 도전을 받고 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런 점을 모두 염두에 두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부름 받은 사도’라는 말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분명하게 전달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사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종’으로 번역된 헬라어 ‘둘로스’(dou"lo")는 하인이나 사환의 의미보다도 노예의 의미가 더 강한 말이다. 바울 당대 헬라-로마 사회에서 ‘둘로스’는 그의 생사권(生死權)이 주인에게 있고, 주인의 재산의 한 부분이었으며, 매매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종도 누구에게 소속된 종이냐에 따라서 그 신분과 일감이 엄청나게 달라진다. 황제나 고위 관리의 종은 같은 종이지만 평범한 장사꾼이나 농사꾼의 종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밝힌다. 자신의 살고 죽는 일과 그가 해야 할 모든 일이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냐에 따라서 그의 종의 신분이 달라진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약속한 이스라엘의 새로운 해방자이며 임금임을 지칭하는 말이다. 바울은 4절 끝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에 당시 로마 황제에게 붙였던 호칭인 ‘우리의 主’라는 말을 붙여, 가이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진정한 主(주)임을 선언한다. 이와 같은 예수의 신분에 따라 바울의 신분도 그 비중이 달라진다.
우리가 바울의 자서전적(自敍傳的) 기록으로 알려져 있는 갈라디아서(1:13-16)와 빌립보서(3:5-12)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바울은 한때 철저한 바리새파 유대인 학자로서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을 고수하고 이를 위협하고 도전하는 자들을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제거하는데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분을 위해서, 그분을 전파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는 그분의 종이 되었다. 로마서(14:7-8)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구약의 아브라함(창 26:24), 모세(민 12:7,8). 다윗(삼하 7:5), 이사야(사 20:3) 등이 야훼 하나님께 속하였고, 그 분 때문에, 그분을 위해서 살고 있다는 의미에서 자신들을 “야훼의 종”으로 불렀던 것처럼, 바울은 이제 이스라엘의 왕이며 온 세상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속하였고, 그분을 위해 살고, 그 분을 위해 일하므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같다.
바울은 자신을 또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부름 받은 사도’로 소개한다. 문법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하심을 입은’이라는 분사절은 ‘부름 받은 사도’라는 말을 수식하고 있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말은 단연코 ‘하나님’이다. 바울을 사도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택하심을 입은’이란 헬라어 단어(ajfwrismevno")가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간접적으로 알리는 신적 수동태로 되어 있다는 점이 이를 입증해준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1절에서 자신이 “사람으로부터도 아니고, 사람을 통해서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사도로 부름을 받았음을 강조한다. 갈라디아서 1:15-16절에서 다시 하나님께서 그가 어머님의 태중에 있을 때 이미 택정하시고,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그의 은혜로 부르셨다고 말하고 있다. 본래 ‘사도’를 지칭하는 헬라어 단어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도’라는 말은 때때로 신약성경에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 혹은 복음전파에 헌신하는 자들을 지칭하는 보다 광의적인 말로도 사용되고 있지만(행 14:14; 고전 4:6,9; 빌 2:25; 살전 2:6), 바울은 ‘사도’라는 말을 종종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목격하고, 예수로부터 직접 복음 전파로 세움을 받은 자를 지칭하는 제한된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5:5절 이하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사람들을 열거한 다음 8절에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다”라고 말하고, 바로 이어 9절에서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부활한 예수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자이며, 마지막 사도로 부름을 받은 자임을 뜻한다. 고전 9:1절의 “내가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는 말도 이점을 뒷받침해준다. 이처럼 바울은 스스로 사도가 되었거나 어떤 사람이나 단체에 의해 사도가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찍이 야훼 하나님께서 이사야(사 49:1)와 예례미야(렘 1:5)를 불러 자신의 대언자(代言者)로 삼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을 불러 새로운 시대의 사도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바울의 ‘사도직’은 어떤 역사적 정황의 산물이 아닌 하나님의 신적 행위의 결과이다(갈 1:1).130)
②하나님의 복음
하나님께서 바울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로 부르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이다. ‘복음’을 지칭하는 헬라어 단어 ‘유앙겔리온’(eujaggevlion)은 바울 당대 헬라-로마사회에서 왕태자의 출생, 왕의 등극, 혹은 국가적 큰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기쁜 소식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신약의 저자들은 이 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혹은 이를 전파하는 일을 지칭하는 전문적인 용어로 사용하였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로마서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서신에서 설교나 메시지를 대변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바울은 복음의 궁극적인 기원과 권위와 관련하여, 종종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롬 1:1; 15:16; 고후 11:17; 살전 2:2,8,9)으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복음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자주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 (롬 1:1-2), 또는 “그리스도의 복음” (롬 15:19; 고전 9:12; 고후 2:12; 9:13; 10:14; 살전 3:2; 갈 1:7; 빌 1:27), 또는 이 복음이 바울 자신에 의해 전파되고 있기 때문에 “나의 복음”(롬 2:16; 16:25)으로 부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죽으심과 부활이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결정적인 사건이며, 이것을 전파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서 서언과 결언 부분에서 바울이 거듭 거듭 복음을 가리켜 “하나님의 복음”(1:1; 15:16)으로 부르고 있다는 점은,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이루시고,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임을 보여준다.131)
2-4절에서 바울은 복음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복음의 기원과 주체는 하나님,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이 약속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의 방편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임을 밝힌다. 즉 복음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먼저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성경 안에서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성육)으로서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주어지기 훨씬 이전인 구약의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에 의해 이미 계속해서 약속되어졌고, 그리고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 선포되어 왔다는 것이다.132)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서 약속이 성취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신약성경만이 복음이 아니라 구약성경도 이미 복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구약에서 복음은 약속의 대상으로, 신약에서는 성취의 대상으로 소개되고 있는 점이다.133) 그런 점에서 신약은 구약 안에 숨겨져 있었고, 구약은 신약 안에서 계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눅 24:25-32, 44-48). 바울은 이점과 관련하여 갈라디아서 3장 8-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약속).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성취).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한 의와 구원의 길이 먼저 제시하였으나, 인간의 불순종으로 실패하였기 때문에, 이제 차선으로 복음을 통한 새로운 의와 구원의 길을 제시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범죄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직 복음을 통한 의와 구원의 길을 세우시고, 그 길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속 그 약속을 선언하게 하셨음을 밝힌다. 하나님은 단순히 약속만을 선언하신 것이 아니라, 출애굽 사건과 사사시대, 왕정 시대를 걸쳐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많은 적대 세력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그의 신실한 구원 행위를 통하여 복음의 내용을 미리 보여주셨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의 계속되는 불경건과 불의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백성들의 출애급사건의 역사와 가나안정복과 사사시대, 왕정시대, 바벨론포로와 그 귀환의 역사를 통하여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세의 율법과 복음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구약 출애굽기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땅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먼저 복음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여 자신의 언약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그들로 하여금 언약 백성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출 2:23-25; 20:2).
이처럼 출애굽 사건으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복음이 알려졌다. 출애굽 사건 후 광야에서 주어진 율법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보여준 그 복음을 대체하기 위해 주어진 것은 아니다. 갈라디아서 3:17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내용인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처럼 율법은 복음을 대체하거나 복음을 폐지하지 못한다. 복음과 율법은 처음부터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 다시 말하자면 율법은 복음과는 다른 목적, 곧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이 명백하게 나타날 때까지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한 삶을 위해 주어졌다. 따라서 율법은 처음부터 결코 복음을 대신할 수 없었다.
3절 이하에서 우리는 바울이 복음의 핵심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보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이 약속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사역이다. 곧 복음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가 다윗의 후손으로 출생한 메시야(=그리스도)이시라는 것, 그분이 성경대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셨으며(고전 15:3-4), 그분이 우리의 주(고전 12:3)이시라 것과 그분을 믿으면 죄 용서함과 구원이 주어진다는 선언이다(롬 10:9-15). 혹자는 이 부분이 이미 바울 이전의 초대 기독교 안에서 고백된 기독론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134) 그러나 바울의 회심과 소명의 시기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시기 사이에 간격이 불과 2-3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바울과 무관(無關)한 독립적인 초대 기독론을 찾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초대 기독교의 기독론적 찬송시로 알려지고 있는 빌립보서(2:6-11)와 골로새서(1:15-20)의 경우처럼, 바울이 기존의 고백을 수정 보완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135) 그러나 바울 자신이 이미 초대 기독론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사실상 3-4절을 형성하고 있는 두 병행 분사절을 이끌고 있는 “육을 따라”(kata; savrka)와 “성령을 따라”(kata; pneu'ma)가 바울이 자주 사용하고 있는 중요한 신학적인 대조인 ‘육’과 ‘성령’의 대조(예를 들면, 롬 8:4-9; 갈 5:13-18)를 연상케 하고 있다는 점은, 이 구절을 바울과 분리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③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3절 초두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그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통해서 약속하신 복음은 바로 그의 아들에 관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복음을 결정하는 시금석(試金石)이 바로 그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두 개의 형용사적 분사절을 통하여 복음의 내용인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설명한다. 즉 그는 아래와 같이 “육을 따라”와 “성령을 따라”라는 두 병행 분사절 을 중심으로, 복음의 주 내용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상의 신분을, 부활전의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메시야적 신분과, 그리고 부활 이후의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서로 구분하고 있다.
그의(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곧 그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분이시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분이시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신분이시니라.
바울은 이 두 병행 분사절을 통해서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가? 이 구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어떤 주석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 예수가 부활을 통하여 비로소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존재론적 변이(變移)가 아니다.136) 또는 어떤 주석가들의 주장처럼 예수의 인격이 인성과 신성의 양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문법적으로 보면, 두 개의 속성(형용사)분사절, “육을 따른...”, “성령을 따른...”은 다 같이 “그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을 수식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육(肉)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존재론적 변이가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사역에 있어서 두 신분 상태, 곧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전의 “육을 따른” 낮아지신 상태에서의 메시야적 신분과 그 사역과, 부활 이후의 “성령을 따른”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높아지신 신분과 그 사역을 보여준다.137)
존 스토트는 이점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한다: “육신을 따라’와 ‘성령을 따라’라는 두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인간적 본성과 신적본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사역의 두 단계로 부활 이전과 부활 이후의 사역을 말하는 듯하다. 부활 이전의 사역은 연약한 것이었으며, 부활 이후의 사역은 쏟아 부어진 성령을 통한 능력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비하(卑下)와 승귀(昇貴), 그의 연약함과 능력, 다윗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 분의 인간적 혈통, 부활에 의해 또 성령을 주신 것에 의해 확립된 그분의 권능에 찬 신적 아들 됨 등에 대한 균형적인 진술이 나와 있다.”138)
이처럼 예수는 다윗의 혈통에서 출생하기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계셨다. 그러다가 때가 되어 그는 옛 시대의 세력에 매여 있는 범죄한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약속된 다윗의 후손(메시야)으로 출생하셔서, 옛 시대의 종이 되어 있는 죄인을 대신하여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심으로 인류를 위한 구속사역을 완수하셨다(롬 3:24-25; 8:3; 갈 4:4; 빌 2:6-11). 그리고 부활 이후의 새 시대에는 성령을 따라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곧 하나님의 호칭인 주님의 신분으로 높아지셔서, 성령을 통해 그들의 실제적인 구원 적용을 위해 계속 사역하신다.139) 물론 이 말이 부활이전 예수의 메시야 사역기간 성령이 예수에게 부재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성령으로 출생하셨고(눅 1:35), 세례사건을 계기로 성령이 충만하였으며(눅 4:1), 메시야사역을 위해 측량할 수 없는 성령을 받으셨다(요 3:34). 그러나 부활사건을 기해 예수는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성령을 파송할 수 있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높아지셨다.
그러므로 새 시대에 있어서 성령과 부활하신 예수는 그 사역에 있어서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성령이 부활하신 예수의 사역을, 부활한 예수는 성령을 통하여 사역하기 때문에, 새 시대에 있어서, 부활하신 모든 주님의 사역은 사실상 성령의 사역인 동시에, 또한 성령께서 하시는 모든 사역은 부활하신 주님의 사역으로 돌려진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성령 안에 있는 자가 되고, 성령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되고, 성령을 소유한 자는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가 되고,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는 바로 성령을 소유한 자가 된다(롬 8:9-10; 고전 12:3). 그럼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서로 불가분리에 있다. 전자가 서면 후자도 설 수 있지만, 전자가 무너지면 후자도 무너진다.140)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의 이중적인 사역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④믿음의 순종
바울과 로마교회 성도들은 복음의 내용인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바울은 먼저 5절에서 자신이 주님으로 높아지신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들 가운데서 ‘믿음의 순종’(uJpakoh;n pivstew")의 역사를 가져오기 위함임을 밝히고 있다.
‘은혜와 사도’(cavrin kai; ajpostolh;n) 라는 말은 다시 한 번 바울의 사도직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과, 또한 바울의 사도직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이점을 고백하고 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의 사도직의 수행에 있어서 함께 동반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141) 물론 이 능력은 그가 전파하는 복음과 함께 나타났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살전 1:5). 그의 사도직의 수행을 통해 모든 이방인들 가운데서 ‘믿음의 순종’을 가져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기서 ‘믿음의 순종’(uJpakoh;n pivstew")구문에 나타나는 ‘믿음’(pivsti")과 ‘순종’ (uJpakoh)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바울은 로마서를 마감하는 결언 부분인 16:26절에서도 동일한 말을 사용하여 자신의 복음이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이 말이 로마서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142) 서언과 결언에서도 언급될 만큼 로마서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믿음의 순종’이란 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믿음과 순종’의 관계는 속격 관계이므로 문법적으로 세 가지 접근이 가능하다. 첫째, 주격 소유격으로 보아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순종’ 또는 ‘믿음이 가져다주는 순종’으로 이해하는 것이다(NIV). 둘째, 목적 소유격으로 보아 “믿음 곧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순종“으로 이해하는 것이다(RSV). 셋째, 설명 소유격으로 보아 믿음과 순종을 분리시키지 않고 통합시켜 보는 것이다.143)
앞으로 로마서 3장의 주석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과 ‘순종’이 구별된다고 할지라도 양자는 결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해야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항상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을 동반하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참된 믿음으로 보기 어렵고,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순종을 찾아보기 어렵다(1:8/16:19; 10:16b/11:23; 11:23/ 11:30,31).144) 그래서 바울은 종종 그의 서신에서 믿음과 순종을 서로 교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1:8절에 나타나 있는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는 말과 데살로니가전서 1:8절의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는 말은 그들의 믿음의 행위들이 널리 알려졌다는 것을 뜻한다(역시15:18/16:19/고후 10:5-6). 그런 점에서 여기 속격 관계는 주격 속격과 설명 속격의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145) 어쨌든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목회나 선교의 진정한 목적은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순종을 동반하는 믿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데 있다고 하는 점이다.
⑤편지를 받는 로마의 크리스천들
바울이 편지의 수신자인 로마의 크리스천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우리가 로마에 언제부터 크리스천들이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제 1부 로마서의 문에서 자세하게 살펴 본 것처럼, 이미 AD30년대에 로마에 크리스천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바울 당대에 로마에는 적어도 1만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정착해 있었고, 로마와 예루살렘 사이에 종교적 절기 참석이나 친척방문이나 상업 및 교육 관계로 유대인들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30년대에 일어난 예수 운동이 어떤 형태로든 로마에 일찍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것은 30년대 초에 시작한 예루살렘 교회와 로마 교회 사이에 시간적인 간격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아마도 초창기의 로마 크리스천들은 이미 유대교에 몸담고 있었던 유대인들과 그리고 유대교에 들어온 소수의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창기 로마의 크리스천들은 유대교 회당에서 모임을 가졌을 것이며, 유대교와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를 쓸 무렵 로마의 크리스천들은 대다수의 이방인 크리스천들과 소수의 유대인 크리스천들로 구성되었을 것이고, 유대교와도 분리되어 회당이 아닌 크리스천 가정에서 모임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점은 로마서를 마감하는 16장에서 바울이 로마에 있는 여러 가정 교회들을 언급하며 암시하고 있는 점에서 확인된다.
바울은 로마 캐톨릭 교회처럼 평신도와 성직자를 나누고 후자를 전자보다 상위권에 두는 일종의 사제 주의자(司祭主義者)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부름을 받은 자인 것과 똑같이, 7절에서 로마의 크리스천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자들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사랑)받은 자인 것과 똑같이, 로마의 크리스천들을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로, 자신이 성령으로 부름을 받은 자인 것과 똑같이, 로마 교인들을 (성령에 의해) “부름을 받은 성도”로 부르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은혜’(cavriς);와 ‘평강’(eijrhvnh)으로 인사를 한다.
여기 ‘은혜’는 바울 당대 헬라 세계의 인사였고, ‘평화’, 곧 히브리어로 ‘살롬’은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인사였다. 그런데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두 가지를 묶어 자신의 인사로 제시한다. 이미 구약 민수기 6:24-26절에 나타나 있는 제사장의 언약적 축복,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에 ‘은혜’와 ‘평강’이 나란히 나타나 있다. 아마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이 언약적 축복을 강조하기 위하여 제사장의 축복처럼 두 용어를 한데 묶어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146) 이와 같은 언약적 축복 인사의 내용은 바울의 거의 모든 서신의 서두에 나타나고 있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엡 1:2; 빌 1:2; 골 1:2; 살후 1:2; 몬 1:2).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인사를 즐겨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147)
⑥우리의 아버지 하나님
바울이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주기도문의 서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제자들과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 초대교회에게 전승해준 새로운 계시를 그가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148) 바울이 활동할 당시 아직 복음서가 쓰여 지지는 않았지만, 주기도문을 포함하여 예수에 관한 전승(傳承)들이 사도들의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널리 유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배와 기도와 찬송 중에 이들이 자유롭게 활용되었을 것이다.149) 그 중에 하나가 예수께서 즐겨 사용한 하나님에 대한 호칭 “아바 아버지”(jAbba' oJ pathvr)였을 것이다(롬 8:15; 갈 4:6). 사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아버지”를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호칭으로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아람어로 친숙한 표현인 “아바”(아버지)를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인 호칭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참조 막 14:36), 또한 그의 제자들도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바”로 부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헬라-로마 세계의 이방인 크리스천들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아바”j(Abba)로 부를 수 있었다(롬 8:15; 갈 4:6).150)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래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대해서만 불렀던 호칭이며, 바울 당대 헬라-로마 사회에서 로마 황제에 붙여진 칭호인 ‘주’(kuvrio")로 부르는 것은 부활절 사건 후에 초대교회가 부활하신 예수께 사용하고 있는 특별한 신앙고백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부활하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세우셨다고 선언하였는데(행 2:35), 바울 역시 빌립보서 2:11절에서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여”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의 주가 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고전 12:3절에서는 성령 받은 참된 신자의 표시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아버지 하나님과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평강과 은혜, 곧 축복의 원천임을 강조한다. 진정한 은혜와 평강은 세상 사람이나 물질이나 더 나아가서 세상의 통치자인 로마황제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다.
2. 로마교회에 대한 감사(1:8-15)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8)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9)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10)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11)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12)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13)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14)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
본문개관
일반적으로 바울의 서신들은 서문 다음에 감사 문단을 가진다(고전 1:4; 빌 1:3; 골 1:3; 살전 1:2; 살후 1:3). 로마서도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종종 이 감사 문단을 통해서 수신자들에 대한 현재 상황에 대한 진단과 칭찬, 수신자들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 전달하려고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에 대한 간략한 소개 등을 피력(披瀝)한다. 그런 점에서 감사 문단은 서신의 전체적인 방향과 성격, 내용 등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151) 로마서의 감사 문단(1:8-15)은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①감사의 내용(8절)
바울은 먼저 로마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는 점에 관하여 감사를 한다. 비록 그가 직접 로마에 복음을 전하지는 않았지만 로마제국의 수도에 세워진 로마교회의 믿음이 그곳에 찾아오고 가는 사람들을 통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으니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는 그로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②기도(9-10절)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지속적인 기도와 관련하여 두 가지 점을 강조한다. 첫째, 자신이 기도할 때마다 항상 로마교회를 언급할 정도로 로마교회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 둘째, 자신이 하나님의 뜻하심 가운데 로마교회를 방문하고 싶다는 점이다. 이처럼 바울은 로마교회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방문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이, 마치 예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처럼,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③바울의 로마교회 방문 목적과 이유(11-15절)
로마교회에 대한 방문 목적과 그 이유에 관하여, 바울은 첫째, 로마교회에 신령한 은사를 전달하여 로마교회를 튼튼하게 하고 싶다는 것과, 둘째, 서로의 믿음을 통하여 서로 격려를 받고자 한다는 점과, 셋째, 그 동안 여러 번 로마에 가고자 하였지만 지금까지 길이 막혔다는 점과, 넷째, 바울은 인류 전체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할 빚을 진자로서 당시 이방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자신의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점을 밝힌다. 이처럼 바울은 감사 문단을 통하여 로마교회에 대한 자신의 방문 의지와 그들에게 복음 전파의 간절한 소망을 피력한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대한 복음전파 표명은 그들이 아직 복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믿음에의 순종, 곧 로마교회 성도들의 신앙적 성장을 위해서 계속적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주해
①감사의 내용(8절)
바울은 감사 문단을 시작하면서 감사의 대상, 감사의 방편, 그리고 감사의 내용을 언급한다. 그는 감사의 대상이 “나의 하나님”임을 강조한다. 하나님만이 자신의 감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감사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기 때문이다. 감사의 주 내용은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세워진 교회에 소속된 성도들의 믿음이 로마제국 전체에 알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믿음이 알려지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온 그들의 구별된 삶이 널리 알려졌다는 것을 시사한다. 당시 로마는, 오늘의 뉴욕처럼, 인구가 1백만 명이 넘는 거대도시였고, 세계의 중심지였다.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 모든 것이 로마에서 결정되었고, 전 세계 사람들이 로마를 오고갔다. 따라서 로마교회의 위치는 어느 지역의 교회보다 중요하였을 것이다. 잘하든 못하든 전 세계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인식하고 있는 바울이(11:13; 15:16) 이방인이 다수인 로마교회의 믿음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져 칭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바울이 계획하고 있는 스페인 선교는 물론, 바울이 여러 지역에 세운 이방인 교회들의 신분을 위해서도 청신호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바울은 아시아와 동 유럽 지역을 선교하는 동안 여행자들로 부터나 자신의 선교 동역자가 된 브리스길라나 아굴라 같은 로마교회 출신자들로부터, 로마교회의 모범적인 근황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②기도(9-10절)
바울은 그가 아직 로마를 방문하여 그곳에 있는 크리스천들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더라도 끊임없이 그들을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로마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도록 규칙적으로 기도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이 확실함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우는 일종의 명세적 표현인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신다”(고후 1:23; 갈 1:20)를 사용한다. 따라서 그동안 예배 시간과 기도 시간에 로마교회 성도들을 위해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로마교회를 방문하고 싶어 했다는 바울의 표현을, 단순히 로마 교회로부터 호감을 얻기 위한 의례적인 인사말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실질적으로 당시 세계의 중심지에 자리를 잡고 있는 로마 교회를 방문하고 싶어 했고, 그의 최종적인 선교 비전인 스페인 선교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생사가 걸려 있는 예루살렘 방문과 관련하여, 마치 그의 초기 선교 사역에 있어서 안디옥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로마교회로부터 다방면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참고 15:14-32). 동시에 우리는 바울의 기도가 막연한 기대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라는 표현에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믿음의 기도였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가 실패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③바울의 로마교회 방문 목적과 이유(11-15)
바울은 로마교회 방문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이유와 목표를 밝힌다. 바울은 방문의 주된 목적을 “신령한 은사”를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제공하여 줌으로써 그들을 영적으로 보다 성숙하게 하려는데 있음을 밝힌다. 이미 로마 교회는 복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간다고 말하지 않고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바울 스스로 로마교회가 불완전한 복음을 받았거나 미성숙한 자라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기 때문에- 신령한 은사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영적 성장을 도와주고 싶다고 말한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신령한 은사”(cavrisma pneumatikovn)는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여기 신령한 은사가 성령의 은사들과 전혀 무관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겠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신령한 은사”가 바울이 로마서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는 그의 복음적 메시지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바울이 5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도직”을 분리시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신령한 은사”는 바울이 다메섹으로부터 받은 그의 복음, 그의 이방 선교를 낳았던 동일한 복음을 지칭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바울이 15:19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가 복음을 전할 때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이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복음만이 성령의 능력을 동반하여 로마교회의 영적 성장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갈라디아서 3:5절의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복음을)듣고 믿음에서냐?”와 데살로니가전서 1:5절의 “이는 우리의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바울은 곧 이어 12절에서 이것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상호보완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즉 바울은 일방적으로 수여자, 로마 교회 성도들은 수혜자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 동등한 수여자, 수혜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 교회 성도들은 이미 바울이 전하고 있었던 동일한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이미 그리스도에 관한 그들의 믿음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겸손하게 서로의 믿음을 함께 나눔으로서, 서로 배우고, 서로 권면하고, 서로 격려하여 함께 보다 성숙한 자리에 이르기를 소망한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목회자, 선교사, 복음 전파자의 자세를 발견한다. 목회자, 선교사, 복음 전파자가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는 “나는 주는 자,” “너희는 받는 자”라는 일방적인 수여자의 교만한 자세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나 피선교자 들로부터 서로 도움을 주고 배운다는 겸손한 자세이다.152)
바울은 계속해서 그의 로마 방문 계획이 순간적인 착안이 아니라, 그동안 3차에 걸친 그의 선교 여행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임을 밝힌다. 바울은 오래전부터 전 세계 선교 비전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땅 끝으로 알려져 있었던 스페인 선교를 그의 마지막 선교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롬 15:23). 왜냐하면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때 그의 평생의 숙원인 유대민족의 회복과 그리스도의 재림이 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는 당시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들의 협조가 필수적임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그동안 여러 차례 로마를 방문하고자 원했으나 그러한 기회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지중해 연안 지역의 선교 사역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시고, 바울에게 로마에게로의 이동(移動)을 허락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153) 그런데 그동안 사역했던 지중해 연안 지역의 선교가 어느 정도 결실을 거두었기 때문에, 바울은 이제 하나님께서 새로운 선교의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로마 방문의 기회를 허락해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다(롬 15:22-32).154) 이처럼 바울은,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기도처럼, 매사에 자신의 뜻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한다.
14-15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왜 로마를 방문하려고 하며, 그곳에 가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를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밝힌다. 그는 당시 유대인을 제외한 전 인류, 곧 모든 이방인을 지칭하는 통칭어인 “헬라인과 야만인,” “지혜 있는 자와 어리석은 자”를 사용하여, 자신이 모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 빚을 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방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음을 밝힌다.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제국의 수도이며, 정치, 경제, 문화의 세계적 중심이 된 로마의 화려함과 웅장함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관광을 목적으로 로마를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1:16절의 자서전적 고백에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통해 복음의 계시와 함께 이방인들에게 그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도직을 받았다(참조 행 9:15; 26:17).
여기 “복음의 빚을 졌다”는 말은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 의무를 지녔다는 말이다. 로마의 교인들에게 직접 빚을 얻었기 때문이라기보다도 그리스도에게 갚아야 할 빚을 졌기 때문이다.155) 사실 바울은 바로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 15:10)라고 고백한 것처럼 늘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복음 전파에 전 생애를 바쳤다.
우리는 여기에 나타나 있는 “헬라인과 야만인”이라는 표현으로부터 적어도 로마서를 쓸 무렵 바울이 로마서의 주된 독자를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바울이 11:13절에서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라는 표현에서도 확인된다. 우리는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한다는 바울의 말로부터,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아직 복음을 받지 않았거나, 혹은 미숙한 복음을 받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말과 거의 동격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참조 고전 1:17/1:23; 고전 15:1,11/5:12; 고후 4:3/4:4), 설교와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로마의 성도들은 물론,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보다 성숙한 믿음과 순종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한 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설교되고 가르쳐져야한다.
3. 주제: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6)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7).”
본문개관
1:16-17절은 로마서 전체의 중심 주제 구절로 알려지고 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로마에 전파하려는 복음에 대한 생각, 복음의 능력,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이유, 복음과 믿음과의 관계와 복음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 주제 구절은 두 부분(16절, 17절)으로 나누어진다. 16절에서 바울은 먼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밝힌다. 이방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 사람들 앞에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오히려 복음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바울이 복음, 곧 온 세상을 향해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신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와 온 세상의 왕이며 구원자임을 선포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유는 실제로 복음이 선포될 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복음은 단순히 메시지의 전달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종(人種)과 신분(身分)과 성(性)의 경계선을 넘어, 죄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는 전 인류와 전 피조 세계를 구원하고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능력이 실제로 나타나는 언어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당시 전 세계의 주(主)로 선포되고 있는 로마 황제 가이사가 있는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담대하게 가이사가 아닌 나사렛 예수가 진정한 주임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156)
17절에서 바울은 복음이 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 없이 믿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가를 설명한다. 바울의 답변의 핵심은 복음 안에는 인간에게 구원과 심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의가 종말론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주해
①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복음(16절)
로마서의 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 1:16-17절은 서언(1:1-15)과 문제의 진술(1:18-3:20) 사이에 있으면서 하나의 전환점을 형성한다. 동시에 16-17절은 3:21-31절에서 제시되는 로마서의 핵심적인 메시지, 곧 그의 논제(論題)의 예비 진술 역할을 한다. 로마서 1:16-17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점은 바울의 논증의 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이다. 15절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자하는 열의를 천명하였다. 그리고 16절 상반 절에서 바울은 헬라어 “갈”(ga;r)이라는 이유 접속사를 사용하여, 그 열의를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실과 연결시킨다. 강조형 부정은 한편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할 때, 바울이 그가 전파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상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는 바울 당대 사회에서 복음이 부끄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당시 가장 참혹한 사형 제도인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신 나사렛 예수를 유대인이 기다리는 종말론적 왕과 구원자를 지칭하는“그리스도”(메시야)와, 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온 세계의 주권자를 지칭하는 “주”(가이사)로 전파하는 매우 역설적이고, 엄청난 용기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18절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道), 곧 복음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역시 고린도전서 1:23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복음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16절 하반 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근거를, 역시 이유 접속사 “갈”(ga;r)을 사용하여, 복음이 믿는 모든 자들에게, 곧 인종의 장벽을 뛰어넘어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임을 밝힌다. 미래의 마지막 재판장에서만 나타날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서 실제로 나타나서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157)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르는 이유는, 인류역사상 그 누구도 감히 해결할 수 없었던 죄와 죽음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해결하고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이 죄와 죽음의 세력의 지배를 받아 창조주 하나님과의 원수가 되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의 대상되어 있던 자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에서 건져내어 창조주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로 옮기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던 크고 무거운 바위를 다이나마이터가 산산이 부셔버리는 것처럼, 복음은 지금까지 사람을 노예화시켰던 엄청난 죄와 죽음의 세력을 산산이 부셔버리고 무장 해제시키기 때문이다. 이 복음의 능력은 사람이나 자연으로부터 오는 능력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처럼 복음은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하나님의 분노, 저주와 심판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 복음이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이 복음이 가져다주는 구원을 받게 되는 자들은, 어디까지나 지금 여기서 복음을 믿는 자들임을 밝힌다. 즉, 복음 그 자체가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지만, 이 능력은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나타나지 않고 오직 믿는 자들에게 역사한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복음을 믿는 자들은 미래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미 죄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새로워지는 구원의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을 통하여 지금 여기서 죄와 사탄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주권 아래로 이전되는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골 1:13). 이처럼 믿음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인간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로 들어가게 한다. 바울이 여기서 복음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복음의 기원과 출처가, 시편 기자의 “나의 구원의 능력이신 하나님”(시 140:7)의 고백처럼,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1:1).
바울은 “능력”(duvnami")이란 말을 때로는 복음의 말씀과 일치시키기도 하고(고전 2:4-5; 4:19,20; 살전 1:5) 때로는 성령과 일치시키기도 한다(롬 15:13,19; 고전 2:1-5; 고후 4:7; 롬 8:11; 고전 6:14). 복음이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능력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기 때문이다. 즉 복음과 더불어 삼위 하나님께서 인간과 피조세계를 만나고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을 가리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은 복음이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 복음을 믿지 않으면 그 복음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바울은 “믿는 모든 사람들”(참조 롬 3:22; 4:11; 10:4,11)이란 말을 첨가한다. 복음은 그것을 듣고 믿는 자들 안에서 역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선교 현장이나 목회현장에서 복음을 통해서 전파되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그를 주라고 고백할 때, 비로소 그는 죄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어 구원에 이르게 된다(롬 10:8-15). 이처럼 주권의 전이(轉移)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일어난다.
지난 19세기의 종교사학파 학자들과 최근의 새 관점 바울연구가들은, 로마서에서 바울의 주된 관심은 한 개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는가하는 것이 아니고, 이방인들이 어떻게 유대인들과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느냐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여기 “믿는 모든 자들”은 결코 한 개인이 개별적으로 믿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개인은 집단과 민족의 일원이지만, 동시에 개인 없는 집단과 민족은 있을 수 없다. 한 사람은 집단과 민족의 죄와 동떨어질 수 없지만, 동시에 그는 개인적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그러므로 그는 개인적으로 믿음을 통한 구원을 필요로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케제만(Käsemann)의 지적은 정당하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라는 문구는 바울은 결코 개인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종교사학파의 해석(Wrede, Paul, 113f., 132)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보편과 가장 극단적인 개인은 똑같은 동전의 이면과 저면이다.”158)
복음에 대한 믿음은 궁극적으로 복음 안에서 복음과 더불어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이며,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이 결코 인간의 자발적인 결단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지만 그를 개인적으로 믿지 아니하면 영생을 누릴 수 없다(요 3:16).159) 바울은 계속해서 믿는 모든 자들을 유대인과 헬라인(이방인)과 연결시킴으로써 구원을 얻는 길에 있어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160) 차별이 없다는 것은 복음만이, 곧 복음을 통해 제시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갈 만이 전 인류의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이 여기서 “첫째는 유대인”에게라는 말을 사용하여 구원 역사에 있어서 유대인의 우선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행 14:46), 동시에 이방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에 도달하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161)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통한 구원의 길을, 이방인들에게는 믿음을 통한 구원의 길을 각각 따로 주신 것이 아니라,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전도의 필요성이 배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별 없이 전 인류를 대상으로 주신 유일한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밖에는 없다는 것이다(참조 요 14:6; 행 4:12).
여기서 또한 우리가 조심해야할 것은, 믿음이 복음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도, 우리는 믿음을 복음으로 부터 분리시켜서는 아니 된다는 점이다. 믿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이 우리에게 선포될 때, 그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인 응답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어떻게 보면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포되는 복음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회복시킨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참된 자유의 표현이다.162) 믿음은 복음을 듣는 자가 복음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자신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고, 모든 신뢰를 하나님께 둠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역사하는 방(공간)이나 통로가 마련되는 것이다. 우리가 궁극적인 면에서 볼 때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선물로 보아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믿음을 아무리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복음에 대한 인간의 신실한 응답을 아무리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구원 문제에 있어서 1퍼센트도 인간의 힘이 보태어진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구원은 100퍼센트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다. 그럼으로 구원문제에 있어서 바울이 로마서 3:27절의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 없느니라”의 선언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인간의 공헌이나 공로를 자랑할 수 없다. 바울은 에베소서 2:8-9절에서 이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바울은 구원을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연관시킴으로써 복음을 통한 구원이 구약에서부터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까지 약속되어졌던 종말론적인 구원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예를 들면 이사야 선지자는 이 종말론적 구원에 관하여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라고 예언하였다.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서 자연히 제기되는 질문은, 복음이 무엇 때문에, 무슨 근거에서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 종말론적인 구원을 가져다주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바로 17절에 나타나는 세 번째 이유 접속사 “갈”(ga;r)과 함께 제시된다.
②하나님의 의(17절)
바울은 복음이 유대인이나 이방인 구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이유를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기까지 나타났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다음 복음 안에 나타난 이 하나님의 의를 하박국 2:4절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과 일치시킨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의 사역, 말하자면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원 사건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서 ‘하나님의 의’(dikaiosuvnh Qeou)가 나타났다라고 보아야한다.
그렇다면 복음 안에 지금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의’(롬 3:5,21,22,25,26)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문법적으로는 ‘하나님’과 ‘의’와의 속격 관계를 주격 속격으로 볼 수도 있고, 목적 속격으로 볼 수도 있고, 그리고 설명 속격으로 볼 수도 있다. 주격 속격의 경우 이 의(義)가 그 기원과 내용을 하나님에게 두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으며, 목적 속격의 경우는 이 ‘의’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설명적 속격의 경우는 이 ‘의’가 하나님 자신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어느 경우가 가장 적절한가?
‘하나님의 의’는 우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하나님에게 속한 것임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본문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는 우선적으로 주격적인 의미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성경에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은 은혜로운 분인 동시에 또한 공의로우신 분이다. 그는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죄와 불의를 미워하시고 의와 선을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하시는 이유는 그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죄인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그분이 공의로우신 분이며, 불의를 미워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한편으로 죄를 지은 인간을 용서하기 위해서, 또 다른 한편으로 죄인인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자에게 심판을 내리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사랑과 은혜의 약속도 지켜져야 하지만, 동시에 그의 공의의 약속도 지켜져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한 약속과 법, 곧 언약을 어긴 자를 심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의는 들어나지 않는다. 즉 언약을 지키면 의가 들어나지만, 반면에 언약을 어기면 불의가 나타난다.
로마서 3:25-26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한편으로 십자가 이전의 사람(구약의 성도)들이 지은 죄를 그때그때 심판하지 않고, 보류해 두었던 것을 이제 대신 심판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들어낸 사건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 지금 예수 믿는 죄인(신약의 성도들)을 의롭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의를 들어내는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인격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 ‘의’는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그의 언약이 성취되는 그의 신실함의 표현이기도 하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의 절정이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자신의 아들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 백성의 끝없는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언약을 파기시키지 않고 끝까지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임을 들어내셨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의 의와 공의의 의가 나타난 현장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한편으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세상]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외아들을 우리 대신 십자가의 죽음에 까지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의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의 심판이 엄중하다는 사실을 체험을 한다(참조, 요 3:15; 롬 5:8).
그렇다면 복음 안에서 나타나는 이 ‘의’를 정적(靜的)으로 이해할 것인가, 동적(動的)으로 이해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이 ‘의’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의로운 상태, 말하자면 우리가 그 분 앞에서 의로운 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지게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를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하신 우리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십자가에서 구현된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의 복음을 믿는 우리를 의로운 신분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의 구현, 곧 그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구원 행위를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주석가는, 로마서 10:3절, 빌 3:9절, 고전 1:30, 고후 5:21절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우리의 의로운 상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간주되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163) 이 경우 의는 구약 이사야 54:17절의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니라”와 빌립보서 3:9절의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경우처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로서의 의이며, 우리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의’를 소유하게 된다.
반면에 다른 주석가는 ‘하나님의 의’를 인간의 의로운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은, 이 ‘의’를 그 수여자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켜 인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고 하면서, 이 ‘의’를 하나님 자신의 언약적 신실성인 종말론적인 창조적 능력과 행위로 보려고 한다.164) 하지만 ‘의’를 단순히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만 보려고 하는 견해는 ‘하나님의’라는 말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 반면에 ‘의’를 지나치게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위나 능력으로만 보려고 하는 견해는 ‘의’가 인간의 책임적인 응답을 강조하는 ‘믿음으로부터’라는 말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의’는 역동적인 의로서 양면을 동시에 다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근거를 두고 있는 ‘칭의’ 속에 이미 성령의 사역을 동반하는 성화가, 성령의 사역이 나타나는 성화 속에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가져오는 ‘칭의’가 함께 들어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나눌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성령을 나눌 수 없는 것처럼, 칭의와 성화는 서로 분리시킬 수 없다.
17절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의를 이미 그가 16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말하고 있는 복음과 직접 연결시키고 있는 점은, 하나님의 의를 정적인 의미를 뜻하는 하나님의 선물로만 보는 것이 어렵게 만든다. 17절에서 또한 그가 오직 믿음으로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기 까지”라는 말을 첨부하고,165) 바로 이어 하박국 2:4절을 인용하여 여전히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동적인 의미로만 보는 것을 어렵게 한다. 바울은 3:21절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의 표현으로서의 의가 율법 외에 나타났다고 선언한 다음, 바로 3:22절에서 이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이신칭의’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의’를 정적으로 보나 동적으로 보나 하나님의 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통해서 나타나고 주어지는 것이다.
③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바울이 인용한 하박국 2:4절을 통하여 바울은 “의인은 그 자신의 신실성 때문에 살리라”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MT 성경 본문도, “나의 의인은 나의(하나님의) 신실성 때문에 살리라”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70인역 본문도 따르지 않는다. 바울은 자신의 주장을 보다 강력하게 나타내기 위하여 종종 구약의 본문을 임의로 바꾸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그가 히브리어 본문에 있는 3인칭 대명사나 70인역의 1인칭 대명사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점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의 종말론적이고 그리스도론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인칭대명사를 생략하고 있는 것 같다. 바울이 이처럼 자신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구약의 본문을 임의로 바꾼다고 해서 우리도 성경의 본문을 임의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성령의 특별한 영감을 받은 성경 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분명하게 들어나도록 하기 뤼해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자유와 권한을 받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의 할 일은 이미 성경의 영감으로 주어진 성경 본문을 가감 없이 그대로 보존하고, 그 본래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여 바르게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이다.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믿음으로’(ejk pivstew")를 주어인 명사 ‘의인’(O; divkaio")에 연결시킬 것인가, 아니면 동사 ‘살리라’(zhvsetai)에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주석가는 ‘믿음으로’라는 말을 동사보다도 명사에 연결시켜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자하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이 살리라, 즉 이신득의(以信得義)에 강조점이 있다고 보지만,166) 바울이 ‘믿음으로부터’라는 말을 명사뿐만 아니라, 동사까지 같이 연결시켜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매우 크다.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또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의’가 새로운 신분과 새로운 삶을 함께 함축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구원의 의미를 가졌다고 본다면, 그리고 바울이 종종 믿음과 순종을 통합시켜 “믿음의 순종”을 말하고 있는 점을 볼 때 ‘믿음으로 부터’가 양자와 다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167) 나무와 그 열매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의인됨(칭의)과 그의 거룩한 삶(성화)은 결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사실상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또한 믿음으로 산다. 그것이 앞서 말한 ‘믿음의 순종’이 뜻하는 의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