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권과 의리
( 혁명동지를 치느냐? 마느냐? )
개경으로 돌아온 태종 이방원은 한양천도 집행기관 이궁수보도감을 이궁조성도감으로 개편했다.
한양으로 가긴 가되 경복궁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며 법궁으로 삼았던 경복궁에는 핏빛 그림자가 있었다. 동생 방번과 방석의 살려 달라는 외마디 소리와 왕좌(王座)에서 내려오던 태조 이성계의 뜨거운 눈물에 대한 기억이 아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경복궁 동쪽에 새로운 궁궐 후보지를 확정하고 공사에 착수했다. 공사를 빨리 마무리하기 위하여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장정 3천명을 징발하여 투입했다.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의 원성을 무마하기 위하여 '몇 월 며칠까지 동원 한다'라는 단서를 달아 차출했다. 오늘날의 창덕궁이다.
한양으로 환도하기 전 개경에서 있었던 일은 털고 가리라 마음먹은 태종 이방원은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와 완산군(完山君) 이천우를 비밀리에 궁으로 불렀다.
"신사년에 조영무가 나에게 찾아와 이거이가 나를 도모하자고 하더라는 말을 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조영무에게 일절 입 밖에 누설하지 말라 엄명한 것이 4년이다. 이거이도 늙었고 조영무도 곧 늙을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먼저 세상을 떠나면 이 말은 변별(辨別)하기가 어렵다. 이 일을 어떻게 처결하면 좋겠느냐?"
"이거이와 조영무를 대질시켜 진위를 가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거이는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운 혁명 동지다. 또한, 그의 아들 이백강은 사위다. 간단치 않은 문제가 얽혀 있는 것이다. 사안의 중대성으로 보아 비공개 처리는 파장이 클 것이라 생각한 태종 이방원은 모든 것을 오픈하기로 했다.
이거이와 조영무를 대질시켜 진위를 가리는 자리에 종친 이화와 상락부원군 김사형 등 35인이 예궐하여 이거이의 말을 듣도록 하고 삼부(三府)의 수장과 대간(臺諫)이 배석하도록 했다. 대궐에서 때 아닌 청문회가 열린 것이다.
혁명동지 이거이를 면대하기가 곤란한 태종 이방원은 지신사 박석명을 대리인으로 내보내고 참석하지 않았다. 박석명이 이거이에게 물었다.
"주상 전하를 도모하자고 한 말이 사실인가?“
"두 아들이 부마(駙馬)가 되었고 신(臣)이 정승이 되었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이러한 말을 하였겠습니까?"
이거이의 맏아들 이저는 태조 이성계의 맏딸 경신공주에게 장가들었으며 둘째 아들 이백강은 태종 이방원의 맏딸 정순공주에게 장가들었다. 그러니까 겹사돈 관계다.
"주상전하를 도모하자는 이거이의 말을 언제 어디서 들었는가?"
조영무를 지목하며 박석명이 물었다.
"신사년에 신(臣)이 이거이의 집에 갔더니 이거이가 말하기를 '우리들의 부귀함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보존할 계책을 마련해야 한다. 주상(主上)이 임금이 되면 반드시 우리들을 싫어하여 제거할 것이니 상왕(上王)을 섬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정종 임금이 태종 이방원에게 선위하기 전 용상에 있을 때를 이르는 말이다. 조영무를 노려보던 이거이가 말했다.
"어찌하여 나를 해치려고 하는가?“
"그대가 있고 없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이익 되고 손해가 되겠는가? 함께 공신이 되어 군신의 분수가 붕우(朋友)의 사귐보다 무겁기 때문에 그대의 말을 주상에게 고(告)한 것이다."
이거이가 더 이상 결백을 주장하지 못했다. 흑백은 가려졌다. 하륜이 대질결과를 임금에게 보고해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석한 대사헌 유양과 사간(司諫) 조휴가 상언(上言)하였다.
"이거이와 그 아들 이저는 특별히 성은을 입어 지위가 극품(極品)에 이르러 마땅히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여야 하나 도리어 두 마음을 품고 조영무에게 감히 불궤(不軌)한 말을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하루아침에 나온 마음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거이와 이저를 국문(鞫問)하여 그 죄를 밝게 바로잡아 만세토록 난신의 경계를 삼도록 하소서."
보고를 받은 태종 이방원은 이거이에게 고향 진주(鎭州)에 내려가 근신하도록 명했다. 이에 반발하여 대간(臺諫)이 들고 일어났다.
"이거이는 마땅히 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만세의 법은 비록 임금이라 하더라도 폐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공신을 보전하고자 하여 이미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에게 맹세하였다. 이거이 부자는 일찍이 큰 공이 있었으므로 죄를 물을 수 없다."
이거이는 정사공신이고 조영무는 개국공신과 정사공신이다.
태종 이방원이 즉위 한 후 정사공신들을 모아놓고 삽혈동맹(歃血同盟) 맹세식을 가졌던 일을 상기시킨 것이다.
삽혈동맹은 살아있는 노루를 잡아 서로 피를 나누어 마시며 변치 말자고 굳게 맹약하는 의식이다. 이거이와 이방원은 눈에 흙이 들어가는 날까지 변치 말자고 굳게 맹세했던 군신관계다.
"한 때의 공으로 만세의 법을 폐할 수는 없습니다. 어찌 이거이 한 사람을 아끼고 자손 만세의 계책을 위하지는 않습니까? 반드시 한(漢) 고조처럼 사사로운 정을 없앤 뒤라야 왕업의 보전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이거이는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가슴 속에 쌓여서 말 가운데 나타난 것이며 또 그 아들 이저도 또한 광망한 자이니 아울러 법대로 처치할 것을 청합니다.“
"내가 이거이를 보전하고자 하는 마음은 이미 정해졌다. 경이 비록 죄를 가(加)하고자 하더라도 들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경이 물러가지 않는다면 내가 문을 닫겠다."
"전하께서 비록 이거이를 유배하고자 하더라도 신 등이 이거이를 구속하고 보내지 아니하여 '법이 죄인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조영무에게 흉측한 말을 한 이거이가 어찌 그 아들 이저에게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저도 또한 법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륜이 이거이 부자를 유배 보내자는 절충안을 가지고 대전으로 들어간 사이 유양이 분개하여 박석명에게 따지고 들었다.
"신은 주상 앞에 직접 계달할 수 없지만 좌정승도 또한 공신이니 어찌 주상에게 다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어찌 말하지 않겠습니까? 주상이 말씀하기를 '다시 들어오지 말라'고 하였고 또 이미 문을 닫았습니다."
밤은 깊었다. 태종 이방원의 의중을 전한 박석명이 유양을 불렀다.
"주상 전하께서 아침 일찍 나와 정사를 살피느라 심히 피로합니다. 다음날을 기다려 끝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정(滿庭)한 공신이 난적을 토죄(討罪)하기를 청하지 아니하면 신자(臣子)의 도리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유양이 고함을 질렀으나 메아리만 울릴 뿐 태종 이방원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밤이 어두워지자 유양이 물러났다.
이튿날 태종 이방원은 태상전으로 태조 이성계를 찾았다.
"너의 고뇌를 이해한다. 하지만 회안이 쫓겨나고 익안군이 죽고 상왕이 출입하지 않으니 친척 가운데 살아 있는 자가 몇 사람이냐? 일이 이루어질 때에는 돕는 자가 많지만 일이 낭패할 때에는 돕는 자가 적다. 죽을 위기에 돕는 자는 친척 밖에 없다. 이 일은 큰 것인데 장차 큰 근심이 있을까 두렵다."
태종 이방원과 맞서다 회안대군 이방간이 귀양 떠나고 익안대군 이방의는 세상을 하직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있는 이방과는 서로 오가지도 않아 넌 외로우니 마음을 크게 써라는 얘기다.
가슴을 파고드는 아버지의 말을 듣던 태종 이방원은 눈물을 흘리며 태상전을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