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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어머니
5장 심정문화는 영원한 천국의 표상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한국의 꽃, 리틀엔젤스
"내가 지금 듣는 이 노래는 노래가 아닙니다! 메마른 영혼에 단비를 내려 주는 고고한 합창이예요."
누군가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면 옆사람도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내가 듣기에는 천사들이 들려주는 하늘의 목소리예요."
리틀엔젤스의 노래를 처음 들으면 누구나 충격을 받습니다. 그 충격은 심정에 전해지는 사랑과 화합의 아름다운 파도입니다. 우리 통일문화의 특색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효정을 근간으로 하는 심정문화' 입니다. '효정(孝情)'은 하늘부모님을 향한 우리의 정성과 사랑입니다. '심정(心情)'은 사랑의 근본 뿌리이자 사랑이 용솟음치는 샘물과 같습니다. 심정문화야말로 시공을 뛰어넘어 영원한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는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세계는 티 없이 맑은 심정문화가 물처럼 바람처럼 흘러 넘치는 예술문화의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이와 같지 않고는 누구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새근새근 잠자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평화 그 자체이고, 천진무구한 미소는 행복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 줍니다. 어린아이의 목소리는 가냘프지만 마음의 빗장을 풀게 하고, 낯선 사람들을 화합시키며, 행복과 평화의 심정을 구김없이 나타냅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순수한 노래의 힘을 믿습니다.
지금이야 전 세계적으로 리틀엔젤스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처음 리틀엔젤스를 만들었을때 노래와 춤의 힘을 믿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너무 궁핍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에게 "노래 부르자"고 청하면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1960년대에 우리가 꼭 그랬습니다. 하루하루가 궁핍해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그 곤궁의 시대에 내가 문화나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들어 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도리질을 쳤습니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문화는 사치 아닙니까? "
문화는 사치가 아닙니다. 우리 민족은 5천 년 전부터 문화를 가꾸고 삶 속에서 누려 온 예술의 민족입니다. 한민족의 문화는 독특함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음에도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그 자리를 잠시 잃어버렸습니다. 가난한 한국인이 미개한 민족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한국인은 고유 글자가 없어 중국이나 일본 글자를 사용한다고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 잘못된 인식에 나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또한 한국전쟁 중에 이곳 저곳 피란을 다니면서 예술가들이 가난으로 인해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습을 적지 않게 보았습니다. 나 역시 학창시절에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도 마음 한편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국은 '미개한 민족' '문화가 없는 민족'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리틀엔젤스는 그 결실 중에 하나였습니다. 가난과 정치 혼란이 온 나라를 휩쓸던 1962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대한어린이무용단'으로 한국 무용과 합창을 하는 리틀엔젤스예술단을 만들려 하자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돈 걱정이 첫 번째였고, 혹여 돈이 생기면 교회를 먼저 지어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였으며, 합창단을 만들려면 어른 합창단이 더 좋지 않느냐는 것이 세 번째였습니다. 못할 이유야 세 가지가 아니라 열가지도 넘었겠지만 우리 부부의 뜻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어렵사리 예술단을 만들기는 했어도 연습할 곳이 없어 삼청동의 허물어진 창고를 하나 겨우 빌렸습니다. 얼기설기 수리해서 연습실을 만들었는데 비가 내리면 물이 줄줄 샜습니다. 겨울에는 연탄난로조차 따뜻하게 피우지 못해 아이들이 손을 호호 불어 가며 연습을 했습니다. 통일교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비웃느라 바빴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아니라 꼭 물에 빠진 천사같아!"
그러나 포기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곱다. 마음이 고와야 노래가 곱다. 마음이 고와야 얼굴이 곱다" 라는 리틀엔젤스의 신념을 가슴에 새기고 3년 동안 땀과 눈물로 얼룩진 맹훈련을 거듭했습니다. 훈련이 끝나자 '태극기를 세계로'라는 웅대한 구호와 함께 1965년 가을 첫 공연길에 올랐습니다. 링컨의 연설로 유명한 미국 게티즈버그에서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을 위한 특별공연을 시작으로 한국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 위대한 행진이 드디어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국을 방문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격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이 땅에 내려온 것 같아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그 시절, 미국에서의 대중공연은 크나큰 모험이었습니다. 자국에서 인정받는 가수나 공연단도 대도시에서 공연을 했다 하면 모진 비판을 받았고, 아예 처음부터 외면 당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노래는 순수 그 자체이며, 그 순수함이 사람들을 한마음으로 화합시키고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리틀엔젤스는 게티즈버그에서 첫 공연을 했을 때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습니다. 미국 곳곳을 다니며 <고향의 봄>과 <아리랑>을 부르면 처음에는 '뭔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지만 잠시 후에는 눈을 감고 감상을 하며 드디어는 감동의 눈물을 흘립니다. 어여쁜 한복을 입고 신랑각시춤을 추면 다들 어깨춤을 따라 하면서 흥겨운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하얀 버선발이 하늘로 뻗으면 서양인의 눈에는 낯설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춤 하나가 끝나면 버선의 곡선이 한국이 지닌 우아한 곡선미라는 것을 저절로 깨달았습니다.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우리의 전통과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세계를 순회하면서 공연 하나를 마칠 때마다 '한국은 아름다운 전통과 문화를 지닌 민족'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세계인들의 마음속에 새겨 주었습니다.
마음과 마음을 이어 주는 어린 천사들의 합창
어느 날 초청장 한 장이 도착했습니다. 발신지는 영국이었습니다. 1970년대 초에 평범한 사람들은 영국에 가기가 극히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영국 왕실에서 리틀엔젤스를 초청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국뿐 아니라 동양에서 처음 있는 감격스러운 초청이었습니다.
부랴부랴 짐을 꾸려 비행기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영국으로 갔습니다. 1971년 엘리자베스 여왕 앞에서 펼쳐진 어전공연은 오로지 대한민국 아이들의 잔치였습니다. 귀우면서도 역동적이고 화려한 공연으로 여러 차례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다음 날 신문과 방송에 크게 보도되어, 한국은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문화와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나라'로 영국인들의 마음속에 새롭게 자리 잡았습니다.
리틀엔젤스의 노래가 울려 퍼진 곳은 80여 나라가 넘습니다. 5대양 6대주를 순회하며 7천 번 가까이 공연을 펼쳤고, TV에는 800번 넘게 출연했습니다. 그동안 만난 대통령과 총리는 100여 명에 달합니다. 미국 독립 200주년 공연, 일본 10대 도시 공연, 한중수교 10주년 공연, 남미 순회공연 등 세계 곳곳에서의 공연은 늘 찬사와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1990년 봄 소련 모스크바 공연은 공산주의자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주었으며, 1998년 5월의 평양 공연은 남북한 화해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리틀엔젤스의 가장 뜻깊은 공연 중 하나는 '한국전쟁 참전국 순회공연'이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2010년부터 생존해 있는 16개 나라의 참전용사들에게 리틀엔젤스를 보내 위문공연을 하도록 했습니다. 리틀엔젤스는 3년 동안 6개 의료지원국을 포함한 22개 나라를 순회하며 참전용사를 기리는 '보은공연'을 펼쳤습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이제는 갚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한국을 기억하고 있었고, 한국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60년이 흘렀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보은공연이냐며 의미를 퇴색시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국가나 정부가 아닌 단지 민간 사절단이라는 이유로 더욱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참전용사들은 빛바랜 군복에 무공훈장을 달고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참석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더불어 한국을 도운 에티오피아의 용사들은 사는 처지가 불우했습니다.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참전용사들을 전부 아디스아바바 변두리의 산꼭대기에 있는 한국전 참전 용사촌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그곳은 사실상 수용소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참전용사가족들은 공산정권의 핍박을 받아 가난과 기아에 허덕였습니다. 훈장을 1달러에 팔아 생계를 유지한 아픈 사연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어린 천사들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옛날 헐벗고 가난했던 분단국가가 이제는 당당히 선진국이 되어 은혜를 잊지 않고 찾아온 것에 대해 눈물겹도록 고마워했습니다. 리틀엔젤스 공연을 계기로 참전용사들에 대한 대우가 달라진 것은 뜻하지 않은 성과 중 하나였습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함께한 워싱턴 행사에서 리틀엔젤스가 <아리랑>과 <갓 블레스 아메리카 (God Bless America )> 를 부르자 80대 노병들의 눈에서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덴마크 코펜하겐 공연에서는 베네딕트 공주가 옛 용사 300여 명과 함께 관람했습니다.
2016년 네팔에서 열린 세계평화국회의원연합 대회에서도 리틀엔젤스는 빛을 발했습니다. 카트만두 공항에서부터 네팔 국민들의 뜨거운 환대를 받았습니다. 어린 천사들을 맞이하기 위해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모였습니다. 대통령궁을 비롯하여 공연장에서 펼친 리틀엔젤스의 멋진 공연의 감격해 네팔 국민들은 칭송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리틀엔젤스는 신의 소명을 다하는 대신자이며, 세계적으로 평화를 확산시키는 천사들입니다."
한 명의 어린아이는 평범한 아이로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모여 순수한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면 하늘의 합창이 됩니다. 그 노랫소리가 어른들의 이기심을 녹이고, 전쟁과 갈등을 사라지게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정치가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문화이고 예술입니다. 사람들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울리는 것은 이성이 아닌 감성입니다. 받아들이는 마음이 바뀌면 사상이 변하고 제도가 바뀝니다.
반세기 전에 리틀엔젤스가 부른 노래는 이제 세계인을 열광시키는 케이팝 (K-Pop)과 한류로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지구촌 어디를 가든 한국 문화에 대한 박수갈채가 쏟아집니다. 그 감동의 첫 출발은 1965년 리틀엔젤스의 게티즈버그 공연이었습니다. 난 그날의 청아한 노랫소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술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진리를 순수한 아이들의 춤과 노래로 분열된 어른들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예천미지, 천상의 예술로 세상을 아름답게
"발레리나가 발끝으로 꼿꼿이 서서 머리를 하늘로 치켜들면 그 자세만으로도 완벽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 됩니다. 그렇게 간절해 보일 수 없습니다. 발레는 하늘부모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최고의 예술입니다. "
1984년 리틀엔젤스예술학교 (현 선화예중고)의 재능 있는 졸업생들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와 영국 로열발레학교 등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그 젊은 영재들의 교육을 뒷받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뛰어난 재능을 무대 위에서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전문 발레단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리틀엔젤스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모나코 왕립발레학교를 마치고 워싱턴발레단에서 수석으로 활동하고 있던 문훈숙을 주축으로 유니버셜발레단 (Universal Ballet Company)을 꾸렸습니다. 초대 예술감독으로 애드리언 델라스 (Adrienne Dellas)를 발탁했습니다.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드디어 1984년 여름, 발레 <신데렐라 >가 창단공연으로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에 올려졌습니다.
그 시절 한국 발레는 국립발레단만이 경쟁 상대도 없이 국내 활동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 발레계의 변방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유니버셜발레단의 창단은 훗날 한국 발레를 세계로 도약시키는 출발점이었으며, 변방에서 중심으로 진출하는 교두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언 35년을 줄기차게 이어 왔습니다.
첫 공연 <신데델라>를 필두로 2000년대 초반까지는 주로 러시아의 클래식 발레를 계승하다가 그 후로는 유럽의 드라마 발레와 현대 발레까지 폭을 넓혔습니다. 그동안 21개 나라를 순회하며 1,800여 회의 공연을 통해 100여 편의 작품을 선보이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발레단으로 성장했습니다.
유니버셜발레단은 '예천미지(藝天美地), 천상의 예술로 세상을 아름답게'라는 꿈을 안고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공연으로 독창적인 색깔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존 크랑코의 걸작 <오네긴>을 동양 발레단으로서는 두 번째, 한국 발레단으로서는 최초로 공연해 유럽의 드라마 발레를 성공적으로 소개했습니다. 또 영국 로열발레단의 명작인 케네스 맥밀런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한국 발레단으로서는 최초로 공연해 한국 발레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한국 고유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 창작 발레도 여럿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1986년 탄생한 <심청>입니다. 10여 나라에서 200여 회 넘게 공연되어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 작품으로, 특히 2012년에는 발레의 본고장 모스크바와 파리에 초청되어 한국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습니다. 고대소설을 발레화한 <춘향>과 어린이용으로 새롭게 개작한 <발레뮤지컬 심청>도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비롯해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의 문화 수준이 그리 높지 않던 시절에 유니버셜발레단은 고독한 한 마리의 학이었습니다.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 내면서 아시아뿐 아니라 북미, 유럽, 중동, 아프리카 등을 돌며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수준 높은 예술성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 발걸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쉬지 않고 이어질 것입니다.
언론은 시대의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신문에 실리는 단어들은 좋은 뜻을 지닌 것보다는 나쁜 것을 지닌 것들이 더 많습니다. '박해'와 '탄압'도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부정적 단어 중 하나입니다. 과거의 비해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려 가고 살림살이가 나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내몰림을 당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1970년대에는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힘없는 사람들이 살아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특히나 1975년은 세계적으로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근심 걱정을 쏟아냈습니다.
"아무래도 월남이 곧 공산화될 것 같아요."
"일본은 공산당이 버젓이 활동하는 나라인데 좌익이 더 기승을 부리겠네요."
자유국가들의 합심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의 공산화가 옥죄어 오고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태어난 나는 공산주의의 잔인함과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체험했기에 공산 치하에 들어가면 피비린내 나는 대학살이 벌어질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이웃 나라에 공산주의가 창궐해 도미노처럼 차례로 무너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미 공산당이 합법화 되어 있는 일본에서 공산주의가 득세하면 아시아는 물론 세계가 도탄에 빠질 위험이 컸습니다.
1970년대에는 일본 통일교회 식구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는데 좌익 또한 기승을 부리는 살얼음판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재일 동포들도 민단과 조총련으로 갈려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서로를 미워했습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일본을 공산주의로부터 지키기 위해 새로운 신문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세카이닛포>는 1975년 1월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으며 도쿄에서 창간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신문을 지탱해 나가는 일은 어두운 밤에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좌익단체들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고 소송이 끊이지 않았으며 폭력을 휘두르는 일도 자주 발생했습니다. 그럴수록 <세카이닛포>는 대다수 선량한 시민들과 반공단체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아 일본 국민들에게 절대적으로 사랑받는 신문이 되었습니다. 초창기 어려운 시절부터 지금까지 <세카이닛포>는 두려움 없이 진실만을 보도해 왔습니다. 그 힘이 일본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 냈습니다.
세계 역사를 움직인 또 하나의 신문은 미국에서 창간된 <워싱턴타임스>입니다. 1981년 초, 누군가 우리 부부에게 "글쎄 <워싱턴스타>가 문을 닫는다고 하네요" 하며 폐간 소식을 일러 주었습니다.
그 소식은 누구에게라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두 개의 신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워싱턴스타>였고 또 하나는 <워싱턴포스트>였습니다. 그런데 130여 년을 이어 온 <워싱턴스타>가 재정난을 이기지 못해 폐간을 결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워싱턴에는 신앙과 자유, 가정의 소중함을 지켜나가는 새로운 신문이 있어야 했습니다. <워싱턴스타>를 인수해 새 신문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반대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미국의 수도에서 새 신문을 창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구구절절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가 해온 일 중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1982년 5월 17일, 갖은 어려움을 이겨 내고 <워싱턴타임스>는 역사에 길이 남을 창간호를 찍어 냈습니다. 우리를 시기하는 사람들은 <워싱턴타임즈>가 통일교회 선전도구가 될 것이라고 떠들어 댔으나, 결코 그런 의도로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워싱턴타임스>의 사훈을 '자유, 믿음, 가정 그리고 봉사'로 정했습니다. 훗날 이 사훈을 통일가의 모든 기관과 기업이 지향하는 '애천, 애인, 애국'으로 바꿨습니다.
그러나 신문 경영은 무척 어려워 매년 적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갔습니다. 만일 <워싱턴타임스>가 없어지면 미국 수도에서 발행하는 보수의 유일한 승공신문이 사라지고, 가정과 사랑의 소중함을 설파하는 신문 역시 사라진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과연 얼마 만에 문을 닫을 것인지' 웃음 섞인 시선으로 지켜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비웃음이 커질수록 나의 신념과 기자들의 열정도 높아 갔습니다. 민주주의와 진정한 보수를 지켜 나가면서도 가정과 도덕, 여성의 가치를 내세웠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뉴욕타임스>와 함께 미국의 양대 신문이 되었습니다.
창간 25주년 기념식에는 세계 유명인들의 축하 메세지가 넘쳐났습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워싱턴타임스>는 나와 함께 20세기의 제일 중요한 10년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한 결과 냉전을 종식시켰습니다"라고 말해, <워싱턴타임스>가 공산주의를 이기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세계인들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도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워싱턴타임스>가 창설되었을 때 그 일은 매우 어려웠고, 지금도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워싱턴타임스>가 살아 있고 번영하는 한 보수주의의 가치는 결코 쇠퇴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감사 인사를 보냈습니다.
<워싱턴타임스>는 권력을 휘두르는 신문이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하며 그들이 하루하루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신문입니다. 모진 풍파를 이겨 내고 언론의 참된 위상을 세운 <워싱턴타임스>는 이제 전 세계인의 소중한 신문이 되었습니다.
정의에는 눈물이 많고 불의에는 용서가 없는
"분명 이 자리가 맞을텐데······?"
"역사 자료를 보면 여기 이 건물이 재판소여야 하는데······재판소는 없고, 웬 병원이 들어와 있네."
"그러면 재판소는 어디로 갔지?"
1990년대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때 <세계일보>특파원이 중국 다롄과 단둥 일대를 취재하러 갔습니다. 그는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대련법정'을 찾았으나 법정은 없어지고 개인병원 간판이 내걸린 것을 보았습니다. 중국 정부가 역사적인 건물을 이미 개인에게 팔아 치운 것입니다.
특파원이 전해 준 소식을 듣고 우리 부부는 우울해졌습니다. 조국광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헌신한 독립영웅들의 발자취가 소리없이 사라지는 것은 한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값이 얼마든 그 건물을 다시 사들이도록 하세요."
현대사의 민족적 수난을 품은 대련법정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신유산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공간이 외국의 개인 소유물로 전락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건물 주인과의 협상을 거쳐 세계일보사가 대련법정이 있던 건물을 사들였습니다.
곧 전문가들을 초빙해 철저히 고증한 후에 안중근 의사가 형을 언도받던 그때의 모습으로 똑같이 재현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국민성금을 모아 1993년 세계일보사를 통해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을 창립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위대함을 널리 알리고 더불어 동양평화를 이룩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중국과 한국의 청소년들이 다롄을 방문하면 꼭 찾아야 하는 평화의 유적지가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동북아는 이웃 나라 간의 복잡미묘한 관계가 얽혀 있는 곳입니다.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켜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렇다 한들 팔짱만 끼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세계일보>는 지난 시대의 아픔을 객관적으로 보여 주고 한민족의 끈기있는 국난극복의 역사와 평화의 중요성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대련법정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했습니다.
일본과 미국, 남미, 중동에서 창간한 신문들이 큰 사랑을 받고 있었음에도 정작 한국에서는 이런저런 제약으로 신문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1989년에야 언론 자유화가 이루어져 <세계일보>를 창간할 수 있었습니다. 통일교회가 만든다는 이유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는데, 역시나 반대가 빗발쳤습니다. 미국과 일본에서 신문을 만들 때 쏟아졌던 비난이 한국에선들 비껴갈 리 없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터무니없는 억측이 넘쳐났습니다.
"통일교회를 선전하는 기관지가 될 것이다."
"편향적인 종교 기사가 판을 칠 것이다."
심지어 "1년도 지나지 않아 폐간될 것이다"라고 헐뜯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언론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한결같았습니다. "언론은 곧 진리의 대변자이며 양심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안고 1989년 2월 1일 창간호 120만 부를 발행하면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 믿음은 30년이 지날 때까지 한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집권 정당의 비리를 보도했다는 이유로 건실한 통일교회 기업이 세무사찰을 당하는가 하면, 아예 회사를 파산시키는 보복도 뒤따랐습니다. 1970년대에 산탄공기총으로 시작해 대공포인 발칸포를 생산했던 통일산업과 농기계 전문 생산 기업인 동양농기계 등 많은 회사들이 표적 세무사찰로 끝내는 문을 닫았습니다.
편집 책임자를 해외로 내보내라는 요구도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어떤 방해공작이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사회정의나 도덕성 회복을 위해 깃발을 드높였습니다. 결국은 "<세계일보>가 옳았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세계일보>는 격동의 시대에 고고의 일성을 울리며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너른 들판에 홀로 선 소나무처럼 외롭기 그지없었지만, 정의에는 눈물이 많고 불의에는 용서가 없는 신문이 되었습니다. 정치 이념을 뛰어넘고, 특정한 종파를 위해 붓을 들지 않으며, 국민과 국가, 세계를 위해 피와 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하기에 <세계일보>는 영실공히 세계인을 위한 세계의 신문입니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나는 지갑이라는 것을 제대로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돈의 필요성을 알지 못했고, 조금 자라서는 남북분단의 소용돌이 속에서 목숨을 보전하는 일이 급해 빈손으로 고향을 떠나오느라 돈이 없었습니다. 또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신앙이 우선이었기에 돈과 동떨어진 삶을 이어 갔습니다. 성혼 후 교회 헌금은 전부 교회와 세상을 위해 쓰였기 때문에 역시나 지갑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습니다. 60년이 흐른 지금도 남들 앞에 내놓을 변변한 지갑이 없습니다.
간혹 값비싼 지갑을 보면 궁금해집니다.
"저 속으로 들어간 돈은 얼마나 머물까? 무엇을 위해 사용될까?"
돈이 지갑속에 머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느 곳으로, 누구를 위해, 어떻게 흘러가느냐입니다. 그 돈의 행로가 그 사람의 인생을 말해 줍니다.
성경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만물을 주관하라"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따라 우리는 만물을 주관하고 번성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통일교회의 경제활동은 한국전쟁 시기에 부산 범일동 토담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미군을 대상으로 초상화를 그려 주는 일이었습니다. 서울로 올라와서는 우표를 수집해서 팔고, 브로마이드 흑백사진을 컬러로 바꿔 거리에서 판매하는 사업으로 돈을 모아 선교에 사용했습니다. 본격적인 경제활동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은 1960년대 적산가옥에서 시작한 통일산업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우리나라가 다양한 상품을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기계산업을 일으킨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처음 통일산업을 시작할 때 쓰레기통에 틀어박힌 일제 선반기계 하나를 당시 가격 72전에 사다가 창고에 들여놓은 것이 첫 출발이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공장을 만들겠다고 하늘 앞에 기도하고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점차 발전해 예화산탄공기총공장에서 M1총과 같은 공기총을 만들고 국내 최초로 발간포를 생산하는 등 굴지의 방위산업체로 성장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계회사가 되어 나라를 살리기 위해 최고의 기술을 갖추고 나아가 세계 여러 나라에 기술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한 일화를 세워 인삼제품을 세계로 수출한 것은, 한국의 인삼을 널리 알리고 세계인이 건강한 삶을 누릴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후 다양한 분야를 선구자의 정신으로 개척해, 1970년대를 거쳐 오늘의 이르기까지 60여 년 동안 우리나라와 세계 경제발전의 한 축을 맡아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돈 버는 일에 그치지 않고 모든 나라가 골고루 기술을 갖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경제 평준화를 실천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그 모든 것의 토대에는 '위하는 삶'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보살피며 살아가야 합니다. 부자가 부자 된 것에 대해 고마워할 줄 모르고 돈을 더 모으는 데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나라와 민족에게 큰 고마움을 느끼며 남을 도와주는 부자가 더 큰 부자가 됩니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차별 없이 그 선물을 골고루 누려야 합니다. 한 개인이 물질을 다 차지하려 들고, 한 나라가 과학기술과 돈을 독점해서 다른 나라를 종속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납니다. 가장 먼저 스스로 노력해 기술을 개발하되, 부자가 된 다음에는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기술을 가르쳐 그 사람도 잘살게 해줘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경제 평준화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비싼 지갑 속의 빳빳한 지폐가 아닙니다. 그 지폐를 누구를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고민하고 올바르게 쓸 때 진정한 자랑이 됩니다.
과학은 인류의 꿈을 이뤄 주는 디딤돌
"과학기술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 하나님이 만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간혹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지만 과학은 인간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기술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만물을 주관하라고 주신 축복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연을 사랑하고 인류에게 쓰임새 있게 활용해야 합니다.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이 과학기술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과학기술은 세계 이곳 저곳에서 제각각의 역할만 수행해 왔습니다. 도서관의 한 권의 논문으로만 묻혀 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흩어져 있는 과학기술을 하나로 통일시키기로 했습니다. 과학기술의 통일을 이뤄 과학자들이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오랜 시간 고민했습니다. 국제과학통일회의는 그 고민 끝에 탄생했습니다.
우여곡절의 산고를 거쳐 1972년 첫 번째 대회가 열린 이후 내로라 하는 세계 석학들이 지속적으로 참여해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현대 과학의 도덕적 방향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미국 뉴욕에서 제1차 대회가 열렸을 때, 우리 부부는 창설자로서 과학이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강조했습니다.
"과학은 인류의 꿈을 실현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과학 문명은 본질적으로 인류 전체의 것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 대회는 1973년 일본 도쿄에서 '현대과학과 도덕 가치'를 주제로 열렸습니다. 첫 대회는 7개 나라에서 온 20명에 불과했지만 2차대회에는 18개 나라에서 60여 명이 참석해 1년 만에 세계적인 대회가 되었습니다, 특히 노벨상 수상자 5명이 참석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우리 부부가 1970년대 초 미국에 갔을 때 미국의 교회 1년 예산이 2만 6천 달러였습니다. 지금은 언론, 교육, 사회봉사 등에 수백만 달러를 쓰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과학기술에 대한 후원입니다. 국제과학통일회의가 출발할 때 몇몇 과학자들은 우리 부부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명한 학자들을 초빙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교수님, 이번 과학자대회에 참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정중히 요청하면, 돌아오는 답은 엉뚱했습니다.
"그 대회의 창설자가 문선명 목사 부부라고 하던데, 나는 그들에게 반대합니다."
하지만 그 학자는 몇 년 후 대회에 참석해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과학자대회의 진정한 뜻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국제과학통일회의는 26차 대회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특히 10년째를 맞아 1981년 서울에서 열린 대회에는 100여 나라에서 808명의 학자가 참석해 세계 최고의 대회가 되었습니다. 그 대회에서 우리는 일찍이 역사에 한 번도 없었던 '기술 평준화'를 내세웠습니다. 과학기술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류 공동의 자산이므로 몇몇 나라가 독점에서 다른 나라를 지배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 부부가 과학기술 평준화에 관심을 갖고 후원한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와 남미,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에 기술을 나눠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선진국의 과학기술을 개발도상국에 나눠 줘 과학기술의 평준화를 이루고자 함이었습니다. 식량이 부족한 아프리카에 소시지공장을 세우고 생산 기계를 무료로 제공했으며, 농사짓는 법과 가축 기르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남미에서는 소를 수천 마리 길렀습니다. 그런데 소들이 배출하는 배설물 때문에 공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각했습니다. 소만 기른 게 아니라 자연을 더욱 푸르게 하기 위해 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또한 하와이 코나에 커피농장을 일궜습니다. 커피 열매를 수확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벌레 때문에 큰 피해도 보았습니다. 커피는 알맹이를 볶아서 만드는 데, 농약을 뿌린 것을 쓰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농약을 뿌리지 않고 벌레를 퇴치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 이제 세계에서 가장 좋은 커피를 생산합니다.
중국과 북한에 자동차공장에 건설하는 프로젝트도 추진했고, 독일에서 자동차 라인 생산의 기간산업과 보링공장 등을 인수하기도 했습니다. 농부들이 일일이 손으로 모를 심는 모습이 안타까워 농기계공장을 인수해서 대량으로 농기계를 보급했습니다. 또한 수준 높은 항공기술과 우주공학기술을 갖추기 위해 한국타임즈 항공도 추진했습니다.
국제과학통일회의는 여러 난제로 2000년 22차 대회 이후 중단되었는데, 전 세계 과학자와 엔지니어, 발명가, 학자들이 크게 안타까워했습니다. 역사 이래 그토록 중요하고 의미 있는 대회를 연 사람은 우리 부부밖에 없었기에 세계 곳곳에서 대회를 다시 개최해 달라는 호소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랜 공백을 깨고 2017년에 다시 대회를 열었습니다. 특히 2018년에 열린 24번째 대회는 수백 명이 참석해 새로운 과학의 길을 탐구하는 값진 재회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나는 과학자들에게 "종교와 과학을 비롯한 세계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주의 근본 되시는 하나님과 참부모를 바로 알아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와 이념, 종교를 뛰어넘어 전 세계의 과학자와 엔지니어, 발명가들이 모여 우리 눈앞에 놓인 과학기술을 점검하고 더 나은 방법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 수고로움이 인류의 미래에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