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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9장 12-22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로마서 13장에서 모든 권세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난다고 말씀하는 것처럼 빌라도를 유대 총독으로 세우신 분은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알려진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예정과 그분의 영원한 작정에 대하여 불신자들은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당연히 이러한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늘 인간의 자유의지가 강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십니다.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시기로 빌라도 앞에까지 왔습니다. 심문 과정에서 빌라도는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너는 어디로부터 왔느냐?”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두려워했던 마음은 어디에 갔는지 자신의 권세, 권한에 대하여 말합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요19:10) 분명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이 크다는 것이고, 그만큼 권세를 부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틀렸다고만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이것을 조금 더 확대하여 해석하면 결국 인간은 늘 자신의 자유의지를 높이고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빌라도의 말에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참인지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요19:11) 즉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바가 없다면 빌라도가 죽일 수 있는 권세와 권한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고 죽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에게 어떤 권세가 있고, 그 권세 아래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그 권한 안에서는 얼마든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자유의지의 논리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손을 흔들면 흔듭니다. 두 다리로 걸으면 걸어집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당장에라도 지금 하고 있는 것을 할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주지 아니하신다면 권세를 가질 수도 없고, 또 어떤 권한을 실행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면 인생의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을 빠뜨리고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위에서 주셔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작정하신 그 일이 시간 속에서 실행되고 있는 일이라는 겁니다. 작정하지 않았는데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작정하실 때 작정하시는 것에 대한 목적을 분명히 가지고 계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을 빠뜨리지 않아야 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가 우리의 목적이 되어 살아가야 함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내용입니다. 먼저 12절을 보시면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계속해서 살펴오고 있지만 빌라도는 강도 바나바와 비교해서라도, 또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죄인 취급해서 채찍질하고 모욕을 줘서라도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줬기 때문입니다. 재판관으로서 공의를 시행해야 하지만, 그의 마음은 공의보다는 야심이 더 컸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말을 묵살할 수 없었던 겁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만 하더라도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지만, 유대인들의 반대하는 소리로 인하여 그렇게 하지 못한 것으로 기록합니다. 특히 저들이 크게 외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놓아주는 것은 로마의 충신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왕이라고 하는 자를 놓아줄 수 있느냐? 자신을 왕이라고 하는 것은 가이사에게 반역하는 것이 아니냐? 그런 자를 놓아준다는 것은 결코 가이사의 충신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에 더더욱 놓아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놓아주려고 했지만 결국 자신의 의지가 꺾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공의의 원칙이 앞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야심이 앞섰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이런 빌라도에게 죄가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11절에서 예수님께서 밝히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빌라도에게 넘겨 준 자들의 죄는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죄가 없는 사실로 여러 번이나 놓아주려고 힘썼지만 그런 그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죄 없다고 말하는 빌라도의 말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없는 죄명도 붙여 반드시 죽이도록 부추긴 사람들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마치 로마에 대항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런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말할 만큼 구별하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은 자신을 정치적 메시아로 소개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 나라와 관련해서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지금 저들은 마치 정치적으로 뭔가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십자가 처형까지 행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죄가 더 크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죄악 가운데서도, 또한 유대인들의 더 큰 죄악 속에서도,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들의 죄조차 사용하여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자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선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지만, 그리스도를 대표로 둔 택자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런 모욕을 당하고 계신 겁니다. 그나마 빌라도가 예수님을 편들고 있지만 그것까지 거절하시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 죽음을, 그러나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 길을 걸어가고자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이기 때문에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향기나는 제물’이요, ‘희생제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엡5:2).
계속해서 13절을 보시면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입니다. 칼빈은 이 구절에서 재밌는 표현을 쓰는데, 빌라도는 마치 1인 2역을 맡은 배우처럼 우왕좌왕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즉 예수 그리스도를 놓으면 충신이 아니라 가이사의 반역자일 뿐이라는 말을 듣고 어떻게 해야 할지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에 있는 재판석에 앉게 되는데, 그 장소의 히브리 명칭이 ‘가바다’입니다. 당시 통용되고 있던 아람어인데, ‘높은’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지금까지는 우왕좌왕,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가 없었지만, 유대인들은 죄인 취급하기를 원했고 죄인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위 양심상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이사의 충신이냐, 아니냐는 문제 앞에서 더 이상 1인 2역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로 판단하고 재판석, 높은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14절을 보시면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이 부분은 다른 복음서와 조금 비교해서 볼 필요가 있는데, 공관복음서는 제 육시부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있는 동안 어둠이 깔려 있었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27장 45절에 보면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그리고 이어지는 46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러면서 죽으십니다. 그러니까 제 육시 때는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셨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좀 더 정확하게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막15:2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시간 제 삼시는 우리 시간으로 9시 정도가 되는 시간이고, 제 육시는 12시 정도가 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한복음은 제 육시인데도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매튜 풀 주석을 참고하면 우리말 성경은 제 육시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은 ‘육시 쯤’ 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보통 유대인들은 낮을 네 부분으로 구분한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구간은 해 뜰 때부터 제3시라 불리는 아침 9시까지이고, 두 번째 구간은 제3시부터 제6시까지, 세 번째 구간은 제6시부터 제9시, 네 번째 구간은 제9시부터 해질 때인 제12시, 즉 저녁 6시까지에 해당하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해당하는 시간 안에 있을 때 해당하는 시간의 처음을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 계산으로 하자면 예수님께서 제 삼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면 오전 9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9시부터 12시 사이 어느 시간에 못 박히셨다는 것이 됩니다. 요한복음의 경우 제 육시쯤이라고 할 때 정오를 넘기지 않은 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이 제 삼시, 즉 오전 9시부터 12시 사이, 그러나 요한복음의 내용을 염두 해 두자면 12시가 가까운 시간이 되었을 때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서와 다르다고 판단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요한복음은 제 육시 쯤 되었다고 말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힐 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유월절의 준비일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때 빌라도가 ‘가바다’ 즉 높은 재판석에 앉아 유대인들에게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여기에 대해 유대인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15절을 보시면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왕을 구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저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구합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삼상8:7).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습니다. 모든 만왕의 왕이시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런 분으로 계시겠지만, 예수님께서 오실 때만큼은 유대인들을 위해 오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11)라고 증거 한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마15:24)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14절에서 빌라도가 “...보라 너희의 왕이로다”고 할 때 이런 내용들이 반영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왕을 구한 것처럼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부인합니다. 그래서 소리를 지릅니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여기에 대해 빌라도가 다시금 묻습니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이때 대제사장들이 대답합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즉 대제사장들은, 그리고 유대인들은 말로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뿐, 사실은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는 자들이 아님을 그들 스스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배격함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모든 복을 걷어차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저들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격하는 것이 하나님을 배격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모른다고 해서 변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심을 그의 말씀으로, 그의 능력으로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구약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을 요구할 때 왕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는가? 왕 되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이 없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이 왕을 요구할 때 사무엘은 늙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사사로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자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왕을 요구하는 원인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세상을 따라 왕을 요구한 것은 무엇이냐? 단순히 사무엘의 아들이 사무엘과 같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들의 진정한 왕으로 있기 원하지 않아서란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숨은 죄악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 죄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에 때로는 다른 대상을 이유로 핑계를 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명확하게 아십니다. 사무엘의 아들이 사무엘과 같이 않아서 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들의 왕으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아서 왕을 새우고자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진정한 왕이라는 사실이 싫어서 그들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조차 자신들의 왕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어떤 식으로 강조하느냐? 로마의 속국으로 있는 자들이 로마의 왕을 실제 저들의 왕으로 모신 것처럼 하면서까지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본래는 로마 왕은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을 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일본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적국입니다. 그런 나라의 왕을 자신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매국노나 하는 짓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제사장들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만 아니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아니면 하나님 대신 다른 어떤 것도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더라도 아무 말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죄성은 사실 인간의 본성과도 연결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0-23) 하나님 자리에 사람 혹은 짐승 등을 올려놓는 것, 이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하나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 우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런 저들을 향하여 빌라도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게 되는 겁니다. 16절을 보시면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단순히 외적으로 보자면 유대인이 승리한 것입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된 것이기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는 더 기뻐할만한 일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9장 11절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저들의 요구대로 되었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더 큰 죄로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분노하므로 왕을 주셨을 뿐입니다(호13:11).
혹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응답 받으면 다 좋은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응답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노하므로 왕을 주신 것처럼 될 수 있다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기도가 주의 뜻에 합당한 기도라면 응답 자체가 분노하므로 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성령의 열매만을 맺는 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 자체가 죄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밖에 없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한 것처럼, 그것도 세상 왕을 보면서 요구한 것처럼, 세상을 보면서 세상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하나님을 우리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면, 요구한 것을 들어주시는 것이 우리에게는 해로운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기도를 통해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육체에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일용할’ 이상의 것을 구함으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의지하게 될 위험이 있다면 구해서 얻기보다는 구해도 얻지 못하는, 오히려 우리의 본성을 안다면 구하지 않는 것이 주 앞에는 더 합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해서 얻게 되고, 얻은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심을 부정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그런 응답이 어떻게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응답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응답 자체가 다 좋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분노하므로 주실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 기도 내용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는 무엇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양식을 구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너무 세상적으로만 구해서는 안 됩니다.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 말은 양식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라는 것입니다. 양식을 구하는데 그 양식이 주신 분보다 의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주신 것을 거두실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강압으로 인해 예수를 넘겨주었지만, 그리고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거기에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밀한 뜻이 있다는 것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은밀하기 때문에 밝혀지기 전까지는 모를 수 있습니다. 밝혀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지 않는 이상 그 유익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이 일을 통하여 자기 백성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시는 겁니다.
계속해서 17절과 18절을 보시면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결국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요구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방금도 말했지만 하나님은 바로 이 일을 통하여 자기 백성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시는데, 율법에 의하면 속죄를 위해 피를 흘리는 제물은 영문 밖으로 끌려 나가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로 선언되었습니다(신21:23). 이런 율법의 예언이 성취 되고 있는 겁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을 위하여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받게 됩니다. 우리의 죄악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속죄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 되신 것처럼 우리는 그분 안에서 의인된 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13장에서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13:12)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자기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속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달리 실제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십자가 형벌을 당하는 강도 두 사람에 대한 기록도 짧게나마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들을 조명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다른 복음서를 보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택자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택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는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나 지금 요한복음은 그런 내용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강도 두 사람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다는 사실이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강도 두 사람의 죄는 단순히 경범죄 정도가 아니라 중한 죄입니다. 당시 법으로는 사형에 해당할 만한 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죄가 일절 없으심에도 그들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 취급을 받으실 때 강도와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가장 악한 죄를 저지른 것처럼, 그들 중에서도 가장 악독한 자인 것처럼 한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이 가운데 매달리기도 하셨던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죄악의 심각함을 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가 없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우리의 죄가 마치 강도와 비교해서 더 나을 게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강도가 우리 양 옆에 있을 정도로 우리는 심각한 죄인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는데(딤전1:15), 우리에게 돌려도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리에 우리가 있어야 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옆에 두 강도가 달려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가운데 있는 우리는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 자리에 있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은혜와 긍휼은 너무나도 놀랍고 크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 놀랍고 큰 은혜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기도 하지만(고전1:23), 오직 부르심은 받은 자들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고전1:24). 그 결과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요,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로움이요, 그리스도가 우리의 거룩함이요,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함이 되시는 겁니다(고전1:30). 이것보다 놀랍고 큰 은혜와 긍휼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위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계신 겁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빌라도는 패를 써서 십자가에 붙이는데, 19절과 20절입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칼빈은 범인들을 처형할 경우 그들의 처형의 원인을 만 천하에 알려 본을 보여 주는 의미에서 패를 붙이는 것이 아마 당시 관례였던 것 같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죄목은 전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두 편의 강도처럼 ‘강도’ 이렇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기록하였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왜 빌라도는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까? 자신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죄가 없지만 결국 유대인들의 고집으로 말미암아 무고한 사람이 부당하게 처형되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라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 손에 들린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가 죄 없다는 사실만을 드러낼 뿐이었지만, 하나님은 빌라도가 쓴 것처럼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럼 단지 유대인의 왕으로만 오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기록되기는 유대인의 왕으로 기록되었지만, 그 기록이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기록함으로 그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길 원하셨습니다. 당연히 여기서 유대인의 왕은, 육적 유대인이 아니라 영적 유대인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이 되시길 원하시면서 이방인조차 아브라함의 자녀임을 나타내시는 것처럼, 단지 육적 유대인만을 의미하는 그런 뜻으로 나타나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빌라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낼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빌라도의 행동에 대해 대제사장들이 못마땅해 합니다. 그래서 요청합니다. 21절을 보시면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지금 대제사장들은 빌라도가 쓴 말이 자신들에게 수치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유대인의 왕인데, 유대인에 의해 죽는다면 그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꿔주길 요청한 것입니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는 겁니다. 그가 실제로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그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칭해서 죽는다는 것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이런 자세는 저들이 얼마나 진리의 작은 불빛조차 견딜 수 없어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에 보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하시지만, 깨닫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깨닫고자 하지 않으며, 철저히 빛에 대하여 조금도 용납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 지금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임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 교회 역사 속에 나타난 많은 진리의 빛은 이런 식으로 꺼져버렸습니다. 빛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빛은 늘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이 그 빛을 꺼버렸습니다. 그래서 소위 교회사에서 중세 암흑기 시대라는 1,000년의 역사가 있었던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세우기 전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을 때 성경은 그 시대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3:1) 오늘날 우리 표현으로 하자면 말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말씀답게 증거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어떠합니까? 조심스럽지만 사사기 시대와 방불한 것이 오늘 우리 시대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기준으로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준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합니다. 내 기준대로 성경을 이해하고, 내 기준에 맞춰 이것도 저것도 행할 뿐입니다. 진리의 빛은 이런 식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성경이 없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자세가 성경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자신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진리를 완전히 꺼지도록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 편에 있어야 할 자들이 하나님 편에 서서 진리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입을 통해서도 자신의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그것이 22절입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대제사장들의 요구에 대해 빌라도가 진리를 알아서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진리가 무엇이냐?” 물었습니다(요18:38). 그러나 하나님은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려고 했던 발람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축복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무엇을 못 하시겠습니까? 종교지도자들은 진리의 작은 빛조차 꺼버리려고 할 때 하나님은 빌라도라는 믿지도 않는 인물을 통해 그 말 그대로를 남겨 두게 하셨던 겁니다.
그러므로 지금 빌라도가 내가 쓸 것을 썼다고 말한 것은 단순히 자신의 의지의 결과라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빌라도의 마지막 양심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양심을 붙들어 진리의 빛을 비추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칼빈은 빌라도가 굽히지 않은 것은 신령하게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제사장들의 탄원에 굴복하거나 자신이 그들의 말에 따라 더럽혀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입으로 그의 아들의 나라의 확고성을 증거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 가운데 서 있는 주의 백성들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한낱 이방인조차 주의 진리를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다면 우리는 더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대인의 왕이요, 만왕의 왕이심을 드러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를 믿지 않고서는 결코 구원이 없음을 드러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나아가 그만이 우리의 지혜요, 그만이 우리의 의로움이요, 그만이 우리의 거룩함이란 것을 우리가 드러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고 할 때 우리가 세상의 어리석음을 따라 가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의 불의함을 따라 가면서, 우리가 세상의 죄악된 것들을 용납하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셨습니다(엡2:1). 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까? 에베소서 2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나의 나 됨이 주의 은혜라면 그 은혜가 헛되지 나타나지 않도록 우리는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데 선한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늘 진리를 따라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 우리의 왕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