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애 1870년대 후반 미국 서부에서 가장 악명 높은 빌리 더 키드는 뉴멕시코를 공포에 떨게 했던 10대 살인자다. 그의 범죄행각은 한 때 친구였던 보안관 패트 가렛의 총탄에 죽고 나서야 막을 내렸다. 이것이 21년을 살면서 21명을 죽였다는 그의 전설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는 상당히 다르다.
1849년 캘리포니아 금광 발굴에 따른 골드러시로 미국인들이 서부로 이동하던 시기였는데, 1861~65년에 걸친 남북전쟁으로 잠시 멈칫거렸으나 1869년에 대륙횡단철도 건설로 서부로의 골드러시가 가속화 되던 시기의 30여년간은 서부 지역에는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무법천지였다. 이 무렵에 빌리 더 키드(1859~1881)가 태어났는데 , 본명은 막카티(Henry McCarty)였고, 보니(William H. Bonney)라고도 불렸다. 광산촌의 거리 어디에나 술집이 널려있고, 술 취한 사람들이 모여 길거리에서 노름판을 벌여 놓고 싸움질하는 것이 거리의 풍경이었다. 이 싸움판에 12살의 빌리가 어머니와 함께 와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권총의 탄환이 어머니에게 잘못 맞아 어머니가 죽자, 빌리는 분노하여 허리의 칼을 뽑아 어머니를 쏜 사람에게 달려들어 그를 찌른 후 도망쳤다. 그리하여 빌리의 짧은 생애가 시작된다.
고아가된 매카티는 16세 때 음식을 훔치다가 잡혔고 열흘 후에는 중국인 세탁소에서 도둑질하다 잡혔으나, 뉴멕시코에서 이웃 아리조나로 도주하여 무법 연방도망자가 되었다. 1875년 9월 23일부터 “Wm. Wright”라는 이름으로 2건의 현상수배가 붙자 윌리엄 보니(William H. Bonney)라 개명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Billy the Kid’로 알려졌다. 1877년 언쟁 끝에 대장장이를 죽이고 아리조나에서 현상 수배되자, 뉴멕시코로 돌아와 영국 출신의 턴스탈(John Tunstal)의 호의로 그 해 겨울에 그의 목장과 링컨 카운티에 있는 상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878년에 링컨카운티에서 가게를 운영해오던 토박이 ‘머피와 돌란파’와 새로 들어온 ‘턴스탈(John Tunstal)파 간에 무장 충돌이 발생하여 이른바 ’링컨카운티 전쟁‘으로 까지 커졌다. 돌란파는 카운티 보안관 브래디(Brady)와 ‘The Boys’라는 갱단(1876~1880)이였고, ‘턴스탈파’는 맥스윈(Alexander McSween)과 목장주 치섬(John Chisum), 치안관 브류어(Brewe)와 목장 카우보이들이었다. 1878년 2월 18일에 보안관 브래디는 돌란의 사주로 치안대를 꾸려 상거래 문란으로 턴스탈을 체포하려하자, 영국사회의 법규만을 생각하여 ‘단순한 상거래상의 문제로 설마 죽이기야 하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체포당하여 치안대의 총에 맞아 죽었다.
무법자로 쫒겨 다니는 자기를 인간적으로 돌바 줬던 턴스탈의 죽음은 빌리 더 키드가 무법자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링컨카운티 주민들은 이 분명한 살인행위에 대해 무언가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며 턴스탈의 목장일꾼들과 함께 무장대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분명한 합법적인 조치였다. 이렇게 해서 링컨카운티 전투가 시작되었다. 싸움은 1878년 2월에서 7월까지 이어졌고, 그의 인생 부침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는 무리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무장대와 치안대 둘다 합법적인 집단이었으니 누가 누구를 체포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2개월 후 무장대는 턴스탈의 식당에서 브래디 보안관이 부관 4명을 다리고 나오자 뒷문에 매복하여 보안관과 부관 2명을 살해해 버렸다. 이로 인해 무장대는 ‘탄스탈 살해범 체포“라는 권한에서 한참 멀어져 버렸다. 그들의 합법적 지위는 사라지고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진다. 무장대는 마을의 어느 불타는 집에 포위되고 만다. 5일 동안의 치열한 전투에서 지휘자가 죽고 어린 키드가 지휘권을 얻게 되자, 그는 몇 명을 데리고 적을 화력을 분산시키는 사이 나머지는 그 자리에서 몸을 피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더 키드는 살아났지만 대부분의 동료들은 죽고 말았다. 살아남은 무장대는 이리저리 흩어지고, 더 키드는 도망자가 되었으나 1880년 보안관 팻 가럿에게 체포되고 만다. 전투가 끝나고 몇 개월 후 새 주지사가 부임하여, 전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사면한다고 발표했다. 더 키드는 월리스 주지사에게 ‘내 목에 1000달러가 걸려있지만 나를 사면해 주면 , 자기가 주지사에게 큰 쓸모가 있을 것’이라며 편지를 보내 거래한다. 거래가 성사되고, 더 키드는 머피와 돌란의 반대 증인으로 법정에 출두한다. 주지사 월러스가 뉴멕시코의 정치판을 잘 모르고 “더 키드를 기소하지 말라고 재판장에게 부탁‘ 하였으나 ’더 키드‘는 유죄선고를 받고 말았다(링컨카운티 전쟁 재판에서 유일한 유죄 판결).
빌리 더 키드는 1881년 4월 30일에 간수 2명을 죽이고 탈옥하였으나, 7월 14일에 링컨카운티에서 북쪽으로 200 km 떨어진 포트 삼나에서 보안관 팻 가렛에게 사살되어 그 곳에 매장되었다.
그가 죽은 이후 그에 대한 많은 전기가 출판되었고 영화나 음악에서도 소재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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