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백두대간 19차(늦은맥이재~죽령) 산 행 일 : 2013. 09. 14.(토) 산행코스 : 새밭 + 늦은맥이재 ~ 상월봉 ~ 국망봉 ~ 비로봉 ~ 제1연화봉 ~ 제2연화봉 ~ 죽령 (거리 14km + 5km) 산행참가 : 16명
※ 금번 산행부터 회비가 1만냥씩 인상되었다. 9년만에 오른 것이지만 더욱 알찬 산행이 되어서 오른 액수보다 더 큰 행복을 얻어 갔으면 좋겠다!
<산행코스>
금번 산행에 백두들의 참여가 많지 않은 것은, 추석을 앞두고 있어서라기 보다는, 궂은 날씨 탓인 듯하다. 오늘 산행을 시작하려는 새밭(을전)에서 늦은맥이재로 오르는 구간은, 여름철 강우 시 통제가 되는 구간으로, 계곡 물이 불어나면 무척 위험한 구간이라고 한다. 비 예보를 보고 어제 오후에 전화를 했더니, 통제 계획은 없다고 했었는데, 지금처럼 소낙성 강우가 잠시만 지속되면 계곡물은 금방 불어날 수도 있겠기에, 다소 걱정스러운 가운데 선잠에서 깨어나 산행준비를 한다.
창밖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는 와중에도, 백두들은 어김없이 산행 준비를 한다. 잠시 빗줄기가 가늘어진 틈을 타, 버스에서 내려 산행 가능성을 점검한다. 새밭탐방안내소 앞 주차장에는 우리 애마만이 엔진 소리를 내며 불이 켜져 있다. 이렇게 비가 오는 신새벽에 우리 백두 말고 어느 누가 또 산행에 나설 수 있을까 의문을 던져 본다. 새밭(乙田 을전)은 한드미 동쪽에 새로 조성된 마을이라는 뜻이라 하며, 여기서 한드미는 어의곡 2리의 중심 마을이다.
산행 준비를 마칠 무렵 퍼붓던 장대비는 조금 잦아들어 있다. 탐방안내소 앞에는 "우천시 산행금지"를 알리는 전광판이 번쩍이고 있어서 사뭇 걱정스러웠으나, 계곡물이 많으면 그냥 돌아오리라 생각하며 산행을 시작한다.
아직 물이 많이 불어나지는 않은 상태의 계곡을 건넌다. 이제 비는 거의 그친 상태이고 산행을 시작한지 한시간쯤 되어서 첫 쉼을 한다. 우장을 갖춘 상태로 오르막을 오르다 보니 겉은 비에 젓고 안은 땀에 젖어있다. 늦은맥이재 도착. <늦은맥이재(느직미기재)> 새밭에서 영주시(榮州市) 단산면(丹山面) 웃좌석으로 가는 재로, 경사가 느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백두들이 속속 도착한다. 이제는 비도 어느정도 잦아들어 우중산행에 대한 우려는 가신 분위기다. 가파른 오름길을 두시간여 동안 쳐올리느라, 산행 초반이 무척 힘들었던 듯! 조금 느긋한 쉼을 하며, 소백산 주능선 산행에 대한 기대감을 피워 올린다. 여느 때와 달리 일반 등산객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자욱한 안개에 잠겨있는 나무들이 사뭇 열대림의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다. 거의 20분 이상의 쉼을 뒤로하고 상월봉을 향한다. 상월봉 향하는 도중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서둘러 우장을 다시 꺼내어 입는다. 상월봉 갈림길. 왼쪽의 직진방향 오름길은 상월봉으로 오르는 길이고, 우측 사면길은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우횟길이다. 지도에도 엄연히 표시된 상월봉임에도, 소백산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설치한 이정표에는 그 어디에도 상월봉을 지명한 표지판이 없다. 아마도 우리 백두들도 이곳이 상월봉 갈림길인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간듯하다. 물론 비가 내리는 탓도 있기는 하겠지만... 우회길을 통과하여 상월봉 갈림길에서 바라본 국망봉. 갈림길 이정표. 돌아본 상월봉. <상월봉(上月峰, 1,394m)> 경북 영주시 순흥면과 충북 단양군 가곡면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소백산 봉우리 중에 세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상월봉은 부처님 얼굴처럼 생겼다 해서 상월불봉(上月佛峰)이라고도 부르는데, 지난 구간 하산 지점으로 소백산 북쪽 자락에 있는 천태종의 총본사인 구인사를 창건한 상월대종사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한다. 국망봉 오름길에 돌아본 상월봉 방향. 동쪽 영주 방향 조망. 돌아본 상월봉과 지난번 산행에서 걸었던 민봉 방향의 온달단맥 능선. 멋진 바위에서 영주 방향 운해를 즐기고 있는 영규 행님. 국망봉을 배경으로 인증 한장! (비가 잦아들었을 때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ㅋㅋ)
상월봉을 돌아보고.. 다시금 국망봉을 향한다. 국망봉 정상. <국망봉(國望峰, 1,420.8m)> 충북 단양군 가곡면과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걸쳐 있으며, 소백산에서 비로봉 다음으로 높은 고봉이며 남서쪽으로 연화봉, 북동쪽으로는 형제봉에 이어진다. 국망봉과 제2연화봉 주변 외진 곳에서 희귀식물인 '복주머니난'이 몸을 감추고 자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왕건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허사로 끝나자, 엄동설한에 베옷 한 벌만을 걸치고 망국의 한을 달래며 개골산(금강산의 겨울 이름)으로 들어갔다 한다. 개골산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 올라 멀리 옛 도읍 경주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 국망봉이라 부르게 됐다고 전한다. 또 다른 설은 조선 선조(宣祖) 때 무쇠장이(水鐵匠) 배순(裵純)이라는 사람이, 왕이 승하하자 3년 동안 이 봉우리에 올라와서 왕성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나라에서 그를 표창하고 무쇠점을 하사하여 배점(裵店)이라 한 것이 배점리라는 지명이 생긴 유래라고도 한다.
『여지도서』(영춘)에 의하면, "소백산은 이현의 동면 40리에 있으며, 강원도 강릉부 오대산에 이르고, 경상도 순흥과 접해 있으며, 국망봉이 소백의 최정상이다."라고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 국망봉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난다. 또한『해동지도』에는 영춘현 남쪽 남천의 상류에 소백산, 남천사(南川寺)와 함께 '국망산(國望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는 단양군의 가곡면과 영주군의 순흥면에 걸쳐 있는 국망봉(1,420m)으로 수록되어 있다.
백두들은 국망봉에 서린 예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서둘러 비로봉을 향하고, 나는 모처럼 시야가 트인 국망봉에서 주변을 사진기에 담는다. 그려! 그짝으로 쭈~욱 가면 쩌그가 바로 비로봉이여! 비로봉으로 이어진 대간 능선. 상월봉과 동쪽 영주 방향 파노라마. 상월봉~늦은맥이~신선봉~민봉. 상월봉 방향. 동쪽 영주 방향. 비로봉 방향.
소백산 국망봉의 삼각점. <소백산(小白山)> ‘한국의 알프스’라 불리는 소백산은 우리나라 12대 명산 중 하나로, 경북과 충북의 경계를 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총면적이 320.5㎢에 달하며, 1,000m를 넘는 고봉이 줄지어 있어 웅장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소백산의 봄은 철쭉꽃이 만개하여 5월말에서 6월초까지 온 산이 천상의 화원을 연상케 할 정도로 연분홍빛으로 물들인다. 겨울철에는 무릎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많은 지역이라 은백의 능선에 정신줄을 놓을 정도다. 또한 소백산은 거대한 산맥을 이루고 있어서 볼거리도 많은 지역이다. 주능선을 중심으로 동쪽인 영주시 방면에는 부석사를 비롯하여 소수서원, 비로사, 희방사 등이 있고, 서쪽과 북쪽에는 고수동굴, 노동굴, 천동굴과 구인사 그리고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대였던 온달성이 잡고 있다. 비로봉 정상에서 서북쪽 기슭에는 살아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천연기념물 제244호로 지정된 주목군락이 자리잡고 있다. 이중환의 “방사 남사고(南師古, 조선 명종 때 학자, 호;격암)가 소백산을 보고 말에서 내려서 절하며 말하기를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라고 말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대유학자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소백산을 오른 기록이 상세하게 전해오고 있다. 퇴계의 전임 풍기군수였던 신재 주세붕(周世鵬)도 소백산을 올랐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퇴계 이황은 순흥의 백운동서원(신재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 우리나라 최초로 세운 서원으로 뒤에 퇴계가 명종으로부터 백운동서원이란 액자를 받았다)을 출발하여, 지금의 배점리를 거쳐 죽계구곡을 따라 석륜사, 중백운암을 경유하여 국망봉에 올랐다. 국망봉 위에서 술 석잔을 마시고 시 일곱장을 쓰고 나서 해가 기울어 중백운암에서 묵고 다음날 하산하였다고 한다. 소백산 북릉인 신선봉(1,272m)에서 서북쪽으로 뻗어 내려간 능선이 부채살처럼 펼쳐지며 아홉개의 능선에 여덟 골짜기를 만들어 낸 곳을 '구봉팔문'이라 부른다. 제3관문봉과 제4관문봉 사이 골짜기인 여생이문안 아래쪽에 천태종의 본산인 구인사가 자리잡고 있다. 소백산의 산행 들머리는 일곱군데로 단양 방면에는 구인사코스, 어의곡리코스, 천동리코스가 있으며, 영주시 방면에는 죽령코스와 희방사코스, 비로사코스, 배점리코스가 있다. 자꾸 봐도 또 보고푼 백두대간! 서쪽 단양 방향. 오늘 걸어야 할 죽령 방향의 장쾌한 대간길을 가늠해 본다. <소백산 주능선> 전통지리에서 이 땅의 등뼈가 되는 대간을 정할 때, 마루금이 남쪽으로 계속 이어지는 길을 선택하느냐(지금의 태백시 북쪽 피재 부근에서 낙동정맥으로 연결되는 선), 아니면 지리산 쪽으로 방향을 틀게 하느냐를 두고 고민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지금의 대간 즉 지리산 쪽으로 방향을 틀도록 한 데에는, 속리산과 더불어 소백산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이 땅의 대간이 '山太極(산태극) 水太極(수태극)', '음양이론', '대간과 10대강의 발원지' 그리고 '산자분수령' 등의 철학과 원칙을 견지하며 아름답게 자리잡는 데에는 소백산이 크게 기여한 셈이다. 조금 당겨서 낮은 자세로 임한 높은 봉우리들의 이어짐을 본다! 국망봉을 뒤로하고 비로봉을 향한다, 가야 할 비로봉 방향 파노라마. 초암사 갈림길 도착. 초암사 갈림길 이정표. 영주 방향. 이짝으로 내려가면 초암사가 있다. 몇해 전 새해 첫 산행을 와서 얼어 죽는 줄 았았제...ㅋㅋ
돌아본 국망봉.
초암사 갈림길을 뒤로하고 비로봉을 향한다. 듬직한 소(牛)잔등 같은 육산에 바위가 이채롭다. 영주시 순흥면 방향으로 죽계구곡과 드문드문 인간세가 내려다 보인다. 상월봉~비로봉 동쪽은 충절의 고장으로 알려진 영주시 순흥면이다. 안향 선생의 후손으로 알려진 순흥 안씨 문중은, 1454년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수양대군과 한명회에게 몰살당하는 운명을 맞았다. 당시 단종은 인근 영월에,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은 이곳 순흥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순흥 안씨의 사대부들은 둘 사이를 오가며 거사를 준비했던 것이다. 소백산에서 흐르기 시작한 물줄기가 개울을 이루는 순흥 청다리 밑에서 하루 수십 명씩 사대부들의 목이 잘려나갔다고 한다. 피비린내 속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사람들도 오랜 세월 안씨 성을 버리고 숨어 살아야 했다. 핏물은 죽계천 물을 따라 흘러 20리 밖에서야 멈췄으니, 그 마을 이름이 ‘피끝’이다. 피끝마을 사람들은 논바닥에 우뚝 선 소나무 밑에 형 수양에게 죽임을 당한 동생 금성의 주검이 묻혀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순흥 안씨 문중은 음력 10월 초하루면 그때 그 자리에 모여 제를 올린단다. <죽계구곡> 소백산 동쪽 자락에 있는 죽계구곡은, 고려 후기의 명현이며, 문장가인 근재 안축의 ‘죽계별곡(竹溪別曲)’의 무대이며, 퇴계와 신재 등 유현들이 유상하던 자취들이 있어 비교적 알려진 계곡이다. 죽계란 순흥 읍내 동편쯤에서 소수서원, 배점을 거쳐 초암에 이르기까지의 대략 5리 정도의 계곡을 말하는데, 이 물은 국망봉 아래 석륜골에서 나오는 물과, 하가동에서 나오는 물이, 중봉 아래서 합류해 초암 부근에 이르러 죽계의 첫머리가 된다. 죽계구곡이 위치하는 순흥지방은 삼국시대부터 있어왔다. 조선시대에도 도호부로 유지됐다가, 금성대군의 난으로 인해 폐지된 뒤, 다시 숙종년간에 순흥부가 됐다. 현재는 영주시 순흥면으로 되어 있다. 죽계천(竹溪川)에서 죽계(竹溪)라는 지명유래는 지방의 향토지나, 시문에도 나오지는 않아 그 유래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대나무가 잘 자라지 못하는 환경인 이곳 지형에 유독 대나무 ‘죽(竹)’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이 보이는 것은, 그 연원을 따져보아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죽령(竹嶺)을 비롯해 대밑골, 죽계천이 있는 순흥 지방의 내죽리(內竹里), 죽동(竹洞) 등 대나무 죽자가 들어간 지명이 곳곳에 보인다. 죽령의 경우 그 개척자의 이름인 죽죽(竹竹)의 이름을 따서 죽령(竹嶺)이라 이름했다고 전해지는 유래가 여러 사서와 향토지에 나와 있어 그 연원을 알 수 있다. 고도를 조금 높이자 구름이 짙어지며 빗방울도 굵어진다. 비로봉을 향하는 백두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인생길을 가듯이~~ 인생에서 마지막이 그렇듯이! 비로봉도 그렇게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났다. <비로봉(毘盧峰 1,439m)> 충북 단양군 가곡면과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순흥면의 경계에 있는 소백산의 최정상에 있는 봉우리로, 비로봉은 부처를 의미하는 산이다. 비로(毘盧)란 범어의 '바이로차나(Vairocana)'의 음역이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준말이다. 본래의 뜻은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법계에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것으로 '부처의 진신(眞身)'을 의미하는 말이다. 비로자나불은 법(法)이 세상에 몸을 입어(身) 드러난 법신불(法身佛)로 '공(空)의 인격화된 존재'이다. 그러하기에 비로자나불은 우주의 만물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 존재로, 연화장 세계의 교주로 받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비로봉은 그 이름만으로도 부처의 산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산에는 비로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봉우리들이 많다. 주로 큰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들이 이 이름을 지니고 있다. 금강산 비로봉(1638m), 오대산 비로봉(1563m), 치악산 비로봉(1288m), 속리산 비로봉(1057m)과 소백산의 비로봉이다. 모두 부처의 산이다. 부처의 법을 드러내어 사방팔방으로 온 누리에 퍼지게 하는 산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름이 '비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백산 비로봉의 바람은 365일 24시간 부는 붙박이 바람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오래 있을 수 없음은 당연한데..
남은 자들 만으로나마 비로봉 정상 인증을 남긴다. (보통 남은 자가 승자다!) 정상석 뒷면에는 조선시대 대학자인 서거정(徐居正)이 남긴 '소백산'이란 시가 새겨져 있다.
"소백산" 小白山連太白山 (소백산연태백산) 소백산 태백산에 이어져 逶迤百里揷雲間 (위이백리삽운간) 구불구불 백리길 구름 사이 솟았네, 分明劃盡東南界 (분명획진동남계) 뚜렷이 동남의 경계를 그어 地設天成鬼破慳 (지설천성귀파간) 하늘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맑은 날에 왔으면 이런 경치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을 가득 안은채 하나둘 비로봉을 뒤로한다. 비로봉 정상의 삼각점. 비바람 거세니 머물 수가 없네..ㅉㅉ 나도 서둘러 비로봉을 뒤로한다. 비로봉 주목 감시초소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좁은 초소에는 미리 와 있던 등산객들이 있어서 앉아서 식사를 할만한 틈이 보이지를 않는다. 많이 늦어진 아침식사라 게눈감추듯 후딱 식사를 끝낸다. 그래도 식후 따뜻한 커피 한잔은 움츠려 들었던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녹여 준다. <주목감시초소> 태백산. 함백산과 함께 유명한 소백산 주목을 보호하기 위한 주목 감시초소다. 이곳은 해발 1,300m이상인 소백산의 아고라지대로, 바람이 세고 비와 눈이 자주 내리는 곳이어서 습기가 많고 키가 큰 나무가 잘 자랄 수가 없는 지대이다. 아고라지대는 아한대 기후지대로 바람과 추위를 잘 이겨내는 주목이나 철쭉 등의 야생식물이 자연과 균형을 이루며 살고 있다. 비로봉 바로 아래에는 천념기념물 제244호인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일반인 통제구역이다. 옛날 통제하지 않던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국망봉과 비로봉~연화봉 능선을 따라 3만여 그루가 분포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이곳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안내판에 적어 놓았다.
주목은 한국, 중국 북동부, 일본 등이 원산지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소백산, 태백산, 오대산, 설악산 등 높은 산악지대나 추운 지방에서 주로 자란다. '주목(朱木)'이란 이름은 나무의 껍질이 붉은색을 띠고 목재도 붉은색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수명이 길고 목질도 단단하며 잘 썩지 않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소백산의 주목군락은 소백산의 정상인 비로봉과 제1연화봉 사이에 주목 3,798그루(2007년 기준)가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고 있는 곳으로, 특히 비로봉 아래쪽 주목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곳을 울타리를 설치해 보호하고 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감시초소 앞마당에서 비로봉을 배경으로 인증을 남긴다. 증거를 남긴 백두들은 죽령을 향하고, 비로 인해 서둘러 지나쳐 온 비로봉을 자세히 기억 속에 갈무리한다. 백두대간은 강원도를 지나면서부터 우락부락한 악산(嶽山)에서 완연히 높이를 낮추는 육산(陸産)으로 확연히 변한다. 소백산의 가장 큰 특징은, 지리산의 세석평전과, 덕유산의 덕유평전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는 산릉이 광활하게 펼쳐진다는 점이다. 이것이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 文次郞)가 지형에 따라 한반도의 산지 체계를 분류한 산맥 개념이 나오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다. 우리 전통의 산지 체계인 백두대간은 산의 흐름, 즉 능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진 산줄기로 나눠 이름 붙였지만, 산맥은 지형지질에 따라 체계를 달리했다. 지질이 유사한 지형을 산맥이라는 이름으로 연결시킨 것이다. 그래서 산맥은 산줄기가 사라진 강으로도 연결되어 산의 맥이 가끔 끊어지기도 한다. 소백산맥도 그중의 하나인 것이다. 중부권의 대표적인 육산인 소백산은 지형적으로는 온화한 평원을 이루고 있지만, 바람과 눈(雪)에 있어선 어느 산보다 세차고 적설량이 많다. 이는 소백산이 위치한 지세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는 겨울철 시베리아에서 발원한 북서계절풍이 불어온다. 이때 내륙 깊숙이 진입한 대기는 소백산맥의 높은 장벽에 부딪혀 강제 상승한다. 수증기를 머금은 대기는 산사면을 타고 오르면서 단열팽창으로 냉각되어 눈으로 변해 내린다. 바로 동서로 길게 뻗은 소백산 줄기가 바람을 가로막으며 커다란 장벽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눈이 많을 수밖에 없다. 세찬 바람에 휘몰아치는 눈은 그래서 생기는 것이다. 일종의 ‘푄(Föhn)현상’인 것이다. 소백산이 설악산과 함께 우리나라의 제일 설경(雪景) 명산으로 꼽히는 이유다. 이로 인해 소백산의 북쪽인 단양·제천은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차갑고 강한 바람이 부는 데 반해, 남쪽의 영주 지방은 기온이 더 높게 나타난다. 반면 여름철의 경우 기온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동서로 가로지르는 소백산이 날씨와 기온조절 역할까지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해 전 새해 첫산행을 소백산으로 와서, 아침식사를 꺼내 보지도 못하고 칼바람에 떠밀려 하산해야 했던 이유다. 이제 아침식사를 했던 '주목 감시초소'도 저만치 멀어져 있다. 육산에서 만나는 암릉은 대부분 훌륭한 조망을 제공한다. 가야 할 죽령 방향으로 이어진 대간능선에 제1연화봉, 연화봉, 그리고 제2연화봉이 가늠된다. 우측 끝의 봉우리가 제1연화봉, 좌측 끝의 봉우리가 연화봉(희방사 갈림길), 우측 멀리 커다란 관측탑이 있는 봉우리가 제2연화봉이다. 우선 제1연화봉부터 가 보자! 돌아본 비로봉 방향. 제1연화봉 도착. 여유가 있었으면 봉우리로 올라가 보려는 시도를 해 보았을 텐데, 물기를 머금은 수풀을 헤칠 엄두가 나지 않아, 이정표 사진만 들고서 제1연화봉을 뒤로한다. 가야 할 연화봉 방향. 당겨본 연화봉에서 제2연화봉으로 이어진 능선이 구름에 윤곽만 드러내고 있다. 구름이 옅어진 틈을 타서 찰칵! 이제 소백산천문대의 모습이 조금 선명하게 보인다. 당겨본 소백산천문대. 돌아본 제1연화봉 내림길. 가야 할 대간능선. 연화봉 직전 희방사 갈림길. 희방사 갈림길에서 좌측 희방사 쪽으로 가면 연화봉을 오를 수 있고, 연화봉에서 소백산 천문대 방향으로 내려오는 게 정맥길이지만, 우중산행이라 우측 죽령 방향으로! <희방사(喜方寺)> 희방사는 고운사의 말사로, 신라 선덕 여왕 12년(643)에 두운(杜雲)이 지었다고 하며, 희방사는 누구에게나 쉽게 모습을 나타나지 않는 외진 곳에 숨어 있으며, 조선시대 훈민정음 원판과 월인석보를 보관하면서 유명해졌는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모두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희방사 창건 설화> 두운 대사는 태백산 심원암(深源庵)에서 소백산 연화봉 아래로 와서 동굴을 집 삼아 수행에 전념하고 있었다. 어느 겨울밤 갑자기 호랑이가 굴 안으로 뛰어 들어와 고개를 흔들며 고통을 호소하였다. 대사가 가만히 살펴보니 목에 비녀가 꽂혀 있었는데, 이를 불쌍히 여겨 비녀를 뽑아 주었다. 이런 일이 있은 며칠 뒤, 굴 앞에 인기척이 있어 나가 보니, 웬 여인이 호랑이 옆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정성껏 보살피니 곧 정신이 들었고, 사연을 들어보니, 여인은 호장(戶長) 유석(留石)이라는 사람의 무남독녀로, 혼인을 치르고 신방에 들었는데 별안간 눈앞에 불이 번쩍한 뒤로 의식을 잃었다고 하였다. 영물인 호랑이가 지난번 자기를 살려준 데 대한 은혜를 이렇게 갚고자 했던 것이다. 때는 한겨울 깊은 산중이라 눈에 덮여 길조차 막혀 있었다. 여인을 귀가시키려면 겨울이 지나야만 했다. 대사는 동굴 안에 싸리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함께 겨울을 지낸 뒤, 여인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여인의 아버지는 실종된 딸이 멀쩡히 살아 돌아오자 기뻐하면서, 대사의 은혜를 갚고자 동굴 앞에 전각을 짓고 농토를 희사하였다. 또한 계곡에 무쇠로 다리를 놓아 대사의 수행에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해 주었다. 오늘날 절이 위치한 행정구역인 수철리(水鐵里)는 곧 이 다리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희방사라는 절 이름은 은혜를 갚게 되어 기쁘다는 뜻의 ‘희(喜)’와 두운 대사의 참선방이라는 의미의 ‘방(方)’을 합친 것이라고 한다. '그놈의 호랑이는 괜히 멀쩡한 여인내를 납치해서 자기의 은해를 갚는데 사용하다니, 요즘 시각으로 보연 댓글에 몰매를 흠씰 맞았을 듯하다.' 죽령 방향의 '소백산 천문대'로 이어진 사면길. 돌아본 제1연화봉은 어느새 구름에 감춰져 있다. 연화봉 갈림길. 좌측이 방금 지나온 제1연화봉 방향 우회길이고, 우측 오름길은 연화봉 정상으로 이어진 길이다.
<연화봉(蓮花峰, 1,394m)>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단양읍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연화(蓮花)란 불교의 '연화장 세계'에서 가져온 용어다. 연꽃에서 태어난 세계 또는 연꽃 속에 담겨 있는 세계라는 뜻으로, 연화장 세계를 일러 화장세계, 연화장장엄세계라고도 부른다. 비로자나불이 있는 세계이며, 한량없는 공덕과 광대장엄을 갖춘 불국토이다. 『화엄경』에서는 연화장 세계가 삼신불, 그 가운데서도 노사나불의 서원과 수행에 의하여 현출된 이상적인 세계라 정의하고 있다. 이 세계의 가장 밑바닥에 풍륜이 있고 그 위에 향수해가 있으며, 이 향수의 바다속에 한 송이의 큰 연꽃이 있는데, 이 연꽃 속에 있는 세계를 일러 연화장 세계라 한다. 이곳을 연화봉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곳이 소백산 철쭉으로 유명한 곳인데, 철쭉이 피었을 때, 봉우리가 연꽃을 닮았다 하여 연화봉으로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갈림길 이정표. 등로 우측에 '별빛탐방로 금성' 안내판이 있다. 소백산천문대. <소백산 천문대> 우리나라 천문대 1호인 소백산천문대는, 1978년 준공과 함께 관측활동을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직경 60㎝가 넘는 반사 망원경을 최초로 설치해 우리나라 천문학의 신기원을 연 곳이기도 하다. 소백산 천문대는 대전의 대덕전파천문대와 영천에 있는 보현산천문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천문대이다.
천문대 뒤편에는 등산객을 위한 물통도 비치해 두었다. 죽령에서 소백산천문대까지 이어진 도로를 따라 죽령으로 향한다. 돌아본 소백산천문대. 가야 할 제2연화봉의 통신중계탑이 등대 역할을 맡은 듯 보인다. 제2연화봉 우회길을 따라가다 보면. 좌측으로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통신탑이 내려다보고 있고, 우측으로는 '토성 전망대'가 있다. 토성 전망대에서 돌아본 제1연화봉 방향. 당겨본 연화봉 방향의 소백산천문대. 제2연화봉 정상에 자리한 '통신중계소' 모습. '토성 전망대' 전경. 토성전망대에서 바라본 연화봉 방향. 통신중계탑의 위용을 뒤로하고 죽령을 향한다. 통신중계소 아래에 세워 놓은 제2연화봉 표석. <제2연화봉(第2蓮花峰, 1,357m)>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와 충북 단양군 단양읍 사이에 위치한 봉우리로 소백산국립공원에 속한다. 『순흥읍지』에서 희방용추를 설명하는 내용에 연화봉(蓮花峰)이 나온다. 또 『조선지형도』에는 현재의 제1연화봉이 해당하는 곳에만 연화봉이 적혀 있고, 일본어로 한글 발음이 병기되어 있다. 연화봉이란 이름은 전국의 곳곳에 산재한다. 이들 지명은 거의 모두가 연꽃처럼 생긴 산의 생김새에서 유래하고 있는데, 제2연화봉에서 비로봉에서 이르는 일대는 아고산(亞高山) 지대로서, 키가 작은 나무와 초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육산(陸山)이기 때문에 산세가 완만하고 산의 모양은 둥그스름하다. 그 모습은 못 위에 솟아 있는 연꽃이 꽃망울을 터트리기 직전의 모습과 흡사하다. 제2연화봉 정상은 소백산 통신중계소와 소백산 강우레이더 관측소에 내어주고 자기 자리도 아닌 엉뚱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다소 아쉽게 느껴진다.
통신중계소. 강우레이더 관측소 갈림길. 돌아본 통신중계소 방향. 죽령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른다. 좌측으로 조망이 트인 곳에서 돌아본 연화봉 방향.
연화봉에서 영주 방향으로 흘러내린 지능선들! 좌측에 있는 쉼터에서 잠시 쉼을 하고 간다. 쉼터 한켠에 설치된 지도에서 죽령까지의 거리를 가늠하고 죽령을 향한다. 죽령 날머리가 보인다. 국립공원 소백산 죽령탐방지원센터를 나서며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한다. 태양계의 크기를 체험하기 위한 별빛탐방로 안내판 죽령 도로에 도착한다. <죽령(竹嶺, 696m)>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경북 영주시 풍기읍 경계의 소백산맥에 있는 고개로, 5번 국도가 통과한다. 도솔봉(兜率峰, 1,314m)·연화봉(蓮花峰, 1,394m)·국망봉(國望峰, 1,421m) 등 높이 1,400m 내외의 높은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는 험한 지세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조령과 더불어 영풍-단양 간의 주요 교통로로 기록상으로 백두대간에서 두번째 열린 고갯길이다. 첫번째 고개는 죽령보다 2년 일찍 열린 계립령 즉 지금의 하늘재다. 죽령은 하늘재와 더불어 고구려 신라가 치열하게 패권을 다투던 곳이다. 이곳에서 가까운 상월봉 아래 영춘의 온달산성에 그 흔적이 있다.
옛날 어느 도승이 짚고 가던 대지팡이(竹)를 꽂은 것이 살아났다 하여 죽령이라 했다고 한다. 서쪽 사면은 충주호로 흘러드는 죽령천의 상류 하곡과 연결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아달라이사금 5년(158년) 3월 죽죽(竹竹)장군에 의하여 죽령 길이 개통되고, 그의 이름을 따서 죽령이라 부르게 되었으니 연륜이 1850년이 넘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죽령 고개를 넘는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한다. 문경새재인 조령, 추풍령과 함께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3대 관문의 하나였던 죽령 또한 소백산을 남북으로 가르며 북서~남동 방향으로 발달한 단층선을 따라 양쪽으로 침식이 크게 이루어진 결과로 저지대를 이루게 됐다. 죽령은 이곳 양쪽의 저지대인 계곡을 따라 나란하게 길을 낸 고개다. 뿐만 아니라 지구온난화가 심해지기 전에 대나무 북방한계선이라고 해서 죽령이라 이름 붙여졌다고도 전한다.
중앙선 철로가 이 고개를 통과하기 위해 '또아리굴'이라 불리는 루프식 터널을 건설했다. 죽령에서 단양까지의 서쪽 사면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여 높은 곳까지 개간되었고, 동쪽 사면인 풍기 쪽으로는 산림이 우거져 있다. 부근에 죽령 봉수와 보국사·희방사·죽죽사가 있으며, 중앙선을 따라 중앙고속도로(춘천-대구)가 있다. 옛날에는 죽령 고개를 넘는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한다. 문경새재인 조령, 추풍령과 함께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3대 관문의 하나였던 죽령 또한 소백산을 남북으로 가르며 북서~남동 방향으로 발달한 단층선을 따라 양쪽으로 침식이 크게 이루어진 결과로 저지대를 이루게 됐다. 죽령은 이곳 양쪽의 저지대인 계곡을 따라 나란하게 길을 낸 고개다. 뿐만 아니라 지구온난화가 심해지기 전에 대나무 북방한계선이라고 해서 죽령이라 이름 붙여졌다고도 전한다.
다음 구간에 가게 될 도솔봉도 담고, 죽령터널이 뚥렸는데도. 죽령에는 아직도 가계들이 즐비하다. 소백산 자락길 안내판. <다자구야 할미의 전설> 죽령 서쪽 아래에는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가 있는데, 죽령산성이 있는 용부원리에는 죽령의 도둑을 퇴치한 다자구할미의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죽령고개는 옛날부터 오르막 30리 내리막 30리로 아흔아홉 구비의 험준한 고개였다. 이 고개에는 대낮에도 도둑이 들끓어 지나는 행인들을 괴롭혔는데, 관아에서 도둑을 잡기 위해 군졸들을 풀었지만, 도둑들은 수목이 꽉 들어차 울창하고 험한 산세를 이용하여 숨어버리므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도둑들에게 재산을 모두 빼앗겨 살기 힘들게 되었다며 웬 노파가 관아를 찾아와 도둑잡기를 자청하였다. 관원이 도둑잡을 방법을 물으니, 자신이 도둑 소굴로 들어가 동태를 살펴서 알려줄 테니 군졸들을 죽령고개 일대에 숨겨두었다가 “다자구야, 다자구야!”하고 소리를 치거든 급히 잡으러 오고, “들자구야, 들자구야!”하면 도둑이 잠들지 않고 있는 것이니 숨어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두목의 생일을 맞아 실컷 술을 마신 도둑들이 모두 곯아떨어지자 할머니가 “다자구야, 다자구야!”를 외쳤고, 이에 숨어 있던 관군이 달려 나가 모두 잡아버렸다. 그런 후, 할머니는 어디로 갔는지 자취를 찾을 길이 없었고, 사람들은 다자구야 할미가 죽어서 죽령 산신이 되었다고 믿어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는데, 다른 제사들이 모두 밤에 이루어지는데 비해 죽령산신제는 대낮에 행해지며, 그 대상이 일반적인 산신령이 아니라, 여성신이라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다자구야 할미를 모시고 있는 죽령산신당은 지방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금도 용부원리 마을의 부락제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소백산 죽령 전경. 죽령 단양 방향. 죽령 영주 방향. 현재 죽령 고갯길은 5번 국도가 지나고, 1936년 건설된 4.5km 죽령터널을 통해 중앙선 열차가 다니기 시작했고, 2002년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백두대간 아래로 길이 4,6km 직선의 죽령터널이 개통됐다. 안동, 풍기, 순흥, 선비들과 보부상들을 힘겹게 하던, 오르막길 30리, 내리막길 30리 꼬박 하루가 걸렸던 죽령길은 승용차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날 수 있다. 그 바람에 5번 국도가 지나는 이 고개는 등산객들이나 다니는 잊혀진 옛길이 되어 버렸다. 다음 도솔봉 구간 들머리 모습. 죽령 옛길 안내판. 옛날 내가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단양 땅에서 풍기장으로 갈 때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넘던 길이다. 백두대간 죽령 표석. 10여년 전, 대간 북진 때 들렀던 기억이 있는 '죽령주막' 소백산 풍기온천에서 몸을 녹이고, '횡재먹거리한우촌'에서 산행으로 축난 몸을 채운다.
따뜻한 불고기와 소맥으로 산행으로 움츠렸던 몸을 녹인다. 뭔 내기를 하신 건지.. 결과는? 모처럼의 우중산행이란 추억을 갈무리하고 집으로 향한다. 여름을 지난 소백산 능선의 싱그러운 바람을 기대했으나, 때아닌 장맛비에 고생 많으셨네요!! 감사합니다^^ |
첫댓글 비로봉서 무쟈게 추웠던 기억에 지금도 이가 덜덜 떨립니다. 죽령 마지막에 영임형수님 시멘트포장 내리막길 스틱에 걸려 아찔했는데 운동신경 대단하셔서 천만 다행였습니다.ㅎ.ㅎ
추억 남겨주신 만보사랑님
감사하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