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하신 일을, 나는 회상하렵니다.
그 옛날에 주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그 일들을 기억하렵니다.
[시편 77:11]
이태원참사 2주기(10월 29일)를 맞이하며, 그 일들을 기억한다.
1910년 한일강제합방,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1948년 4월 제주,
1950년 한국전쟁,
1980년 5월 광주,
1987년 6월,
2014 세월호......
나는 다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는 반복된다.
잘못 기억된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고, 제대로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임을 믿는다.
그래서 기억되지 않는 것들은 반드시 반복되어 기억하지 않고는 못견딜 정도로 새겨지길 바란다.
그리고 내 기억에서는 아름다운 것들만 지워지고, 그래서 아름다운 것들이 반복되길 기도한다.
시인은 지금 '위로받기 조차 마다하는(2)' 큰 고난에 빠져있다.
그토록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건만, 자신의 현실을 생각하면 한숨만 나온다.
주님께서 나를 영원히 버리신 것은 아닐까?(7)
그분의 약속도 이제는 영원히 끝나버린 것일까?(8)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는 일을 잊으신 것일까?(9)
시인은 자기연민에 빠져 기도했고, 마음 속에서 끓어오르는 솔직한 질문들을 던진다.
10월 27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광장의 모임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모임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길갈 운운하며 모인 그들에게 불벼락 정도는 내리셨으면 좋겠다는 허망한 생각을 해보기도했다.
이런 생각이 허망한 이유는, 하나님은 요즘 그런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망할 것이다. 아니, 이미 망했다."는 확신을 가졌다.
하나님의 역사는 더디지만, 그렇게 전개되어왔기 때문이다.
고통 속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시인은 그 마음을 한 켠으로 밀어넣는다.
그리고 그 곳에 옛날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다 놓는다.
그러자 지난간 일들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
지난 간 일들이 현재로 들어오고 그를 미래로 안내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가 된다.
시인은 과거의 기억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미래의 소망을 품는다.
변한 것은 없다.
하지만,
시인은 광야시절 모세와 아론을 통해 주님의 백성을 양떼처럼 이끌어주셨던(20) 하나님께서
자신도 환난 속에서 구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 믿음이 시인을 구원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시인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믿음을 품는 일뿐이다.
2024년 대한민국이 지금의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대혼란 속에 빠져들 것이라 해도,
지금 나는 그 모든 악한 세력들이 종말을 고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품는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품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 그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않은가?
그렇게 함께 그 길을 가지만, 끝내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버린다면 구렁텅이에서 다시 노래를 부를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불행하지 않은가!
기억하자.
제대로 기억하자.
그 일들을 제대로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