遠山(원산)
山色無遠近산색무원근 平仄平仄仄
看山終日行간산종일행 仄平平仄平
峰巒隨處改봉만수처개 平平平仄平
行客不知名행객부지명 平仄仄平平
<歐陽修>
산의 색(경치)은 멀고 가까움에 다름이 없어
하루종일 산만 보며 걸어가네,
보이는 봉우리 모양은 제각기 다르고
그 이름조차 나그네는 알 길 없어라.
이 시(詩)는 시제(詩題) 원산(遠山)인 구양수(歐陽修)의 오언절구(五言絶句) 측기식(仄起式) 시(詩)다. 압운(押韻)은 행(行), 명(名)이다. 행(行), 명(名)은 하평성(下平聲) 경통(庚統) 운족(韻族)이다. 오언절구(五言絶句) 측기식(仄起式) 기승전결(起承轉結) 평측(平仄)을 맞추어 보면 근체시(近體詩) 작법(作法)으로 보면 맞지 않다. 압운(押韻)은 하평성(下平聲) 경통(庚統) 한 운족(韻族)으로 작시를 해서 압운운통(押韻韻統)은 맞추었으나 평측운은 맞지 않다. 구양수(歐陽修)은 왕안석(王安石)의 동향(同鄕) 선배(先輩)였으나 정치로선(政治路線)은 구법(舊法)을 옹호(擁護)하다 신법(新法)을 주장하는 왕안석(王安石) 개혁신법(改革新法)에 밀려 관직(官職)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시제(詩題) 원산(遠山)은 종일 걸어가도 보이는 것은 선 봉우리만 보이고 나그네는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모르겠단다. 첩첩산중(疊疊山中) 속에 있음을 노래한 시다.
우리 인생 여정과 비슷하지 않는가? 가도가도 끝이 없는 고난의 연속이 인생사(人生事)이니 말이다. 정계에서 물러난 후로 자신의 처지를 읊은 것이 아닌가? 싶다. 시제(詩題) 옥루춘(玉樓春)은 칠언율시(七言律詩) 평기식(平起式) 시(詩)다. 술잔 앞에 두고 돌아갈 날 알리려는데, 말도 꺼내기 전 고운 임이 목메어 울먹 인다. 인생이 원래 정에 약해서 그렇지, 이 응어리가 바람이나 달과는 아무상관없지. 이별가로 새 노래는 짓지 말게나. 옛 곡 하나로도 애간장이 다 녹아나거늘. 낙양성 모란이나 실컷 즐기세. 그래야 봄바람과도 쉬 헤어질 수 있으리.<尊前擬把歸期說=平平仄仄平平仄 未語春容先慘咽=仄仄平平仄仄仄 人生自是有情癡=平平平仄仄平 此恨不關風與月=仄仄仄平平仄仄 離歌且莫翻新闋=平平仄仄平平仄 一曲能教腸寸結=仄仄平仄平仄仄 直須看盡洛城花=仄平仄仄仄平平 始共春風容易別=仄仄平平平仄仄,>
옥루춘(玉樓春) 칠언율시(七言律詩) 평기식(平起式) 이 시(詩)는 압운(押韻)은 설(說), 인(咽), 월(月), 결(結), 별(別)이다. 압운(押韻) 설(說), 인(咽), 결(結), 별(別) 사자(四字)는 다 입성(入聲) 설통(屑統) 운족(韻族)이고. 월(月)도 입성(入聲) 운목(韻目)이다. 기승전결(起承轉結) 사련(四聯) 팔행(八行) 평측(平仄)을 맞추어 보자. 압운(押韻)이 전체가 다 측성(仄聲) 운목(韻目)이라 사련(四聯) 팔행(八行) 평측(平仄)은 맞추려고 애썼으나 근체율시(近體律詩) 평측작법(平仄作法)은 맞지 않는다. 구양수(歐陽脩)는 중국(中國) 송대(宋代) 정치가(政治家) 문학가(文學家)다. 호(號) 취옹(醉翁) 육일거사(六逸居士)라고도 부른다. 부친(父親)은 네 살 때 잃고 집안이 가난해서 모친(母親)의 교육(敎育)을 받고 진사시험(進士試驗)에 합격(合格)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까지 승진했으나 왕안석(王安石)의 개혁혁신(改革革新) 정치(政治)에 반대(反對)하여 퇴관(退官)하였다. 고문(古文)을 부흥(復興), 당대(唐代)의 화려한 시풍(詩風)에 반대(反對)하여 신시풍(新詩風)을 열고, 시(詩)ㆍ문(文) 양방면(兩方面)에 송대(宋代) 문학(文學)의 기초(基礎)를 확립(確立)했다. 당(唐)ㆍ송(宋) 팔대가(八大家) 중의 한 사람이다. 구양수(歐陽脩)의 삼상지학(三上之學)은 현대인들에게도 가르침 교훈이 될만하다. 삼상(三上)은 말 위(馬上)에서 잠자리 침상(枕上)에서 화장실 측상(廁上)에서 책을 독서(讀書)하라는 뜻이다. 틈틈이 짬짬이 시간 자투리를 활용해서 책을 읽다 보면 남보다 더 많은 식견(識見)과 교양(敎養)이 축적(蓄積)된다는 말이다. 오늘은 당풍(唐) 시학(詩學)에 반대하고 송풍(宋風) 시학(詩學)을 주장했던 구양수 유작시(遺作詩) 이수(二首)를 근체시(近體詩) 평측운통(平仄韻統)을 맞추어 반추(反芻)해 보았다.
여여법당 화옹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