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상 기도하고 / 눅 18:1-8
성도 여러분, “삼포세대”라는 말을 아십니까? 2010년 이후, 학자금 대출에 대한 부담과 청년실업 증가 및 치솟는 집값 등 삶의 비용이 도를 넘어서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거나 미루는 젊은 세대를 “삼포세대”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오포세대”라는 말이 생겼는데요. 경기불황이 장기화되고 취업난이 가중되면서 ‘연애, 결혼, 출산’에다가 ‘취업,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한 세대를 말합니다. 그리고 또 “7포 세대”란 말도 생겼지요. ‘연애, 결혼, 출산, 취업, 내 집 마련’ 그리고 ‘인간관계, 미래(희망)’까지 포기한 세대를 말합니다. 그 다음은 ‘건강과 외모관리’까지 포기한 세대를 “9포세대”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꿈도 희망도 없는 삶을 비관하여 ‘전부를 포기했다’고 해서 “전포세대”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n포 세대”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n”이란 ‘더 이상 숫자를 세는 것이 무의미하다’ 곧 ‘포기할게 무한하게 많다’는 뜻입니다. 사실 그들은 포기하고 싶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적인 상황이 그들에게 포기를 강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이 ‘포기’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물론 본문의 결론은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그리고 왜 포기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부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그리고 공식적이고 구체적으로 가르치신 기도가 ‘주기도문’인데요. 이 주기도문으로 기도란 우리의 필요한 것을 간구하는 것 이전에, “아빠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만나는 방법이며 대화의 방법”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곧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기도로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라, 기도로 아버지께 말하고 들으라, 기도로 사랑을 받고 기도로 은혜를 입고 기도로 능력을 입으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요, ‘하나님과 대화하는 통로’라는 것이죠. 이것은 피조물이자 인생이요 죄인인 우리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특권이고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신 특권이 있습니다. 그건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가 특권임을 망각하곤 합니다. 동시에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기 쉬는 것을 죄라고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저 필요할 때만 기도하면 되는 줄 압니다. 필요에 따라 그때 그때 기도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건 우리 생각입니다. 주님은 바울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살전 5: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대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꿈에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꿈과 무관한 사람입니다. 꿈은 희망으로 나타납니다. 꿈은 불타는 소원을 갖게 합니다. 꿈꾸는 사람이 자기의 불타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응답이 늘 그렇게 쉽게 빨리 오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응답의 지연이 기도자를 힘들게 만듭니다. 어떤 문제를 놓고 아주 오래 동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을 때 힘듭니다. 응답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현실 환경이 더 나빠질 때 낙심하게 됩니다. 꼭 기도를 포기하지는 않더라도 기도의 강도가 눈에 띄게 약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점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그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곳에 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과부니까 당연히 가난했을 겁니다. 거기다 그 과부는 원한까지 겹쳐 있었습니다. 원한에 사무친 한 가난한 과부였던 것입니다. 이 과부는 자기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 재판장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원한을 풀어주소서”란 말은 재판을 통해서 자기의 억울한 일을 해결해 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재판장은 재판을 열지 않습니다. 가난한 과부에게 돈을 바라지는 않았을 거고 그렇다면 혼자 사는 과부라고 무시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낙심하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그 재판장을 찾아갑니다. 결국은 재판장이 두 손을 들게 됩니다. 그래서 과부가 문제를 해결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수차례 들어온 말씀입니다. 내용도 알고 주제도 아는 말씀입니다. 1절에서 밝힌대로 기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도의 자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친절하게 안내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기도의 자세를 왜 그렇게 친절하게 안내하고 계실까요? 우리더러 실제로 기도하라고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가르침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기도해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새벽을 놓쳤으면 아침에라도 나와서 기도의 분량을 채우려고 하는 적극성을 가진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잠시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그 영혼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어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과부와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항상 기도하고”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건 낙심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가 낙심만 하지 않는다면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럼 낙심이 무엇입니까? “낙심”의 원어 ‘엥카케인’은 ‘완전히 정신을 잃다, 녹초가 되다’라는 뜻입니다.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그 영혼이 혼비백산해서 완전히 지쳤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인생을 살아갈 힘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한 번 낙심에 빠지면 기도줄을 놓쳐버리게 됩니다. 영적으로 끝없이 추락하게 됩니다. 기도하라는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자꾸 기도하라고 하면 속에서 역정이 일어납니다. 영적인 반감이 생겨납니다. 낙심은 마치 수렁과 같습니다. 그래서 한 번 빠지게 되면 빠져나오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잘 추슬러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둘 때 낙심을 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를 할 때 낙심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기도 때문에 낙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할 때 즉각 즉각 응답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기도는 몇 달씩, 어떤 기도는 몇 년씩, 어떤 기도는 평생을 갑니다. 처음에는 힘내서 기도합니다. 응답을 기대하면서 기도합니다. 언제쯤 응답될 것이다고 생각하며 열정적으로 기도합니다. 그런데 응답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때 기도에 대한 기대감도 한풀 꺾이게 됩니다. 기대감도 차츰 식게 됩니다. 기도하면서 피곤을 느끼게 됩니다. 기도하다가 지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했는데 기도 때문에 낙심할 수 있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게 고비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때에라도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과부는 불의한 재판장 앞에서 낙심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더니 결국은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영국에 불신자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한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남편의 회개를 위해서 일년 동안 날마다 기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날마다 12시가 되면 그 여자는 혼자 자기 방으로 가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 여자가 기도한지 12개월이 지나갔는데 그가 하나님께 돌아올 징조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는 6개월을 더 기도하려고 결심하고 날마다 혼자 방에 들어가서 남편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6개월이 지나갔는데 아직도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를 않고 응답도 없었습니다. 그 여자의 마음에 회의가 일어났습니다. 그렇다고 남편의 구원을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여자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응답하실 때까지 기도하겠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저녁 남편이 식사를 하러 내려오지를 않아서 남편이 있는 방으로 올라가봤더니 남편이 무릎을 꿇고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며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그 여자에게 기도에 대한 회의가 들 때가 고비였습니다. 만약 그 때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기도를 중단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고비의 언덕을 넘지 못하고 기도하기를 포기했다면 남편의 영혼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포기하지 않는 기도만큼 강렬한 기도는 없습니다. 일을 이루는 사람과 이루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비범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차이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포기하고 싶을 때 그 고비를 잘 넘겼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지에 도달한 사람의 특징은 하던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생이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인생은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대로 기도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기도를 포기하는 순간 낙심의 영이 찾아옵니다. 낙심의 영이 우리 안에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우리를 낙심하게 하는 낙심의 영을 몰아낼 수 있는 도구는 기도뿐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며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간구할 때 낙심의 영이 물러가게 됩니다. 여러분의 심령에서 낙심의 영을 몰아내고 기도의 영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낙심의 영을 추방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기도하는 교회, 낙심하지 않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혹시 낙심 중에 있다면 낙심을 털고 일어나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2-3절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당시 여자의 일생은 참으로 불쌍했습니다. 특히 의지할 곳 없는 과부의 인생은 더더욱 불쌍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지켜줄 바람막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출가하기 전에는 아버지가 보호하고, 출가하면 남편이 보호하지만, 남편이 죽고 나면 그때부터는 보호자가 사라지게 됩니다. 잘났든 못났든 남편이 살아있을 때에는 남편이 아내의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남편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접을 받지만, 남편이 죽으면 하루아침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맙니다. 남자없는 사람이라고 많은 멸시와 무시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과부는 한까지 맺혔습니다. ‘한’은 심리적 억압상태를 말합니다. ‘한’은 자기가 받고 있는 사회적 대우가 부당하고, 자기가 받을 수 있는 일정량 이상의 심리적 억압을 받을 때 생겨난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눌려지낸 여인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특히 한이 많습니다. 이 과부도 혼자되다 보니까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을 겁니다. 그게 한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과부가 되었다는 것은 인생의 위기를 맞이했다는 말입니다. 삶의 위기를 맞아서 그가 한 것은 재판장을 찾은 것입니다. 그를 아는 친구들이 말렸을 것 같습니다. 인간 같지도 않은 재판ㅍ 찾아가봤자 소용없으니까, 차라리 안 가는 게 더 좋을 거라며 충고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과부는 재판장을 찾았습니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 재판장을 찾았지만, 불의한 재판장에게 무시를 당할 때 더 큰 위기를 맞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과부는 재판장에게 죽기 살기로 매달렸습니다. 한두 번 찾아간 게 아닙니다. 4절 ‘그가 얼마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재판장이 수차례나 무시한 것입니다. 몇 번이고 못들은 척 한 것입니다. 그래도 과부는 재판장에게 자기 인생의 승부를 걸었습니다. 승부수를 던졌으니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질 수밖에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재판장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길은 기도입니다. 위기가 닥치는 당시는 힘들지만 그 위기로 인하여 다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면 위기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기는 기도의 기회입니다. 위기는 기도할 때 기회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실패는 기도의 실패입니다. 기도에서만 실패하지 않았다면 아직 실패하지 않은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직 낙심할 때가 아닙니다. 기도할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아직 절망할 때가 아닙니다. 기도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위기란 누구에게나 있는 법입니다. 삶의 위기를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크냐 작냐의 차이이지, 누구에게나 위기는 있습니다. 개인의 위기 뿐 아니라 가정의 위기도 있습니다. 생업의 위기도 있습니다. 또한 나라의 위기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도 위기가 있습니다. 그런 것 보면 위기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우리 삶의 전 영역에 위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기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위기입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입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입니다. 위기를 기회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방법도 하나입니다. 위기 앞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위대한 능력입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탁월한 능력입니다. 기도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입술의 기도가 있습니다. 머리의 기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기도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도를 하세요? 입술의 기도를 하세요. 머리의 기도를 하세요? 아니면 마음의 기도를 하세요. 우리의 기도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기도여야 합니다. 과부가 재판관에게 나갈 때 입술로 나간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 나간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나갔습니다. 마음이 정해지니까 무시당해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확정되니까 거들떠보지 않아도 또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마음의 기도는 통곡과 눈물의 기도입니다. 마음의 기도는 신음하는 기도입니다. 깊은 내면의 세계로부터 흘러나오는 기도입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한나가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사무엘상 1:10절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통곡소리를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신음소리를 무시하시지 않았습니다. 엘리 제사장을 통해 이렇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삼상 1:17절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신약성서에 보면 예수님도 그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5: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주님은 아들이셨지만 아버지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심한 통곡이 있습니까? 눈물의 간구와 소원을 올리는 것이 있느냐 말입니다. 혹 우리가 너무 느슨하게 기도하는 것이 아닐까요? 꼭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정신차리고 기도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위기가 닥치면 그때 가서야 강청기도를 하는 것은 한 발 늦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도는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과부가 매일 재판장을 찾아가 말한 것을 두고 예수님은 그녀가 부르짖었다고 하셨습니다. 7절에 앞부분을 보시면 나와 있지요?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히브리어로 ‘부르짖다’는 단어가 ‘짜아크’인데 인간이 당하는 한을 밖으로 품어내는, 마음속의 찢어지는 고통의 소리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과부의 기도를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재판관에게 나아가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마음의 기도는 한 번에 끝나지 않습니다. 한 번 부르짖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3절 앞부분의 말씀처럼 “자주”하는 기도입니다. 과부는 재판장을 자주 찾아갔습니다. 과부가 처음에 재판장을 찾아왔을 때 재판장은 아마 “저렇게 하루 이틀 찾아오다 그만이겠지” 하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과부는 계속해서 찾아왔습니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아니면 몇 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확히 알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들어줄 때까지 찾아갔습니다. 사람에게도 한 번 하는 말보다 자주하는 말이 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한 번 하는 기도보다 자주하는 기도가 보다 능력이 있습니다. 단순히 숫자상으로 확률적으로 더 유리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주 하는 기도가 능력있는 것은 응답될 때까지, 응답이 있을 때까지 쉬지 않고 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기도는 목숨을 거는 기도입니다. 과부는 재판장을 찾아가서 번거롭게 했습니다. 여기서 “번거롭게 하니”라는 말은 ‘눈썹을 건드린다’는 뜻인데 잠자는 사자의 눈썹을 건드리고, 잠자는 호랑이의 콧털을 건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잘못하면 죽습니다. 재판장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과부 한 사람 정도 어떻게 되는 것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한두 번이야 좋은 말로 돌려보냈겠지만, 그 다음에는 경고했을 거고, 그 다음에는 욕설과 위협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찾아갔다고 하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하고 간 것입니다. 마음의 기도를 하는 사람은 기도에 목숨을 걸어버립니다. 그런 사람이 하는 기도를 결사적인 기도라고 합니다.
구약성서에 결사적인 기도를 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야곱입니다. 창세기 32장에 보면 그는 얍복강 나루터에서 천사와 결사적인 씨름을 벌입니다. 처음에는 천사가 이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달라집니다. 야곱이 죽기 살기로 덤벼든 까닭입니다. 야곱은 천사의 옷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한번 물으면 놓지 않는 진도개처럼 때리면 맞고 쓰러뜨리면 넘어지면서도 절대로 천사의 옷자락은 놓아주지 않습니다. “이제 놔라.” “못놓습니다.” “정말 못놓겠느냐?” “예, 죽어도 못놓습니다.” 그 때 천사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습니다. “이래도 못놓겠냐?” “예, 죽었으면 죽었지 축복해주기 전에는 절대로 못놓습니다.” 결국 천사가 야곱을 축복합니다. 그제야 야곱이 옷을 놓았습니다. 아마 천사가 속으로 이런 말을 하고 갔을 것 같아요. “어휴, 정말 지독한 놈이구먼!” 그러나 우리가 야곱처럼 매달린다면 예수님은 뭐라고 하실 것 같아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죽기 살기로 대들었더니 가난하고 힘없는 과부가 부하고 힘있는 재판장을 이겼습니다. 특히 재판장이 이런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5절하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여기서 “괴롭게 하리라”의 원어 ‘위포피아제’는 ‘나를 때려 멍들게 하다, 난폭하게 다루다’라는 뜻입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재판관은 과부가 휘두르는 펀치에 맞아 온 몸에 멍이 들고 상처가 나는 것입니다. 자기 생활이 과부 한 사람 때문에 아주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앞으로 또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차라리 그 소원을 들어주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불의한 재판관과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을 비교하십니다. 사실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도 굳이 비교하고 계십니다. 6-7절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키 포인트가 “하물며”에 있습니다. 그 못된 재판장도 그렇게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물으십니다. 풀어주신다는 말입니까? 안 풀어주신다는 말입니까? 이어서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를 묻고 계십니다. 오래 참으신다는 말입니까? 속히 풀어주신다는 말입니까? 8절 앞부분에서 답하고 계시지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하나님의 응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밤낮 부르짖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보세요.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우리가 아무리 택함받는 자라도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도 소원을 두고 부르짖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의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8절하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근심어린 눈빛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언제까지나 나는 꿈꾸는 청년이고 싶다’는 책을 쓰신 유태영 박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전북 임실 청웅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를 캐어먹고 나무껍질을 벗겨 먹으면서 자랐습니다. 남들이 다 가는 중학교도 가지 못해서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고, 신문팔이에 구두닦이에 안해본 것 없이 다하면서 자랐습니다. 그래도 서른 살이 다 되도록 거렁뱅이 신세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결혼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1967년 흥사단 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는데 그들은 결혼예복도 제대로 입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평생을 두고 처음으로 사랑하는 아내가 사 준 구두를 신어 보았습니다. 양복은 주례하시는 강박사님이 준 헌 옷을 손질해서 입었습니다. 신부는 남대문시장에서 포플린이라는 흰 천을 떠다 손수 흰 한복을 만들어 입고 머리에 망사를 해서 얹었습니다. 손님은 교회에서 온 60여명의 교우들이 전부였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내빈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에 친구들이 대기시켜 놓은 택시를 타고 신혼여행을 갑니다. 택시에 오르자마자 그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기본요금 오르기 전에 내립시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좋으실 대로 하세요.” 그래서 을지로 입구에서 탄 택시를 미도파 백화점앞에서 내려, 명동에 있는 한일관에서 떡만두국 한그릇씩을 시켜먹고,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시내버스를 타고 안양유원지로 향했습니다. 유원지에 도착한 그들은 싱그러운 포도냄새가 풍기는 포도밭을 거닐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해질 무렵 포장마차에서 된장찌게로 저녁을 먹고는, 도로변에 있는 장급 여관을 찾았습니다. 방값을 물어보니 떡만두국 열그릇 값입니다. 그는 아내의 손을 잡고 다른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찾아간 곳이 지붕 높이가 2m도 안돼 손이 닿을 정도로 허술한 여인숙입니다. “이 집에서 가장 싼 방 하나 주세요.” 여인숙 종업원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웃고 있었습니다. 옛날 화장실이 바로 방문 앞에서 1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냄새나는 방을 얻어서 첫날밤을 지냈습니다. 이렇게 결혼한 그가 얼마되지 않아서 덴마크에 유학을 가게 됩니다. 그가 유학을 꿈꾸게 된 것은, 어릴 때 서울에 올라와 미군부대에서 구두닦이를 하면서 야간학교를 다닐 때부터입니다. 그때 그는 유학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하나님께 유학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풀뿌리를 캐먹고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살아야 하는 이 가난이라고 하는 한을 풀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지지리도 못사는 우리 농촌을 잘사는 나라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끈질기게 기도하기를 13년, 어느 날 하나님은 그에게 한국농촌에 대해서 글을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편지도 한통 썼습니다. 우리 농촌을 잘 살게 하고 싶다고 그러니 당신네 나라에서 나를 초청해 달라고 썼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영문으로 번역해 타이핑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덴마크와는 국교가 성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덴마크 대사관도 없고, 덴마크라는 나라가 어디에 붙어있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또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 나라에서 제일 높은 사람에게 편지와 논문을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도서관으로 달려가 대백과사전을 뒤져서 현재 그 나라에서 제일 높은 분이 누구인가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편지 앞에 ‘프레드릭 9세 임금님 귀하’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소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또 기도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 소리없이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그 나라 우편배달부가 임금님이 어디 사는지를 모르겠느냐?” 그래서 그는 봉투에 ‘프레드릭 9세 임금님 귀하, 코펜하겐, 덴마크’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가 덴마크 국왕에게 전달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국왕이 행정부에 지시를 내려서 국비로 유학을 할 수 있도록 초청을 한 것입니다. 13년만의 끈질긴 기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이룹니다.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던 월트 디즈니는 수만 번의 스케치 끝에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미키 마우스를 만들어냈습니다. 세계적인 프랜차이즈 KFC의 창립자 커넬 샌더스는 자신이 만든 치킨을 들고 미국 전 지역을 돌면서 1,008개의 식당에서 거부당하다가 1,009번째 식당에서 판매에 성공했습니다. 이들의 성공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특출한 재능이 있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다만 포기하지 않고, 역경과 실패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끈질기게 계속 했기 때문에 성공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쉽게, 또는 빠르게 응답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것에서 여러분의 믿음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에서 그 사람의 믿음이 드러난다는 말이지요. 여러분의 기도 생활은 어떻습니까? 아니 기도로 드러나는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전부를 걸고 끈질기게 기도하여 반드시 응답받음으로서 여러분의 믿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기를 바랍니다. 불타는 소원을 가지고 끈질기게 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주님은 항상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위기에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마음의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통곡과 눈물의 기도, 부르짖는 기도, 목숨을 거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응답을 꿈꾸며 기도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믿음이 있어야 교회에 나오는 것처럼,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과부의 이야기를 통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 것처럼, 그뿐 아니라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 것처럼, 갈보리의 모든 성도들이 믿음에 굳게 서게 하옵소서. 또 낙심하지 말고 열심히 기도하여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두 사람이 기도하러 / 눅 18:9-14
어린 소년 하나가 거드름을 피우며 동네 운동장에서 야구 방망이와 공을 가지고 혼자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타자다." 하고 외친 뒤 공을 위로 던지고 방망이를 휘둘었는데 헛치고 말았습니다. 소년은 혼자서 "노 볼, 원 스트라이크"하고 소리쳤습니다. 소년은 기세가 꺽이지 않은 채 공을 주워 들며 다시 소리쳤습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타자다." 그리고는 다시 공을 위로 던지고 방망이를 힘껏 휘둘렀습니다. 이번에도 헛치고 말았습니다. 소년은 스스로 심판이 되어 "노 볼, 투 스트라이크" 하고 외쳤습니다. 소년은 야구 방망이와 공을 잘 살핀 후에 손바닥에 침을 뱉고 손을 비비며 모자를 고쳐 쓰고 외쳤습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타자다." 그리고 공을 위로 던지고 공이 내려올 때 방망이를 힘차게 휘둘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또 헛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트라이크 아웃! 와!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투수가 되었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기가 꺽이지 않는 자세는 대단한 모습입니다만, 아무도 그를 훌륭한 야구 선수로는 인정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 소년처럼 우리도 스스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속으로 인정하고 자신만만할지 모르나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면 큰 일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자세는 어떤 것일까요? 오늘 읽은 말씀에 세리는 바리새인보다 의롭다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은 스스로는 의롭다고 확신에 차 있었지만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왔는데 모두 의로운 예배자라고 인정받고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아가 매번 기도할 때마다, 그 기도가 은혜의 보좌에 상달되고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봉사가, 우리의 사역이, 우리의 헌금이, 우리의 구제가 모두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복된 결과가 따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인생의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또는 어제까지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오늘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게 인생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문제 앞에서 처음엔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러다 정신을 가다듬고 어떻게든 문제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 저것을 두드려 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두드려 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권력을 두드려 봅니다. 다른 사람은 지식을 두드려 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종교를 두드려 봅니다. 그러나 그 무엇을 두드려도 속 시원하게 풀리지 않습니다. 그 어디서도 시원한 해결책을 얻어내지 못합니다. 인생 문제의 어디를 두드려야 할지를 정확히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복 중의 복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만도 은혜이고 행복인데 거기다 무엇을 구하든지 주신다고 했습니다. 기도만 하면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부르짖기만 하면 응답해주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제노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축복이라고 믿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기도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엄청난 특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 바로 기도입니다. 특권은 누려야 합니다. 특권을 누리지 않는 것은 그것을 허락하신 분에 대한 실례입니다. 우리에게 특권을 허락하신 분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살전 5:17절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신구약성서에서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그런데 그 특권을 부여받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 특권을 잘 사용하고 계십니까? 그 특권을 열심히 사용하고 계십니까? 혹시 그 특권을 어디다 묻어두신 건 아닙니까? 그 특권을 어디 다 두었는지도 모르고 지내신 건 아닙니까? 아니면 그런 특권을 받았다는 것마저도 잊고 지내신 건 아닙니까? 만약 하나님이 주신 특권을 그런 식으로 여겼다면 여러분은 엄청난 실수를 범하신 겁니다. 하나님께 무례를 범한 것입니다. 기도를 특권으로 여기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의 특권을 사용하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에서 두 가지 비유를 드셨습니다. 둘 다 주제가 기도였습니다. 첫 번째 비유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될 것을, 불의한 재판장과 한맺힌 과부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기도에 대한 두 번째 비유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태도로 기도하면 안된다는 것을,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대조하여 보여주셨습니다. 본문 역시도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많이 들어온 말씀입니다. 어쩌면 지겹도록 들어온 말씀이고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말씀입니다. 사실은 이런 말씀일수록 더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는 것을 아시지요? 보다 경청하지 않으면 자기가 조금 알고 있는 지식이 말씀이 들려오는 것을 막아버립니다. 그건 마귀의 노림수입니다. 말씀은 반복입니다. 말씀은 반복해서 들어야 합니다. 한 번 듣는 것보다 두 번 듣는 것이 낫습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을 때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움직이게 됩니다. 그리고 더 반복해서 들으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인격과 삶에 변화가 옵니다. 구약성경 시편 다음에 잠언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잠언은 우리 실생활에 구체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지혜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잠언을 읽다보면 말과 관련된 단어들이 계속 반복됨을 볼 수 있습니다. ‘좋은 말해라, 말조심해라.’ 한 번만 해도 넉넉히 알아들을 텐데,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또 들을 때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반복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듣고 또 들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받을 준비만 갖춰져 있으면 반복해서 들어도 말씀이 새롭게 느껴집니다. 말씀을 사모함으로 ‘아멘’하면서 들으면, 한 번 들을 때보다 두 번 들을 때가 더 은혜가 됩니다. 말씀을 반복해서 듣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말씀의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에게 말씀을 반복해서 듣는 것이 즐거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게 말씀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사로잡히고 말씀에 붙들리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보는 눈이 열리고, 말씀을 해석하는 능력이 생기며, 말씀을 적용하는 힘이 길러지기를 바랍니다. 9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우리는 영적 교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나는 너보다 더 잘 믿는다, 나는 너보다 더 경건하다, 나는 더 의롭고 깨끗하다”라는 마음이 더 무서운 죄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비교합니까? 다른 이를 정죄함으로 상대적으로 자신을 과시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관점으로 비교하며 내 경건이 더 위에 있다고, 내가 더 의롭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귀히 여기는 마음을 품을 때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누구를 말합니까?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요. 물론 당시에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율법사, 제사장 같은 외식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도 바리새인이 대표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바리새인 들으라고 하신 말씀일까요? 성경이라는 거울은 누구를 보여준다고요? 성경은 누구 이야기라고요? 바로 ‘나’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비유를 읽으면서 “아, 이거 예수님이 바리새인 같은 외식하고 교만한 자들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구나.” 하면 ‘땡’ 틀린 거고요, “아! 이거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구나. 이 바리새인이 나로구나.” 하고 읽으면 ‘딩동댕’ 제대로 성경을 읽은 것입니다.
10절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가 대조되고 있지만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첫째, 두 사람 다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시편에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라고 표제어가 붙은 것만 해도 120-134편까지 15편이나 됩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올라가는 것을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84편 기자의 고백을 들어보세요. 84:10절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또한 그들은 성전에 올라가지 못하는 것을 불행으로 여겼습니다. 137편 기자의 고백을 들어보세요. 137:1절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성전에 올라가고 싶어도 올라갈 수 없어 통곡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아무 때나 맘만 먹으면 교회 나올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해 보셨습니까? 그걸 축복이라고 여겨보셨습니까? 사정이 있어 교회 나오지 못할 때 심령으로라도 통곡해 보셨습니까? 교회 가까이 사시는 분들 그게 축복인줄이나 아세요. 둘째, 두 사람 다 기도했습니다. 둘 다 기도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둘 다 기도에 대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둘 다 실제로 기도하기 위해 성전을 찾았습니다. 둘 다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둘 다 서서 기도했습니다. 둘 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자칫 바리새인과 세리의 재판관이 되려고 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성급하게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십니까? 당연히 느끼시겠지요.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면 자신이 그리스도인인지를 생각해봐야겠지요? 그럼 여러분에게 기도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까?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에서 나아가 기도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까?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듭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마음을 눌러버릴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잘 쓰는 수법은 기도를 미루는 것입니다.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가끔씩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기도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특히 교회로 가서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번거롭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잘 쓰는 말이 있습니다. ‘꼭 교회 가서 기도해야 하나님이 들어주시나?’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이 더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111운동 열심히 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바리새인들과 세리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종교지도자 계층입니다. 종교인으로서는 거의 흠잡을 데가 없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높임을 받았습니다. 로마 식민지에서 해방되는 것까지도 경건한 종교심으로 회복해야 한다는 믿었던 이른바 신본주의자들입니다. 세리는 어떻습니까? 백성들에게 천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옳은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경건과는 다소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생활과는 동떨어진 사람들입니다. 율법에도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오직 돈밖에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돈이 된다고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둘은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세리와 비교되는 것 자체를 대단한 모욕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말도 안되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인 지위로 볼 때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은 세리들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이제 두 사람의 기도를 차례로 들어보겠습니다. 11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서서 따로 기도하여’ 왜 따로 기도합니까? ‘바리새’라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자기 과시의 마음을 가지고 따로 선 것입니다. 죄가 많은 세리들과 함께 기도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예배드릴 때 누군가 불편하게 생각됩니까? 하나님께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함께 예배하고, 함께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동일합니다. 바리새인처럼 누군가와 같이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하나님께 바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드릴 때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여야 합니다. 못마땅한 것을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인정받으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바람직하며 좋은 기도의 시작입니다. 기도에 있어 감사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론 너무 성급하여 감사를 생략하고 간구부터 하는 잘못을 범하곤 하는데 그게 아니죠? 먼저 감사부터 해야 합니다. 설사 감사를 빠뜨리지 않는다고 해도 형식적인 절차로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진심어린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 때 가슴 찡~해오는 그런 감사를 해본지가 까마득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가슴 찡한 감사를 할 수 있다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대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의 순서로서 감사가 아니라 기도의 형식과 절차로서 감사가 아니라 가슴 찡한 감사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바리새인이 감사로 기도를 시작한 것은 잘했으나 감사의 내용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했습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이란 토색하는 자, 불의한 자, 간음한 자입니다. 물론 세리도 포함됩니다. “토색”이란 말에 대해 간단하게 정리하면 원어 ‘할팍스’는 ‘강탈하다’는 뜻입니다. 돈이나 물품 따위를 억지로 빼앗는 것을 말합니다. 토색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의하게 살지 않은 것에 대해, 간음하지 않은 것에 대해, 세리처럼 살지 않은 것에 대해 실제로 감사할 일입니다. 사실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그럼 바리새인의 기도에 뭐가 문제입니까? “…와 같지 아니함”이란 말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 말을 한 배경엔 ‘자기의’가 있습니다.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은연 중에 드러낸 것도 아니고,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일대일의 만남입니다. 거기서 남의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는 이렇고, 누구는 저렇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상대방보다 의롭다고 주장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 의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상대적인 의를 주장해 봤자 입니다. 절대의가 되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스울 뿐입니다. 기도란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중에 세리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의의 판단기준은 하나님이십니다. 자기가 아무리 의롭다고 주장해도 하나님이 너는 불의하다고 판정하면 불의한 겁니다. 아무리 자기의가 다른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낫다고 증명해봤자 ‘그래도 내 앞에서는 불의하지 않느냐?’고 하시면 할 말 없게 됩니다.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계속하여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어보겠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중요시 했는데,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무관심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금식입니다. 금식을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한 끼만 건너뛰어도 얼마나 배가 고픕니까? 하루 한 끼 금식하는 것도 큰 맘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또 어쩌다 금식을 해도 대체적으로 연중 행사입니다. 경건생활을 위해서 한다면 삼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절박한 사정이 있다고 해도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자기 경건을 위해서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더러 그렇게 하라면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중 누구도 그들의 종교적 열정을 따라갈 수 없을 겁니다. 그럼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금식한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율법에서도 1년에 하루는 금식할 것을 요구합니다. 7월 10일 대속죄일에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금식합니다. 그 때는 금식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강제성을 띈 국가적 행사였습니다. 그 외에도 금식해야 하는 경우가 나오지만 율법에서 강제 조항은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 랍비들이 훗날 일주일 중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는 조항을 삽입하여 장로들의 전통으로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법을 스스로 지켰다며 하나님 앞에서 자랑한 셈입니다. 사실 율법을 지킨 것도 의일 수 없을 진대, 전통을 지킨 것을 의로 내세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는 아니겠지만, 처음의 자기 경건을 위한 목적에서 벗어나 일주일에 이틀 금식하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게 되었습니다. 특히 여러 사람들 앞에서 금식하는 것을 자랑하곤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다 하셨겠어요. 마태복음 6:16-17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참 보다보다 못해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오늘 예수님이 예로 든 바리새인도 그 점에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식으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또 바리새인은 자신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합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유했는데,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재물 또는 돈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 중에 십일조를 하지 못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를 하기는 하는데 수입이나 소득의 십일조를 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하지 않습니다. 편법적인 십일조를 하는가 하면 모양만 내는 십일조를 하기도 합니다. 이에 비해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철저히 했습니다. 여기서 ‘소득’의 원어 ‘크타오마이’는 ‘획득하다’는 뜻 외에 ‘소유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월급과 같은 일정한 수입은 물론이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율법이 정한 규례를 훨씬 능가하는 십일조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적 열성은 오늘 우리에 비해서 더 뛰어났으면 뛰어났지 뒤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럼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십일조를 철저히 한 것을 의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걸 내세우면서 하나님께 보상을 요구하는 듯한 자세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일조는 했으나 십일조의 정신은 몰랐던 것입니다. 여러분, 십일조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란 고백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란 고백입니다. 내가 그분의 것을 맡고 있는 청지기라는 고백입니다. 요컨대, 십일조는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조건부적 뇌물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역대상 29:14절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물론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받습니다. 그건 이미 증명된 것입니다. 그러나 복받을 목적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건 앞뒤가 바뀐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 올라와서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했으나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이제 세리의 기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세리는 성소 앞에 감히 가까이 가지도 못한 채 멀리 떨어진 구석에서 기도합니다.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에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으나,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기도합니다. 세리는 하나님을 위해 한 가지도 자랑할 것이 없고, 도리어 죄책감으로 인한 부끄러움 때문에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자신을 알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여기에 바리새인같은 자기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 곧 토색과 불의와 간음하는 자들 비교하는 것도 없습니다. 세리와 같지 않음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는 것도 없습니다. 바리새인에게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입니다. ‘저 죄인을 벌 주세요’가 아닌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했습니다. 노숙자 두 사람이 목욕탕엘 갔습니다. 둘 다 몸이 더러웠습니다. 그중 한 노숙자는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고 열심히 더러운 몸을 씻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노숙자는 비교적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던 관계로, 자신의 더러운 몸의 때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목욕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함으로 비록 목욕탕에까지는 갔으나 씻지는 않고 열심히 씻는 다른 사람더러 더럽다고 흉만 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목욕탕에서 나올 때 누가 깨끗하다고 판정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깨끗한 옷을 입고 있어도 씻지 않았던 노숙자는 더럽다고 판단 받게 될 것이고, 비록 더러운 옷을 입고 들어갔다 할지라도 씻었던 노숙자는 깨끗하다고 판단 받게 될 것입니다. 1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맺습니다.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건 정말 어처구니없는 말입니다. 진짜 얼토당토 않는 황당무계한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시지요? 자신이 아무리 깨끗하다고 우겨도 소용없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의롭다고 주장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깨끗하다고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판정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보는 깨끗함의 기준이 다릅니다. 의로움의 기준이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면 깨끗한 겁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면 의로운 겁니다. 바울의 선언을 들어보겠습니다. 로마서 8:33-34절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아멘?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면 끝난 겁니다. 이의를 제기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판결은 뒤집힌 예가 없습니다. 앞으로도 뒤집힐 가능성이 없습니다.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말은 세리가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의롭다고 인정해주신 후 응답해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기 전에 회개가 먼저여야 함을 확인해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거기다 한 마디 덧붙이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여러분을 낮추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높이실 겁니다. 여러분이 낮춘지 오래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높이실 때까지 기다리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더는 낮출 수 없습니까? 얼마간만 더 기다려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틀림없이 높여주실 걸 믿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겸손히 긍휼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앞에 나와 죄와 연약함을 인정하고 긍휼을 구하여 용서받고 의롭다는 인정을 받기를 바랍니다. 이제 전보다 더 기도하셔야 합니다. 더 말씀을 가까이 하셔야 합니다. 무엇보다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셔야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교회를 가까이 하고 예배를 우선순위 1번에 놓아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세리는 모든 것이 극과 극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앙적인 자세로 아주 달랐고 결과도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둘 다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둘 다 하나님게 기도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기대한 사람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는 둘 다 교회안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둘 다 열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신앙자세입니다. 하나는 교만했고 하나는 겸손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의로 충만했고 하나는 하나님의 의를 구했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의식했고 하나는 하나님께 집중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쪽입니까? 여러분의 신앙자세가 본문의 세리를 본받아 하나님앞에 인정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신다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지난날,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며, 교만하게 살아왔음을 회개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비를 구합니다. 사랑과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하는 가족들로부터도 인정받고, 주의 종들로부터도 인정받고, 교인들로부터도 인정받고, 세상 사람들에게까지도 인정받고, 진정한 의로운 자라 인정받아 주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 눅 18:15-17
2002년 3월 2일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 사는 ‘저스틴 채프먼’이라는 8살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3살 때부터 천재성을 나타내어 “스탠퍼드 비네”라는 지능테스트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습니다. 5살 때 온라인으로 고등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6살 때 뉴욕의 로체스터대학에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때 받은 IQ테스트에서 298점을 받았고, 미국 대학입학 능력시험인 SAT에서는 주요과목에서 만점인 800점을 맞았습니다. 2001년 7월에 영재를 위한 브리든 스쿨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엔 곧 잘 했지만 11월부터 모든 수업을 거부하더니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등 정신이상증세를 보이면서 급기야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 일로 채프먼의 어머니는 어린이 보호태만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채프먼의 어머니가 하는 말이 “채프먼의 IQ테스트는 조작했고, SAT성적은 이웃집 아들의 점수를 훔쳤으며, 스탠퍼드 비네의 지능테스트는 대신 답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열등의식 때문에, 자녀에 대한 지나친 애착이 자녀를 망가트려 놓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 대한 관심을, 먼저 신앙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고, 인격적인 성숙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어린이에 대한 관심은 도가 지나치다고 해도 너무한 감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관심을 가져야할 것에 대해서는 전연 관심이 없고 무관심해야할 일에 대해서는 너무 하리만치 관심을 두는 일이 있습니다. 육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고, 영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 교육에는 관심이 많으면서도, 영적인 교육에 대해서는 전연 관심이 없습니다.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1920년대 일제식민지 시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어린이’란 말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이를 보고 ‘이놈’ ‘애새끼’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소파 방정환 선생이 일본유학에서 돌아와 아이들에게 존댓말 쓰기 운동으로,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한 것이 ‘어리신 이’입니다. 이 말을 줄여 ‘어린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는 아이들에 대한 존댓말입니다. “어린이는 여기 앉아라.” 하면 안 되고 “어린이들은 여기 앉으십시오. 앉으시지요.” 이렇게 말해야 문법적으로 맞는 말이 됩니다. 어른을 보고 ‘어르신은 밥 먹었나?’ 하는 말이 안 맞는 것처럼, ‘어르신 진지 잡수셨어요?’라고 하는 존댓말이 맞는 말입니다. “어린이 밥 먹었나?” 하는 말도 문법적으로 안 맞는 말입니다. “어린이 진지 잡수 셨어요?” 하는 말이 맞는 말입니다. 어린이에 대해 사용하는 언어부터, 어린이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된다는 뜻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요즘 아이들”하면 어떤 생각, 어떤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시는지요? 사실 요즘 아이들은 옛날 같지 않습니다. 다음은 인터넷에 올려진 어느 유치원 수업 시간의 이야기입니다. 선생님이 ‘오늘은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해주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 하나가 ‘선생님, 백설 공주, 신데렐라 같은 시시한 이야기 말고요, 액션 스펙터클 서사시로 해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식은땀을 흘리며 ‘아, 알았어요. 그럼 오늘은 인어공주 이야기를 하겠어요.’ 다른 아이가 ‘인어 공주 이야기는 안데르센 버전인가요? 아니면 디즈니 판 애니메이션 버전인가요?’라고 말하니 선생님이 ‘착한 어린이는 그런 거 묻는 거 아니에요. 조용히 선생님 얘기 들어야죠.’라고 말하니까 아이들은 기대 반, 의심 반인 표정으로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이 ‘옛날 아주 먼 옛날 깊고 깊은 바다 속에 인어들이 살고 있었어요.’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니까 또 다른 아이가 ‘거기서 인어란 듀우공이나 돌고래를 선원들이 착각한 것인가요? 아니면 고기를 먹으면 800년을 산다는 일본 인어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물귀신인가요? 그러고 보니 판타지 소설에 가끔 나오는 인어도 있군요.’ 이게 요즘 아이들의 수준이라는데 이해가 되십니까?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 할머니가 각각 9살, 6살짜리 두 손자를 데리고 야외로 나갔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 과일, 그리고 컵 라면에 보온병까지 다 준비해 가서 아이들에게 컵라면을 끓여주었더니, 6살짜리 작은 손자가 할머니를 보면서 “이 라면은 도대체 누가 해 준거야? 이렇게 맛있을 수는 없는데” 하면서 능청스럽게 말하더랍니다. 그러자 9살짜리 큰 손자가 “우리 할머니가 해 주는 것은 전부 다 맛있어. 근데 오늘은 좀 더 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가 기분이 좋아서 과일을 챙긴다고 한 눈을 파니까 손자 둘이 엄지손가락을 척 올리면서 “이렇게 말해줘야 다음에 또 주지” 하더랍니다. 이상의 이야기들이 과장된 것일 수도 있고,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변한 것만은 사실이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보신 아이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요즘 아이들은 예전 우리와는 달라” 하면서 ‘도무지 아이 같지 않은 아이들, 시끄럽고 산만한 골칫거리들, 어른 속만 썩이는 것들’ 등 여러 생각이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아이들 하면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겉과 속이 동일한 순수함, 천진난만한 미소와 맑은 웃음소리, 내일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노래하는 것, 그리고 미래의 기둥이자 나라의 보배’ 등의 이미지들입니다. 이런 아이의 이미지에 대해 전 숭실대 철학과 교수였던 안병욱 선생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어린이는 신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다. 어린이는 미의 극치요 아름다움의 정상이다. 어린이의 맑은 눈동자는 수정처럼 아름답다. 어린이의 고사리 같은 손은 볼수록 귀엽다. 어린이의 부드러운 피부를 보라, 희고 연하고 따뜻하고 보드랍다. 어린이가 평화스럽게 잠자는 모습은 흡사 어린 천사와 같다. 어린이의 맑은 웃음 속에는 아름다운 천국의 표정이 있다. 눈에 넣어도 조금도 아플 것 같지 않은 그 귀여운 모습. 소꿉장난에 일심분란으로 열중하는 어린이의 정열, 자유자재로 상상화를 그리는 어린이의 분방한 천재성, 어린이는 분명히 신의 귀여운 자녀다.” 대단한 어린이 예찬입니다. 그렇죠? 그러나 이보다 더 아이들을 예찬하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본문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자기 아이들을 데려 온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5절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같은 일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은 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온 이유를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서”(19:13)였다고 말하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막 10:13) 그러니까 부모들이 자녀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이유는 ‘예수님께서 아이들의 머리에 안수하셔서 축복기도해 주시기를 바라서’였다는 말입니다. 부모들이 이렇게 한 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전에는 ‘속죄의 날’ 저녁에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이 아이들을 축복하며 기도한 관습이 있었는데, 그것이 점점 사라져 그것에 아쉬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은 다를 것이라 여겨 데리고 온 것이죠. 그렇게 부모들과 함께 온 아이들 중에는 제법 자란 어린이들도 있었고,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품에 안고 기도하신 것을 보면 아주 어린 아기들, 곧 젖먹이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부모들이 어린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일에 대해 짜증을 내고 화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자들의 이러한 태도는 당시 상황으로서는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어린이는 하찮은 존재들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주전 1년 6월 17일로 서명된 알렉산드리아의 파피루스 사본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사본에는 한 남자가 장차 자신의 아내 될 사람에게 보낸 편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남자는 아내가 될 사람에게 장차 아이를 낳게 되면 “남자는 살려두고 여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예수님 당시 아이들이 철저하게 무시되고 멸시받는 존재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였을까요? 초대 교회 교부인 ‘저스틴’의 변증서 1장 27절에 보면, 당시는 어린아이들을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았다는 것, 아마도 딸일수록 더더욱 숨기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든 지도층 인사가 공개적으로 아이들을 안고 축복하는 일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제자들이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 온 사람들을 꾸짖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어린이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을 제자들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곧 제자들 역시 당시 지도자들처럼 부모들이 지극히 하찮은 존재들인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한다고 여겨 분노하여 꾸짖은 것입니다.
16절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 나리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나 제자들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먼저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에게로 오는 어린 아이들을 막는 것을 보시고는, 일단 그 아이들을 자기에게로 오게 한 뒤, 그 아이들을 안으시면서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죠.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아이들을 데리고 온 그 부모들이 난처해하지 않도록, 예수님은 그들을 먼저 배려하신 후 제자들을 나무라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세상 나라의 관습은 아이들을 무시하고, 아이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나다니는 것을 금하고, 아이들이 어떤 행사나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 들어오는 것은 그 행사를 훼방하는 것이라 여길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그 아이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고 행동하고, 또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용납하는 곳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후 예수님은 그 부모가 자기에게 데려온 어린 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의 머리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존중하시면서 그들의 인격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은 당시로 볼 때 굉장히 파격적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아이들이, 그리고 아이들에 관한 일이 세상 그 어떤 일보다 우선적이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의 사고와 가치와 전통을 깰 정도로 아이들을 품고 기도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이 일은 오늘의 기성세대에게, 지금의 교회에게, 그리고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와 교회는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여주셨으니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을 축복하고 돌보고 잘 가르치는 일을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의 교회와 기성세대가 어린이들을 예수님처럼 중요하게 여기고 있을까요? 40년 전, 미국 필라델피아의 어느 작은 교회에서 세 명의 아홉 살짜리 아이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교회는 재정 형편이 어려워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세례를 받은 세 명의 아이들 중 한 명이 ‘토니 캄플로’라는 사람인데, 그가 펜실베니아주에 있는 이스턴 칼리지의 유명한 사회학자이자 저명한 저술가가 되었습니다. ‘토니 캄플로’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나는 내가 속해 있는 교단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세례 받던 해의 그 교회의 보고서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내 이름이 있었고, 딕 화이트와 버트 뉴먼의 이름도 있었다. 딕 화이트는 현재 선교사로 나가 있고, 버트 뉴먼은 지금 아프리카의 한 신학교 교수로 있다. 그런데 내가 세례 받던 그 해, 그 교회의 보고서는 이렇게 되어있었다. ‘올 해 우리 교회는 별로 좋지 않았다. 27명이 교회를 떠났고, 세 명만 새로웠는데, 모두 아이들뿐이었다.’” 이 글에서 토니 캄플로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세례를 받던 해, 그 교회는 27명의 어른이 교회를 떠난 것과 겨우 아홉 살짜리 세 명의 어린이가 세례를 받은 것을 비교하면서 ‘실패였다’고 평가하면서, 그래서 ‘교회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고 보고한 그 판단이 얼마나 잘못 되었냐는 것입니다. 왜 잘못 되었습니까? 그 교회가 문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세례 받았던 세 명의 아이들은 27명, 아니 270명의 어른들이 해내지 못했던 위대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른 27명은 교회 문을 닫게 만들었지만, 아이 세 명은 열방으로 흩어져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미국 교회가 존경하는 부흥사인 D. L. 무디가 교회학교 교사를 하면서 전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전도 후 그가 올린 보고서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두 사람 반을 전도했습니다.” “두 사람 반”이라는 말에 사회자가 “아! 알겠습니다. 어른 두 사람과 아이 하나를 전도하셨군요”라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러자 무디는 사회자에게 대답했습니다. “거꾸로 얘기하셨습니다. 저는 어린이 두 사람과 어른 한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어른들은 인생을 벌써 절반 이상 산 사람이기 때문에 엄격하게 말하면 반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아직 일생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의 인생이 아닙니까?” 아이들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인식이 무디 당시 교회, 심지어 한 교단 안에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아이들의 가치를 예수님처럼 보고 있을까요? 젊고 제대로 갖춘 새가족이 교회에 등록하는 것보다, 한 어린이가 등록하는 것을 저나 여러분이 더 가치 있고 귀한 일로 여기고 있습니까? 혹시 저와 여러분 속에도 제자들처럼 아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귀찮아하고, 그래서 손사래를 하면서 거부하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기 바랍니다. 아이들에게서 여러분의 내일을 보고, 아이들을 통하여 20, 30년 뒤의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를 보고, 아이들에게서 미래의 세계와 주님의 나라를 보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요즘 아이들이 아이답지 못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만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맞벌이 주부가 인터넷에 다음의 글을 올렸습니다. 시부모님이 단식 투쟁을 벌이면서, 어린 손자 돌보기를 거부하고 있어 힘들다는 글입니다. 그 이유는 올해 칠순이 되신 시아버님이 해외여행을 보내달라고 하셨는데, 형편이 어려워서 보내드리지 못한 것 때문이랍니다. 부부의 입장에서 보면, 부모님에게는 달랑 아들 하나,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는 맞벌이를 하고 있었고, 게다가 며느리는 둘째 임신 중이어서 곧 출산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 ‘도무지 형편이 안 되니, 어머님 칠순 때 보내드리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싫다면서 두 분이 식사를 거부하고, 첫째 손자를 돌보지 않고 있어서 미칠 지경이라고 글을 올렸습니다. 어디 이 뿐인가요? 요새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릴 때 우리들에게는 공부해라, 무럭무럭 잘 자라라고 해 놓고서는, 어느 날 보니까 어른들은 어릴 때 그대로 멈추어있더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이 볼 때, ‘어른들은 도무지 변하지 않고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도리어 아이처럼 변해가는 어른들 때문에 힘들다’는 말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도 어른이지만 어른답지 못한 사람들이 그 배경입니다. 오늘 본문 앞의 9절을 보면,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과 “세리”를 비교한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은 바리새인들을 가리킵니다. 곧 바리새인들이 자기를 자랑하고 내세우기 좋아하는 아이들과 똑 같다는 말입니다. 이런 모습을 ‘아이 같다’고 하지 않고 ‘유치하다’고 말하지요. 그 뿐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의 문제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종종 자기들끼리 “누가 더 큰 자인가?”를 물었고, 또 예수님께도 그것을 물었습니다. “우리 중 천국에서는 누가 더 크고 높은 자가 될 것인지요?” 이러한 생각은 초창기부터 그들 사이의 갈등을 일으켰으며, 심지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중에서 누가 크냐는 것이 그렇게 큰 관심사냐? 나는 항상 낮아지고 작아지라고 가르치지 않았니? 그런데도 너희들은 여전히 누가 크냐 에만 매달려 있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상대방과 비교해서 ‘내가 너보다는 크다, 넌 내 아래야’하는 것이 얼마나 유치합니까? 아이들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제자들의 모습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이들을 안으시고는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다. 누가 낮고 크고 높으냐를 따지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이 아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의도는,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 제자도를 가르치기 위한 일종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다운 모습이 제자의 참 모습이라는 말이죠. 17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오늘 본문은 단지 ‘어린아이들’만을 지칭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자”란 나이가 어린 사람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이 낮고 약한 장애우나 환자들, 경제적으로 낮은 자들인 가난한 사람들, 당시 사회에서 죄인으로 취급당하던 세리나 창기나 소외된 자들, 그리고 고난 받는 자들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 역시 아이들처럼 공식적인 자리나 랍비 앞에 공공연히 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신 것이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신 것은 어린아이들 뿐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죄인이나 부정한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 무시당하는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말씀드린 대로 당시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제자들까지 세상적인 기준으로 사람들을 보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중요한 사람, 중요하지 않은 사람, 가치 있는 사람, 가치 없는 사람, 가까이 하고 사귀면 득이 되는 사람, 손해 볼 사람’을 구분한 것이죠.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화가 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리고 주님의 교회에서는 중요하지 못한 사람도 대접받고, 환영받고,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연약하고 부족하여 무시당한 사람들이, 그래도 환대받고 인정받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요, 교회여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이들과 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저는 이것을 성경원어를 가지고 설명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어린 아기”는 성경 원어로 ‘브레포스’인데요. 그 뜻은 ‘태아, 유아, 갓난아기’입니다. 어린 아이를 뜻하는 또 다른 단어는 “파이디온”입니다. ‘어린아이’ 또는 ‘유아’를 뜻합니다. 이 단어들을 종합해 보면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 앞에서 아이처럼 된다’는 말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 의존하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엄마의 뱃속에 있는 태아는 100% 전적으로 엄마를 의지합니다. 갓난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부모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또 부모가 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이들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 곧 천국의 아이들입니까? 아이처럼 오직 하나님을 믿고 신뢰합니까? 아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합니까? 그리고 아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까? 두 번째로 ‘아이처럼 되라’는 말은 ‘순전하게 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솔직하고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에 비해 훨씬 솔직하고 진실합니다. 무엇이든 숨겨두지를 못합니다. 유럽 속담에 “아이들은 거짓이나 비밀에는 쓸모가 없다”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거짓이나 비밀을 잘 저장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어른들이 “이 말은 절대로 하지 마라”고 하면, 그 말까지 그대로 전합니다. 이것을 순수하고 맑은 “동심”이라고 합니다.
어린이의 순진함에 대해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 예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른 잔디에 새 풀이 나고 나뭇가지에 새 움이 돋는다고 제일 먼저 기뻐 날뛰는 이는 어린이다. 봄이 왔다고 종달새와 함께 노래하는 이도 어린이고, 꽃이 피었다고 나비와 함께 춤을 추는 이도 어린이다. 별을 보고 좋아하고 달을 보고 노래하는 이도 어린이요, 눈 온다고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 산을 좋아하고 바다를 사랑하고 큰 자연의 모든 것을 골고루 좋아하고 진정으로 친애하는 이가 어린이요, 태양과 함께 춤추며 사는 이가 어린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기쁨이요 모든 것이 사랑이요 또 모든 것이 친한 동무다.’ 이처럼 어린아이는 순수합니다. 가면 쓰고 살면서, 또는 이중적인 태도를 하고 살면서도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는 어른과는 다르지요. 하나님 앞에서 아이와 같은 사람들은 그 마음속과 겉으로 드러나는 얼굴이 같은 사람입니다. 순수하고, 의롭고, 정직하고, 이중적이지 않으며, 매사에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은 사람, 그가 하나님의 나라의 어린이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아이처럼 되라’는 말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낮춘다(타페이노오)’는 말은 자신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을 무엇 아래로 끌어내려야 합니까? 1) 하나님 아래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보다 높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없이도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하나님 없이도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천국 백성이 아닙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오직 주님의 은혜와 그 능력 안에서만 할 수 있다. 아무리 작은 일, 사소하고 하찮은 일이라도 나는 주님 없이는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영적인 아이이고 천국의 아이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자기를 낮춘다는 말은 스스로를 다른 사람 아래로 끌어내리는 뜻합니다. 미국의 흑인 교육가인 ‘조지 워싱턴 카버’는 유명한 식물학자로 앨라배마 주에 있는 터스키기 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그 지역 부자들이 살고 있는 동네를 산책하고 있었는데요. 그때 어느 백인 여인이 그를 ‘그냥 일없이 지나가는 흑인이려니’ 생각하고는 ‘몇 달러 줄 테니 장작이나 패 달라’고 했습니다. 총장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데다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장작을 패서 그녀의 벽난로 옆에 차곡차곡 쌓아주었습니다. 일이 다 끝나 그가 돌아간 후, 그 집의 하녀가 주인에게 그가 ‘터스키기 대학의 신임 총장’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그러자 그 부인은 너무 부끄럽고 당황해서 다음날 총장실로 찾아가 백배 사죄했습니다. 그러자 워싱턴 총장은 “부인, 괜찮습니다. 저는 가벼운 육체노동을 좋아합니다. 그 뿐입니까? 이웃을 돕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요.” 하며 도리어 위로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은 이렇게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낮추는 사람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천국에는 아이들만 있겠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대로, 나이가 어린 아이들이 그 순수함과 겸손함과 신뢰함으로 주님을 잘 믿기에, ‘천국에는 어른 인구보다 어린 인구들이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비록 몸은 어른이라도 아이처럼 순수하고 겸손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천국에 많을 것이기 때문에, 천국은 아이 같은 사람들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이들인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엄마의 손을 꼭 쥐고 편하게 잠든 아기처럼,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로 인해 평안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운전하는 차라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잠들 수 있는 아이처럼, 여러분의 인생살이, 세상살이가 하나님의 품안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 때문에 언제나 즐거운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저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아이들이 도무지 아이 같지 않다.’ 또 ‘어른들 또한 어른답지 못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아이들이 진정한 ‘아이다움’을 회복하기를 바라신다 말씀하셨고, 어른들 역시 ‘어른스러움’을 간직하면서도, ‘아이들의 소중한 가치를 잃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두 가지는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같은 것입니다. 아이들이 아이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어른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른이 좋은 모델이 될 때, 아이들이 아이다움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과 이 땅의 아이들을 사랑하는 길은 둘 다 같은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자녀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자녀의 모습을 갖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더 순수하고, 더 거룩하고, 더 의롭고 바름으로서 천국의 참된 아이와 같이 되자는 말입니다. 우리의 자녀들과 다음 세대들이 바로 그것을 보고서, 아이다움과 천국백성다움을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것을 본 아이들이 이 땅에서, 그리고 주님 앞에서 ‘참 아이’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2020년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할 때 만입이 있어도 다 감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의 그 모습으로 변화되어서, 주님 앞에 가장 순수하고, 또 주님의 은혜를 받은 그대로 가장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으로 섬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당신의 관심은 무엇인가요? / 눅 18:18-30
유재덕의 저서인 ‘소중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131가지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큰 교회에 한 사내가 모자를 쓰고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안내자들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어찌된 일인지 모자 벗기를 거절했습니다. 옆에 나란히 앉은 그 교회 신자들도 거듭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님 역시 내심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문 앞으로 가서 사내를 기다렸습니다. 목사님은 그 사내에게 예배에 참석한 것에 감사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참석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예배 시간에는 모자를 벗는 것이 교회의 예법에 어울릴 것이라는 지적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내가 목사님을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일부러 내서 저와 대화를 나눠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예배에 초대해 주신 것도 무척 기쁩니다. 사실 저는 3년 전부터 이 교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저에게 관심을 갖기는 오늘이 처음입니다. 3년 동안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오늘에서야 비로소 안내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순전히 제가 쓰고 있는 이 모자 때문에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늘 바쁘게 지나가시기만 하던 목사님과 직접 몇 마디 대화를 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요.” 사람은 관심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관심을 받고 싶어 하고 동시에 관심을 주고 싶어 합니다. 도무지 관심이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사람은 관심을 갖고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관심없이는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에 관심을 갖느냐입니다. 어떤 일에 관심을 갖느냐 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과 이웃에 대한 관심입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께 관심을 수평적으로는 이웃에 관심입니다.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만 무관심해도 안됩니다. 그런데 비신자들은 하나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무관심한 채 이웃에만 관심 있습니다. 물론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웃에게 다정한 관심을 가짐으로 호감을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관심에서 이웃에 대한 관심이 나와야 합니다. 워싱턴에 있는 어느 교회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평소 교회를 잘 출석하지 않던 교인의 전화였습니다. 그 교인이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번 주일에 대통령이 우리 교회 예배에 참석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목사님이 그 교인에게 대답했습니다. “예, 아직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그 예배에 참석하셔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전화를 건 그 사람은 예수님께 대해선 관심이 없었고 대통령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님께 대한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내심 두렵습니다. 폴 틸리히는 신앙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신앙이 무엇이냐? 궁극적인 관심이다.” 여러분의 궁극적인 관심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최종적인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도 돈에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일수록 돈에 관심을 더 가져야 합니다. 비신자들은 돈을 ‘얼마나 버느냐?’에만 관심을 가지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돈을 ‘얼마나 버느냐?’에는 물론이고 ‘어떻게 버느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떻게 쓰느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돈이 필요하고 돈의 유익한 점이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돈이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도 권력에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일수록 더 권력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비신자들은 권력 자체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때론 자기의 힘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권력을 남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권력을 잡느냐?’와 ‘어떻게 권력을 쓸 것이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권력을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권력은 필요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지만 권력이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도 행복에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일수록 더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행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행복을 추구해야 합니다. 비그리스도인은 행복 자체에 관심을 갖습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행복에 관심을 갖되 행복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행복의 목적이 주님께 있습니다. 내가 행복해야 할 근본적인 이유가 주님을 위해서 입니다. 내가 행복해 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이고, 내가 행복하게 살 때 나를 통해 예수님이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어떤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왕이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행복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되는 비결을 물었습니다. 한 사람이 묘안을 주었습니다. ‘전혀 근심이 없고 행복한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이 입은 속옷을 입으면 행복해 질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신하들에게 세상에서 걱정이 없고 행복하기만 한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의 속옷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왕의 명을 받은 신하들이 나가서 행복한 사람을 찾아다니다가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세상에서 걱정이 없고 정말 행복하기만 했습니다. 왕의 신하들이 그에게 정중히 부탁했습니다. ‘임금님께 드리려고 하는데 당신의 속옷을 좀 벗어 주시겠습니까?’ 그 사람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속옷이 없습니다.’ 속옷 한 벌 없이 살아도 임금보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단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의 궁극적인 관심으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궁극적인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아도 예수님을 잃으면 사실은 모든 걸 잃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얻었습니까? 여러분은 모든 걸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만 빼고 다른 것은 다 얻었습니까? 사실 여러분은 모든 걸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을 보세요. 그가 어떤 사람입니까? 행복의 조건을 두루 갖춘 사람 아닙니까? 18절에 보면 그는 관리입니다. 관리란 통치자, 또는 방백을 말합니다. 하급 관리가 아니고 꽤 높은 지위에 있는 권력자였습니다. 23절에 보면 그는 큰 부자입니다. 그냥 부자가 아니라 큰 부자였습니다. 갑부라는 말입니다. 그는 자기가 돈을 쓰고 싶을 때 언제라도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권력과 돈을 한꺼번에 가진 사람입니다. 비그리스도인이 볼 때 가장 이상적인 모델입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사람입니다. 거기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그는 청년입니다. 20절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돈 많죠. 사회적인 지위 있죠. 거기다 청년이죠. 이만하면 일등 신랑감입니다. 다른 건 굳이 물어볼 것도 없는 완벽한 사윗감입니다. 그는 모든 걸 다 가졌습니다. 아주 완벽한 조화를 갖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 21절을 보세요.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그는 율법을 다 지킨 사람입니다. 도덕적인 사람입니다. 윤리적인 사람입니다. 정말 빠진 데가 없습니다.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이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 중에 그만한 사람이 흔하지 않았습니다. 18절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흠 잡을데 없는 그런 그에게도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 고민은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민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니고데모처럼 밤중에 찾은 것은 아니지만 은밀하게 찾은 듯 합니다. 그 자리에 제자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떤 고민입니까? 영생에 대한 고민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에 대한 고민은 인생의 근본적인 고민입니다. 지금까지 살다간 모든 사람들이 영생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어떻게 영생할 방법이 없을까에 대해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었습니다. 사실 인류가 영생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전도서 3:11절상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과는 달리 지으셨습니다. 그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영생을 소망하도록 지으셨습니다. 영생을 꿈꾸도록 만드셨습니다. 오히려 영생에 무관심한 것이 비정상적입니다. 그런데 영생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생을 말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취급을 받습니다. 비합리적인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반지성적인 사람으로 대우를 받습니다. 왜 그들이 그럴 것 같습니까? 마귀에게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보이는 현실이 전부라고 합니다. 보이는 것도 믿을 수 없는 데, 보이지도 않는 것을 어떻게 믿느냐는 그럴듯한 논리를 폅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합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죽은 다음에 생각할 문제라고 합니다. 죽으면 다 끝이니까 살아있을 때 맘껏 즐기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세상의 부와 명예를 위해서 자기 영혼을 마귀에게 팔아넘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꼭 드러내놓고 사탄을 숭배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무관심한 사람, 하나님을 적대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죽음이 코앞에 닥쳤을 때에 비로소 죽음 이후를 생각할 것입니다. 영원한 삶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희미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까지 기다리시겠지만, 대부분은 스스로 포기해버릴 것입니다. 스스로 지옥행을 택하고 말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권력 있고, 돈 있고, 젊음 있고, 도덕적인 사람이었지만 한 가지가 없었습니다. 영생이 없었습니다. 그는 남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일찍이 얻었지만, 자기에게 없는 것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없으면 안되는 한 가지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는 탁월한 사람입니다. 영생에 문제로 고민했다는 점에서 그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영생에 한 걸음 다가 선 사람이고 천국에 한 발 가까이 간 사람입니다. 뭔가 희망이 있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질문에 다소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영생을 얻고자한 것까지는 문제될 게 없습니다. 그의 문제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입니다. 생명은 태어나는 것이지 무엇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비싼 대가를 지불해도 생명을 살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보화를 다 주어도 생명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영생을 무엇을 하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왔습니다. 노동의 대가를 지불했더니 재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실력을 갖추고 열심히 했더니 권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젊음도 율법도 노력한 만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가만 지불하면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영생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27절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영생은 사람의 손에 달려 있는 게 아닙니다. 영생은 사람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영생은 사람의 힘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힘써도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베소서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때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얻은 사람의 행위가 너무나 중요하지만, 행위 때문에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의 행위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1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잠자코 부자관원의 말을 듣고 있던 예수님이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하다고 일컫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악하다거나 죄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자신에게로 향한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게 하셨습니다. 사람을 보면 스스로를 선하다고 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기에, 예수님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 철저히 아버지를 높이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께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그 경계를 넘지 않으셨습니다. 20절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관원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율법에 자신 있어 함을 아시고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어떤 계명입니까? 십계명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7계명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6계명입니다. 도적질하지 말라는 8계명입니다.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9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5계명입니다. 젊은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21절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이 계명들에 대해 사람의 수준에서 보면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킨 사람입니다. 간음을 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살인을 했다거나 도둑질도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에게도 효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수준에서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판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계명 정신이 뭡니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간음하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을 살인한 것입니다. 남의 것에 마음이 가는 것도 일종의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거짓 증언하는 것,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 등 무엇하나 완벽하게 지켜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는 말은 자기 수준에서 하는 말일뿐입니다. 주님께서 보실 때는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22절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말도 안되는 소리말라’고 나무라셨습니까? 아니지요? ‘네가 계명의 정신에 대해 무식해서 그렇다’며 핀잔주지도 않았습니다. 젊은이의 사기를 꺾고 싶지 않았던 모양인지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여러분 같았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처럼 있는 그대로 용납했을 것 같습니까? 사람을 세우는 사역자의 길은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부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판단부터 합니다. ‘예수 믿은 지 몇 년이나 됐는데 그것밖에 안되느냐?’ ‘집사된지 몇 년인데 아직도 겨우 그 정도 밖에 안되느냐?’ 인내하며 기다려주지를 못합니다. 짐승을 길들이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하물며 사람을 키우고 세우는 일이 단시간에 가능하겠습니까? 한 사람이 믿음의 사람으로 든든히 서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말씀의 사람으로 탄탄하게 서는 데는 긴 시간이 소요됩니다. 믿음이 제대로 서지 못한 것을 보고 조급하게 판단하지 마세요. 말씀에 확고히 서지 못한 자신을 향해 실망하지도 마세요. 다시 말씀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넘어진 여러분을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을 붙들고 일어나길 원하십니다. 22절을 보세요. 예수님은 부자 관원이 너무나 자신있어 함을 보시고 특별한 제안을 하십니다. 계명을 다 지켰다고는 하지만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까 이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차라리 있는 것을 다 팔아서 예수님께 가져오라고 했으면 한 자리 보장해주려나 싶어서 순종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십니다. 그냥 따르라고만 했으면 따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빈털터리로 따르고 하십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고, 빈손으로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은 자기 의를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걸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부와 권력이 그의 삶을 지탱해주었습니다. 이제 그걸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걸 놓을 때 하늘의 보화를 잡을 수 있고, 그걸 버릴 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23절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얼마 전까지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던 부자의 모습은 오간데 없고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충만해졌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영생에 관심을 갖고 찾아온 그가 정작 영생의 길을 제시받고는 영생을 포기하고 맙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다’는 인사를 하고 떠났지만 예수님 앞을 떠나는 순간 그가 바라던 영생은 물 건너가고 말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있는 우리에게 이 명령이 주어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찬송가 50장 1절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네 사랑하고 의지하여 주만 따라 살리라 주께 드리네 주께 드리네 사랑하는 구주 앞에 모두 드리네’ 찬송가 215장 1절 ‘내 죄 속해 주신 주께 힘과 정성 다하니 나의 온갖 언행 심사 주를 위한 것일세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바치리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바치리’ 이렇게 고백하는 우리에게 “네가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마음의 보좌를 예수님께 내어드렸다고 하면서, 가진 소유에 대해서는 권리양도가 잘 안됩니다. 우리가 욕심이 많아서일까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출발이 잘못되었습니다.
24-25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근심하고 돌아서는 청년을 보시며 하나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이 세상 것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장애물이 된다는 뜻만 가진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자기 것을 많이 가진 사람, 자신이 남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저런 일을 했다’고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 곧 영생을 얻는 것이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뜻의 말씀입니다.
26절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오늘 본문에는 이 청년의 질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를 듣고 본 사람들 역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물음은 ‘저런 청년도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구원을 얻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청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약적으로 볼 때 부귀는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여겨졌으며, 또 율법적으로 볼 때 청년은 거의 완벽할 정도로 율법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의 사람을 찾아보기가 정말 어려운데도 ‘안 된다’ 하시니, 무리들은 ‘이런 사람마저 안 된다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27절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사람의 힘이나 방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자들인 듣는 자들의 질문을 통하여 알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그 관리처럼, 이스라엘 최고의 가문에, 높은 지위에, 또 부자에, 거기다가 율법에 충실한 경건성과 영적인 고민까지 갖춘, 그야말로 가질 것 다 가진 사람들이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말 어렵지만, 구원 곧 영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서, 하나님은 세상적으로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가진 것을 포기한다는 게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합니다. 사실 크든 작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전적으로 포기하는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회개도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제대로 회개합니다. 믿는 것도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야 믿습니다. 사람의 행위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습니다. 구원이란 인간이 가진 조건이나 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28절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우리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보세요. 그들은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을 때 모든 걸 버리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진 채로 따랐습니다. 가진 것 위에 더 가질 목적으로 따랐습니다. 그러니 지금 와서 버리라고 한다고 버릴 수 있겠습니까? 아마 ‘네 가진 것을 다 버리라’고 하면 ‘에이, 예수님도 농담하지 마세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이제 와서 하세요? 하실려면 좀 진즉 하시지 않고’라고 대답할지 모릅니다. 다 버리는 것은 놔두고라도 재산의 십일조만 드리라고 할 때 과연 여러분 중에 순종할 분이 얼마나 될까요? 교회가 돈이 필요해서 집을 은행에 담보로 잡히게 하자고 할 때 선뜻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교회에서 몇이나 될까요? 우리가 예수 믿는 동기를 원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믿는가? 하나님을 위해서 믿는가?’ 우리가 생각하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대책없는 말씀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 쪽에서 볼 때 대책없는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은 대단히 비현실적인 말씀 같습니다. 실제로 인간적으로 볼 때 비현실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믿는 구석이 있을 때 예수를 전부로 생각하지 않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뭔가 가진 것이 있을 때 그걸 자기 의로 내세울 수 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저히 비우도록 하신 겁니다. 사실 그릇이 비어 있어야 하늘의 보화를 담을 수 있습니다. 29-30절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주님의 말씀은 ‘버림을 위한 버림’이 아닙니다. ‘포기를 위한 포기’가 아닙니다. 버림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포기 자체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포기한 사람에게, 버린 사람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늘의 보화만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세에 영생만 보장하신 것이 아닙니다. “현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이 땅에서도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풍성한 삶과 넉넉한 생활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순서가 중요하지요? 순서가 잘못되면 다 잘못됩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먼저는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받는 것입니다. 먼저는 버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얻는 것입니다. 포기하기 전에 받을 것부터 관심을 갖지 마세요. 버리기도 전에 얻을 것부터 미리 앞서가지 마세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요즘 여러분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관심이 여러분을 말해줍니다. 여러분의 궁극적인 관심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궁극적인 관심으로 삼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맞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확실합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과 만남을 삶의 최우선순위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말씀을 대하는 시간을 우선순위 1번에 배정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궁극적인 관심이 오직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삶으로서 증명해 보이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부자 청년이 구원 받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무언가가 없는지 점검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만약 있다면 그것까지 주님께 맡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의 주가 되심을 다시 한 번 고백하면서, 그 고백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자신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며,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 얻는 이 놀라운 진리를, 가까이와 먼데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 눅 18:31-34
포인세티아란 꽃이 있습니다. 이 꽃의 색깔은 유난히 붉어서 종종 예수님의 보혈로 상징됩니다. 그런데 이 화초는 아주 춥고 캄캄한 곳에서 특유의 붉은 꽃을 피웁니다. 빛이 완전히 차단되고 냉기가 감도는 공간에서 남모르게 꽃을 피웁니다. 포인세티아의 파란 잎사귀가 어둠과 추위를 견뎌내고 꽃을 피워내는 모습은 감동적입니다. 만약 포인세티아가 있는 곳에 빛이 새어 들어가면 붉은 꽃에 얼룩이 생깁니다. 심지어 비상구의 약한 불빛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데 방해가 될 뿐입니다. 포인세티아가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철저한 고립과 어둠의 세월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꽃을 피운 사람들은 한결같이 춥고 고독한 시련의 터널을 지났습니다. 이 역경의 터널을 거쳐 비로소 아름답고 성숙한 존재로 거듭났던 것입니다. 고난을 두려워하고 시련을 회피하는 사람이 인생의 아름다운 꽃을 피운 예가 없습니다. 소설가 스티븐슨은 결핵 말기의 고통 속에서 명작 ‘보물섬’을 집필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평생 자신을 괴롭힌 만성두통을 참아내며 인류에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파스칼은 청년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힌 온몸의 통증을 이겨내고 ‘팡세’를 남겼습니다. 베토벤은 청각장애의 고통 속에서 불후의 명곡을 만들었습니다. 선교사 마틴은 폐결핵과 악전고투하며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프랑스 화가 르누아르는 류머티즘으로 고통을 겪으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가 붓을 한번 움직일 때마다 얼굴에 고통의 땀방울이 맺혔습니다. 믿음의 길을 걷는 자에게도 시련의 터널이 있습니다. 건너야 할 아픔의 강이 있고 넘어야 할 고난의 산이 있습니다. 헤쳐나가야 할 역경의 수풀이 있고 지나야 할 연단의 과정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이 길을 걸었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 많은 고난을 겪습니다. 14:5절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14:19절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14:22절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바울을 통해 기록된 성서에 은혜라는 말이 90회나 나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은혜를 강조한 사람입다. 그런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우리는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공로는 철저히 배제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불의한 모습 그대로지만 의롭다고 쳐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이름하여 “칭의”라고 합니다. 칭의는 구원의 시작입니다. 아직 완전한 구원인 천국까지는 멀었습니다. 완전한 구원을 이름하여 “영화”라고 합니다. 칭의와 영화 사이에 간격이 있습니다. 그 간격이 우리의 남은 삶 곧 여생으로 “성화”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드로를 통해서 여생을 이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베드로후서 3:11절하-12절상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여생을 이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절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거룩하게 살라는 겁니다. 성화를 위해 살라는 겁니다. 칭의와 영화를 이어주는 성화의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물론 천국에는 사모하는 주님이 계십니다. 요한계시록에 표현된 데로 꿈에 그리던 곳입니다. 21: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러나 천국에 가는 길까지 황홀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문까지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7:13-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다고 했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협착하다고 했습니다. 좁은 문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협착한 길로 걸어서는 것 자체가 환난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려고 맘을 먹는 순간부터 고난의 화살은 우리를 향해 빗발치듯 날아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성화의 길을 걷지 못하게 하려고 막습니다. 예수믿고 천국가면 되지 거룩하게 사는 게 또 뭐냐며, 그렇게 예수를 심각하게 믿을 필요가 있느냐며, 제발 광신도처럼 믿지 말라며 구박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들이 세상의 영에게 조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특별한 의도없이 말하는 것 같아도, 영적으로 보면 마귀의 조종을 받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19-20절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마귀의 일차적인 목적은 우리를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알려주셨지요? 벧전 5: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게 안 되면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의 자리에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만족하면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말입니다. 계 3: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혹 여러분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믿음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것은 기뻐할 일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통으로 여러분이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경기를 다 끝난 후에 상을 받는 최후의 장소가 아닙니다. 골인 지점을 행해 달려가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최후의 승리를 보장받은 사람들이지만, 아직은 싸워야 할 영적 전투가 남아 있습니다. 누가 ‘신앙생활에 아픔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믿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씨 뿌리고 가꾸는 수고가 없이도 가을이 되면 거둘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과 함께 가는 길에도 고난이 있지만, 그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받고 인내를 배워 순금같이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31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서울입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상경하는 게 아닙니다. 서울 나들이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방에서 중앙으로 진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이유가 나옵니다. “선지자들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여기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란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된 구약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시편 22편에 보면 예수님은 사람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여 사람들의 비방거리와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될 것이며, 그분의 옷을 가지려고 제비 뽑을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죽어 간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벽에 이런 낙서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God is no where.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그 고난의 현장에서 나올 수 밖에 없는 탄식의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그 낙서 아래에 이 말을 고쳐 새로운 낙서를 써 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where의 w자를 앞의 no의 뒤에 붙여놓기만 한 것입니다. 바로 "God is now here. 하나님이 바로 지금 여기에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 죽음의 현장,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도 아파하시며 우리와 함께 고난받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참 놀라운 신앙의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죽을 때 그 고난의 현장에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난의 현장에 가슴 아파하며 계셨습니다. 또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함께 고통을 당하시며 아파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라고 합니다. 원래 이 말은 세금을 영수하고 난 다음에 다 지불되었다는 의미로 쓰여지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헬라 시대의 영수증에서 가장 잘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값을 다 지불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결코 죄의 멍에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부터 죄값을 다 받으시고 하나님의 장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지워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실 것이라고 보다 직접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 적어도 700년 전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마치 십자가 사건을 바로 곁에서 지켜본 것처럼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의 뜻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고난받는 종”이 바로 자신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53:10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 말씀처럼 자신을 속건제물로 드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는 길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난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의연하게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개인적 감정과 사사로운 뜻에 연연하지 않고 초연하게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누가복음 13장에는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이렇게 천명했습니다. 13:33 -34절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 자신이 걸어야 할 길임을 아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이방인인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에게 넘겨져 회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뱉음을 받겠으며, 채찍질 당하고 죽는 길이 자신이 걸어야 할 최후의 길임을 인식하셨습니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도 자기 길을 가셨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운명에 대해 궁금한 생각을 버리세요. 정말 불필요한 생각입니다. 영원한 삶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루하루 성실하게 사세요. 운명을 봐드린다는 점광고에 속지 마세요. 그들이 타인의 운명을 정확하게 볼 수 없고 설령 귀신의 힘을 빌려 어느 정도 맞춘다고 해도 그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운명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운명의 노예가 아닌 운명과 맞서 운명을 개척하며 사는 것입니다. 포기해 놓고 그걸 운명 탓으로 돌리지 마세요. 실패를 운명 탓으로 여기지 마세요. 그렇게 하면 마귀만 좋아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느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인됨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나의 죄를 짊어지기 위하여, 묵묵히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속죄의 어린양이 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 안에서 '죄' 또는 '죄인'이라는 말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런 말을 거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인이라고 하면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여러 가지로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평생 가슴 아프도록 느껴보지 못한 채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인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죄인의식을 가지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내가 예수님을 죽였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한 장본인이 바로 자신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램브란트(Rembrandt)라는 네덜란드의 화가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그린 다음 그 주변에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동조하는 군중들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군중들 가운데 한 사람을 자기 얼굴로 그렸습니다. “이 군중 가운데 내가 있다.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장본인이다”라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무릎 꿇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습니다. 내가 예수를 못 박는 이 무리들과 한패가 되었습니다.” 그는 겉잡을 수 없는 눈물과 거룩한 슬픔으로 인해 대성통곡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죄에 대해 괴로워하며 그것 때문에 눈물을 흘려본 경험이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자신의 죄악된 행실을 저주하며 십자가 외에는 희망이 없다며 십자가 앞에 고꾸라져본 경험이 정말 있느냐 말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느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십자가에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내 죄를 예수님께서 짊어진 대신 자기의 의를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 없는 예수님은 죄인이 되고 죄 있는 나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의를 들고 서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3:18절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불의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의를 들고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손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무조건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십니까? 의가 없는데도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십니까?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갈 수 있는 은혜를 얼마나 실감하십니까? 성령께서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만지셔서, 식어버린 은혜의 심령이 다시 한번 뜨겁게 달아오르길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수난 당하실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그 이유가 있을 겁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그릇된 환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환상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보아온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로마를 무너뜨리는 것은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메시야 사상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아닐까 했는데 그가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이번에는 예수님이 틀림없다고 여기는 분위기였습니다.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도, 예수님을 위해 궂은 일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혀 믿음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 그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고 할 때 그들이 보인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9:46절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그러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고 하니까 지금이야 말로 자기들이 기다리던 때가 왔다고 마음속으로 반긴 것입니다. 속으로 환호성을 지른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위해 자신의 꿈과 비전과 정열을 쏟아부으신 주님이 애처롭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9:45절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18:34절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9:45절은 두 번째 수난 예고 후의 제자들의 반응이고, 본문 34절은 세 번째 수난 예고 후의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너무나 흡사하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뜻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암호로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방언으로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18:32-33절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한 것은 그들의 지능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학습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남들보다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쉬워서 귀 있는 자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루이틀 따라다닌 것도 아닌데 스승의 말씀을 하나도 깨닫지 못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들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듣고 싶었던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가 듣고 싶어하던 말씀은 귀에 잘 들어옵니다. 크게 강조하지 않아도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듣고 싶지 않았던 말씀은 아무리 큰 소리로 말해도 옆으로 새고 맙니다. 아무리 강조해서 말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립니다. 아무리 예를 들어 말해도 들을 때 뿐입니다. 말씀에 시험 든 사람들을 보면 머리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머리가 비상한 사람입니다. 설교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생각을 넓힌 사람입니다. 대개 생각을 복잡하게 하는 사람이 시험에 듭니다. 우리는 좀 단순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복잡한 문제도 단순하게 접근하면 의외로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복잡한 마음에는 성령님도 역사하기 힘듭니다. 단순하게 믿는 것이 좋습니다. 설교자가 성경에서 벗어나지 않게 전하면 그걸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설교자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그대로 받지를 못합니다. 설교자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한계가 있고 부족함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설교자의 약점과 한계와 부족함이,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을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설교자의 약점과 한계와 부족함까지도 사용하여 선을 이루실 수 있는 분입니다. 성경은 말씀을 단순히 믿는 자가 구원을 받았고, 말씀을 단순히 행하는 자가 은혜를 입었음을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인 사건을 떠올려보세요. 제자들이 오천명의 끼니를 걱정할 때 예수님의 대답은 제자들을 당혹하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누가복음 9:13절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 얼마나 당황스런 말씀입니까? 그런데 영적으로 좀 예민한 사람이라면 대개 주님은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주님, 교회 화단이 지저분하네요.” “네가 정리하면 좋겠구나.” “주님, 쓰레기통을 비우지 않아 냄새가 나네요.” “네가 비우면 되잖니?” “주님, 어떻게 강단에 화분 하나도 없어요.” “네 집에 좋은 것 있더구나. 그 것 갖다 놓으면 안될까?”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생전 듣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쪽입니까? 환경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솔선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이고, 주위 환경에 대해 불평이 많은 사람은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이라고 보면 아마 틀리지 않을 겁니다. 지금 제자들의 손에 있는 것이라고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제자 중에 한 사람이 계산을 해봅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은 들 것 같았습니다. 요한복음 6:7절에 의하면 그 제자는 빌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했을 때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그냥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히 믿고 단순히 순종했을 때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개입을 원하세요? 단순해지세요. 여러분의 속사람이 바뀌기를 바라세요? 말씀을 단순히 믿으세요. 여러분의 환경에 변화를 원하세요? 말씀에 단순히 순종하세요. 단순히 믿으라는 말과 맹신은 다릅니다. 말씀을 단순히 믿기 위해서 먼저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34절 앞부분의 말씀에서 보듯이 제자들은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깨달음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억지로 믿고 싶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작정한다고 순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깨달은 만큼 믿을 수 있고 깨달은 만큼 순종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깊이만큼 믿음을 가질 수 있고 깨달음의 깊이만큼 순종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말씀을 깨닫고 싶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마는, 중요한 것은 정말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갈급한 마음이 있느냐 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자는 말씀을 보는 눈빛이 다릅니다. 말씀을 읽는 자세가 다릅니다. 말씀을 대할 때 수시로 기도하게 됩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깨닫게 하옵소서.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실제로 말씀을 깨달으려면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6:13절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님은 진리의 영입니다.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여기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특히 그분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진리의 영만큼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잘 인도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는 영입니다. 성경의 가장 유능한 교사는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다가 막힐 때, 성령님께 물으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듣다가 마음에 부담이 될 때, 성령님과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깨달음을 주셔서 선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대신 달려 죽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죄인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 하나님 앞에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귀의 종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에게 단순히 믿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심령을 만져주심으로 영적인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남은 생애에서 말씀을 단순히 믿고 말씀을 단순하게 순종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기적의 역사를 종종 경험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솔직히 말씀하시던 그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걸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생명이 믿는 우리의 영혼 속에 다시 태어나게 하옵소서. 불쌍한 인간을 끝까지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주님처럼 언제나 불쌍한 이웃을 사랑하고 따뜻하게 대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님을 만난 한 맹인 / 눅 18:35-43 만남은 중요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만남을 꺼려하지요?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일 것입니다. 그중 신천지가 집단으로 확진 판정을 받아서 신천지 사람을 만나는 것을 조심하라고합니다. 어떤 분이 SNS에서 신천지의 불법적인 추수꾼 포교활동이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전파와 흡사하다면서, 신천지 바이러스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만남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부정적인 최악의 시너지로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습니다.
동화작가인 정채봉의 “만남”이란 글이 있어 소개하겠습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우리 인생에서 만남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사실 인생이란 만남의 연속입니다. 인생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만나 더불어 살아갑니다. 우리는 좋은 사람과의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고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실 때에도 사람을 통해서 주시고, 인생의 좋은 기회를 주실 때에도 사람을 통해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시골의 호숫가에 홀로 뛰놀던 소년이 그만 호수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온 귀공자였으며 수영을 할 줄 몰랐습니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시골 소년이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10년 후 그는 시골 소년을 찾아갔습니다. 생명의 은인인 시골 소년의 근황을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때 시골 소년이 의사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과 가정 형편상 의대에 진학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시골 친구의 사정을 아버지에게 전했고 그의 부친은 아들의 친구가 의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맡아주었습니다. 그 귀공자의 이름은 윈스턴 처칠이고 그 시골 소년의 이름은 알렉산더 플레밍입니다. 1940년 5월 영국이 독일군의 침공을 받았을 때 전쟁터를 순시하던 처칠 수상은 그만 폐렴으로 눕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폐렴이라면 목숨을 건지기 어려운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이때 플레밍 박사가 자신이 발견한 페니실린으로 처칠을 고쳐주었습니다. 또 한 번 처칠의 생명을 건져준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만남이 서로를 살렸고 서로의 생을 크게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좋은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우쳐주는 일화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언젠가 다시 만날 사람도 있겠지만,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라서 다시 만날 보장이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너무 만남을 경솔하게 갖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옷깃이라도 스치고 눈이라도 마주치며 지나는 사람들에게 좀더 좋은 인상을 주면서 살아가야 함에도 우린 그렇게 하질 못합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만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떻게 유독 그 사람과 만난단 말입니까? 그 숱한 사람들과 그 숱한 세월 속에서 만남을 가졌다는 것은, 설사 그것이 짧은 만남이었다 할지라도 ‘단순한 인연’이나 ‘우연한 만남’일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만남은 예사 만남이 아닙니다. 여러분 서로 간의 만남 역시 보통 만남이 아닙니다. 아주 특별한 만남입니다. 윈스턴 처칠과 알렉산더 플레밍의 만남보다 더 소중한 만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신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영원한 만남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천국에 가서도 다시 만나게 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 되어 함께 걷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삶이 다 하는 날까지 하나 되어 함께 걸읍시다. 저 천국 문에 이를 때까지 하나 되어 함께 걸읍시다. 35절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오늘 우리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절망스런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눈은 있으되 앞을 볼 수 없는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의 불행은 앞을 보지 못하는 것 뿐 아닙니다. 사실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엄청난 불행입니다. 다른 장애도 고통스럽지만 시각 장애는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여러분이 겪는 고통도 힘드시겠지만 시각 장애보다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죽었다’는 말을 다른 말로 ‘눈을 감았다’고 표현합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죽음을 선고받는 것입니다. 또 ‘절망적인 상황’을 가리켜 ‘앞이 보이지 않는다, 캄캄하다’고 표현합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더욱 절망하게 만드는 것은 구걸하는 인생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설사 맹인일지라도 집이 부유하고 집안 형편이 넉넉하다면 그래도 조금 나을 텐데, 지지리도 가난하기까지 합니다. 집에서 식구들의 봉양을 받을 형편도 못되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 눈까지 멀게 되었으니 이보다 절망스러울 수도 없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구걸을 해야 했습니다. 앞만 볼 수만 있다면야 죽는 한이 있어도, 구걸하지 않아도 될텐데 하는 생각을 해 봤자 소용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가끔씩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면 가슴이 미어왔습니다. 그는 구걸을 하기 위해 도로변에 자리를 폈습니다. 사람들은 많이 지나갔지만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녁에 계산해 보면 갈수록 인심이 야박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도 그는 길 가에서 구걸을 했습니다. 오늘따라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습니다. 아마 무슨 일이 있나봅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36-37절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그들 중에 마음씨 좋은 사람이 대답해 줬습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이 말은 맹인의 귀를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면... 그래, 바로 그분 아닌가?’ 그는 가만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38절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그가 만약 조금이라도 지체했다면 기회를 놓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기회는 마냥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성공의 기회가 마냥 있다면야 누가 성공 못하겠어요?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내내 주어진다면야 실패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기회가 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순간 지나가버리는 것이 기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6:2절하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은혜 받는 것도 때가 있고 구원받는 것도 날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때가 언제라구요? 지금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을 놓치면 안됩니다. 의료 선교사 머레이는 1921년부터 만주 용정에서 의료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용정에 거주했던 조선 사람들에게 가장 심각한 병은 결핵이었으며, 그 원인은 가난 때문입니다. 머레이 선교사가 처음 왕진한 환자는 엉덩이에 결핵이 생겨 3년이나 앓고 있는 여자였습니다. 이미 병균은 온 몸에 퍼져 있었습니다. 방바닥에 누워 있는 그녀의 몸 위에는 넝마조각만 있을 뿐 요는 아예 없었습니다. 실내는 영하 20도의 바깥 온도나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물론 남편은 열심히 일했지만 벌어들인 품삯이라고 해야, 환자가 먹을 농축우유를 사는 정도였습니다. 머레이는 간호원들과 함께 가족에게 옷을 만들어 주고, 환자와 아이를 목욕시켰습니다. 남편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마워했고, 그의 아내는 며칠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교사를 만난 것이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은혜 받을 때가 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에게 구원의 날이 언제까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혹 여러분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분이 있습니까? 지금 바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미루려고 하지 마세요. 다음 기회에 영접하겠다고 늦추지 마세요. 여러분에게 다음 기회가 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미 구원의 선물을 은혜로 받으신 여러분, 여러분에게 봉사의 기회가 계속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교회 봉사도 기회가 있습니다. 교회 일을 하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다음’이 아닌 ‘지금’입니다. 그 때는 ‘나중’이 아닌 ‘이번’입니다. 그 때는 ‘내년’이 아닌 ‘올해’입니다. 지금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다음에는 순종하고, 이번에 순종하지 못한 사람이 나중에는 순종하고, 올해 순종하지 않은 사람이 내년에는 순종할 수 있을까요? 혹 그런 경우가 있긴 하지만 대개는 그렇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봉사 기회를 드릴 때 기쁨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에게 사역을 맡길 때 감사함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제발 “못하겠다”고 부정적으로 말하지 마세요. 그 말대로 됩니다. 귀에 들린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민수기 14:28절하반절 말씀을 잊지 마세요.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한 번 해보자”고 긍정적으로 말하세요. 그러면 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디모데전서 1:12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보세요. 무조건 빼는 것이 겸손일 수 없습니다. 계속 사양하는 것은 겸양이 아닙니다. 순종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셨다며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입니다. 끝까지 순종하지 않는 것은 교만입니다. 주의 몸된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겸손한 사람임을 하나님께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앞에서도 증명해 보이시기 바랍니다. 38절을 다시 보세요.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맹인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아니 놓쳐서도 안됩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맹인에게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여기서 “외쳐”의 원어 ‘보아오’는 ‘도움을 얻기 위하여 소란스러운 방법으로 소리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큰 소리로 외쳤을 것입니다. 기도로 친다면 부르짖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기 전에는 소경은 조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만약 누가 그 소경에게 큰 소리로 외치라고 한들 그렇게 큰소리로 외칠 수 있겠어요? 기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무리 앞에서 부르짖어 기도하자고 이끌어도,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느껴지지 않으면 부르짖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제가 아무리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라고 해도, 여러분이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새벽 기도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하지 말라고 가로막고 서도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 기도제목을 받으셨나요? 한번 읽어보고 기도해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할 시간이 넉넉한 것이 아닙니다. 시간 빨리 갑니다. 교회 오면 앉아서 잡담하지 마시고, 특히 남의 이야기는 절대금물입니다. 남 이야기 할 시간에 기도제목을 한 번이라도고 더 읽어보기 바랍니다. 읽기만 해도 기도가 될 것입니다.
소경이 예수님을 뭐라고 불렀나요?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외침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아무에게나 붙일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특별한 의미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하여 메시야를 보내시는데, 그가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란 곧 메시야를 호칭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12절 이하에 보면 아이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마태복음 21:15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노하여’ 대단히 화를 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어떻게 나사렛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느냐는 말이지요. 아이들이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생각한 거지요. 성전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인줄 몰라보고, 철모르는 어린아이들은 알아보았습니다. 눈뜬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몰라보고, 앞 못 보는 맹인은 알아보았습니다. 참 역설적입니다. 먼저 믿었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을 받았다고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알았고 맹인은 깨달았습니다. 아이들과 맹인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단순함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건 단순함입니다. 주님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받을 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5: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보세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는 마음이 청결한 자라고 합니다. 청결한 마음이란 한 마음을 말합니다. 야고보서에 1:8절에 나오는 마음과 대조되는 마음입니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두 마음을 품는 자는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기도 응답받기 위해서는 하나만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오직 기도 응답만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맹인은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다른 것 생각할 겨를도 없었을 겁니다. 그는 단순하게 예수님만 생각했습니다. 그는 단순하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믿는 대로 고백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능력이 있습니다. 맹인이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믿었다고 해도, 만약 그가 소리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그냥 지나가셨을 겁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시기 바랍니다. 행동으로 여러분의 믿음이 있음을 입증하기를 바랍니다. 맹인은 다윗의 자손 예수를 부른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합니다. 이 애원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맹인의 외침 한 마디에 즉각 걸음을 멈추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불쌍한 맹인이 눈떠보겠다고 외칠 때 곁에서 도와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를 예수님께 인도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장애물이 발생했습니다. 39절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 나오지요? 맹인 더러 시끄럽다고 꾸짖었습니다.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맹인을 또 한번 절망에 빠뜨릴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다가와서 하는 말들이 위로와 소망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낙심되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낙담하여 기도줄을 놓쳐버리고 한 동안 주님께 등 돌리다가 영적인 침체에 깊이 빠져들지 않습니까? 맹인을 보세요. 그가 어떻게 하는지를 눈 여겨 보세요. ‘그가 더욱 크게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그는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한 번 소리 질렀는데 아무 반응이 없다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곁에서 시끄럽다는 꾸중을 들었다고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맹인이 얼마나 간절하게 부르짖었는지 아십니까? 맹인의 외침을 보면 38절과 39절이 조금 다릅니다. 38절에서는 일반적인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외쳐 이르되” 그러나 39절에는 사람들이 ‘잠잠 하라’고 꾸짖으며 저지하니까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외쳤다고 합니다. 여기서 “크게”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폴뤼스”라고 하는 이 말은 ‘다수의 무리’ 또는 ‘군중’을 의미할 때가 있습니다. 많은 무리들의 무시와 경멸의 소리, 아니 거기 모인 그 수많은 사람들보다 더 큰 소리로 외쳤다는 말입니다. 무리들의 소리보다 그 한 사람의 소리가 더 컸다는 말이죠. 그리고 “소리 질러”라는 말은 원래 까마귀의 울음소리에서 만들어진 의성어로서, 동물들의 소리와 같이 거의 알아듣기 힘든 ‘악쓰는 소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가 “크게 소리 질렀다”는 말은 자기를 저지하면서 꾸짖는 사람들 뿐 아니라,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 더 큰 소리로, 마치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외쳤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처할 때 기도하고픈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기도하라는 사인인가보다 깨닫게 됩니다. 그런 마음을 내가 먹으면, 환경이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데 실제로 그렇지 못합니다. 장애물이 나타납니다.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환경적 요소가 생겨납니다. 맹인에게 그랬듯이 낙담을 주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예수님 주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믿는 사람이 기도의 방해꾼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한다고요? 더욱 크게 소리 질러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등에 있는 견딜 수 없는 짐의 무게보다는, 자신의 신발 속에 들어있는 모래알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정적일 때는 사람 의지하면 안됩니다. 사람은 결정적일 때 대개는 돌아서고 외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기도하는 것을 평소에 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교회 성도들 중에 분명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는 말이 들리고, 또 그런 느낌이 드는데,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기도하지 않을 때 안타깝습니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 소리 지를 힘조차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힘이 있습니다. 젖 먹던 힘과 죽을 힘입니다. 여러분, 젖 먹던 힘을 내서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마지막 죽을 힘을 다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젖 먹던 힘을 내면 능히 새벽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하면 얼마든지 금식 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40-41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절규하는 맹인을 모른체하고 지나가실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첫 번째 외침을 듣고도 얼마를 더 가셨습니다. 주위가 소란한 탓도 있겠지만, 맹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눈을 뜨고자 하는 ‘불타는 소원’이 있는가, 앞을 보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맹인의 믿음 있는 행동을 보시고, 예수님은 머물러 서서 그를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맹인을 자기에게로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유익 여부에 따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는 분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당신을 찾는 모든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분입니다. 도움이 필요하여 도움을 청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맹인을 몰라보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일부러 그렇게 질문하신 겁니다. 대개 예수님은 치유 이전에 그와 비슷한 질문을 하곤 하셨습니다. 믿음을 확인하가 위해섭니다. 정말 예수님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으신 겁니다. 치유사역자들도 그렇게 합니다. 무조건 안수기도부터 해주지 않습니다.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가를 먼저 확인해 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으면 먼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합니다. 육신의 병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혼의 질병인 죄문제를 해결받는 것이 보다 급하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치유 사역의 근본 목적이 영혼 구원에 있고, 말씀이 힘 있게 전해져 하나님나라가 확장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은 자신의 문제를 내놓으라는 말입니다. 내놓으면 해결의 길을 열어주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예수님 앞에 내 문제를 내놓는 것입니다. 문제를 내놓지도 않고 해답을 원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든지 주님께 내놓으시기 바랍니다. 그 문제가 크든 작든 가리지 말고 내놓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는 아무리 큰 문제라도, 우주를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어떤 어려운 문제도 쉽게 풀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문제도 순식간에 풀어질 수 있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맹인이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아니, 보면 모르겠소?” “뭐, 누구를 놀리는 거요?”라며 대들지 않았습니다. 보기를 원한다고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필요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줄 알았고 그걸 구했습니다. 먼저 구해야 할 것을 먼저 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마땅히 구해야할 것을 알고 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정말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구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맹인은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처럼 금과 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보는 것을 원했습니다. 맹인이 보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맹인은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책을 구한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나머지는 보너스로 얹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본질인 하나님나라와 그 의에 충실하면 나머지는 책임져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본질을 등한시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의 본질은 하나님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죽어서는 하나님나라인 천국에 가는 것이고, 살아서는 이 땅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돈은 그 다음입니다. 취미생활은 그 다음입니다. 그런데 자꾸 이것들을 본질보다 앞세우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핑계로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실현하는 사역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제자로서 본질에 충실한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42-43절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맹인은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맹인에게 있어 구원은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는 눈뜨는 것을 ‘믿음으로’ 소원했고, 그 소원은 ‘믿음대로’ 이뤄졌습니다. 맹인이 눈을 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믿음입니다. 이제 새 봄을 앞 두고 있는 시점에서 여러분의 믿음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설만한 믿음이 있는지를 스스로 체크해 보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아이젠하워의 마지막 임종의 순간을 아는 분이 많지 않습니다. 월터리드 미 육군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방문했습니다. 30분의 면회 시간을 얻어서 들어갔습니다. 목사님이 30분의 면회 시간을 마치고 막 나가려고 하니까 아이젠하워가 조금만 더 있다 가라고 합니다. "아니,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제게는 확신이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이 아이젠하워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목사님은 자기 주머니에 있던 신약성경을 꺼내 놓고 어떻게 죄사함을 받을 수가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지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인도를 통해서 아이젠하워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기도가 끝났을 때에 그가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빌리, 감사하오. 나는 이제 준비 되었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날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 설 준비를 갖추고 싶습니까?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여러분의 남은 삶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일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여러분의 탁월한 삶을 통해 여러분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인생에 있어 최고의 만남은 예수님과 만남입니다. 예수님과 만남은 우리의 운명을 바꾸는 만남입니다. 예수님과 만남은 우리 자신을 바꾸는 만남입니다. 예수님과 만남은 우리의 환경을 바꾸는 만남입니다. 우리는 이미 인생의 최고의 만남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만남은 일회성 만남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만남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야 합니다. 2020년 사순절을 앞두고 예수님과 행복한 만남을 기대하는 복된 절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 본문의 맹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귀중히 여겼으며, 그는 부르짖으며 기도했으며, 변화될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와 그의 눈이 떠지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이런 기적을 체험한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들도 어려움이 닥쳤을 때 맹인처럼 더욱 크게 기도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우리를 바라보거나, 또는 만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작은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