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생긴 일들
서울가면 촌놈 껍데기 벗긴다는 바람에 허리춤을 꽉 잡고 다녔다는 어느 촌로(村老), 어려서 담임선생님에게 듣던 그 이야기가 어찌나 사람을 웃기던지 뱃살을 움켜쥐고 뒹굴던 생각이 다. 아마 과천(果川)에서부터 길 무렵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도 어쩐지 서울가면 겁이 난다는 친구가 있어 나하고 궁합(宮合)이 맞는다고 대포 한잔 즐겁게 나눈 일이 있다.
진주(晋州)에서 올라온 친구와 함께 모처럼 기분을 낸다고 밤거리를 걷다가 신호위반으로 걸리고 말았다. 통행금지시간에만 신경을 쓰다가 바쁜 마음에 멋모르고 거리를 건넌 것이 재수 없이 신호 위반이었다. 자정 가까운 한산한 거리라서 마음 놓고 건넌 것인데 빨간 신호등이 마물(魔物)의 눈처럼 앞에서 노리고 있을 줄이야…….
길목에다 덫을 놓는 사냥꾼처럼 건장한 교통순경 한 사람이 재빨리 달려왔다. 그물에 걸린 수는 모두 일곱이었다. 그중의 다섯은 직장여성 차림의 아가씨들이었고 얼뜬 촌놈은 우리 둘 뿐이었다. 이 아가씨들은 처음부터 별로 대수롭게도 생각하지 않고 세련된 아양으로 때워버리는 눈치였다. 그러나 우리는 사정이 좀 다르다. 아양도 그렇고 배짱도 그렇고 이런 때에 촌놈들의 밑천이란 기껏 어수룩한 수작밖에 더 있는가?
그런데 이 순경 아저씨는 끝내 우리의 수작에 넘어가지 않고 신분증(身分證)을 압수하고 말았다. 결국 몇 분 뒤에는 과료(科科) 일금 100원정을 물고 다시 찾기로 되어 있기는 했지만.
출근시간 무렵이었다. 신호등 없는 거리를 미꾸리처럼 잘도 빠져나가는 서울내기들 흉내를 내다가 어떤 이름 모를 아가씨와 함께 차의 홍수 속에 꼼짝 못하고 서 있었다. 특공대를 닮았는지 마구 달려드는 차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다 보니 우리는 마치 곡예사처럼 대로 한복판에서 위기일발의 합동 '쇼'를 벌리게 되었다. 양쪽 보도에 섰던 관객들에게는 아침부터 스릴 만점의 구경거리를 제공한 셈이다.
태평로(太平路)를 분주하게 걷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옆구리를 꾹 찌른다. 돌아보니 허술하게 차린 지긋한 나이세의 구두 수선공이 뒤축이 다 달은 내 구두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10원이면 양쪽 뒤축을 바꿔대어서 새 구두를 만들어주겠단다. 새 구두를 만드는 것도 좋고 새 양복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지나가는 사람의 옆구리를 찔러서 말씀을 붙인다는 것은 아무리 너그렇게 보아드려도 무례 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따뜻한 봄 날씨에 투박한 겨울외투를 걸치고 뒤축이 다 달은 구두를 끌고 다니는 사람을 그 이상으로는 대접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렇고 아무리 '구두쇠' 라지만 10원이면 새 구두가 된다는데 그 돈 아낄 사람이 있을까?
나는 구두 두 짝을 선뜻 벗어주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수선공이 분명히 말한 10원 이라는 여운이 아직도 귀에서 가시지 않는데도 어쩐지 잘못 들은 것만 같이 느껴진다. 하기야 몇 억이 드는 한강교의 복구공사도 10원인가에 맡겠다고 나서서 화제를 모은 일이 있었는데, 뒤축만 갈아대는 구두의 복구공사쯤 10원에 청부 맡겠다고 나서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닐 성 싶었다. 이 아저씨는 양지바른 자리를 골라 앉더니 으레 하는 버릇으로 때에 절은 천막지로 앞을 싸고는 작업에 착수할 자세를 갖추었다. 이내 아저씨의 손타구니에 양쪽 뒤축이 맥도 못쓰고 나가 떨어졌다. 아저씨는 이 뒤축들을 이모저모 바꿔 대 보더니 크기가 서로 맞지 않아서 고칠 수 없다고 흡사 의사가 마지막으로 중환자의 손을 떼는 때처럼 엄숙하게 선고해버린다. 처음부터 수상하다고 생각했더니…….
이렇게 되고 보니 실상 엄숙해지는 것은 아저씨가 아니라 구두의 주인공이었다. 옛날에는 껍데기를 벗겼다더니 이제는 대신 구두를 벗기는 것이 아닌가 하고, 결국 가장 질기고 가벼운 나일론창이 250원이면 무척 싸다는 아저씨의 사상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약 10분 뒤에 나는 뒤축이 높아진 산뜻한 구두를 신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떴다. 그런데 이 가벼운 마음이 며칠 못 가서 허술하게 깨져버리고 말았다. 우리 직장에 단골로 다니는 아저씨는 150원이면 얼마든지 갈아준다고 장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떤 친구에게 저녁 8시 반쯤해서 전화를 걸었더니 '주무신다'고 퇴짜를 놓으며 내일 아침 9시에 다시 걸란다. 아침에 시간을 맞추어 다시 걸었더니 어제 저녁의 그 여자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게 받는다. 이번에는 "어데 사는 누구인가?", "우리 사장님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 “무슨 용건인가?"하고 마치 조서(調書)라도 꾸미는 수사관처럼 야무지게 물어온다.
어쩐지 대답하기도 조심스러웠지만 공손한 말씨로 신분을 밝혔다. 얼마 뒤에 지극히 간단한 한마디를 남기고는 목소리만 구면(?)인 이 아주머니와의 대화도 끊어져 버렸다.
"사장님은 지금 주무십니다" 라고.
시골 접장은 별 볼일 없다는 것일 것이다.
나는 수화기를 한동안 원망스럽게 바라보았지만 허전한 기분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서울의 사장님들은 그렇게 잠을 많이 주무셔야 하나? 하고.
어느 빌딩 모퉁이에 퍼대고 앉아서 구두를 닦았다. 한 짝을 겨우 닦고 났을 때 누가 뒤에서 반갑게 부른다. 옛날 제자인 시골 초등학교 훈장이었다. K군은 시간이 바쁘지만 차나 한잔 나눈다고 기다린다. 정말 촌놈끼리 잘 만났다.
이제부터 우리도 A급 다실에 들려 노른자 두어 개씩 넣어서 모닝커피라는 것 한잔씩 못 마실 까닭이 없다.
"나도 어쩌면 서울로 오게 될지 모르네."
다실 층계를 올라서며 무심코 한 마디 털어놓았다.
아주 터무니없는 말만은 아니었지만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부탁해둔 어설픈 사실을 지금 굳이 자랑스럽게 떠벌릴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이 낯선 서울바닥에서 그래도 차를 사겠다는 지극히 대견한 호의에 대한 보답이 되지 못할 바에는 이 실현성이 희박한 일을 굳이 말할 계제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촌놈끼리의 대화가 이런 자랑을 빼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정말 나도 언젠가는 서울로 와야겠다. 그리고 우선 과부의 댓돈 오푼 빚을 내서라도 전화를 한 대 놓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다음에는 나도 집안 식구들에게 질러주는 훈련 좀 시켜두어야겠다. “우리 교수님도 주무십니다" 라고.
(現代文學, 19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