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22]한하운
발가락 잘리는 고통
발길질 당하는 설움
'문둥이 시인'의 인권선언
목동훈 기자
경인일보 2014-06-26 제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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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 남동구 간석동에 위치한 '부평농장' 전경으로 만월산에 둘러싸인 모양이다. 부평쪽에서 남동구 간석동 방면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1950년대 이곳에는 나환자 요양소인 '성계원'(국립부평나병원)이 있었다. 한하운은 1948년 월남후 서울과 경기도 등지를 떠돌다 이곳에 정착했다. 지금 부평농장에는 소규모 공장들이 입주해 있다. /조재현기자작은 사진은 '부평농장(음성 나병환자 집단촌)사무소'가 1980년대에 촬영한 전경 사진이다. 사진 상태가 좋지 않다. /부평농장 제공 |
나병 거지로 살다 이병철 등 눈에 띄어
1949년 발표 '전라도 길' 절절함 묻어나
그의 詩통해 고은도 시인되기로 결심
부평 공동묘지 인근 요양소 '성계원' 정착
인천여고 문예반과도 각별한 인연
전라도(全羅道) 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한하운(韓何雲, 본명 한태영, 1919~75)이 1949년 월간 종합잡지 '신천지'를 통해 발표한 '전라도(全羅道) 길'.
그는 소록도 나환자 요양원을 가는 길에서 느낀 슬픔과 괴로움을 이 시에 담았다. 한하운은 나병을 앓아 '나(癩)시인' '문둥이시인'이라는 수식어가 이름 앞에 붙었다.
삼복더위에 소록도까지 천 리 길을 가야 하는 그에게는 기차도 허용되지 않았다. 차장(車掌)이 그를 발길로 걷어차며 기차에서 내쫓은 것이다. 나환자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는 발가락이 다 잘려 나가고, 혹독한 더위 속에 쓰러져 죽더라도 천 리 길을 걸어가기로 한다.
그렇게 나온 작품이 '전라도 길'이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매번 거론되는 고은은 한하운의 시를 읽고 시인이 되기를 결심했다. 고은은 한하운처럼 나환자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기까지 했다고 털어놨다.
한하운은 1949년 4월 신천지에 '전라도 길' 등 10여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해 5월에는 첫 시집 '한하운시초'(정음사)를 냈다. 그가 시인이 된 사연은 매우 극적이다. 한하운은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며 구걸하는 나병 걸린 거지였다.
그는 추운 겨울 여관비를 마련하고자 다방 등을 돌아다니며 시를 팔았고, 그러던 어느 날 이병철과 박거영 등 문인의 눈에 띄어 시를 발표하게 된다. 이병철은 한하운을 문단에 소개한 인물로,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
한하운은 가깝게 지내던 이병철이 월북한 데다, 자작시 '데모'의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한때 빨갱이 논란에 휘말려 고초를 겪기도 했다.
최원식 인하대 교수는 "문둥이에게는 좌익도 우익도 없는 것이다. 데모에 참여하고 싶지만 참여할 수 없는 하위자일 뿐"이라며 "시 '데모'는 하위자의 발화다. 한국문학에서 소외당한 소수자의 소리가 나온 것"이라고 했다.
한하운은 시를 통해 나환자의 고통과 서러움을 표출했다. 그의 시는 인간대열에 끼지 못한 문둥이의 인권 선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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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 시집 '한하운시초'와 '보리피리' 초판 표지. 3 한하운의 '작약도' 친필 원고. /한국근대문학관 제공 |
'한하운시초'는 큰 인기를 누렸다. 당시 정음사 최영해 사장은 "나문학이랄까…. 환자들의 고민 속에서 우러나는 작품을 정음사에서 다뤘습니다. 소설에 '애생금', 시에 '한하운시초' 모두 다 굉장히 인기를 얻었습니다. 나는 이 두 작품이 우수하고 우리 마음을 찌름을 느꼈습니다"라고 자평했다.(경향신문 1949년 8월 15일자 지상좌담회 기사 중)
1950년, 한하운은 약 600명의 나환자와 함께 부평 공동묘지 인근 골짜기(인천시 남동구 간석동 만월산)에 정착하게 된다. 그는 자치위원장에 취임하면서 이곳을 '성계원'(성혜원·成蹊園)이라고 명명한다. 나환자 요양소라고 했지만, 강제 수용소나 다름없었다.
한하운은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아베 총리 모교인 일본 성계(세이케이)고등학교를 다녔다. 일본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해 부평 나환자 요양소 이름을 '성계원'으로 지은 것은 아닐까.
한하운은 자서전 '고고한 생명-나의 슬픈 반생기'(인간사·1958)에서 "동경의 2년 나머지 생활은 나의 지금까지의 반생에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라고 밝힌 바 있다.
부평 공동묘지 골짜기가 나환자 요양소로 결정된 이유는,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철저히 차단돼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마을에 나환자 요양소가 들어서는 것을 주민들이 크게 반대했다.
우선 부평은 이 지방민의 반대가 없을 것이라 믿고 불모의 산협이지만 우리가 무슨 선택의 자유가 있을까…… 우리들의 마지막 안식처로서 택하기로 하였다.(한하운 자작시 해설집 '황토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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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문화재단이 2010년 '한하운 전집'을 엮으면서 찾아낸 친필 연보. 이 연보에는 한하운이 1920년 3월 10일생으로 돼있다. 하지만 묘비에는 1919년 2월 24일 태어난 것으로 돼있고, 김포시청 홈페이지에는 1920년 3월 20일 태어난 것으로 나와 있다. 한하운은 중국 북경(베이징)에서 북경대 농학원 축목학계를 1943년 6월 졸업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그가 재학할 당시 북경대는 북경이 아닌 쿤밍(昆明)에 있었다. 북경대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창사(長沙)를 거쳐 쿤밍으로 이전했으며, 1946년 다시 북경으로 왔다. 한하운 이력에 대한 고증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근대문학관 제공 |
나환자들은 잘못된 사회적 편견으로 고통받기도 했다. 1959년 6월 14일 한 남성이 "나환자가 아이를 산다"는 말을 듣고 자기 아들을 성계원 나환자에게 팔았고, 그 아이는 피살 직전 경찰에 구출됐다는 신문기사가 날 정도였다.
물론 기사 내용은 사실과 달랐다. 한 남성이 성계원을 찾아와 "내 아들을 사라"고 하자, 이에 놀란 성계원 측이 경찰에 신고한 것인데 엉뚱한 내용으로 보도가 된 것이었다.
성계원은 1960년 '국립부평(나)병원'으로 개칭됐으며, 지금은 '부평농장'이라 부른다. 나환자들이 한때 자립을 위해 양계(養鷄)업을 했는데, 당시에는 부평 쪽으로만 길이 나 있어 '부평농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부평농장 권태우(62) 회장은 "15살 때 병에 걸려 청주에서 혼자 이곳으로 왔다. 철조망 없는 수용소였다. 산이 철조망이었다"고 했다. 또 "당시에는 나환자가 400명 넘게 있었는데, 지금은 80명 정도 남았다"며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아 일반인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성계원에는 학교가 없었다. 때문에 이곳에 오기 전에 학교 좀 다녔다고 하는 환자들이 아이들을 가르쳤다. 의사·간호사가 나환자와의 접촉을 꺼린 탓에 환자들끼리 주사를 놔 줬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땅 용도가 주거지역에서 준공업지역으로 변경되면서, 소규모 공장들이 들어설 수 있게 됐다.
건물 임차인들이 "사람들이 나환자를 무서워해 공장 직원 뽑기가 어렵다"는 민원을 내어, 나환자들이 총회에서 '나환자 낮 활동 금지령'을 내린 적도 있다고 한다.
한하운은 성계원에 머물면서 계속 시를 썼다.
님 오시면 피어라 진달래꽃./한식에 소복(素服)이 통곡할 때에//부평(富平) 성계원에 진달래 피면/이 세상 울고 온 문둥이는 목쉬어.//(중략)//앞날이 없는 문둥이는/돌아서 돌아서면서 무너지는 가슴에/다시는 뵈올 수 없는 것은/다신 뵈올 수 없는 것은/님 오시면 피어라 진달래꽃.('여가')
나환자들은 성계원에서 짝을 찾아 결혼식을 올렸다.
흙이 있다 하늘의 구름과 푸른 지평은 넓기만 한데/문둥이가 살 지적도(地籍圖)는 없어.//버림받은 사내와 버림받은 계집이/헌신짝에 짝을 맞추는 것이//어쩌면 울고 싶은 울고 싶은/하늘이 마련한 뼈아픈 경사(慶事)냐.//(중략)//문둥이의 결혼이여//분홍빛 치마폭으로 신랑 방문을 가려라/어서어서 태양 앞에 새롭게 다가서라.('나혼유한')
한하운도 유임수(兪壬守)라는 여성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나병을 앓았으나 증세가 경미했고, 한하운이 1975년 2월 28일 간경화증으로 타계한 뒤 치매를 앓다 숨졌다고 한다.
한하운은 1959년 음성 판명을 받고 사회로 복귀한다. 이때부터 부평구 십정동 자택과 자신이 서울 명동에 설립한 '무하문화사(無何文化社)'를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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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하운이 음성 판명을 받은 뒤 머물렀던 '경인농장'(십정농장) 전경. 그는 1975년 2월 28일 이곳 자택에서 간경화증으로 숨졌다. /조재현기자 |
성계원에서 나온 음성 나환자들은 경인농장(경인전철 동암역 근처)과 청천농장(인천나비공원 부근)에 정착지를 마련했다. 당시 이곳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오지(奧地)였다.
청천농장 어경윤(72) 회장은 "성계원에 있다가 1961년 12월에 청천동으로 왔다. 당시 이곳에는 집이 한 채밖에 없었다"면서 "정착 초기에는 채석장에서 돌을 캐 내다 팔고, 산에 나무를 심고 그 품삯으로 정부로부터 밀가루를 배급받아 생활했다"고 했다.
한하운은 경인농장에 정착했는데, 1990년대 후반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농장 건물은 몇 채 남아 있지 않다.
한하운 작품 중에는 '작약도-인천여고 문예반과'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작약꽃 한 송이 없는 작약도에/소녀들이 작약꽃처럼 피어.//갈매기 소리 없는 서해에/소녀들은 바다의 갈매기.//(중략)//인천은 밤에 잠들고/소녀들의 눈은 어둠에 반짝이는 별. 별빛.//(하략)
이 시는 한하운이 시작(詩作) 강의차 인천여고 문예반과 작약도에 갔다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 작약도(동구 만석동 산 3)는 섬 둘레가 1.2㎞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일본인 스즈키 히사오가 소유하고 있다가, 해방 후 정부가 동립(東立)산업주식회사에 매각했다.
이후 한보개발, (주)원광을 거쳐 2005년 6월 진성토건주식회사(현 진성주식회사) 소유가 된다. 작약도는 인천 등 수도권 주민들이 즐겨찾는 피서지였다. 하지만 여객선사 운영난 등으로 인해 2012년 1월 뱃길이 끊겼다.
한하운은 인천여고 문예반과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1960년 자작시 해설집 '황토길' 서문에서 "이 책을 엮는 데 빼놓아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 인천여고 경숙 양이 즐거운 겨울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추운 날씨에 하루 빠지지 않고 알뜰히 이 '황토길'을 엮어 놓았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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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에 있는 시인 한하운 묘. 묘비 뒷면에는 그의 시 '보리피리'가 새겨져 있다. /목동훈기자 |
인천여고와 이 학교 총동창회가 2008년 발간한 '인천여고 백년사'를 보면 1960년대 인천여고에 '문학소녀'들이 많았고, 이들을 비롯한 많은 여학생들로 도서관 대출계는 항상 바빴다.
이 학교를 나온 유일곤(1963년 졸업)씨는 "고교 시절에 채홍덕, 황인지 선생님을 따라 서울 행사장에 간 적이 있다"며 "그곳에 계신 한하운 시인에게 꽃다발을 줬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한하운의 작품은 첫 시집 이후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한국문학계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다. 시인 고은은 "중학생 때 밤새 울며 '한하운시초'를 몇 번이나 읽었다"면서 "시구절이 가슴에 절절하게 와 닿았다. '나도 이런 병에 걸려야겠다' '이런 시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또 "한하운으로 인해 시인이 되겠다는 최초의 맹세를 했지만 그 이후로는 그를 잊었다"며 "서울 명동에서 한하운이 박거영과 함께 지나가는 것을 지척에서 본 적은 있다"고 했다.
글 = 목동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