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김천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김천에는 전쟁 전부터 시내에 CIC사무실이 있었다. 이들은 김천경찰서 사찰계와 긴밀히 협조하여 보도연맹원들을 관리했다. 김천경찰서 사찰계 근무자 정씨(정형철) 증언에 따르면, 연행을 지시한 자들은 김천극장 영사실에 주둔하던 미군 헌병이었다고 한다. 김천지역에서 연행된 주민들은 경찰서 외에 김천소년형무소에도 감금되었다.
전쟁 발발 직후 김천지역에서도 가장 먼저 희생된 사람들은 김천형무소 재소자와 갑종의 국민보도연맹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무소사건>
김천형무소는 20세 미만의 미성년들이 수감되는 소년형무소로소 시설규모는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1948년 후 정치범이 급증하면서 성인들도 김천형무소에 수용되기 시작했으며, 1949년 8월 재소자 수는 961명이었다. 형무관이었던 손씨(손성호)에 의하면, 한국전쟁 발발 전 재소자는 1,000명 내외로 기결수 600여 명은 소년수였고 400여 명의 미결수는 성인 좌익사범이었다고 한다.
총살은 1950년 7월 10일경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형무소가 소유하고 있던 1대의 화물트럭에 20여 명의 주민들을 태운 다음 서너 명의 형무관이 탑승했다. 학살 장소에는 이미 헌병들이 총살을 준비하고 있었다. 산 아래에는 동네 주민들을 동원해서 파놓은 구덩이(길이 3미터에 깊이는 가슴 정도였다)들이 여러 개 있었는데, 희생자들은 그 구덩이 앞에 너 댓씩 앉혀졌다. 헌병들이 총을 쏘면 희생자들은 구덩이로 떨어졌다. 한 구덩이에는 열댓 명 정도가 매장되었다. 총살이 끝나자 산 너머 대기하고 있던 근처 마을 사람들이 삽을 들고 와서 흙을 덮었다. 7월 10일 이후 구성면 송죽리 돌고개에서 희생된 보도연맹원과 재소자들은 최소 500명 이상이었다.
구성면 광명리 대뱅이재는 김천지역 학살 장소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조사 결과, 학살 시기는 1950년 7월 중순에서 말까지이며, 학살이 확인되는 날짜는 16일, 20일, 26일이다. 이 시기 동안의 대뱅이재 학살지는 2곳으로, 도로 양쪽 골짜기이다.
김천형무소가 소개를 완료한 날이 7월 16일이었다. 그 전에 재소자 349명이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었으며, 나머지 600여 명의 재소자가 김천지구CIC, 3사단 22연대 헌병대, 경찰에 의해 구성면 송죽리 돌고개, 구성면 광명리 대뱅이재, 대항면 직지사계곡에서 집단희생당한 것이었다.
김천경찰서 아천지서 의용경찰이었던 신씨(신현도)에 따르면, 구성면 학살 장소에는 미군이 있었다고 한다. 김천형무소 소장 운전기사였던 성씨(성광조)가 당시 현장을 목격했다. 대뱅이재에는 이미 파 놓은 구덩이 앞에 이송된 주민들이 줄을 지어 앉혀 놓여 있었고, 현장에는 열 명 정도의 헌병들이 주민들을 줄 세운 후 총살 했다. 대전형무소 특경대원이었던 이씨(이준영)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 7월 15일 하루 동안 군인들과 함께 대전형무소 특경대원들이 김천형무소에 감금되었던 보도연맹원을 트럭 두 대에 싣고 나와 총살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형무소 재소자와 별개로 김천과 인근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김천형무소와 김천경찰서 유치시설에 감금되었다가 같은 장소에서 학살당했다.
미24사단 CIC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김천지역에서 예비검속된 주민의 수는 1,200여 명에 달했는데, 김천경찰서 유치시설에는 200여 명이, 김천소년형무소에는 1,000여 명이 수용되었다. 증언을 종합할 때, 김천형무소로 연행된 1,000여 명의 주민들은 공장과 창고에 수용되었다가 총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희생된 곳은 구성면 광명리 대뱅이재와 송죽리 돌고개(구성면 송죽리 돌고개는 현재 지례중학교 구성분교 옆 골짜기를 말한다), 구미리, 마산리, 그리고 대항면 직지사 계곡, 대덕면 등이다. 주로 김천 관내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김천경찰서 유치장에, 김천 인근지역에서 잡혀온 보도연맹원들은 김천소년형무소에 감금되었다. 김천경찰서 유치장이 가득 찰 때마다 트럭에 실어 보내 학살했으므로 경찰서 유치장에서 형무소로 이송된 경우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천경찰서 사찰계 근무자 도씨(도윤수)에 의하면, 지서단위의 학살은 없었고 모두 본서에서 처리했다고 한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김천에서 희생된 국민보도연맹원의 수는 1,200여 명, 형무소 재소자는 600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김천지역에서 미 24사단이 왜관으로 최종 철수한 시기는 8월 1일이었으며, 김천지역의 민간인학살은 7월 10일경 시작되어 31일까지 저질러진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김천형무소가 1950년 7월 16일 공식 후퇴한 것이므로 7월 16일 이후에 희생된 사람들은 재소자가 아니라 예비검속된 지역 주민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구성면 광명리 대뱅이재에서 학살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는 날짜는 16일, 20일, 26일인데, 이 때 이곳에서 희생된 주민들은 대부분 국민보도연맹사건의 희생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역시 대구형무소사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민보도연맹사건에서 A급 인사들을 먼저 학살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미군 폭격 피해>
낙동강 전선에 가까이 있었으므로 김천지역은 인민군 점령기를 전후하여 미공군의 폭격에 의해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인민군이 진입이 예상되던 1950년 7월 31일 김천 남면과 농소면에 피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주민들은 식량과 옷, 소 등을 끌고 피난을 시작하여 8월 3일 낙동강에 이르렀으나 같은 날 3시 이미 왜관교가 폭파되었기 때문에 왜관 경부선 철교와 인도교가 폭파되어 강을 건널 수 없었다.
돌아가라는 미군의 명령에 의해 피난민들은 김천 연봉읍을 지나 연봉천에 도착했다. 당시 연봉천에 모인 피난민들은 수천 명에 달했다. 연봉천에서 하루 밤을 보낸 피난민들은 8월 4일 아침 10시 정찰기 1대를 목격했다. 정찰기가 돌아간 뒤 11시 금오산방면에서 날아 온 전투기 4대가 연봉천의 피난민을 향해 30여 분간 폭격했다. 이로 인해 수십 명이 사상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확인된 피해는 사망 12명, 부상 3명이었다. 이 폭격에 대해 미공군 8폭격대대 임무보고서에는 “김천에서 동쪽 3마일에 위치한 하천 양쪽 수목에 기총사격을 가할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9월 2일에는 B-26으로 추정되는 미 폭격 편대가 김천시내를 융단폭격하여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고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며, 9월 29일에는 오후 3시 감천면 무안리 외안마을에 정찰기의 정찰이 있은 후 전투기 4대가 네이팜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해 10여 명의 주민들이 사상당했다. 김천지역은 폭격 이전인 9월 25일 미 24사단에 의해 수복된 상태였다.
<부역혐의 피해>
국군 수복의 시기에도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집단희생되었다.
김천지역은 9월 23일 진입한 미 24사단에 의해 수복되었다. 이어 복귀한 김천경찰서는 지례 등 5개면에서 부역자라며 많은 주민들을 잡아 왔다. 김천경찰서 통신계 근무자에 따르면, 임시경찰서로 사용했던 김천극장 내 임시 유치장에 50여 명의 부역혐의자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이중 상당수가 희생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으로 조사되지 않았다.
희생사실이 확인된 사건은 모두 1951년 2월에 있었던 사건들이다. 1951년 2월 6일 김천시 다수동 구장이자 마을 유지였던 전주헌은 아들 전시대가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되어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부역을 했을 것이라는 혐의를 받아 설 제사를 지내던 중 김천경찰서로 연행되어 총살당했다. 희생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1951년 2월 14일에는 경찰에게 체포당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으로 보았던 구성면 주민들이 피신하던 중 체포되어 구성지서에서 조사받은 후 은신처였던 곳으로 끌려가 폭살당했다. 6․25 전쟁 발발 후 인민군이 구성면을 점령하자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여희동 등 주민들은 인민위원회 선전부 활동을 하였다. 1950년 9월 25일경 국군이 수복하자 이들은 체포될 경우 총살당한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 뒤 꿀재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 사실이 경찰에 의해 발각되자, 부항면의 더 깊은 산 중으로 피신하였다. 김천경찰서 사찰계는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형사 3명씩 6명으로 구성된 2개의 체포조를 구성면 일대에 잠복근무하게 하였다. 이들은 먼저 가족들을 감시하였는데, 이를 견디지 못한 정숙경 등 3명이 1950년 10월 20일경 입산하게 되었다. 이때 정원경의 동생 정대경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매를 많이 맞았는데, 당시 김용팔 형사의 활동이 두드러져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이들은 부항면 파천리 뒷산에 숨어 있으면서 불을 피우다 발각되어 경찰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여희동을 제외한 여환직 등 6명은 경찰에 체포되어 구성지서에 구금당하던 중 1951년 2월 14일 한 때 은신처였던 꿀재에서 총살 또는 폭살되었다. 꿀재 인근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한밤중에 꿀재 방향에서 나는 엄청난 총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당시 총살현장에 있던 대한청년단장 여성동이 희생자 최춘만의 모친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김천경찰서 사찰계 근무자는 수류탄 2~3개를 터트려 살해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이상 김천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