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는 여러 분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마도 천주교나 알미니안 계열에 소속한 분들은 구원의 확신에 대해 부정적인 어감을 가질 것이고, 이단 구원파 계열에 계신 분들은 인간의 주관적인 지식적 동의 정도에 불과한 구원의 확신을 절대적 구원으로 오해하고 합리화할 것입니다. 이에 비해 칼빈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 개혁주의는 신중하게 믿음의 증명이 수반되는 구원의 확신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롬8:28과 요일3:24 등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구원으로 나아가고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구원을 받았지만 확신이 뚜렷하지 않은 경우도 있을 수 있음). 개혁주의는 말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확신, 우리의 삶에 있는 성령의 증거,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우리의 양자 됨, 그리고 구원에 대한 우리의 확신, 이것들 사이에 친밀한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이와 관련, 구분선 아래에 『칼빈의 제1차 신앙교육서, 그 본문과 신학적 해설』의 설명을 올리고요. 전자•후자 등 지시하는 대상을 명확히 표시하고 강조하는 내용은 네모 박스 안에 넣어 올립니다. 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소명
칼빈과 리드 둘 모두는 하나님이 영원 가운데서 작정하신 것과 무엇에 근거해서 그리하셨는지를 추정하는 데 있어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드(J.K.S. Reid)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칼빈은 리드와 다른 칼빈 비판가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또는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중요한 구분을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counsel, consilium)과 하나님의 부르심 간의 구분이다. 전자(하나님의 비밀한 경륜)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말씀을 떠나서 탐구되어서는 안 된다. 후자(하나님의 부르심)는 믿음을 통해 알려져 있고 경험을 통해서도 확증된다. |
그러므로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 (call, vocatione)으로 시작해서 그것으로 끝나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의 계획에 대해 합법적으로 알 수 있는 것과목 마찬가지로 증표(a token, tessera)에 의한 것처럼, 부르심에 의해서 우리에게 확증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기독교 강요』, III.24. 4). |
이와 관련하여 영원한 예정 (Eternal Predestination)이라는 칼빈의 글에서 핵심 부분은 로마서 8:28인데, 특히 이 구절의 후반부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강조는 필자(존 헤셀링크)의 것이다). ← 댓글1 |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에 대한 예증을 본다. 이 부르심은 일반적인 또는 외적인 부르심과 달리 “전에는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시기 위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인치고 재가하는 확실하고 특정한 부르심”(Concerning the Eternal Predestination of God, 70.)이다.
잘 주목하라!
하나님 안에 숨겨진 것이 그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드러난다.
칼빈의 한 주석에서 이것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선택은 그 자체로 숨겨져 있고 비밀로 남아 있다. 주님은 이것을 부르심에 의해, 즉 우리에게 우리를 부르시는 이 축복을 주실 때 드러내신다(manifests, patefacit). ← 『칼빈 주석』 요 6:40. |
더욱이,
이 내적 부르심은 우리를 속일 수 없는 구원의 보증이다(『기독교 강요』 III. 24. 2). |
그 다음에, 칼빈은 이와 관련된 것으로 요한일서 3:24을 가리킨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느니라(요일 3:24, 칼빈의 번역). |
따라서 말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확신, 우리의 삶에 있는 성령의 증거,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우리의 양자 됨, 그리고 구원에 대한 우리의 확신, 이것들 사이에 친밀한 연관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흘러나오는 샘”인 선택에 관한 우리의 모든 고찰에서, 적절한 접근은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의 깊이를 재려 하지 않고 우리의 부르심으로 돌아서는 것인데, “이 부르심은 그것[우리를 택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외적 증거이며 하나님 자신 안에 감추어진 값없는 양자됨에 따라 나오는 것이다(댓글 2).
존 헤셀링크, 『칼빈의 제1차 신앙교육서, 그 본문과 신학적 해설』, pp.274∼276.
첫댓글 댓글1) 그러나 기독교 강요』에서 이 구절은 한 번도 인용되지 않는다! 대신에, 칼빈은 마 22장의 결혼 잔치 비유, 특히 "정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라는 구절을 언급한다. 칼빈은 이 구절을 “신자들이 자기들에 대한 선택을 판단해야 하는"(『기독교 강요』III. 24.9) 방편이 되는, 특별한 또는 내적 부르심이 아니라 일반적 또는 외적 부르심으로 해석한다.
어쨋든 특별한 내적 부르심을 받은 자 중에 일반적인 외적 부르심을 받은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군요.
@노베 네, 알겠습니다.
댓글2) 하나님은 “자기가 자기 성령에 의해서 자기의 택자들을 중생하게 하실 때 자기의 선택을 선언하시고, 따라서 그들에게 확실한 표시를 새기시는 반면, 그들은 자기들의 삶의 전 과정에 의해서 이 양자됨의 실재성을 입증하고 자기들의 양자됨을 확증한다”(『칼빈 주석』단 12:1).
구원을 받은 자들은 구원받은 자다운 믿음과 실천으로 자신의 믿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해 나아갈 것이고 그것이 성화이며 성도의 견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노베 댓글을 읽으며 저도 배움이 생기네요.
하나님이 인간들을 깨우쳐 주시지 않는 한 인간은 완전히 무지하고 맹목적인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나머지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성령으로 깨우쳐 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지를 핑계로 삼을 수 없으므로, 누구나 교만하거나 잠을 자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억제하셔야 하며,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생각과 기질을 인도해야 하며, 또 우리는 복음을 완전히 믿어 다윗 왕이 고백한 것처럼 복음이 꿀보다 더 달고 금과 은보다 더 귀하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만큼만 이야기하겠습니다.
***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 구원의 확신/// 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믿지 않고 저항한 모든 사람들에게 형벌을 내리기 위해 오실 때 이 세상은 오직 복음에 따라 심판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참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여야 하며,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구속을 위해 제공하신 것이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의심해서도 안 됩니다. 복음을 믿는 사람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구세주로 오실 것을 의심하지 않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거절하지 않는다면 /// 하나님은 분명히 이러한 확신을 주십니다. /// ***
<-- 칼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그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고(2)
https://cafe.daum.net/1107/Y4OQ/159
@장코뱅 하나님께서 특별한 부르심으로 구원한 자들에게 크게든 작게든 구원의 확신을 주시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도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 같고요. 무엇보다 칼빈이 번역한 요일3:24를 보면 더욱 구원의 확신이 생깁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믿음이 연약해서 구원은 받았지만 확신이 약하거나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너무나 연약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사람들에게 쓴 편지를 통하여, 이 소망을 더욱 확고히 가지게 하려고 새로운 논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멸시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위엄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무시당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거슬리고 하나님께 대항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 우리는 한층 더 구원의 소망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하나님 자신의 일로 여기시고 그 일에 흥미를 느끼십니다. 이 점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
///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이 어떠한지를 충분히 확신시켜 주시지만, ///우리의 본성은 불신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항상 의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실 것이며 그의 위엄이 사람의 발에 짓밟히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르침은 우리를 확신으로 가득 채워줍니다. 하나님이 그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을 결합시키는 은혜를 주셨으므로 이 둘 사이에는 끊을 수 없는 유대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과 배반을 대적하여 자신의 위엄을 유지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주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유와 쉼을 주려고 오시지 않겠습니까?
<-- 칼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그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고(1)
https://cafe.daum.net/1107/Y4OQ/158
@장코뱅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확신을 주시지만 성도의 믿음이 연약하여 확신이 약해지거나 없을 수 있다는 것이 현실적인 생각 같습니다.
성령의 유효한 역사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이단교회의 부추김과 개인의 주관적 깨달음을 구원으로 여기는, 그런 구원파의 믿음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과 합당한 복음과 구원의 서정과 개혁주의 5대강령(TULIP)을 인정하는 흐름 속에서, 구원의 확신과 믿음의 확신을 얻는 것이 안전하고 안정적입니다. 존 오웬의『구원하는 믿음의 증거』에서 구원하는 믿음이 영혼에 주는 유익 부분을 올리니 읽고 참고하고 은혜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 구원하는 믿음이 영혼에 주는 유익은 크게 네 가지다(존 오웬)
https://cafe.daum.net/1107/YY6J/14
네, 잘 알겠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천주교, 인간의 성급한 주관적 확신이 곧 구원이라고 착각하는 구원파 식의 구원의 확신은 잘못된 종교입니다. 개혁주의적인 구원의 확신이 안정적이며 현실적인 것으로 보여서 그에 동의합니다.
네, 좋습니다. 공감과 댓글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22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을 증명하시는 방법으로 부르심, 외적인 소명을 주신다는 칼빈의 설명이 고무적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위엄을 위하여 인간을 불신과 대적하는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의심과 불순종 같은 것들을 제거해주려고 하신다는 설명도 독특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간결한 요약과 임팩트 있는 댓글에 매우 공감하고 감사합니다.
좋은 댓글을 읽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