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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체화된 삶의 절실한 언어들
-김옥종 시집 《민어의 노래》중심
현대인에게 있어 삶은 현실을 초과할 수 없다. 주어진 현실의 무게는 삶을 한시도 해찰할 수 없도록 일상을 옥죄기 때문이다. 그런 환경에서 누구나 진전된 삶을 위한 변화를 갈망하며 살아간다. 인간의 실존을 위한 생존 문제라는 위중함 속에서도 고달픈 몸과 마음을 위로하는 방법을 터득해 간다. 어떤 사람은 침묵을 자위自衛 수단으로 삼거나, 또는 참을 수 없는 감정을 과감하게 드러내 중압감을 해소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문학은 그중 한 예가 될 수 있다. 진력을 다한 삶에서 빚어지는 일상의 애환을 드러내는 것이 문학이라면 그 자체가 사회성을 띤 시대 현상을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한 서사물인 셈이다. 현대인들 대다수는 어쩔 수 없는 처지에서 선택한 생업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며 긍정적인 관점에서 감당해 간다. 사회 경쟁에서 대단하게 성공하지 못한 삶이라 해서 그 또한 좌절만 할 수 없다. 되레 담담하게 긍정하는 필생의 시간만큼은 당당한 사회 주체임을 확신하는 자의식의 발현인 셈이다. 그런 순간순간 스쳐오는 회한을 시로 형상화하는 작업은 자신의 삶에 대한 긍지에서 출발한다. 주어진 현실에서 좌절하지 않고 전력을 다한 삶의 주체들이 자아의 표현 수단으로 문학을 선택했다면, 사회를 진전시키는데 기여하는 것으로 사회학적 관점에서도 괜찮은 셈이다. 세상이라는 개별적 세계 속에서 사회 구성원으로 담담하게 역할을 수행할 때 비로소 또 다른 주류로서 그들만의 변별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 중에 현실을 시적 공감으로 확장해 가는 김옥종 시인을 떠올려 보았다. 익히 아는 바와 같이 김옥종 시인은 격투기 선수로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요리사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시인의 삶을 문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첫 시집《민어의 노래》를 면밀하게 살폈다. 물고기를 다루는 생업 속에서 인간의 생애와 접목한 시편에는 소시민의 애환이 깃든 표정들이 진하게 배어있었다. 그것은 현실과 유리된 이상이 아니라 실재한 현상을 사실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데서 기인한다. 대체적으로 김옥종 시인의 시에서 드러나는 문장의 담백함은 진솔한 마음으로 사유한 생업은 숙명일 수 있다. 몸속으로 육화 된 진정한 언어의 소요는 크고 작은 파동을 가슴까지 밀어 올린다.
더위는 참을만하다는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저녁에는
부적절하게 보내고 싶은 사람이 있어
홍어 코빼기는 초장에 찍고
애는 참기름 장에 찍어 먹고
내 애는 담근 술병에서 꺼내
반나절 말려두었다가 그대의 속이
온전치 않는 날에 새끼배추와 몽근하게
끓여내야겠네
-<홍어애탕> 전문
음식을 조리하는 요리사의 눈은 사물을 이상화理想化하려 않는다. 그것은 사실적인 관점으로 집중해야 하고 한순간도 해찰해선 안 되는 직업의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오감을 통해 감각되는 물성이 내면의 심성에서 발효되는 시간마저 변질되어서는 안 되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그런 최대한의 노력에 따른 결과가 삶의 의식으로 발화하여 언어로 재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눈길을 끄는 시 <홍어애탕>도 앞서 말한 범주와 궤를 같이한다. 문제는 홍어가 풍기는 특유의 냄새로 아직은 많은 사람들에게 친근할 수 없는 요인이다. ‘홍어’라는 어종을 이용하는 요리 방법의 하나로 한때는 특정 지역 사람을 비하하는 비속어로 쓰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홍어를 통해 세상살이의 곁붙이 같이 따라붙는 애환을 피력한 것도 고통스럽다는 표현인 것이다. 시인이 홍어를 통해 부양하고 있는 사회성은 현실적인 우리의 이야기라서 공감할 여지가 크다. 그런 요소를 적절하게 짚어내고 있어 지리적인 친근성과 더불어 부담 없이 다가간다. 사람이 모여 사회를 구조하듯 홍어라는 사물성이 간직한 독특한 ‘애’가 들어가야 별미인 ‘홍어애탕’을 끓여낼 수 있다. ‘홍어애탕’이라는 시적 대상이 함의하고 있는 언어적 의미는 사전적 범주를 초과한 시대에 비례한 사회성과 더불어 정치적인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다. ‘홍어애탕’은 결국 곡진한 삶의 비유이자 시의 정형에서 빠뜨릴 수 없는 비유처럼 남도南道 서정의 완경으로 맛깔스런 풍미를 완성한다. 참을만하다는 ‘더위’에 빗댄 고독만큼이나 알고 보면 부적절하게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는 사연도 따지고 보면 애증의 이면을 갖고 있다. 버릴 것 하나 없는 홍어처럼 소중한 그대를 위해 언젠가는 ‘홍어애탕’을 끓여보겠다는 독백 같은 다짐이 단순해 보여도 그렇지 않다. 애간장을 녹인다는 ‘애’는 결국 시인의 가슴 안에서 긴 시간으로 속앓이 한 마음의 표징으로 한국인만이 갖고 있다는 ‘화병’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홍어애를 넣어 끓인 ‘애’ 탕의 독특한 맛(풍미)을 빌미 삼아 통정하려는 대상은 특별한 사람을 의미한다. 막상 ‘사람’을 떠나보내고 보니 그리워지는 “홍어 코빼기는 초장에 찍고/ 애는 참기름 장에 찍어 먹”을 수 있어 버릴 것 하나 없는 홍어처럼 떠나보낸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다. 혹시나 재회의 기회가 온다면 막연하지만, 그 사람을 위해 “내 애는 담근 술병에서 꺼내/ 반나절 말려두었다가 그대의 속이/ 온전치 않는 날에 새끼배추와 몽근하게/ 끓여내야겠네”라며 속내 깊은 흉중을 흘린다. 화자의 전언으로 들려주는 시 속에는 바다 물고기를 통해 날 것 같은 언어가 삶의 비의와 더불어 감칠맛 나는 향토성을 자극한다. 그중 시적 대상인 민어는 서, 남해안 쪽에서 즐겨 먹는 바닷고기이다.
고사리 장마가 지나고 난 바닷길
깊게 패인 여울물 소리에 새우떼의 선잠을 깨우는
밴댕이와 알 품은 병어들의 놀이터가 돼버린 전장포 앞바다에서는
서남쪽 흑산해에서 진달래꽃 피기를 기다렸다가
뻘물 드리우는 사리물 때를 기다려
뿌우욱 뿌우욱 부레로 내는 속울음으로
내 고달픈,
고향에 다다른 칠월의 갯내음을 아가미로 훑는다
마늘 뽑고 양파 캐어 말리던 늦은 오후,
구년은 자랐을 법한 일 미터의 십키로짜리 숫치를 토방에 눕히고
추렴하여 내온 병쓰메*에 네 등살은 막장에 얹어 먹고
목살은 묵은지에 감아먹고 늙은 오이짠지는 볼 살에 얹어 먹고
고추 참기름 장에는 부레와 갯무레기 뱃살을 적셔먹고
갈비뼈와 등지느러미 살은 잘게 조사서
가는 소금으로 엮어내는 뼈다짐으로 먹어도 좋고
내장과 간은 데쳐서 젓새우 고추장에 볶아내고
쓸개는 어혈이 많아 어깨가 쳐진 친구에게 내어주고
아랫 턱 위에 붙어있는 입술 살은 두 점 밖에 안 나오니
내가 먹어도 될 성 싶은
깊은 고랑 주름살에도 꼬리뼈 살을 긁적거리고 있노라면
봉굴수리잡* 옆의 대실 개복숭아는 제법 엉덩이가 빨갛다
세월은 소리 내어 울지 않는 것
민어 몇 마리 돌아왔다고 기다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새우 놀던 모래밭을 파헤쳐
집 지을 때부터 플랑크톤이 없던 모래밭에
새끼를 품어내지 못한 오젓, 육젓이 밴댕이를 울리고
깡다리를 울리고
병어를 울리고
내 입맛 다실 갯지렁이도 없는 바다에 올라 칼끝에 노래하던
민어의 복숭아 빛 속살은 다시 볼 수 없으리라
*병쓰메: 2홉짜리 작은 소주. 일본말 빙즈메에서 온 말.
*봉굴수리잡: 봉굴저수지 옆에 있었던 수리조합의 준말.
-<민어의 노래> 전문
민어가 자주 출몰하는 ‘전장포 앞바다’와 시인의 태생지일듯한 섬의 환경을 상상해 본다. 시인이 태어나 성장한 시간이 온통 집약되어 있는 ‘전장포’는 전남 신안군 임자면을 아우르는 바다 물길이자 삶의 터전임을 알 수 있다. 사철 푸른 바다와 거친 파도가 일상처럼 몸에 밴 생존을 위한 험난한 시간들을 기억 속 문장으로 체현體現한 것이다. 농촌이나 어촌이나 보릿고개라는 고달픈 계절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농경지가 부족한 섬에서의 절박한 그 계절을 넘기기 위해 고사리를 뜯는 장마를 지나 한참을 더해야 바다를 둘러싼 산 능선에 진달래 꽃이 터졌을 것이다. 그러고도 한 동안 바닷가 사람들에게 배고픔은 금방 해소되지 않는다. ‘조금’이 한참을 지난 뒤에야 찾아오는 “뻘물 드리우는 사리물 때를 기다려/ 뿌우욱 뿌우욱 부레로 내는 속울음으로/ 내 고달픈,/ 고향에 다다른 칠월의 갯내음을 아가미로 훑는다”는 사리물 때는 밀물과 썰물의 차가 최대가 되는 시기로 만만치 않은 바다의 높은 파고를 넘어야만 그토록 기다리던 민어가 돌아온다. 민어를 통해 곤궁한 삶을 해소할 수 있었던 전장포 바다가 화자의 유년기 고픈 배를 가득 채워준 바다였다. 시적 대상으로 기억에 남은 ‘전장포’의 바다는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치열한 각축장이었고, 그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도보다 더 크게 울부짖어야만 했던 섬사람들의 비명 가득했던 장소로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3연으로 아우러진 ‘민어의 노래’는 시인이 지금껏 살아온 회한과 동경이 교차하면서 아련한 울림으로 교차한다. 한없이 순한 사람들이지만,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맞서야만 했던 바닷사람들의 슬픔을 탁본한 듯한 중저음中低音의 문장이다. ‘전장포’ 바다가 ‘조금’과 ‘사리’로 반복하여 변주되지만, 바다의 본성을 잃지 않듯 긴 세월의 부침을 굳건하게 버텨낸 바닷가 사람들의 비말飛沫같은 언어들을 형상문자로 복원한다. 1연의 아련한 기억 속 바다는 잊을만하면 도지는 통풍만큼이나 아픈 향수처럼 애틋함이 묻어 있다. 어린 눈으로 체험한 실상에서 육화한 삶은 위중함을 깨닫게 한다. 2연에서는 토속적인 민어 요리 방법을 보고 자란 섬사람들만의 정겨운 풍경을 재현하고 있다. 그 언술 안에서 서정시의 정경을 보여주는 인정미 가득한 “쓸개는 어혈이 많아 어깨가 쳐진 친구에게 내어주고/ 아랫 턱 위에 붙어있는 입술 살은 두 점 밖에 안 나오니/ 내가 먹어도 될 성 싶은/ 깊은 고랑 주름살에도 꼬리뼈 살을 긁적거리고 있노라면/ 봉굴수리잡* 옆의 대실 개복숭아는 제법 엉덩이가 빨갛다”는 묘사만으로도 시적 상징을 초월한 완경이다. 민어를 맛깔지게 먹는 방법처럼 사람 사는 데 있어 끈끈한 인정머리가 배제된다면 시의 본령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 3연 아름다운 기억 속 전장포 앞바다도 예전 같지 않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한다. 과거 추억 속 아름다운 ‘전장포 앞바다’의 변해버린 현실 앞에서 돌이킬 수 없다는 비애가 가슴에 슬어 든다. 그 체념 같은 “민어의 복숭아 빛 속살은 다시 볼 수 없으리라”라는 말속에는 미래의 모두가 감당해야 환경에 대한 부채負責란 것도 암시하고 있다.
울 큰 엄니 사리 물때에
눈이 가슴팍 까지 차오르던 날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꿩전을 부치셨다
생이 몇 바퀴 돌고서야 꼬순내 나던 꿩전이
명태 대그빡으로 만든 것임을 알았다
하릴없이 유년의 뒷그림자
녹슨 칼로 닦아내고
비계의 육즙 옆에 얼큰하게 드러눕던 밤
울 큰 엄니 꼬부랑 할매 되어
돌고 돌아오던 길가에서
기억을 꼬집고 가차이 서있는 보름달 아래에
콩대 타는 소리 튀어 오르고
휘어진 냉길 눈물샘으로 불어내며
명태 대그빡 대신 꿩 살을 다져 전을 부친다
대실 잔등에서 북서풍의 설향이 물안개처럼 흩날리고,
냉골인 구들장을 뎁혀 눅눅해진 시절을
올 곱게 하고 싶은 날에
버스 끊긴 정류장 앞은 달이 차고 넘쳐
새벽으로 번진 은하수 길 따라
명태 자리 별의 대그빡을 조사서
전을 부친다
-<명태 대그빡 전> 전문
세월은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생사를 갈라놓는다. 기억에만 남아있는 사람들의 추억은 잊을만하면 울컥 되살아나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그래서 흔히들 문학은 과거를 기록하는 것이라며 문자를 새겨 영원성을 갈망한다. 김옥종 시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과거라는 찰나도 시적 발현을 거쳐 사라지지 않는 생명성으로 양각된다. 그것이 시인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위안일 수 있다. “울 큰 엄니 사리 물때에/ 눈이 가슴팍 까지 차오르던 날/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꿩전을 부치셨다”며 회상의 단초를 드러낸다. ‘엄니’라는 말부터가 그리움이 묻어 시적 정감을 배가한다. 시인의 생애에서 은근한 사랑의 화수분이 되어준 그 ‘엄니’가 살아온 시간은 물리적으로 아득하지만, 정신적인 거리는 예전과 동일한 지근거리에 있다. 그 거리는 팍팍한 현실을 무한 애정으로 보듬어 주던 어머니의 가슴이자 세상을 살아가며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포옹의 시간으로 환기된다. 시인은 시간 여행을 통해 수시로 과거 속 ‘엄니’를 회상할 것이다. 회상 속에서 ‘엄니’의 손맛으로 기억하는 ‘꿩전’이란 것이 나이 들어 알게 된 ‘명태 대그빡 전’이었다. 명태 ‘대그빡’이라는 거친 어감을 맛깔진 ‘꿩전’으로 에둘러 말한 것마저 어머니라는 정감으로 품어낸 세상의 깊이를 가늠케 한다. 신안군의 다도해인 섬에서 ‘꿩전’의 유래는 빈궁한 삶을 견뎌내게 한 궁리인 것이다. 한 끼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버려진 명태 대가리로 곤궁한 시기를 극복한 어머니의 사랑이 혼곤하게 밴 추억으로 그 섬에 살던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소싯적 아이의 꿈같은 시간 속에 각인된 고향과 어머니의 사랑으로 넘긴 한 끼지만, 절박한 현실을 넘기는 데는 많이 부족했다. 시인은 바닷고기를 조리하는 직업인으로 살며 어머니가 베푼 살가운 정을 음식 속에 듬뿍 담아내고 있다. “울 큰 엄니 꼬부랑 할매 되어/ 돌고 돌아오던 길가에서/ 기억을 꼬집고 가차이 서있는 보름달 아래에/ 콩대 타는 소리 튀어 오르고/ 휘어진 냉길 눈물샘으로 불어내며/ 명태 대그빡 대신 꿩 살을 다져 전을 부친다”는 슬픔 같은 현실에서 먹고살기 위해 고단한 노동을 실천해야만 한다. 생존의 고통이 가슴까지 차오를 즈음이면 주저 없이 어머니가 부쳐낸 “명태 대그빡 전”이라는 시 제목처럼 정색하며 음미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고달픈 세월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새벽으로 번진 은하수 길 따라/ 명태 자리 별의 대그빡을 조사서/ 전을 부친다”라며 어머니가 베풀던 사랑을 실천해야 할 삶의 덕목으로 기억한다. 욕망이 앞선 사회에서 이타적인 사랑을 볼 수 없는 요즘 순정한 마음들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그 시절 가슴으로 나눈 인정을 삶의 중심으로 불러내 형상화한 김옥종 시인의 적층 된 과거가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은 그만큼 요리사란 삶에서 특별함으로 실천되기 때문이다.
뉘집 굴뚝에서 강그러지는 냉갈이다냐
정지의 곤로 위에 눌은 밥은
하얀 눈으로 내리고
가슴팍까지 차오른 눈들을 헤집고
늙고 병든 토끼며
뒤뜰의 대나무 숲에
걸터앉은 때까치며
멧등 위에 짚벼늘 넣어 만든 비료 포대 썰매며
수분기 없는 홍시며
마른 시렁에 식은 보리 개떡이며
사카린 풀어 놓은 팥 없는 눈꽃 빙수며,
그런 그런 그들이 다들 살갑고
몇몇은
토끼몰이에 진을 다 빼고 나서야
맹독의 싸이나 넣고 촛농으로 밀봉해둔 메주 콩 먹고 비틀거리는
꿩 한 마리 주워서 돌아왔고
시원한 무국에 해장으로
사랑방에 모여들어 소주 댓병 추렴하여 놀 때
서당골 이모 샛서방 기다리다 젓가락으로 찌르던
허벅지 사이로 차갑게 그믐달이 진다
-<봉리 수리잡에서> 전문
서정시의 정서가 감각의 접점에서 기인한다고 볼 때, 김옥종 시인의 시적 정서는 과거에서 유추한 시각적 풍요를 들 수 있다. 상상 속의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잊었던 소중한 시간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흐릿하지만,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한 끈끈한 인정이 가슴속에서 체온보다 뜨겁게 살아난다. 김옥종 시인이 배치한 풍경은 인위적으로 설치된 구조물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자연의 상태를 기억 속에서 복원해 낸 사실성에 근거한다. 허구가 아니라는 것은 어떠한 여건에서도 변화될 수 없는 고유한 진정성으로 인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뉘집 굴뚝에서 강그러지는 냉갈”이냐는 물음마저 정겨운 남도의 진한 인정머리로 호환된다. 시인이 성장한 바닷가에서만 통할 수 있는 살가운 정감을 고스란히 재현해 냈다. 자칫 흩어져버릴 수 있는 부뚜막의 연기가 식었던 온돌을 덥히듯 현실과 과거의 경계를 교란하기 시작했다. 첫 행으로 언술 된 행장은 김옥종 시인만이 알고 있는 추억이다. 하지만, 보편적 공감을 불러오는 “정지의 곤로 위에 눌은 밥은/ 하얀 눈으로 내리고/ 가슴팍까지 차오른 눈들을 헤집고” 번져온 온기는 뜨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공통된 추억으로 자리매김되면서 잊힌 공동체 의식의 근본인 인간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소소한 추억 속을 시적 활기로 살궈내듯 김옥종의 시가 행을 거듭하면서 서정적인 상상력으로 변주되는 것의 변별성은 특별하거나 이채로운 것이 아니라서 성공한 것이다. 다시는 체험할 수 없는 옛날 옛적의 이야기 속에나 등장할 진경 묘사가 갖는 시적 의미는 시의 본질인 상징으로 언어 망을 상회한 것 들이다. 풍요로 대체되는 현대인의 의식에서 사라져 버린 인간애를 환기하는 것은 이제 덤도 아니다. 김옥종 시인이 생각하고 있는 문학적인 위의는 곤궁했던 시절의 재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쓴 물 나도록 힘든 노동 끝 간절했던 휴식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카린’의 단맛에 중독된 것처럼 순수했던 시절의 꿈은 저버릴 수 없다. 아련하여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토끼몰이에 진을 다 빼고 나서야/ 맹독의 싸이나 넣고 촛농으로 밀봉해둔 메주 콩 먹고 비틀거리는/ 꿩 한 마리 주워서 돌아왔고/ 시원한 무국에 해장으로/ 사랑방에 모여들어 소주 댓병 추렴하여 놀 때/ 서당골 이모 샛서방 기다리다 젓가락으로 찌르던/ 허벅지 사이로 차갑게 그믐달이 진다”는 추억마저 처절한 절망을 견뎌야 했던 비애라 더는 말할 수 없다. 뽑아내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질기도록 솟아나는 흰머리처럼 “봉리 수리잡” 그곳에 가면 만날 것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다시는 볼 수 없다. 시로 발화하기 전부터 김옥종 시인의 뇌리에 각인된 말들은 이미 충분한 시의를 품고 있었다. 풍경을 전언하는 화자와 동일시하는 순간도 훗날 되돌아보면 찰나에 불과하다. 찰나에 불과한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이방인이란 타자로 인식하면서 살아온 셈이다. 인간이면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귀거래사의 시간이 임박해서야 알게 되는 풍화風火라는 순리에서 생명의 유한성을 인식하게 된다.
어제도 너를 보내준 꽃무릇 길로 돌아오는 길에 하루에 한 번씩은
헤어짐을 준비해온 터라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은 없을 거라고
촉촉이 젖어있는 어둠에 볼을 비벼댄다
서로에게 가까이 가는 길은 너무 힘들어
배롱나무 꽃이 져버린 달력을 넘기며
어둑한 밤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서 네 지친 그림자를 떠올리면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두려움인지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인지
사방은 어둡고 다다를 수 없는 너는
파도로 살아나
가슴으로만
그 여린 가슴으로만 무너져 내리는데
눈물 한 방울 없이
거칠게 잊어 줄 것 같은 계절에
앞서 떠난 바람아 대숲을 흔들던 날에도
서로 다른 부위의 상처가
누구의 심장에도 박히지 못한 침엽수로 떠돌고 있었으니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두려움인지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인지
-<우리가 닮아 간다는 것> 전문
영장류에 속하지만, 인간도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리 앞에서는 왜소한 존재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듯이 매번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루를 평생처럼 연명하며 살아가고픈 인간의 욕망을 ‘현재’라는 시점을 경계로 볼 때 ‘어제’라는 시간도 엄연한 과거라는 피안彼岸의 세계임을 깨닫게 된다. 냉혹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서야 욕망의 임계치臨界値를 깨닫게 된다. 그 마지노선을 넘으면 되돌아올 수 없는 내일이라는 미래라는 차안此岸의 세계가 기다린다. 부단한 자기반성의 시간을 통해 순리에 다가가려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궁극이다. “어제도 너를 보내준 꽃무릇 길로 돌아오는 길에 하루에 한 번씩은/ 헤어짐을 준비해온 터라”라며 비장한 각오를 확인한다. 화자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별이란 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은 없을 거라고/ 촉촉이 젖어있는 어둠에 볼을 비벼댄다”는 안타까움에 묻어나는 그리움이 짙다. 채 하루를 넘기지 못한 이별의 후유증에 통증 같은 그리움을 더해 아픔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함께 걸을 수 없는 ‘꽃무릇 길’을 혼자서 감내하며 걸어야 한다. 화자가 걷는 ‘꽃무릇 길’ 그 자체가 험난한 삶의 현장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별의 결말은 슬픔을 잉태한 채 화자의 몫으로 고스란히 떠넘겨지고 말았지만, 남은 자는 떠난 사람이 밟고 간 행로를 답습하며 실행해야 한다. 정인情人과 함께 한 시간을 떠올리며 서로가 달랐던 순간들의 부질없었음을 깨닫는 후회가 가슴을 쓰리게 한다. 그 사람을 떠나보낸 뒤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배롱나무 꽃이 져버린 달력을 넘기”지만, 변한 것은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두려움인지/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인지”를 절망하며 무상이라는 인생살이를 깨달아간다. 그토록 통렬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본능도 크게 다를 바 없어 언젠가는 귀소 지점에서 비애 같은 숙명일 뿐이다. 화려하게 피었다가 시들고 마는 ‘꽃무릇’을 보면서 인간도 생물적인 생장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애의 행로에서 ‘두려움’과 ‘슬픔’마저 무감해질 때 절실한 욕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김옥종 시인의 시적 지향은 문학을 통한 과거와 현실을 긍정으로 수렴해 가는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그것은 문학이라는 수사로 가공되지 않는 사실성에 근거한 세계를 진실하게 보여주고 있어서다. 낙도라는 섬에서 체험한 기억을 촘촘한 시어로 직조하여 잃어버린 삶의 원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김옥종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다는 사람 냄새가 진동하는 치열한 생존의 터전이다. 바다의 물 때를 거스르지 않고 자유롭게 드나들던 신안의 바다에서 잡아 올린 고기가 자연산이듯 김옥종 시인의 시심도 자연 그대로인 것이다. 시인에게 체화된 섬의 근성이 문학적으로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이후에도 본원적인 삶의 궤적들이 시적으로 구현되어 각박해진 현대인들에게 위안이 되는 김옥종 시인의 성장을 전망해본다.
-《시와사람》2021년 봄 9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