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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문학 제67집 (2015년 10월)
유쾌한 상대성의 르네상스: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황 지 혜 (신라대)
국문초록
이 논문의 목적은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에 드러난 바흐친의 카니발적
이미지를 읽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영국 극작가로서 카
니발 또한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화려한 꽃을 피웠다. 바흐친 또한 셰익스피어 작품에
는 겉으로 드러나는 카니발적 요소들이 많다고 언급하면서 영국 르네상스 시대의 연회
적 자유사상을 언급하고 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발견되는 카니발적 요소들은
가면과 변장,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하부의 이미지들이나 상호모순적인 양면 가치들,
향연의 이미지들이다. 특히 신체적 하부를 향하는 격하의 이미지들은 그로테스크 리얼
리즘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러한 신체와 신체의 기능에 대한 관심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본중심적인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을 중심으로 한 사고의
전환은 중세까지 지배적이었던 대 존재 사슬에서 벗어나 인간의 생생한 육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이는 의학이라는 새로운 과학과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시대적 전환
과도 관계가 있으며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급진적인 시대적 변화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변화와 교체에 대한 세계 인식은 극 속에서 카니발적 파괴와 생성
이라는 양가적인 극적 장치들로 표현되고 있다. 절대화되고 총체화되기를 거부하는
카니발의 상대성의 원리는 변화 생성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긍정하고 있다
☞ 주제어: 카니발, 그로테스크 이미지, 대관, 폐위, 유쾌한 상대성
I. 카니발, 사회의 틈을 열다
카니발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이교도적 의식과 농신제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시대에 가장 융성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카니발은 1년 중 3개월을 할애할 정도로 삶의 시간 속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
하고 있었다. 카니발은 합법적으로 허가된 비공식적인 축제였기 때문에 카니
발 기간 동안 만큼은 삶을 지배하고 있던 계급 사회의 권위적인 힘이 일시
정지되었다. 공식적인 축제는 신분상의 차이를 서열화하고 위계질서의 상징
적 표상과 호명을 통해 계급적 불평등 구조를 승인하고 강화하는 이데올로기
적 국가장치였다. 반면에 카니발은 바흐친(M. M. Bakhtin)의 말을 인용하자
면 모든 “위계적 서열, 특권, 규범, 금지의 일시적 파기를 축하”(Rabelais 9)1)
하는 민중들의 문화였다. 지배계급 문화 내에 용인된 피지배계급의 문화이자
합법화된 비공식적 문화라는 점에서 카니발은 “사회라고 하는 직물에 갈라진
틈”(Holquist 301)이다. 틈새 공간으로서의 카니발은 카니발 외부의 현실 세
계와는 다른 시공간을 건설해낸다. 현실의 시간은 지배계급들이 자신들의 세
습된 특권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영속화하기 위해 영원한 과거로 고착되
어 있다. 반면에 카니발은 “진정한 시간성의 축제로 생성과 변화, 갱생을 축하
하는 축제”(10)로 유토피아적 미래를 향하고 있다. 한편 카니발은 처음부터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긴 하지만 매년 정해진 시간에 순환하는 연례적 축제였
기 때문에 이러한 반복은 지배계급의 권력을 반복적으로 중단시킬 수 있는
틈새 전략이기도 했다. 카니발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매년 기계적으로 반복되
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반복이란 형식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들, 즉 시간,
공간, 그리고 사람들의 차이는 동일화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반복성
1) Mikhail Bakhtin. Rabelais and His World. Trans. Hélène Iswolsky (Bloomington:
Indiana UP, 1984) 앞으로 이 책에서의 인용은 괄호 속에 쪽수만 표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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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이를 생산해 낼 수 있는 또 다른 틈새 전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카니발의 위반성이 축제의 형식으로 인해 제한적이며 유희적
성격이 강하다 할지라도 오히려 이러한 ‘놀이’의 성격으로 인해 매년 반복되
는 카니발은 다른 시공간과 다른 사람들을 접속시키면서 방해받지 않고 차이
를 생성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카니발의 축제적 전략은 당대의 현실에서는
꿰뚫을 수 없었던 배타적인 신체적 경계와 장벽에 균열을 내면서 새로운 관계
들을 생성해 내고 다양한 흐름들이 통과할 수 있는 틈을 낸다. 그러한 틈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고 쉽게 메울 수 있는 크기라 할지라도 곳곳에
서 동시 다발적인 균열이 발생한다면 그리고 이 균열이 반복된다면 언젠가
벽은 스스로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다. 카니발에 잠재되어 있는 저항 전략의
핵심은 사회 질서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 안에서 틈을 내는 데
있다. 카니발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카니발적 삶 이외의 다른 어떤 삶도 없으
며 오직 카니발의 자유의 법칙만” 통용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카니발의
삶은 카니발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호흡하며 살아가는 자유로
운 놀이로서의 삶이다. 한편 새로운 삶의 창조라는 의미에서 “예술과 삶의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는 카니발의 세계는 “일상적이고 공식적인 삶의 방식
으로부터 탈주하여” 권위를 해체하고 위계질서를 뒤집는 유희의 공간이 된다
(7). 바꾸어 말하면 카니발적 삶은 “뒤집혀진 삶”이자 “거꾸로 된 삶”
(Problems 122)으로 현실의 모든 권위적 상징과 위계가 파괴되고 전복된다.
중요한 점은 카니발에서의 파괴는 “완결성에 적대적”(10)이며 결코 절대화
될 수 없는 “유쾌한 상대성”(11)의 논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카니발의
상대성의 원리는 현존 질서의 불변성과 초시간성에 반대로 사회-역사적 변화,
전환의 계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파괴는 생성을 내재한 상호
모순적인 가치체계를 포함하고 있다.
카니발을 통해 민중들은 현실의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신분 질서의 경계를
허물고 수평적이고 순수한 인간관계를 탄생시킨다. 다시 말하자면 민중들은
카니발을 통해 계급적 서열과 차별을 가시화하는 현실의 수직적인 세계를 파
괴하고 자유와 평등에 기반한 수평적 세계를 건설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수
평적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민중들의 생생하고 물리적인 접촉과 서스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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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관계 맺기이다. 따라서 카니발의 생성으로서의 파괴는 물질적이고 육체
적인 그로테스크의 이미지들로 구현되고 있다.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은
이성의 영역으로 머리인 신체의 상부와 연관되어 있다면 그로테스크는 신체
의 하부와 연결되어 있다. 신체적 하부는 배설이나 성교, 임신, 출산과 같은
생리적, 생식적 기능과 연결되어 있다. 신체적 하부는 격하의 이미지를 가지
는 데 출산이나 배설행위는 모두 신체의 하부를 따라 가장 낮은 곳, 아래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원리로
서 그로테스크는 “옛것과 새로운 것, 죽어가는 것과 탄생하는 것”(24)과 같은
상대성의 원리를 긍정하고 있다.
본 논문은 바흐친의 카니발 개념을 적용하여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희극인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Taming of the Shrew)에
드러난 카니발적 이미지들을 읽고자 한다. 셰익스피어는 카니발이 가장 화려
하게 개화했던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극작가이다. 그리고 1593~1594년
에 쓰여졌다고 추정되는 『말괄량이 길들이기』 또한 르네상스 시대에 속해
있다. 이 극에서 사건은 언제나 외부에서 찾아온 이방인과의 만남으로 인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우연히 만나게 되고 가면을 쓰고 변
장을 한 채 자신의 신분과 정체성을 바꾸는 인물들은 카니발을 통해 서로 접
촉하게 되는 다양한 민중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 특히 이 극은 극중극 형태로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서극 안에 위치한 본극이며 실제로 서극에서 영주를
위해 유랑극단이 공연하는 연극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극은 『말괄량이
길들이기』라는 연극을 끝으로 극을 종결지음으로써 서극을 미완성 구조로 남
겨 두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호한 열린 결말의 극 구조로 인해 이 극은
주로 서극을 제외한 본극에 집중해 타자, 여성, 주체, 담론이라는 키워드로
해석되어 왔다. 하지만 서극을 포함하게 된다면 말괄량이 여성을 길들여지는
타자나 되받아 말하는 저항적 주체로 보는 비평적 틀을 일관되게 적용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본 논문은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극중극 양
식이며 극 제목인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연극이라는 점을 주지하면서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서극 속에 위치한 연극적 행위로서의 본극은 자유로운 놀이
로서의 카니발적 삶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러한 유희 전략은 현존하는 질서
내에서 새로운 시간을 생성해 내는 카니발적 틈새 공간을 열게 된다. 카니발
적 웃음과 가면이 가진 경계 위반적 속성은 카니발적 광장의 무대와 접속하면
서 말괄량이를 둘러싼 계급과 젠더 규범의 허위성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카니
발적 패러디 전략을 실천하게 된다. 젠더와 신분 질서의 경계를 위반하는 그
로테스크적 몸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변신중인 상태”(24)를 나타내고
있으며 통합된 주체로서 동일화되기를 거부하면서 미완의 가능성을 열어두
고 있다.
II. 카니발적 웃음과 변장 : 경계를 위반하다
카니발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어릿광대가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처럼 어
릿광대는 카니발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경계적 존재이다. 어릿광대
가 모습을 드러내면 일상의 제도적 시간은 멈추고 유쾌한 경계 넘기를 허용하
는 카니발의 입구가 열린다. 어릿광대는 광대의 역할을 연기하지만 연극 무대
라는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다. 어릿광대는 웃음을 주지만 희극을 연기하는
코미디언도 아니다. 코미디언의 무대는 관객석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관객
은 코미디언의 연기를 바라보는 관람자의 위치로 고정된다. 반면에 어릿광대
는 관객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 접촉하고 소통하면서 역할놀이 속에 참여함으
로써 관객과 연기자의 경계를 지워버린다. 어릿광대는 “삶과 예술의 경계, 말
하자면 독특한 중간 지대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 어디든 언제나
어릿광대로 남아 있기”(7-8) 때문에 어떠한 틀에도 고정되지 않고 어디에서든
어릿광대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경계 위반자인 셈이다. 어릿광대는 경계를 가로
지르면서 기존의 형식을 해체하고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시도할 수 있다. 이러
한 수직적인 구도에서 수평적인 관계로 전환하게 하는 카니발의 원리는 무엇
일까? 그것은 바로 “웃음”이다. 바흐친은 웃음은 모든 사람과 전 세계로 침투
할 수 있는 “집단적이고 합창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권위적인
사회의 계급구조가 신분과 계층간의 불평등한 구분선을 긋고 신분이동을 가
로 막는 장벽을 세웠다면 웃음은 사람들 속으로 침투하여 서로를 감염시키면
서 ‘분리’와 ‘차별’의 경계선을 지운다. 모두가 소통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카니발의 웃음은 “모든 사람들의 웃음”(11)이다. ‘모든 사람들의 웃음’은 풍자
적인 웃음과는 다르다. 풍자란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비유적 사용을 통해 발생하는 풍자적 웃음이란 비판 대상으
로 부터의 거리두기를 통해 표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풍자적 웃음이란 모두
가 공감할 수 있는 웃음이 아닐뿐더러 풍자되는 대상 보다 풍자를 하는 자의
위치를 더 격상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바흐친이 긍정하는 “유쾌하고 축
제적인 웃음”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것이며 “결속시키는 것으로만” 작동한다.
모두에게 공유된 웃음으로 “친밀한 정서적 유대”로 묶여진 웃음 연대들은 ‘금
기’와 ‘금지’를 강요했던 권위적이고 페쇄적인 사회구조의 “방해물들을 걷어
내고 길을 낼”(Speech 134-35)수 있는 것이다.
엄숙함과 엄격한 규율로 거행되는 국가적 제도와 종교적 의식은 웃음을
허용하지 않았다. 계급 문화는 법과 종교라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를 통해
피지배계급에게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시켰다. 이데올로기의 내면
화는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국가 권력에 대한 공포와 외경을 가지도
록 훈육함으로써 피지배계급이 단결할 수 있는 가능성과 저항의지를 꺾는 효
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특히 역사적으로 중세에는 카니발 기간을 제외하고는
민중들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웃음이 금기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지배계급
은 웃음이 지닌 위반적 잠재성을 사전에 통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기
와 위반성이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인류학자 토마스 (Northcote W.
Thomas)의 해석을 빌자면 금기란 사람이나 사물이 가지고 있는 신성한 (또
는 부정한) 특징을 포함하고 있는데, 신성함과 부정함이라는 특질이 금지라는
개념을 탄생시켰고 신성함(또는 부정함)은 금지의 위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
이다(Totem 25). 웃음은 엄숙함과 모순되는 속성으로 위계적 신분 사회에서
엄숙함은 신성한 것으로, 웃음은 부정한 것으로 이항 대립적 가치 체계로 구
조화된다. 그러나 엄숙함이 신성한 것으로 표상되고 이데올로기로 재생산되
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성함을 위반하는 부정함이 존재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
자면 이데올로기의 신성함을 설파하기 위해서는 부정함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고 부정함이 신성함 보다 선재해야 한다는 논리에 닿게 된다. 금기란 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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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신분적 질서가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세계에
서 웃음은 부정되지만 사회적 틈인 카니발의 세계에서는 웃음이 허용되는 이
유가 여기에 있다. 웃음에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공식적으로 금지하기
위해서는 비공식적인 문화인 카니발에서는 웃음의 위반을 허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카니발의 웃음은 현실에서는 금지되어 있었던 폐쇄적인 위계질서의 경계
넘기를 시도하고 종국에는 경계선을 지우는 위반을 실천한다. 카니발적 세계
속에서 계급적 구조 때문에 서로 분리되어 있었고 배타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은 허물어지고 자유로운 접촉이 이루어진다. 카니발의
삶 속에서 일상을 구속하고 통제하던 규범과 가치 체계들은 정지된다. 가장
먼저 중단되는 것은 “사회적 계급적 불평등이나 (나이를 포함하여) 여타 다른
형태의 불평등으로부터 생겨난 모든 것”(Problems 123)이다. 카니발의 세계
속에서 일상적 삶을 지배하고 있는 위계적 신분 구조는 전복되어 높은 신분은
비천한 신분으로 비천한 신분은 고귀한 신분으로 위치가 역전된다. 예컨대
바보는 현자가 되고 노예는 왕이 되고 영웅은 희화하되고 신성하고 외경스러
운 종교 의식은 속되고 외설스럽게 패러디된다. 카니발적 삶이란 어느 정도는
“뒤집혀진 삶”으로 사회 계급적 구조에 반하는 “개개인 사이의 새로운 상호관
계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Problems 122-23).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치환과 패러디의 전략이 현존하는 제도의 위계질서와 같은 형식을 사
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카니발에서도 공식적인 위계 체제와 같은 국가의 수장
으로서의 왕과 종교적 수장인 대주교를 선출하고 선포한다. 국가와 종교의
수장을 선출하고 선포하는 형식적 절차는 현존하는 제도와 마찬가지로 위계
질서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거꾸로 되고 패러디된 위계적 구
도는 기존의 제도를 파괴하고 새로운 배치를 생성해내는 것과 관계가 있기에
또 다른 위계적 구도를 재생산해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웃음은 권위를 생산하
는 것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카니발적 세계에서 뒤집혀진 삶이란
불변적 가치나 체계로 고착되는 것에 반대하는 것으로 절대적인 가치나 체계
들이 치환되고 상대화되는 유쾌한 상대성의 논리에 의해 살아가게 된다는 것
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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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어릿광대가 왕으로 추대되는 과정은 이전의 왕을 아래로 끌어내
리는 탈관을 포함하고 있다. 사회적 변화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것이 탄생될
때 이러한 생성은 반드시 기존의 것, 낡은 것의 파기를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
에 죽음과 탄생은 상대적이고 양가적이다. 위계적사회의 신분과 계급이 모자
나 왕관, 의복과 장신구 등의 상징적 복장 규범을 통해 가시화되고 고착화된
다면 카니발의 상대적 세계 속에서는 이러한 신분이란 의복처럼 교체할 수
있고 착용할 수 있는 가면과 같은 것이다. 바흐친의 말을 빌자면 “가면은 변화
와 재생의 기쁨, 유쾌한 상대성, 획일성과 유사성에 대한 유쾌한 부정”과 연관
되어 있으며 “전이와 변형 그리고 자연적인 경계선에 대한 침해”(39-40)와
관련되어 있다. 카니발 기간에 왕으로 추대되는 어릿광대의 모자는 왕의 왕관
을 교체하는 유쾌한 상대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실제로 중세의 어릿광대의 모
자는 “침범해서는 안 되는 권리”(89)를 가지고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계급질
서의 경계를 넘을 수 있는, 위반할 수 있는 권리의 상징이 되었다.
어릿광대의 모자가 왕관을 대체하고 대관식을 치룸으로써 위계질서를 뒤
집는 역할을 하고 있듯이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계급과 젠더는 가면처럼
바꾸어 쓸 수 있는 것이고 변장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다. 서극에서 영주는
술에 취해 잠든 땜장이 슬라이2)를 발견하여 자신의 저택으로 옮겨 와 가짜
영주로 만드는 장난을 치고 자신은 슬라이의 하인으로 가장한다. 이러한 가면
놀이는 최하위 노동계급인 슬라이를 영주로 격상시키고 영주 스스로 하인으
로 격하시키는 카니발의 대관식과 폐관식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말하자면 위
아래가 뒤집힌 카니발적 세계에서 잠이 깬 슬라이는 처음에는 자신의 존재를
땜장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예를 갖추어 자신을 영주로 대하는
하인들과 자신이 누워 있는 공간이 영주의 저택이라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슬라이는 자신을 수 십년간 광증을 앓아온 영주라는 허구적 이야기를 사실로
믿게 된다. 특히 이러한 가면 놀이 중에 시동 바솔로뮤의 여장은 신분을 뒤집
는 것 뿐만 아니라 성을 전도하고 있다. 시동이 영주의 아내 역할을 연기하면
2) 앞으로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작중 인물은 영어와 병기하지 않고 한글로만 표기하기
로 하고 이 한글 표기 방식은 한국셰익스피어 학회에서 출간한 『셰익스피어 연극
사전』의 서양어 표제어 일람표 양식을 따른다.
서 남성을 여성으로, 하인을 상류계급으로 믿게 만들 때 이러한 여장은 ‘계급’
과 ‘젠더’ 이데올로기의 경계를 위반하고 있다. 남성이 여성의 가면을 쓰고
르네상스 상류계급 여성인 젠틀우먼의 이상적인 여성 규범을 모방할 때 지배
이데올로기가 구축해 둔 위계질서의 경계선은 흐려진다. 이렇듯 변장은 모든
의상과 사회적 지위의 교체 및 혁신 속에 담겨있는 보다 깊고 본질적인 의미
(245)를 지니고 있다. ‘신분’과 ‘정체성’이란 의복이나 가면처럼 입고 바꾸어
쓸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다.
서극에서 영주는 슬라이의 신분을 격상시키고 자신의 신분을 격하하면서
남성에게 이상적인 상류 신분의 여성 역할을 수행하도록 세부적인 연기 지도
를 하면서 적극적으로 이 가면놀이를 주도한다. 그러나 영주의 변장 전략은
계급과 젠더라는 것이 사실은 지배계급이 허구적으로 구성한 가면으로서의
정체성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폭로하는 전복적 장치가 되버린다. 서극에서 이
미 시작된 가면의 경계 넘기로서의 위반성은 본극인 연극 속으로 침투해 등장
인물-배우들이 재현-연기하고 있는 당대 남성 지배 계급의 가부장적 이데올
로기와 이상적인 여성 행동 규범이란 사실 배우들의 가면-페르소나처럼 연기
되고 가장될 수 있음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또한 하위 계급 남성인 슬라이를
속이고 길들이려는 상류 계급 영주의 전략은 본극에서 종결된 열린 극 구조로
인해 영원히 슬라이를 가짜 영주의 신분으로 머물게 하는 역설을 낳는다. 더
욱이 슬라이는 연극이 시작되자 마자 다시 잠이 들어 버렸고 영주의 신분으로
잠에 빠져든 슬라이의 폐위식은 연기된다. 카니발 기간 동안 왕으로 대관식을
치룬 광대는 카니발이 끝날 즈음엔 다시 폐위되고 민중들은 다시 일상의 시간
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반면 영주로서 잠이 든 채로 깨지 못하는 슬라이의
현실 복귀는 지연될 수밖에 없으며 미완으로 남겨진다. 애초에 영주는 슬라이
를 속이는 일을 “달콤한 꿈, 아니면 허망한 망상”(Ind.1.42)으로 말하면서 슬
라이를 가짜 영주로 만들었다 다시 땜장이로서의 비참한 현실로 돌려보낼 계
획을 세웠다. 그러나 영주의 의도를 벗어나 슬라이는 “달콤한 꿈”에 머물게
됨으로써 카니발적 일탈의 시간이 연장되는 역설을 낳고야 만다
III. ‘놀이’로서의 카니발적 삶: ‘말괄량이’가 길들여질까?
카니발은 민중들의 “제 2의 삶”으로서 일상적인 삶과 함께 “이원적인 세
계”(6)를 구성하고 있다. 일상적인 삶의 틈으로 출현하는 카니발은 제도적 법
률이나 위계질서를 대변하는 가치나 금지들을 일시 중단시키고 자유와 평등
에 기반한 순수한 인간관계들을 탄생시킨다. 신분적 차이에 의해 불공평한
사회적 구조 속에 분리되어 있었던 사람들은 광장으로 몰려나와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접촉하면서 수직적인 위계 관계를 허물고 수평적인 관계를 이끌어
내는 유토피아적 공간을 건설하게 된다. 일시적인 해방적 공간으로서 존재하
는 유토피아에서 신분이나 계급이란 의복처럼 갈아 입을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다. 따라서 신분이 사회적으로 단단하게 구조화된 것이 아니라 옷처럼
바꾸어 입을 수 있듯이 정체성 또한 가변적이고 구성적인 것이 된다. 사회적
으로 구성된 ‘말괄량이’라는 호명은 카니발적 유희의 공간과 접속하여 캐서리
나가 길들여 질 수 있는 지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없게 만들 뿐 아니라 극
중에서 지목된 여성 캐서리나만이 유일한 말괄량이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말괄량이가 결혼을 통해 순종적인 아내로 길들
여졌다고 말하는 남성 인물들의 목소리도 카니발적 향연의 공간인 결혼 피로
연과 결합하여 권위의 힘을 상실하게 된다.
1. 카니발적 광장과 인물들
카니발의 공간은 민중들의 공간으로 카니발의 기간 동안 만큼은 지배계급
들은 민중들에게 공간을 내 주어야 했다. 카니발이 이루어지는 광장은 사람이
모여들고 서로 어울릴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비카니발적인 일상적 삶 속에
서는 계급과 신분, 나이나 성별 등 사회가 분리시킨 여러 상이한 경계와 구조
적 장벽으로 인해 사람들은 분리되고 소외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광장이란
길과 길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카니발이라는 축제의 형식과 접속
하여 사람들이 어떠한 진입 장벽에도 막히지 않고 신체적이고 물리적으로 접
촉하도록 공간을 개방한다. 따라서 광장이란 사람과 사람이 만나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 의사소통을 이루어낸다는 점에서 수평적인 공간이다.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카니발의 광장이나 광대와 같은 카니발적 인물은 등장하진 않
지만 바흐친은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고 접촉할 수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 카
니발 광장적 의미”(Problems 128)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극에서
카니발의 광장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공간은 실제로 길과 길이 만나는 곳,
다시 말하자면 길 위에서 만날 수 있는 열린 공간과 여러 사람들이 어울리게
되는 축제적 형식인 ‘결혼 피로연’과 같은 향연의 장소이다. 극중극 형태인
이 극은 서극의 장소인 잉글랜드의 영주의 저택과 영주의 저택에서 공연되는
연극이 본극인 형식을 띠고 있다. 그리고 이 본극인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영주의 성을 지나가던 유랑극단이 잠시 머물도록 허가를 받으면서 공연하게
되는 것이다. 유랑 극단은 길 위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어디에도 정
주하지 않기에 끊임없이 길을 내며 접속들을 만들어 나가는 유목민과 닮았다.
이동하는 유목민에게 “모든 지점이 중계점으로만 존재하듯” (A Thousand
380) 그들이 머무는 동안 기거하는 공간은 집이 되지만 천막-집을 허물고 길
로 돌아가면 집은 다시 열린 공간으로 되돌아간다. 유목민으로서 유랑 극단은
영주의 성을 지나면서 공연을 하고 하루 묵어 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지
만 다시 길을 따라 순환하면서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시공간을 열게 될 것
이다.
배우들이 영주의 성에서 허가를 받아 연극을 공연할 때 연극이 진행되는
방은 무대가 되고 연극 속 공간은 잉글랜드를 벗어나 이탈리아의 시공간을
창조해낸다. 이탈리아의 파두아에서 베로나로 다시 파두아로 이어지는 길과
길 위에서 그리고 길과 길 사이에 있는 집으로 사람들은 모두 길을 따라 이동
하고 길을 통해 만나게 된다. 사람들이 모이게 되는 파두아는 하나의 광장으
로 베로나에서 온 이방인과 피사에서 온 이방인들을 만나게 하여 사건 속으로
끌어 들인다. 이 사건은 우연성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처음부터 계획된 것
이 아니며 계획이 있었다 하더라도 의도와는 다르게 다른 방향으로 사건이
흘러가면서 새로운 접속과 배치들을 만들어 내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대목
이 새로운 접속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이 만남이라는 형식은 이 극에서 결혼이라는 삶의 단계로 이행
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극은 말괄량이 여성이 결혼을 하게 되는
과정과 결혼을 통해 길들여지는, 정확히 말하자면 길들이려는 남성이 보기에
는 길들여지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권력을 위한 일련의 교섭들”(Smith 290)
의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남성들이 말괄량이가 길들여졌다라
고 결론을 내리는 장소가 결혼 피로연 자리라는 것이다. 바흐친에 따르면 결
혼 피로연은 향연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데 향연이 이루어지는 연회 장소에서
는 음식과 술 등 먹고 마시는 행위가 따를 수밖에 없다. 음식이 슬픔과 연결될
수 없듯이 “모든 연회는 승리를 축하하는 본성”(283)이 있으며 이러한 향연의
이미지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식사 중에 이루어지는 담화를 빼 놓을 수
없다. 식사 중에 이루어지는 담화는 “말과 지혜로운 담화, 유쾌한 담화”(281)
로 향연의 장소인 결혼 피로연은 사람들 사이의 위계적 벽을 허물면서 자유롭
게 발화할 수 있는 권위를 획득할 수 있는 곳이다. 말하자면 자유로운 언어적
유희가 일어나는 장소로서 연회의 이미지는 “말을 해방시키며 두려움 없고
자유로운 어조”(296)의 힘을 실어주고 있다. 말괄량이 캐서리나가 페트루치
오와의 결혼을 통해 복종하는 아내로 길들여졌음을 입증하는 장소는 결혼 피
로연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증 방식은 결혼 피로연에서 남편들 간 내기라는
놀이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과 연회적 담화와 연회의 카니발적 성격들을
지니고 있다는 점들로 인해 복종적인 아내로 길들여졌는가? 에 대한 결론은
유보될 수밖에 없다.
2. 카니발적 패러디
결혼 피로연에서 캐서리나가 길들여졌다고 입증되는 것은 말을 통해서이
다. 물론 이 말은 남편 페트루치오의 명령에 의한 것으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만 하는 의무에 대해 다른 “고집불통 아내들”(5.2.296)3)에게 알려주
라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여성에게 요구했던 젠더 규범은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것이며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결국
3) 앞으로 『말괄량이 길들이기』(The Arden Shakespeare: The Taming of the
Shrew)(London: Methuen, 1981)의 작품 인용은 괄호 안에 막, 장, 행 수로 표기한다
결혼 제도란 아버지에게서 남편으로의 남성 지배 권력을 안전하게 이양함으
로써 여성을 복종적 주체로 재생산해내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인 것이다. 따라
서 캐서리나가 전할 내용은 남편의 아내에 대한 지배의 정당한 권리와 아내의
남편에 대한 순종의 미덕을 설파하는 것이다. 그러나 페트루치오의 “내 아내
의 새롭게 생겨난 미덕과 순종의 표시”(5.2.18-19)를 보여주겠다는 공언은 역
설적으로 캐서리나에게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된다. 게다가
캐서리나의 말은 연설에 가까우며 극 중의 다른 어떤 남성의 말보다 압도적으
로 긴 내용으로 44행에 달한다. 긴 내용 중 캐서리나가 사용하고 있는 화법은
페트루치오가 이전에 사용한 수사학을 비판적으로 패러디 하고 있다.
당신의 남편은 당신의 영주요, 생명이요, 수호자요.
당신의 책임자, 당신의 군주이죠. 당신을 걱정하고 당신을 먹여 살리기 위
해서 바다에서나 육지에서나 자신의 몸을 혹사 시키잖아요 밤에는 폭풍우
속에서 낮에는 추위에 몸을 떨면서 그 동안 당신들은 집에서 안심하고 편
안히 따뜻하게 누워 있을 수 있는 거죠
Thy husband is thy lord, thy life, thy keeper,
Thy head, thy sovereign ; One that cares for thee,
And for thy maintenance; commits his body
To painful labour both by sea and land,
To watch the night in storms, the day in cold,
Whilst thou liest warm at home, secure, and safe
(5.2.147-52)
‘당신의 남편’이라는 호칭에는 호텐시오와 루센시오라는 두 남성이 포함되
어 있다. 호텐시오는 젊은 젠틀맨으로 상류계급의 남성이며 루센시오는 거상
의 아들이다. 호텐시오는 젠틀맨이지만 자신을 연모하던 부유한 미망인과 결
혼을 할 정도로 가난하며 루센시오는 막대한 상업력으로 부를 축적한 상업
자본가 아버지로 인해 이탈리아 여러 도시로 유학을 하며 향유적 삶을 살아가
는 인물이다. 남편인 페트루치오 또한 작고한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유산에
다 부유한 아내가 지불할 수 있는 지참금으로 부를 축적하려 하는 시골 젠틀
맨에 불과하다.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사회적 지위가 낮은 상인의
아들인 루센시오는 상류계급의 여성인 비앙카와 결혼함으로써 신분상승을 이
룰 수 있었다. 가문만 남은 시골 젠틀맨 신분인 페트루치오도 상규계급인 캐
서리나와의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과 부의 축적을 동시에 이루게 되었다. 결
국 이 두 남성의 신분 상승은 자매인 캐서리나와 비앙카, 즉 젠틀우먼이라는
상류 계급과의 결혼을 통해서였다.
그녀는 내 소유물이요, 동산이요, 집이요.
살림 도구요, 전답이요, 곳간이요.
말이요, 소요, 당나귀요, 어쨌든 내것이요,
. . . . . .
두려워 말아요. 상냥한 처녀. . .
백만 명이 와도 방패가 되어서 당신을 막아 주겠소
She is my goods, my chattels, she is my house,
My household stuff, my field, my barn,
My horse, my ox, my ass, my anything.
. . . . . .
Fear not, sweet wench . . .
I’ll buckle thee against a million. (3.2.228-30)
페트루치오의 이 말은 일견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캐서리나를 보호하고 지
키려는 기사도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상황은 페트루치오
가 만들어낸 환상으로 결혼 피로연에 참석한 하객들을 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더욱이 캐서리나를 지켜주겠다는 페트루치오의 발언은 캐서리나를 자신의 사
유재산인 상징적 자본으로 물화하고 있다. 페트루치오가 사용한 수사법은 캐
서리나의 인격을 무시하고 사물로 나열하면서 자신의 소유물로 격하하고 있
다. 반면에 캐서리나는 페트루치오의 수사법을 패러디하여 남편을 과장되게
우상화하고 격상시킴으로써 허위적 일면을 비틀어 꼬집는 비판적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있다. 바흐친은 연회의 담화는 “보편적인 동시에 유물론적인 것으
로”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모든 관념론적인 것의 권위를 떨어뜨리면서 우스꽝
스럽게 모방하고 있으며 이러한 익살스러운 연회는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하
고 희화화하고 있다”(296)고 말한다. 캐서리나는 하인을 대동하고 다니면서
거친 육체적 노동과는 무관한 젠틀맨과 부유한 거상의 아들을 숭고한 위치로
끌어 올림으로써 남성 지배계급의 허위성을 폭로하고 권위를 떨어뜨리고 있
다. 남성의 우월성을 과장되게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캐서리나의 “의도적인
패러디”는 르네상스 시대의 환상적인 젠더 이데올로기가 강제하는 “이상적인
여성들의 품행이라는 어리석음”(Hirsh 60)을 비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순
종적인 여성, 아내라는 이상적인 젠더 규범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구축된 담론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캐서리나가 사용한 패러디는 조롱과 비하
라는 부정하기로서의 속성이 아니다. 캐서리나는 페트루치오가 여성을 물화
하고 격하하기 위해 사용한 수사법을 뒤집어 남성을 과장되게 격상시키는 패
러디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남성의 언어로 쓰여진 지배이데올로기를 부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어법으로 새롭게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젠더 규범은 캐서리나
만을 말괄량이로 호명하고 길들여져야 할 훈육의 대상으로 명명했지만 사실
은 규범 내에서 말괄량이의 잠재적 위반성을 내재하고 살아가는 “고집불통인
아내들”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기율 담론이 검열해 내지 못한 또
다른 말괄량이의 존재는 권력 체제 안에서 구성된 복종이라는 행위 안에는
권력에 저항하는 힘, 즉 내적 저항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IV. 그로테스크적 격하: ‘길들이려는 자’ 길들여지다
향연의 이미지는 물질적 육체적 힘에 대한 승리를 축하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물질적 육체적 힘이란 인간으로서 체험하고 인식하는 향연의 정신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향연의 정신을 바흐친은 “민주적 정신”을 가지고
있는 “연회적 자유사상”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도 이러
한 연회적 전통이 있었다는데 동의하고 있다(297). 바꾸어 말하자면 연회적
자유사상이란 추상적인 관념에 대한 인간의 육체적 힘에 대한 승리를 축하하
는 사조를 말하는 것으로 인간의 신체에 대한 관심은 르네상스 시대의 세계관
을 반영하고 있다. 중세 시대까지 인간은 “존재의 대 연쇄”(Great Chain of
Being)라는 신을 중심으로 인간은 신분의 차이에 따라 수직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중세의 위계적 질서는 신에 대한 경외와 공포, 엄숙함과 경직된 이데
올로기를 작동시켰으며 인간의 위치는 지상으로 끌어내려져 있었고 지상에서
도 신분적 차이에 따라 사람들에게 차별적 위치를 부여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는 인본중심주의 세계관으로 중세적 사유를 거꾸로 뒤집은 수평적 세계관이
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인간의 신체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는데 이러
한 신체에 대한 관심의 배경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오직 정신적인 것만을 지나치게 숭배해온 금욕주의적 중세기의 가
치관에 대한 반발”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지리상의 발견과 과학의 발
달”(김욱동 249)이었다. 새로운 지리상의 발견은 무역과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부유한 시민’이라는 신분적 상승을 이루게 만들었으며 자본
을 기반으로 한 신흥계급을 출현시켰다.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그레미오
가 자신의 구혼자로서의 물적 조건을 강조하면서 신부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목록은 값비싼 수입 물품들이다. 그레미오가 나열하는
“페르시아 천, 아라스 천의 벽 포장, 진주를 박은 터키 방석, 베니스 산 능
직”(2.1.42-47)등은 당시 터키와 베니스와 영국간의 면직물 교역이 이루어진
뒤 영국에서 화려한 복장 및 사치를 조장했던 값비싼 수입품들이었다(Palliser
337). 그리고 그레미오가 이러한 값비싼 수입 물품을 들여 올 수 있었던 이유
는 “마르세이유 항구에 정박해 있는 상선”(2.1.367-68)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레미오를 물리치고 비앙카를 차지하는 사람은 “대형
상선 세 척 이상, 중형 상선이 두 척, 소형 상선이 열두 척” (2.1. 370-72)을
소유한 막대한 상업 자본가인 거상을 아버지로 둔 루센시오였다.
새로운 과학이란 르네상스 시대의 의학을 말하는 것으로 16세 전반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 그리고 게일런의 의서가 해석되어 출판되었
으며 실험적 해부가 증가했다 (Maclean 28). 서극에서 하인은 슬라이가 영주
로서의 신분을 믿지 못하는 것은 지독한 광증 때문인 것으로 질병적 증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극도의 슬품이 피를 굳어지게 하고 우울증이 광증을
키워내니 희극을 보는 것에 의사도 찬성한다”(Ind.2.132-135)라는 의학적 소
견을 덧붙임으로써 슬라이를 완전히 속이게 된다. 본극에서도 의학적 인용은
발견되고 있다. 페트루치오는 “탄 고기를 먹으면 답답증이 생기고 화를 잘
내는 증상이 생기니 단식하는 편이 좋겠다”(4.1.157-160)라며 캐서리나를 음
식을 통해 길들이려 하고 있다. 페트루치오는 캐서리나를 굶기기 위해 의학적
지식을 교묘히 사용하고 있다. 음식이란 먹고 마시는 행위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식사는 인간의 신체와 신체의 기능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또한
음식이란 입으로 들어가 배를 지나 항문으로 배설되는 신체적 부위로 이동하
면서 신체 하향적 이미지를 띄게 된다. 초월적인 신의 영역에서 지상에 있는
인간 중심으로 사유가 전환된 르네상스 세계관은 생과 죽음이라는 변화하고
생성되는 인간 신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 중에서도 물질적인 신체적 하향
움직임을 강조하고 긍정하고 있다. 이러한 격하의 이미지는 파괴와 생성이라
는 양가 가치성을 지닌 그로테스크적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1. 그로테스크한 몸의 이미지
그로테스크의 몸은 인간의 구체적 신체에 대한 기능 특히 하향적 속성을
가진 신체와 관련이 있다. 예컨대 배설이나 출산 등 신체적 현상은 높은 곳에
서 가장 낮은 곳, 즉 대지 위로 떨어지는 하강의 움직임과 관련되어 있다. 신
체의 상부에서 하부로 떨어지는 이러한 움직임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핵
심 원칙인 “격하시키기”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하강의 움직임은 “모든 고귀
하고 영적이며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물질적인 수준인 대지와 육체의 차
원으로 이동시키는”(19)것이다. 바흐친은 『돈키호테』를 예로 들어 기사도와
기사 서훈식등 기사도의 정신과 예식을 격하시키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전
통의 한 근원을 발견하고 있다. “그루미오, 칼을 빼라, 우린 도둑들에게 포위
당했다. 사내대장부라면 너의 연인을 구출해야 지”(3.2.34-35). 극 중에서 페
트루치오가 그의 하인 그루미오에게 한 이 말은 가짜 기사인 돈키호테의 환상
과 닮아 있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거대한 거인으로 가상하고 맞서 싸운 것처
럼 페트루치오는 허구를 실제로 끌어 들이고 있다. 사실 도둑들은 하객들이며
연인을 구출하는 것은 위기에 빠뜨리는 것이다. 결국 이 가상적 상황은 페트
루치오 자신을 기사로 이상화하고 있지만 캐서리나로부터 신부로서 결혼 피
로연에서 축하를 받을 권리를 빼앗고 그녀에게 모욕감을 안겨주기 위해 현실
속에 환상을 끌어들이고 있다. 페트루치오는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캐서리나
를 길들이려는 목적으로 가상의 현실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페트루치
오의 이러한 환상 만들기는 자신 또한 하객들에게는 바보짓을 하는 어릿광대
의 모습으로 비추어지면서 웃음의 대상이 되고야 만다.
캐서리나를 억지로 끌고 하인 그루미오와 함께 떠나는 페트루치오 일행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운 카니발의 행렬을 상상하게 만든다. 카니발을 대표하는
인물로 퍼레이드에 빠지지 않는 인물은 그로테스크의 몸을 상징하는 ‘헤라클
레스’였다. 카니발의 주인공에 해당되는 “헤라클레스”는 “거인의 이미지”로
“지하 세계” 즉 “지옥”(392) 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 지옥의 이미지는 “지형학
적으로 신체의 하부”(301)를 의미하면서 그로테스크적 격하 즉 하강의 움직
임과 연결되어 있다. 실제로 페트루치오는 다른 남성인 그레미오에게 “알시데
스의 12배 이상”을 해낼 “위대한 헤라클레스”(1.2.255-56)라 불리고 있다. 거
인의 신체적 이미지를 연상하지 않더라도 페트루치오에게 부여된 거인의 이
미지는 유일하게 말괄량이 여성과 결혼해서 길들일 수 있는 자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말괄량이라는 용어는 ‘악마’와 ‘마녀’의 동의
어로 사용된 적도 있듯이 페트루치오 또한 악마와 결혼한 악마, 악마보다 더
한 악마로 불리면서 지속적으로 지옥과 연결되어 있다. 카니발이 하부, 지하
지옥과 관련되어 있듯이 이러한 그로테스크의 하강 운동은 단순한 파괴가 아
닌 파괴와 생성이라는 양가적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로테스크
이미지는 “아직 끝나지 않는 변형으로서 죽음과 탄생, 성장과 생성이라는 변
신의 현상”(24)이란 과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지금 오고 있는 페트루치오의 차림새를 말하지요, 새 모자에 헌 가죽
조끼를 입고 바지는 세 번이나 뒤집어 지은 것이며, 양초들을 담았던 헌
장화는 한쪽은 죔쇠로 조여져 있고 다른 쪽은 끈으로 묶여 있다고요. 그리
고 시내 무기고에서 뒤져서 꺼내 온 듯한 녹슨 헌 칼을 차고 있는데, 칼자루
는 부러지고 칼집 끝의 쇠 덮개는 없으며, 칼끝은 두 갈래가 났지요. 낡은
안장은 좀이 먹고, 등자는 천하에 걸작이며, 그가 탄 말이란 엉덩이는 주저
앉았는가 하면, 비창증에 걸려 등뼈까지 곪아 들고, 입천장은 헐고 전신은
퉁퉁 붓고, 발뒤꿈치에는 종기가 나고, 관절병에 절룩거리고, 황달병에다
귀 밑까지 부어 있고, 현기증에 형편이 없고, 기생충이 우글우글하고, 등은
휘청휘청하고, 어깻죽지는 금이 가고, 뒷다리는 딱 붙어 있지요. 재갈은 다
끊어져 가고, 양가죽의 굴레는 허청거릴 때마다 잡아 다니는 성화에 몇 번
이나 끊어져서 다시 잇고 한 것이고, 배띠는 여섯 군데나 이어댄 것이고,
그리고 낡은 벨벳으로 만든 엉덩이 줄에는 먼저 주인여자의 성명의 첫 글
자가 두 자 장식용 단추같이 뚜렷하고, 더구나 이 줄은 새끼로 몇 군데 이어
댄 것이지요.
Petruchio is coming in a new hat and an old
jerkin; a pair of old breeches thrice turned; a pair of
boots that have been candle-case, one buckled,
another laced; an old rusty sword ta’en out of the
town armoury, with a broken hilt, and chapeless;
with two broken points; his horse hipped-with an
old mothy saddle and stirrups of no kindredbesides,
possessed with the glanders and like to mose
in the chine, troubled with the lampass, infected
with the fashions, full of windgalls, sped with
spavins, rayed with the yellows, past cure of the
fives, stark spoiled with the staggers, begnawn with
the bots, swayed in the back and shoulder-shotten,
near-legged before, and with a half-cheeked bit
and a headstall of sheep’s leather, which, being
restrained to keep him from stumbling, hath been
often burst and new-repaired with knots; one girth
six times pieced, and a woman’s crupper of velure,
which hath two letters for her name fairly set down
in studs, and here and there pieced with packthread.
(3.2.41-62)
루센시오의 하인 비온델로의 입을 빌어 묘사되는 이 장면은 페트루치오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교회로 오고 있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사실 비온델
로의 긴 설명은 신랑 페트루치오가 오고 있느냐라는 짧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다. “완전히 낡은 새 소식”(3.1. 30)이라는 모순어법으로 시작된 긴 묘사는
미래에 대한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비온델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페트
루치오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비온델로의 묘사에 따르면 페트루치오는 가능
한 모든 형식을 빌어 격하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비온델로가 장황하게
나열하며 사용하는 “과장법, 과도함, 지나친”(303) 묘사는 그로테스크 문체의
기본적인 속성이기도 하다. 새신랑인 페트루치오의 모습은 새 것과 헌 것이
뒤섞여 있고 안과 밖은 뒤집어져 있고 짝이 제대로 맞추어져 있지 않는 조각
나고 찢겨진 몸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계급의 상징적 도구인 칼은 구색이
맞지 않을 뿐 더러 이상적인 규범과 정신을 극단적으로 조롱하고 있다. 새신
랑 페트루치오의 칼은 ‘낡은’이라는 시간적 차원을 넘어 아무런 도구의 사용
적 가치도,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교환 가치도 상실하고 있다. 두 갈래로
갈라진 칼은 보이지 말아야 할 내부까지 뒤집어 보이게 만들며 페트루치오를
조롱감으로 만들고 있다. 더구나 신랑의 기괴한 옷차림은 사물 뿐 아니라 동
물과도 구분되지 않는 그로테스크적 이미지를 증폭시킨다. 페트루치오의 하
부와 연결된 말의 이미지는 병들어 소멸로 가기 직전의 죽음의 증상들을 그로
테스크하게 드러내고 있다. 르네상스 의학의 시선에서 찢겨지고 해부학적으
로 분해된 말의 몸은 경계를 넘어 대지 아래로 쏟아져 내리려 하고 있다. 붓고
헐고 곪아서 갈라진 말의 몸 역시 내부를 외부로 뒤집어 놓은 형상으로서 완
전하게 닫히고 단단하게 만들어진 덩어리로서의 몸을 뚫고 나온 규범을 이탈
한 그로테스크한 몸을 보여준다.
게다가 말의 엉덩이에 남겨져 있는 전 여주인의 이름은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자 이질적인 다른 몸들을 뒤섞으면서 기괴한 몸을
생산해 낸다. 동시에 엉덩이라는 하부와 전 여주인의 흔적은 신체적 하부의
기능인 성적인 부분과 연결됨으로써 결혼을 위해 교회로 향하는 새신랑의 발
걸음을 외설과 저속함으로 옮겨 놓고 있다.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말과 그
말에 새겨진 전 여주인의 이름 그리고 그 말 등과 뒤섞여 버린 페트루치오의
신체적 하부는 전통적인 희극적 제스쳐에서 보여주는 그로테스크적 몸4)의
4) 바흐친은 원초적 쾌락을 그의 그로테스크 개념의 초석으로 삼고 있다. 바흐친에게
있어 그로테스크는 본질적으로 신체적인 것으로서, 언제든지 육체 및 육체적인
무절제에 관련되어 이러한 것들을 과도하고 난폭하게 그리면서도 본질적으로 유쾌하
게 찬양한다. (톰슨 77. 재인용 안혜진)
세 가지 면 “성교, 숨이 끊어질 때의 고통, 출산 행위”(353)가 혼재되어 있다.
그로테스크에서 특히 입은 삼키고 넘기는 하향적 움직임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로테스크적 지형학에서는 배와 자궁에 상응”하는 것이다. 특히 “구멍”을
상징하는 벌어진 입은 “에로틱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지하로 내려
가는 입구”(321)로 묘사된다. 따라서 입천장이 보이는 말의 벌려진 입은 자궁
이자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가 된다. 죽어가는 말과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 그
리고 지하로 내려가듯 하강하는 출산이 혼재되어 있는 이 장면은 죽음은 생명
을 내포하고 파괴는 생성을 포함하는 양가 가치적이고 상대적인 카니발의 원
리를 가시화하고 있다. 사람과 짐승의 몸이 뒤섞이는 것은 그로테스크적 예술
형태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특히 이 장면은 “임신한 노파”라는
유명한 그로테스크 테라코타 작품을 연상시키고 있다. 임신한 노파는 가능하
지 않은 두 가지 상반된 속성이 혼재되어 있는 형상으로서 탄생과 죽음이라는
상호모순적인 양면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죽어가는 말의 벌어진 입과 엉덩이
에 새겨진 여주인의 이름은 성장하고 소멸하는 삶의 과정을 내포하고 있으며
과거-여주인과 현재-새신랑을 접속시키면서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탄생
을 내재하고 있다. 기괴한 옷차림으로 결혼식에 늦게 나타남으로서 신부의
신분에 모욕을 주고 수치심을 안겨 주려 했던 페트루치오의 의도는 카니발적
세계와 접속하여 다른 의미의 층들을 생산하게 된다. 이전 여주인의 흔적을
달고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말 그리고 그 말을 타고 새로운 출발을 향해 나아
가는 페트푸치오의 모습은 “임신한 죽음이자 탄생하는 죽음”(25)을 나타내는
그로테스크적 이미지로 캐서리나와의 초야와 임신에 대한 기대와 욕망을 담
고 있다.
2. 외설과 비속화
그로테스크한 몸은 파괴하면서 생성하는 몸이다. 따라서 이 몸은 단단하게
닫혀 있거나 총제적으로 완성될 수 있는 몸이 아니다. 그로테스크의 이미지는
먹고 배설하고 성교와 임신과 출산이라는 신체 내부적 생리현상이나 신체 기
능에 대해 표현하는 것을 금지하지도 않는다. 이상적인 규범의 세계가 육체를
언어화하는 것, 특히 신체의 성적 표현이나 성교 행위들을 발화하는 것을 금
지시켰다면 그로테스크의 세계에서는 신체의 개별적인 부위, 특히 몸의 경계
인 엉덩이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입과 배 엉덩이는 그로테스크한 신체
부분으로 이러한 특정한 신체 부위는 외설스러움이나 욕설 또는 비하와 연결
되어 있다. 이러한 비하와 외설은 카니발의 탈관적 속성으로도 나타나는데
“비하”는 성스럽고 숭고한 모든 것들을 물질, 육체적인 하부의 차원으로 끌어
내려 탈관함으로써 새로운 인식으로 생성되게 한다. 카니발의 세계 속에서
언어는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새로운 방향으로 의미들을 생성시킨다. 페
트루치오는 캐서리나에게 구애하기 전에 어떠한 말괄량이 언행을 하더라도
칭찬으로 대응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젠틀우먼이라는 상류신분에 맞게 격
식을 갖추고 미리 준비해둔 칭찬과 찬사의 수식어들은 실제로 대면하게 되자
아무런 사용도 하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캐서리나의 언어적 유희에 끌려 들어
가 길들여지면서 성적 농담과 무례한 말들을 내뱉게 된다.
캐서리나.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걸상 같은 거지요.
페트루치오. 그 말 참 잘했어요 그러면 이리 와서 나를 걸터 앉아요.
캐서리나. 당나귀에서 걸터앉는 법이에요. 당신은 바로 그런 건가요?
페트루치오. 여자에게나 걸터앉는 법이지요. 당신이 바로 그런 거야.
캐서리나. 그렇다 친다 해도 난 당신처럼 금방 지쳐 빠지진 않아요.
페트루치오. 아이고 착한 케이트! 나는 당신에게 그렇게 못 견디게 걸터앉
지는 않을 거야. 글쎄, 당신은 젊고 가벼우니까.
캐서리나. 하기야 당신 같은 시골뜨기가 걸터앉기에는 너무 가볍고
말고요. 이래봬도 난 어지간히 무게가 있는 여자라고요.
페트루치오. 무게가 있다고? 무게가 있다니! 허! 허!
페트루치오. 저런, 당신은 말벌같이 지독하게 화가 났군.
캐서리나. 내가 말벌이라면 침이 있으니 조심해요.
페트루치오. 난 그 침을 뽑는 수단이 있어.
캐서리나. 흥, 그 침이 어디 있는 줄도 모르는 주제에.
페트루치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래에 있지.
캐서리나. 미안하지만 혀에 있는 걸
페트루치오. 누구 혀에 있다는 거야?
캐서리나: 당신 혀에 있지 어디 있겠어요? 아까부터 남의 말꼬리만
물고 늘어지고 있군요. 제발 썩 꺼져버려요.
페트루치오. 아니! 내 혀를 당신의 꼬리에다? 안 될 말이지.
Pet. Why, what’s a movable?
Kath. A joint-stool.
Pet. Thout hast hit it. Come it. come, sit on me.
Kath. Asses are made to bear, and so are you.
Pet. Women are made to bear, and so are you.
Kath. No such jade as you, if me you mean.
Pet. Alas, good Kate, I will not burden thee!
For, knowing thee to be but young and light
Kath. Too light for such a swain as you to catch,
And yet as heavy as my weight should be (2.1. 198-205)
Pet. Come, come, you wasp; i’faith, you are too angry.
Kath. If I be waspish, best beware my sting.
Pet. My remedy is then to pluck it out.
Kath. Ay, if the fool could find it where it lies.
Pet. Who knows not where a wasp does wear his sting?
In his tail.
Kath. In his tongue.
Pet. Whose tongue?
Kath. Yours, if you talk of tales, and so farewell.
Pet. What, with my tongue in your tail? Nay, come again, Good Kate.
I am a gentleman- (21.209-17)
페트루치오는 캐서리나와 대면하기 전 어떠한 상황에도 캐서리나에게 정
반대 상황으로 대응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워 두었다. 예를 들어 욕을 퍼부으면
달콤한 노래로, 침묵을 하면 심금을 울리는 웅변으로, 거절하면 승낙으로 대
응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길들이기를 위한 전략은 캐서리나
의 반응이 자신이 예상한 범주를 벗어나 버리자 성적이고 외설적인 농담으로
변해 버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캐서리나가 페트루치오의 단어 사용을 성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키게 만듦으로서 육체적 하부의 언어들로 바꾸어 버린 것이
다. 이러한 육체적 하부의 언어는 걸상이라는 사물이 신체 부위인 엉덩이와
접속하면서 타고 다니는 당나귀를 1차적으로 연상시킨다. 동물인 당나귀와
엉덩이의 결합은 다시 동물과 사람의 경계가 뒤섞인 그로테스크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면서 성적인 이미지를 상상하게 만들고 이러한 성적 상상은 이성
의 검열을 거치지 않고 입 밖으로 표출된다. 정중함과 격식을 갖춘 언어 규범
은 계급과 관련된 규범이자 공식적인 문화 내에 통용될 수 있는 언어적 조건
이었지만 카니발적 공간에서 이들의 언어는 그 규범을 이탈한다. 이렇듯 “기
존 언어의 규범, 위계질서, 금지의 지배로부터 해방된”(188)언어는 페트루치
오의 젠틀맨의 계급을 탈관시킬 뿐 아니라 솔직하고 거리낌 없으며 노골적이
기까지 한 성적 대화로 전개되면서 신체적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욕설과 상
소리와 같은 솔직한 카니발적 언어는 엄숙한 이데올로기의 족쇄를 풀고 인간
의식의 자유로운 사고와 상상력을 해방시킨다.
빗장이 풀린 언어는 더욱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성적 이미지들을 자극하
고 발설한다. 말벌의 침과 꼬리는 사람의 생식기와 신체하부로 옮겨가 육체적
하부 이미지를 강조하게 된다. 성교에 대한 상상은 그로테스크의 물질적 육체
적 하부의 이미지로서 “격하적이며 탈관적인 동시에 재생하는 기능”을 수행
하고 있다. 계급과 젠더를 탈관하고 결혼을 앞 둔 두 남녀에게 육체의 이미지
는 자연스럽게 신체 하부로 향하고 있다. 이러한 신체 하부에 대한 이미지는
성교와 임신 출산이라는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향하고 있다. 말하자면
결혼을 앞두고 구애의 과정 속에 있는 두 남녀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결혼식
과 초야를 준비하고 있고 이러한 초야에 대한 상상은 미래의 임신과 출산이라
는 또 다른 생성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말벌의 침과 꼬리에서 연상되는
“남근 혹은 생식기”는 이 둘의 육체가 구분되지 않는 성교의 이미지와 연결되
면서 “항상 수태할 수 있고 출산할 수 있는 육체이거나 혹은 적어도 임신이나
수정이 준비된 육체”(26)를 강조하고 있다. 그로테스크 고대 예술 작품인 “임
신한 노파”의 양면 가치적 속성처럼 두 개의 상이한 육체는 한 육체 속에 있는
것이며 죽음은 또 다른 생성을 내재하고 있다. 극의 마지막에 페트루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이리 와요, 케이트, 우리 침실로 갑시다”(5.2.185).
페트루치오는 결혼 피로연에서 캐서리나가 순종적인 아내임을 입증하여 내기
에 이겼기 때문에 모든 길들이기는 완결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페트루치
오가 캐서리나를 길들이기 위해 초야를 치루지 않고 연기해 온 것은 사실 페
트루치오 자신의 욕망 또한 통제하고 지연시켜온 것과 다르지 않다. 캐서리나
는 카니발적 공간인 결혼 피로연에서 순종적인 아내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
함으로써 다른 남성들에게 자신이 길들여졌다고 믿게 만든다. 상류 계급의
남성들 앞에서 공적으로 캐서리나의 길들여짐을 증명해 보이려 했던 페트루
치오는 오히려 캐서리나가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줌으로써 캐
서리나의 전유적 전략에 길들여지고야 만다.
V. 미완의 탈관식 : 경계 위반을 꿈꾸다
말괄량이는 길들여졌을까? 열린 결말은 연극 공연의 끝을 말해 줄 뿐이지
말괄량이가 길들여졌다고 결론내릴 수 없게 만든다. 유랑 극단에 의해 무대
위에 올려진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르네상스 시대 매년 돌아오는 카니발처
럼 다시 무대 위에 올려 질 수 있다. 카니발의 순환이 반복의 형식을 취하지만
시공간의 차이에 따라 상이하고 다양한 흐름들을 접속시키고 소통시키듯이
연극이란 매번 같은 내용을 무대 위에 올린다고 하더라도 차이를 생산해 낼
수 있다. 연극이 만나는 관객과 장소 그리고 시간에 따라 그 의미는 차이의
해석들을 생산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말괄량이라는 용어 자체도 시대의 변
천을 겪으면서 ‘소년소녀’처럼 성별화된 몸으로 고정되었다. 사실 셰익스피어
가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만 하더라도 말괄량이라는 용어는 남자에게 해당되
기도 했다(Bruster 34). 특히 말괄량이라고 지칭되는 남자들은 “낮은 계급의
남성”(Williams 196)이었는데 서극에 땜장이 슬라이와 같은 노동자 계급이
말괄량이라 호명되었다. 영주는 말괄량이 하위 남성 계급인 슬라이를 길들이
려는 목적을 가지고 연극적 상황을 만들어 내었다. 말괄량이 슬라이를 영주로,
영주 자신은 하인으로 현실을 뒤집은 카니발적 대관식은 그러나 폐위식으로
마무리되지 못한다. 우연히 영주의 저택을 지나던 유랑 극단에 의해 또 다른
연극이 개입되고 이 연극 공연을 끝으로 극은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유보된 결말은 영주를 하인으로 슬라이를 영주로 그리고 시동을 영주의
아내로 가면을 쓴 채 남겨둔다. 카니발의 시간은 일상적인 위계질서를 중단시
키고 사회적 틈을 열어 자유롭게 인간관계를 맺도록 생성의 공간을 건설한다.
유랑 극단의 도착은 카니발을 알리는 어릿광대의 등장처럼 영주의 시간에 틈
입하여 규범의 시계를 정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영주로 대변되는 일상적
시간에 틈을 내어서 다른 흐름을 개방시킨 유랑 극단의 도착은 카니발의 시간
으로 향하는 입구를 열어 주는 계기가 된다. 서극의 시간이 규범과 금지들로
통제되고 억압되는 불평등한 신분적 사회라면 연극의 시간은 역할 수행하기
라는 자유로운 놀이하기로서의 삶이 된다. 따라서 카니발 공간을 개방하는
연극 속에서 등장인물-배우들은 방해 받지 않고 현존하는 제도 속의 규범과
이데올로기를 패러디하고 전복한다.
말괄량이 여성을 길들인다라는 이야기는 영주가 슬라이를 길들이려하는
의도를 패러디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남성에 의해 길들여지는 여성의 이야기
를 통해 유랑 극단은 연극을 관람하고 있던 영주의 검열도 피하면서 영주로
대변되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의 허위성을 폭로하고 뒤집고 있는 것이다.
극 중에서 펼쳐지는 연극의 형식은 일시적으로 지배 담론을 정지시킬 수 있었
던 카니발처럼 공연이라는 행위를 통해 지배계급을 비판할 수 있다. 극 속에
서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은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하부를 지시하는 언
어와 이미지들로 뒤바뀌고 권위를 세우려는 일은 우스꽝스러운 행위로 희화
화된다. 행복한 승리자의 기분에 만끽해 흘러 나온 “침대로 갑시다”라는 페트
루치오의 마지막 말은 결국 길들이기의 마지막이 육체적인 결합에 이르는 것
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말은 서극에서 “부인, 자 옷을 벗어요. 그리고 잠자
리로 들어가 보자구”라는 슬라이의 말과 뒤섞인다. 연극 속 젠틀맨인 페트루
치오와 현실의 노동자 계급 슬라이는 다르지 않다. 또한 페트루치오와 캐서리
나가 성공적으로 초야를 치루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셰익스피어는 슬라이
의 폐위식을 연기시키고 모두가 가면을 쓴 채로 결론을 유보함으로써 미완의
미래를 향해 변신의 과정 중에 있고 양가적 가치의 시대적 전환기에 놓인 유
쾌한 상대성의 르네상스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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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 비교문학 제67집 (2015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