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거울장난
성선경
파란시선 0101 ∣ 2022년 7월 20일 발간 ∣ 정가 10,000원 ∣ B6(128×208) ∣ 101쪽
ISBN 979-11-91897-23-4 03810 ∣ 바코드 9791191897234 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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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 소개
인연이란 인연은 다 투명하여서 저 빛, 찬란하다
[햇빛거울장난]은 성선경 시인의 열세 번째 신작 시집으로, 「꽃살문」, 「햇빛고요」, 「그냥」, 「돼지감자는 뚱딴지」 등 60편의 시가 실려 있다.
성선경 시인의 [햇빛거울장난]을 접한 독자들은 다소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책의 갈피마다 등장하는 주체들은 다층적이라고 할 만큼 화법과 어조에서 큰 편차를 보인다. 우주의 비의에 감탄하고 세상의 아름다움에 탄복하거나 언어의 유희 중에도 전언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시작(詩作)에 대한 고민을 누설하는 등 엄숙한 주체는 이미 익숙하다. 그리고 퇴직한 중늙은이나 그래서 다시 한 여자의 남편으로 처음처럼 돌아온 일상의 주체를 내세우는 경우도 낯익긴 매일반이다. 그러나 예시한 주체들이 이 시집처럼 자유분방하게 어우러지는 사례는 단언컨대 드물다. 이러한 주체의 다층성은 시인으로 더 오래 살아온 성선경의 이력에 그 원인이 있지 않다. 그보다는 그가 아니 그의 시가 삶이 아니라 사랑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선경 시의 주체는 기꺼이 저 모든 죽고 죽어 가는 것들을 위무하는 종소리의 중심에 있다고 자인하는 문인이자(「범종」), “꿀보다 향기로운 시”를 쓰고자 하는 시인으로(「꿀벌처럼」), 그리고 가슴에 “숨겨 둔 슬픔”을 나누는 친구인 동시에(「겨울, 동」), “그냥 그렇게 산다 싶은” 생각을 하는 이웃으로(「그냥」), 세상을 그리고 슬픔을 어느새 알아 버린 “첫사랑 그 지지배 지지배배” 하는 모양을 쓸쓸히 바라보고 들어주는 남편으로 화할 수 있는 것이다(「나뭇가지에 앉은 새처럼」). 요컨대 스스로 나뉘고 갈라짐으로써 실제로는 모든 존재를 껴안고 마는, 저 “투명하게 바라보는 빛의 응시”와 같은 시선을 성선경의 시는 견지하려 한다고 하겠다(「햇빛경전」). (이상 김영범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시인은 시가 오는 몰입의 절정감을 누릴 때조차 일상을 저버리지 않는다. 시가 언어기호로 굳어지는 순간 미처 호명해 주지 못한 눈짓들이 망각 너머로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소리와 뜻과 명징한 이미지가 트라이앵글처럼 합일적 복합체를 이루어 공명하는 시편들에서도 느껴지는 긴장은 시를 간섭하는 일상의 자잘한 소음들에 대한 경청의 자세로부터 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잠시 내가 한눈을 팔았다 싶을 때/찰칵, 가로등을” 켜고 끄는 그들이야말로 성선경 시의 요정들이 아닌가 한다(「등불, 등」). 세계의 비밀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기도 하지만, 그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애써 한눈을 파는 것이 예나 이제나 늘 너그러웠던 품성의 시인이 자신도 모르게 예각화한 방법론이다. 몰입과 방심을 두루 지닌 시편들이 어디에서 연원하는가를 살펴보니 제 발을 잘라먹고 ‘궁(窮)’을 견디는 문어의 외로움과 만나게 된다(「궁」). 궁핍과 외로움을 먹물 삼아 쓴 시편들이 문어 흡반처럼 붙어서 생생한 실감으로 떨어지질 않는다고 하면 어떨까. 마산 어시장에서 막 올라온 그 유연하고도 능청스러우며 강력한 흡반들이 “환갑 진갑 다 지나 이젠 여기가 끝, 했을 때/나는 동산바치/꽃 화분 서른한 개가 내 앞에 있”다고 노래하는 「늙은 원예사」의 비루와 소멸의 징후들을 새뜻한 재생의 경이로 전환시키고 있다. 심심한 일상을 카랑카랑한 백척간두로 절대 무한을 살고자 하는 시의 꿈이 지금, 여기를 아득한 지평으로 열어젖혔다. “햇살을 끌어당기는/동심원 동심원의 저 투명한 긴장”을 품은 「햇빛고요」에 나도 물잠자리처럼 젖은 날개를 널어 말려 봐야겠다.
―손택수(시인)
•― 시인의 말
한 시간 한 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하루하루가 모여 일생이 된다면
이 참 엄청난 일이다 생각되다가
꽃도 잎도 다 지난 지금
이제는 그 모든 게 흐릿해져서
모두 신의 장난 같다
한 줌 햇살에 나앉아
젖은 영혼이나 널어 말려야겠다.
•― 저자 소개
성선경
1960년 경상남도 창녕에서 태어났다.
1988년 [한국일보]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널뛰는 직녀에게] [옛사랑을 읽다] [몽유도원을 사다] [모란으로 가는 길] [진경산수] [봄, 풋가지行] [서른 살의 박봉 씨] [석간신문을 읽는 명태 씨] [파랑은 어디서 왔나] [까마중이 머루 알처럼 까맣게 익어 갈 때] [아이야! 저기 솜사탕 하나 집어 줄까?] [네가 청둥오리였을 때 나는 무엇이었을까] [햇빛거울장난], 시조집 [장수하늘소], 시선집 [돌아갈 수 없는 숲], 시작에세이집 [뿔 달린 낙타를 타고] [새 한 마리 나뭇가지에 앉았다], 산문집 [물칸나를 생각함], 동요집 [똥뫼산에 사는 여우](작곡 서영수)를 썼다.
고산문학대상, 산해원문화상, 경남문학상, 마산시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햇빛고요
꽃살문 – 11
햇빛고요 – 12
궁(窮) – 13
나팔꽃처럼 – 14
까마귀가 없는 보리밭 – 15
국수 – 16
괘관산(掛冠山)에 들어 – 17
나의 명상 – 18
나뭇가지에 앉은 새처럼 – 19
두문(杜門) – 20
꿀벌처럼 – 21
꽃밥 – 22
그냥 – 23
등불, 등(燈) – 24
파묵(破墨) – 26
아내는 헤이즐넛을 마시고 – 27
관상(觀相) – 28
김치 꼭다리 – 29
아이고! 어쩐다, 이 지랄 – 30
아이고, 닭 잡아라 – 32
제2부 비 오다 갠 어느 늦은 오후
사향제비나비 – 35
비 오다 갠 어느 늦은 오후 – 36
이런 노름판을 봤나? – 37
비 내리다 문득 햇살이 비칠 때 – 38
너머 – 40
햇빛경전 – 41
춘천(春川) – 42
햇빛거울장난 – 43
장미 1 – 44
장미 2 – 45
저 눈먼 아침, 잡아라 – 46
어떻게 셈해야 하나 – 48
안부 – 49
겨울, 동(冬) – 50
햇빛 뜰 – 51
안계 종점 – 52
수련 1 – 54
수련 2 – 55
북천역 – 56
비비추 – 57
제3부 멸치를 배우는 시간
별천(別川) – 61
비백(飛白) – 62
범종 – 63
삶은 계란을 까는 여자 – 64
백로(白露) – 66
기장 멸치 – 68
문슬(捫虱) – 70
모자 – 72
밥 – 73
멸치를 배우는 시간 – 74
망종(芒種) – 76
딴청 – 77
너무 – 78
돼지감자는 뚱딴지 – 79
니 머라카노 – 80
동전 – 81
동래학춤 – 82
달의 물결무늬 – 84
그해 여름 – 86
늙은 원예사 – 87
해설 김영범 묵묵하고 둥근 사랑 – 89
•― 시집 속의 시 세 편
햇빛고요
물잠자리 물잠자리가 한 마리
떠내려온 단풍잎에 가만히 앉아서
햇살을 끌어당기는 저 고요
흐르는 물살에는 햇살의 파문
동심원 동심원엔 끝없는 긴장
물잠자리 물잠자리가 끌어당기는
풍경과 풍경 너머의 풍경
물잠자리 물잠자리가 끌어당겨 온
동심원 동심원의 저 고요
그림자 하나 없이 숨죽이는 풍경들
물잠자리 물잠자리가 한 마리
잠시 붉어진 단풍잎에 가만히 앉아서
햇살을 끌어당기는
동심원 동심원의 저 투명한 긴장
개여울도 흐르다 잠시 숨죽인
햇빛 햇빛에
막 피어나는 꽃 한 송이
햇빛고요. ■
그냥
네게 불쑥 건네고 싶은 것 그냥,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듯 그냥, 아무리 살아 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냥, 네게 휙 안겨 주고 싶은 그냥, 고양이처럼 꼬리 치며 안겨 오는 그냥, 사랑이란 것도 때로는 다 부질없다 싶을 때 꺼내 보는 그냥, 발버둥 쳐 봐도 다 알 수 없는 삶 같은 그냥, 봄 햇살 아래 알종아리를 드러내고 싶은 그냥, 야옹거리며 내가 네게로 가는 마음 그냥, 목욕탕이 쉬는 수요일 같은 그냥, 왜냐고 묻지 않는 그냥, 아무에게나 내 속을 털어놓고 싶은 그냥, 한시도 내게서 떨어져 나가 본 적 없는 그냥, 밥 한 그릇을 잘 비운 것 같은 그냥, 우리네 삶의 종착지 같은 그냥, 길고양이 같은 그냥, 그냥 그렇게 산다 싶은 그냥, 불쑥 오늘 너에게 또 건넨다! 그냥. ■
돼지감자는 뚱딴지
당뇨에는 효험 있다 그래도 돼지감자는 뚱딴지, 니 잊었다는 말 거짓말, 하마 잊었다는 말 거짓말, 잠시 꿈에 들었단 그 말 거짓말, 이제는 사랑도 옛말이라고 손사래 쳤던 그 말 거짓말, 돼지감자는 뚱딴지, 캐고 보면 뚱딴지, 니 잘 가라 흔들던 그 손 다 거짓말, 손가락 걸었던 그 약속 잊었다는 말 거짓말, 니 잘났다 돼지감자, 캐고 보면 뚱딴지, 나는 단숨에 돌아설 수 있다는 그 말 거짓말, 돼지감자는 잘나도 뚱딴지, 이제는 서로를 놓아주자는 그 말 거짓말, 아무래도 뚱딴지, 벚꽃처럼 분분히 헤어지자 그 말 거짓말, 돼지감자는 뚱딴지, 아무리 잘나도 뚱딴지, 이제 꿈에서 깨어났다는 그 말 거짓말, 그저 다 지나간 봄빛이었다는 말 거짓말, 한순간의 폭풍우였다는 그 말 거짓말, 다 잊었다는 그 말 거짓말, 돼지감자는 뚱딴지 알고 보면 뚱딴지, 니 잊는다는 그 말 거짓말, 하마 잊었다는 그 말 거짓말, 까마귀처럼 새하얀 까마귀처럼 말캉 거짓말, 돼지감자는 뚱딴지. ■